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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 낳은 작가 박경수 선생 고향집 보전 위해 후배들 모금 나서

천하한량 2008. 2. 19. 05:54
서천이 낳은 작가 박경수 선생
다시 고향 떠나 쓸쓸한 요양생활
고향집 보전 위해 후배들 모금 나서

 

허정균 기자 huhjk@newssc.co.kr

 

 

   
▲ 2000년 11월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식장에서의 박경수 선생

많은 사람들이 서천이 낳은 대표적 작가로 박경수를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1930년 한산면 죽동리의 한 보잘 것 없는 농가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으로는 한산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이다.

남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학교를 다닐 때 그는 집안 농사일을 거들었고 밤에는 강의록을 읽었다. 해방되던 해 16세의 박경수 소년은 자동차 정비공으로 운전 기사의 기술까지 습득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책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20세에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따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4년 뒤에 중학교 교사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대학 졸업자와 다름없이 중등학교의 교단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육자로보다는 작가지망생으로 문학수업에 몰두하여 1955년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에 단편소설 <그들이>가 입선되며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에 이르렀다. 이어 이 잡지에 단편 <닭>과 <환생>을 발표하였으며 1959년에는 <사상계>의 편집기자로 입사하였다.

기자로 입사한 후에도 그는 1959년에 <혈맥> <하행 열차> <그 아내> <이빨과 발톱>, <김광재군> 등에 이어 1961년에는 <절벽> <구돌재> 등의 단편을 계속 발표하여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4.19 이후 건설부 공보실에 근무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그만두고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해마다 많은 작품을 쏟아내었다. <우수와의 결별> <박람회>(64년), <싸늘한 계절> <우울한 마을> <야수(夜嗽)>(63년), <잃어버린 가을> <낙인> <춘난> <애국자> <속(續) 애국자> <화려한 귀성>(64년), <태아(胎芽)의 해> <고독한 잠을> <육체의 천사> <어느 빈농의 세대> <성년의 비밀>(65년), <어느 충직한 짐승 이야기>(72년) 등이 그것들이다.

“그는 어떤 공백이나 휴식없이 꾸준히 소설을 써왔고, 다른 작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고르지 못하고 태작을 내놓기도 하는 일 없이 알찬 작품만을 발표해오고 있다.”
박경수에 대한 당시 문단의 평이다.



 <사상계> 입사 장준하 만나
 <동토>로 한국문학상 수상
 고향에서 펴낸 장준하 평전

40대 들어 그는 장편소설을 선보였다. 1969년 1년간 <신동아>에 <동토>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1년 이 작품으로 제8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열었으며 작가로서 위치도 확고해졌다. 이어 동아일보에 <흔들리는 산하>(후일 <향토기>로 개작)를 연재하였으며 <이화중선> <청산별곡>(71년), <종이 울리는 새벽>(72년), 소년 소설<임꺽정>(73년), <여인도>(74년), 전기 소설 <이 때 이렇게 사는 사람> <폐소기>(77년) 등의 장편물이 쏟아져 나왔다.

<동토>나 <향토기> 어느 작품에든 흙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태어나 자라며 살아 온 곳을 다시없이 거룩한 땅으로 알고, 이 작가는 아무런 가식이나 과장없이 떳떳하게 돌이켜보고 서술해 나간다. 이러한 작가의 자세는 전투하듯 사는 강인한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지만(중략)...... 허식 없는 리얼리즘의 평원을 열어 보인 바로 그 입장이다. 전통 사회로서의 농촌 세태를 충실히 재현하는 데 박경수의 농민 문학은 승리의 서경시를 이룬다.”
라고 임중빈은 그의 문학을 평하였다.

   
▲ 박경수 선생이 낙향하여 <장준하>를 집필했던 한산면 죽동리에 있는 가옥

1988년에 고향 한산으로 낙향한 그는 <사상계>에서 일할 때 모셨던 장준하 선생의 평전 집필에 매달렸다. 1995년 <재야의 빛 장준하>(해돋이)로 결실이 맺어졌다. ‘일제의 징병으로 일본군 입대-일본군 탈출-광복군 합류-해방공간에서 백범 김구의 비서-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와의 대결-의문의 죽음 등’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장준하 선생의 평전 집필에 최적임자가 ‘박경수’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2003년에는 이를 증량 보완한 <장준하>가 ‘돌베개사’에서 나와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찾고 있다.

그러나 항상 포근하던 고향집도 그를 노환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었다. 재작년 2월부터 그는 부인과 함께 서울 북아현동의 어느 요양병원에서 쓸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부인도 간병인의 보호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다. 병원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가족들은 그의 문학의 산실이던 집을 팔기로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이에 그를 따르던 후배들이 문학혼이 스며있는 그의 고향집을 보전하기 위해 후원계좌를 열고 모금운동에 나섰다. 그가 떠난 죽동리 생가에는 2년 전까지 그가 생활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경수 선생 후원계좌

농협 437-02-375863
예금주:공금란(박경수 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