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자료실 ▒

은행마다 아우성 “돈이 없다”

천하한량 2007. 12. 2. 20:27
▲ 일러스트 정현종

은행에 충실하던 예금 고객들이 자산운용사의 펀드로, 증권사의 CMA(자산관리계좌)로 이탈하면서 은행이 자금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 그 여파로 변동금리로 돈을 빌린 금융 소비자들의 주택담보대출(모기지) 이자 상환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은행이 자금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지급준비금 마감일이다. 지급준비금은 은행들이 갑자기 예금 인출이 몰릴 때에 대비해서 한국은행에 예치해 놓는 자금이다. 한은은 만기 전 인출 가능성이 낮은 정기예금에 대해서는 평균 잔액의 2%, 수시로 입출금이 일어나는 요구불예금 등에 대해서는 평균 잔액의 7%를 지급준비금으로 예치토록 하고 있다. 한은은 매월 7일과 22일 두 차례 규정대로 지급준비금을 쌓는지 점검한다.


 

지난 11월 7일 한 시중은행 자금본부에 비상이 걸렸다. 마감을 앞두고 한은에 예치할 지급준비금 중 8000억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콜시장(금융회사 사이의 하루짜리 자금거래시장)에서 급전을 빌려 막지만 이날은 시장에도 돈이 없었다. 결국 한은에서 8000억원을 지원 받아서 막았다.


지난 4월 6일에도 은행들이 무더기로 지급준비금이 부족한 일이 벌어졌다. 7일이 토요일이어서 지급준비금 마감일은 6일로 당겨져 있었다. 인천 송도 오피스텔 청약을 위해 5조원이 넘는 자금이 여러 시중은행에서 이탈해 청약은행인 농협에 몰리면서 다른 은행들이 자금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날은 한은이 지급준비금 마감 시간을 늦추고 농협은 막판에 콜시장에 7000억원을 풀면서 오후 6시30분쯤 모든 은행이 지급준비금 마감을 맞출 수 있었다.


은행 관계자들은 “지급준비금이 부족한 것은 일시적으로 자금이 한 은행으로 몰릴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으로 은행권의 자금 부족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금융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지급준비금은 평균 잔액에 대비해서 쌓는 것으로 사전에 준비가 가능한데도 지급준비금 부족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은행의 자금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은행은 예금을 받아 대출을 해주고 예금과 대출 금리의 차로 수익을 내는 게 기본적 비즈니스 모델이다. 때문에 은행의 자금원인 예금이 펀드로 대이동하면서 지급준비금 마감에 어려움을 겪는 등 문제가 생기고 있다. 은행에서 펀드를 팔면 은행은 판매 수수료만 챙길 뿐 자금 운용은 자산운용사에서 맡아서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10월 은행권의 수시입출금식 예금은 16조6000억원이 줄었다. 작년 같은 기간 동안엔 5조원이 줄었다. 수시입출금식 예금엔 금리가 연 0.2~0.3%밖에 되지 않는 보통예금이 포함돼 있다. 일선 창구 담당자들에 따르면 카드 결제 계좌로 주로 이용하던 보통예금 통장에 예전엔 200만원 정도 들어 있었지만 이제는 100만원 정도로 준 사례가 많다고 한다. 증권사가 하루만 넣어도 최고 연 5%의 수익률이 나오는 CMA 통장 영업을 강화한 때문이다. CMA 통장은 현금입출금기에서 출금·이체가 가능하고 카드 대금 자동이체 등 은행 통장의 서비스와 차이가 거의 없는데 우량 어음이나 채권에 투자해서 수익률은 높다. 때문에 직장인의 급여이체 통장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은행으로서는 보통예금이 금리가 낮기 때문에 수익성이 가장 좋은 예금이었다.


정기예금은 1~10월 7조원이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연중 정기예금 잔액이 가장 많던 6월(275조409억원)과 비교하면 10월(269조8235억원)까지 5조2174억원이 줄었다.


반면 펀드 잔액은 연중 지속적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1~10월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펀드액은 48조원이 늘어났다. 대부분 주식형 펀드다. 때문에 9~10월엔 자산운용사의 수신 잔액이 은행 정기예금 수신 잔액을 넘어서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현상은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이 수그러들기 직전이던 2000년 3월 이후 7년 반 만에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은행들은 예금이 줄어들면서 부족해진 자금을 CD(양도성예금증서)와 채권을 발행해서 메우고 있다. CD나 채권은 예금에 비해 조달 비용이 높다. 올해 1~10월 CD 발행액은 25조2000억원이 늘었다. 작년 같은 기간엔 1조2000억원이 늘어나는 데 그쳤다. 채권 발행액은 작년(28조원)과 비슷하게 26조4000억원이 늘었다.


은행들이 부족한 자금을 메우기 위해 너도 나도 CD를 발행해서 시장에서 소화가 잘 안 되자 CD 유통 수익률은 급상승하고 있다. 지난 11월 21일 만기 91일짜리 CD의 유통 수익률은 5.48%를 기록했다. 2001년 7월 이후 6년4개월 만에 최고치다. 특히 은행의 지급준비금 마감일을 앞두고 CD 발행이 늘어나면서 일주일 사이에 급등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통상 CD의 유통 수익률은 콜금리(5%)보다 0.2%포인트 정도 높았다. 그러나 0.4%포인트 이상 높다는 것은 은행들이 ‘밀어내기’식으로 CD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라고 금융계 안팎에서는 판단하고 있다.


은행의 예금이 빠진 부족분을 조달 원가가 비싼 CD로 메우면서 피해가 직접적으로 금융 소비자에게 돌아가고 있다. CD 금리와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현재 가계 대출의 78.1%가 시장 금리에 따라 변동하고 있다. 고정금리 대출은 14.8%에 불과하다.


은행들이 시장 금리의 기준으로 삼는 게 CD 금리다. CD 금리에 2~3%를 붙여 주택담보대출 금리로 책정한다. 예컨대 지난 11월 19일 CD 금리가 0.03%포인트 오르자 20일부터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올랐다. 하루 전 CD 금리를 신규 주택담보대출 금리로 바로 적용하는 하나은행은 20일 3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0.03%포인트 올려 연 6.72~7.42%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전 영업일 3일의 평균 CD 금리를 적용하는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지난 20일 0.02%포인트를 올리기로 했다. 신한은행은 연 6.4~7.8%, 우리은행은 연 6.3~7.8%가 됐다. 국민은행은 CD 금리 등을 고려해서 매주 목요일 다음 한 주간의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결정하고 있다.


외환은행은 20일 현재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연 6.87~8.02%로 이미 연 8%를 넘겼다. 외환은행은 1년 전만 해도 5.7~6.7%의 금리를 적용했다. 1억원을 빌렸을 경우 연간 이자부담액이 최대 232만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현재 상태가 지속된다면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연 10%대까지 치솟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한재준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앞으로도 조달 원가가 비싼 CD를 통한 은행의 자금 조달이 계속될 것으로 보여 주택담보대출 금리의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