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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삼을 심되 결단코 자기가 캐먹지는 않는다, 이 약속을 지켜왔어요. 우리는 캐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삼을 심기 전날 밤새 술 마시며 신명 나게 놉니다. 다음날 아침 술이 덜 깬 상태로 산에 오릅니다. 그러니 산삼을 심고도 어디 심었는지 모르게 되죠.”
박인식(朴麟植)은 자신의 농담에 스스로 흡족해 흐흐흐 웃었다. 쉰여섯이면 중후한 나이인데, 그는 허벅지에 쫙 끼는 검은 바지와 윗단추를 하나 풀어 젖힌 하얀 와이셔츠, 검은 산꾼용 모자 차림이다.
서울과 파리를 왕래하며 몇 달씩 머무는 그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왔다. “강원도 평화의 댐 근처 산골에 산삼을 심으러 갑니다. 토요일 3시 광화문에서 버스가 출발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소? 50명쯤 모입니다.”
‘농심마니’라는 이름을 들은 지 20년이 됐다. 산삼을 캐 횡재하려는 게 아니라 거꾸로 산삼을 심으러(農)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는 패거리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그 행사를 계속해왔던 것이다. 이 패거리의 ‘수괴(首魁)’가 박인식이다.
- “무병장수의 욕망과 불치병을 고치려는 사람들에게는 산삼이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됩니다. 산삼 캐러 가는 모임만 200여개쯤 생겨났어요. 이들이 캔 산삼 중에는 우리가 심어놓은 게 많을 겁니다. 한번 산에 갈 때마다 500주를 심었으니, 지금껏 약 2만주쯤 퍼져있겠지요. 18년 전 경기도 포천의 명성산에서 심었더니, 요즘 그 아래 동네가 심마니 마을이 됐다고 합니다. 우리 얘기가 전해져 몇몇 지자체에서도 몇 년 전부터 수익사업으로 산삼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20년간 심기만 하고 정작 본인들은 한 번도 캐먹지 않았다니, 순전히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군요.
“우리 회원이 50명쯤 되는데, 대부분 처음 시작할 때의 회원들입니다. 제 시간을 내고 제 주머니를 털어 심지만 모두 신나서 합니다. 이 땅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요. 세상 땅에는 다 존재 이유가 있어요.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프랑스는 포도주, 그리스는 올리브로 먹고 살도록 했다면, 한반도는 산삼이라고 믿습니다.”
- 지난 7일 20년째‘농심마니’로 불리는 박인식씨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서울 안국동 와인가게에서 만났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허황하기도 하고,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고.
“가령 한 사람당 10뿌리씩 산삼을 심으면, 5000만명의 인구라면 1년에 5조원씩을 심는 셈입니다. 심어놓은 산삼 한 뿌리 가격이 매년 1만원씩 올라도 10년이 지나면 총 50조원의 국가 수입이 생겨요. IT기술, 자동차, 조선산업 못지않게 산삼이 앞으로 우리를 먹여 살릴 겁니다. 그걸 믿고 그걸 앞당기기 위해 산삼을 심어왔지요. 정부 차원에서 ‘산삼공사’를 발족해, 산삼가공식품이나 의약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산삼공사’사장을 맡을 요량입니까?
“난 그런 걸 시켜줘도 못한다는 걸 잘 아시면서.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데 질려 직장을 그만 둔 사람인데. 난 규칙적으로 매이는 것은 못해요.”
―그럼 무얼 얻으려고 이렇게 해온 거죠?
“젊은 시절 왜 험한 산을 오르느냐고 난 자신에게 물을 때가 많았지요. 등반은 무상(無償: 보상이 없는) 행위지요.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있는 행위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용(無用)에서 더 큰 쓰임(用)이 있듯이, 무상(無償)에서 더 큰 삶의 의미가 숨어있는지 모르지요.”
