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유람단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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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선생은 단장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 개화사상을 갖게 된 것이
다. 이후 선생은 우정국 주사(郵政局 主事)를 거쳐 주미(駐美)
서기관 등을 역임하며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기위해 관계
에 몸을 담는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관직을 떠났던 그가 박
정량의 청으로 다시 맡은 관직이 학부학무국장과 외국어학교
장. 이때 젊은이들을 가르치던 선생은 많은 생각을 했다.
나라를 자주독립으로 지키며 바로 잡을 수 있는 확고한 길은
무엇인가. 민족자주의식 고취,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 민권을
보호하기 위한 언론활동 등이 그 길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
다.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후반인생이 일제와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점철되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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