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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 신빈곤층 ‘남모를’ 가난

천하한량 2007. 11. 22. 18:10
한겨레] 대학교수인 서아무개(39)씨의 연봉은 7000만원 가량 된다. 그런데 고소득자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서씨의 가계는 항상 적자다. 매달 주택담보대출금 상환과 자녀들 사교육비로 빠져나가는 돈이 월급의 반을 넘기 때문이다. 4년 전 부모님과 자신의 아파트 마련을 위해 은행 2곳에서 모두 3억원의 대출을 받은 것이 ‘족쇄’가 됐다.

세금을 뺀 월수령액은 490만원쯤 된다.

이 가운데 매달 나가는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이 200만원을 넘는다. 아이들 교육비로 지출하는 돈도 얼추 100만원 가까이 된다.

남는 돈 190만원 가운데 부모님 용돈과 각종 경조사비로 각각 50만원씩 제하고 나면 생활비는 100만원도 채 안된다. 이러다보니 그는 지난해부터 틈틈히 봐주는 컨설팅 자문료로 부족한 생활비를 겨우 메우고 있다. 서씨는 직업상 신용등급이 괜찮아서 마이너스 통장을 즐겨 쓴다. 부채가 많아도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부채총액을 점검해보니 3년째 담보대출금을 꾸준히 갚고 있는데도 총부채 3억원이 줄어들기는커녕 거꾸로 늘어난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결국 서씨는 지난해 말 긴급 가족회의를 열어 “우리 집은 현재 가난하다.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녀는 물론 부부 용돈도 크게 줄이고, 식비 등 생활비도 초긴축 상태로 전환한 것은 물론이다.

서씨의 경우 그동안 자신의 소득과 신용을 과신한 채 부채만 키우는 악성 재무구조를 만들어 왔다고 봐야 한다. 서씨같은 화이트칼라층 가운데 소득은 평균 이상이지만 나가는 돈이 많아 적자 생활을 하는 가정이 적지 않다. 또 보기에는 중산층인 것 같은데, 매달 마이너스 통장에 의존해야 기본 생활이 가능한 가정도 허다하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소득이 급감하거나 실직 등을 당할 경우 빈곤층으로 떨어질 수 있는 재무구조다. 이런 계층을 두고 ‘화이트칼라 신빈곤층’이라고 한다.

소득이 높은 일부 고소득 계층은 신용이 높고 주변 가족들의 기대심리도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전시 효과’(더 높은 소비생활을 하는 주위 사람들과 비교해 소비를 하려는 심리)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 긴장하지 않으면 소득의 대부분을 써버리기 십상이다. 결국 주택의 형태와 자녀들 사교육비, 각종 경조사비와 용돈 등이 일반 가정에 비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소득은 높지만 고정비용 지출 증가로 생활고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 가파르게 증가하는 고소득층의 부채비율을 보면 오히려 많이 버는 것이 함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올해 초 삼성경제연구소가 낸 자료를 보면, 월 500만원 이상 고소득자의 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142%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무설계 전문가들은 “고소득계층은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신용에 대해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소득이 높을수록 일정 예산 범위 안에서 지출이 이뤄지도록 더욱 꼼꼼히 가계부를 작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부자가 되는 길은 버는 돈의 규모가 아니라, 미래의 재무목표에 맞게 얼마나 저축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최익림 기자 choi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