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희망과 웃음 선사한 월남선생 생가표지판 없어 찾기 어려워

천하한량 2008. 1. 21. 16:10
희망과 웃음 선사한 월남선생
생가표지판 없어 찾기 어려워

 

편집국 기자 newssc@newssc.co.kr

 

 

   

▲ 양성규 어르신기자

한산교회에서는 지난 1월 13일 오후 찬양 예배에서 월남연구소(월남문고, 월남학교) 설립 예배를 드렸다. 월남 이상재 선생 서거 81주년이 오는 3월 29일이다.

이날 설립 예배에서 ‘월남이 우리민족에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이준목사의 설교제목에서와 같이 월남연구소의 역할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한산에 살다보면 관광객을 만나게 된다. 일관되게 묻는 말이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를 어디로 가나요” 이다. 한산모시타운, 신성리 갈대밭, 이하복 가옥, 문헌서원 표시판만 있을 뿐 월남 생가표시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동네 입구에 조그마한 표시만 있을 뿐 서천 나들목이나 서천읍 오거리 등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 표시판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한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해학(諧謔)(익살스러운 말, 유머)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 월남 이상재 선생의 친필

80여년 전의 좌우합작 민족단일전선 신간회(新幹會)의 초대회장이었다. 정인보(鄭인菩)는 월남 이상재 신도비명에서 “평생을 통해 가난이 심해서 어떠한 때는 하루 한 끼의 밥도 먹지 못했지만 오히려 태연하셨다”고 썼으며 박승봉(朴勝鳳)의 ‘월남 이상재 선생의 행장’에 “민족에 유익한 일이라면 죽고 사는 일에 관계없이 싫어하거나 괴로워하여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라면서 “중년 이후로 더욱 곤액(困?)해서 서울에 있은 지 수십 년 동안에 집 두어칸을 얻지 못하고 동서로 옮겨 다니면서 늙을 때까지 일정한 곳이 없었으나 그래도 태연했다”고 쓰고 있다.

암울한 현실을 해학으로 풍자하는 것이 이상재의 장기였다. 일본의 정객 오사키(尾峙行雄)가 가회동 우거(寓居)를 찾아오자 응접실로 가자며 낡은 돗자리를 가지고 소나무 숲으로 데려갔다. 오사키가 “일본과 조선은 부부사이인데 남편이 조금 잘 못했다고 아내가 들고 일어나서 되겠소?” 라며 3.1운동을 비판하자 “정당한 부부가 아니고 폭력으로 이루어진 부부라면 어떻게 하겠소?” 라고 답했다.

일본 사찰단시절 도쿄의 병기공장을 보고 “성경에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걱정이요” 라고 했다는 일화나 조선주둔군 사령관 우쓰노미야(宇都宮)가 감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하자 “아니 감기는 대포로 못고치오?”라고 되받았던 일화는 압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청량한 웃음거리였다.

민립대학설립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하와이 교포들이 초청하자 “뜻은 고마우나 나는 일본 여권으로는 하와이는커녕 천당에서 오라해도 안가겠소”라고 거절할 정도로 원칙은 뚜렷했다. 청년과 허물없이 지내는 그에게 청년들 버릇이 나빠진다고 걱정하자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들에게 노인이 되라고 하겠나”라고 받아넘기기도 했다.

지난 12월 2일 서천군 서예 모임인 서의회는 월남 서거 80주년(3월 29일) 기념 제3회 백일장 대회를 주최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월남을 기념하는 행사를 통해서 미래의 일꾼으로 키우는 데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원칙과 말을 수시로 바꾸면서 독설을 내뿜는 정객들이 득실거리는 요즘 수난의 민족에게 희망과 웃음을 선사했던 그의 지도력이 그리워진다.

<양성규 어르신기자>

                                                                                                                   

 

                                                                                                                   (출처 뉴스 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