그는 직업이 너무 많아 일정 직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는 국내 최고의 클라이머라는 평가를 들었고, 이제는 정력적인 소설가이며, 화가, 미술평론가, 시인, 여행가이고, ‘로마네꽁티’(서울 안국동 소재) 와인가게 바깥주인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는 ‘방랑(放浪)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며 인도 네팔 중국 남미 등을 단돈 몇 푼으로 몇 달씩 떠돌던, 소위 배낭여행의 ‘원조(元祖)’였다. 1980년대 초 직장을 그만두고 알프스 산악군(群)에 미쳐 프랑스 샤모니에서 일 년 동안 혼자 산 적도 있었다. 이런 그의 낭만과 기행(奇行), 방랑벽은 숱한 남녀 추종자들을 늘 몰고 다녔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삶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규칙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이 바로 ‘농심마니’ 행사다. 1987년 봄 전남 화순군 모후산에 묘삼(苗蔘: 산삼 모종) 400주를 심는 걸로 시작해 매년 두 차례 전국의 산을 돌며 산삼을 심어온 것이다. 20년이면 짧지 않은 세월인데, 그는 한번도 이 행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우리 국토의 절반은 산삼이 자랄 수 있는 토양입니다. 산삼은 전세계적으로 북위 34도~48도 선에서는 재배가 가능합니다.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북미 유럽 러시아에도 분포되어 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한국산(産)에 비하면 약효가 떨어져요. 더 잘 자라고 무처럼 큰데도.”
- 農심마니 회원 50명이 한번에 묘삼 500주 심어 지금까지 2만주 퍼뜨려
- 나는 그에게 말려들었다.
“왜 그렇죠?”
“산삼은 고생대에서 진화해온 식물입니다. 우리나라만큼 세계적으로 고생대 지질이 보존된 곳이 드뭅니다. 산삼이 먹어야 할 먹이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뜻이죠. 산삼은 땅의 정기(精氣)로 자라죠. 게르마늄 등 25가지 미량원소를 함유한 토양에서만 산삼의 약효가 나옵니다. 그 미량원소들이 어떻게 결합해 약효가 생기게 됐는지 아직은 모릅니다. 어쨌든 한반도에서 자란 산삼이 가장 약효가 좋다는 것은 판명됐지요.”
제법 오래 사귀었지만 그의 학구적 면모를 처음 접했다. 그는 연세대에서 지질학을 전공하기는 했다. 그러나 강의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산악부 서클 후배가 대신 시험을 쳐준 뒤, 성명란에 ‘김인식’이라고 성(姓)을 잘못 적어 넣어 들통이 난 적도 있다. 그를 평소 “인식이 형”이라고만 불러, 박씨 성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술 마시고 여행하고 책 쓰고 포커 치느라 바빴을 텐데, 언제 이런 공부를 했지요?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했어요. 지리산 등에 묘삼을 심어놓고 정말 자라는지 매년 체크하면서 ‘임상실험’도 거쳤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전국의 103개 군(郡)이 산삼공출군(산삼을 바쳐 올려야 하는 군)으로 지정돼 있어요. 옛날에는 이 땅이 온통 산삼밭이었다는 뜻이죠. 삼을 재배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러다가 조선 중기 때 유학자 주세붕(周世鵬)의 상소로 밭에서 인삼 재배가 시작됐어요. 인삼밭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인삼은 한번 재배하면 지기(地氣)가 약해져 그 땅에는 10년간 다른 작물을 심어야 해요. 요즘에는 그러지 않고 같은 땅에서 비료와 부양제를 써 키웁니다.”
그의 표정에서는 직장 다니던 시절 술이 덜 깨 부친 바지를 바바리인 줄 알고 팔에 걸치고 출근하고, 술자리가 파한 뒤 구두를 챙겨 신은 줄 알고 맨발로 귀가하던 ‘전설’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산삼과 인삼의 종(種)은 같습니다. 산삼은 몇 백 년도 삽니다. 하지만 밭에서 적응한 인삼은 ‘야성’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인삼은 6년근이 되면 썩어버립니다. 인삼 씨앗을 산에다 뿌리면 4~5년이면 더 이상 못 자라고 죽습니다. 그래서 산삼은 나이로, 인삼은 무게로 값을 칩니다. 우리가 산에 산삼을 심기 시작한 뒤 5년쯤 됐을 때, 산림청에서 이를 본떠 헬기로 인삼 씨앗을 산에다 뿌렸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산삼 씨앗을 구하지 않고 인삼 씨앗을 썼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매 행사 때마다 산에 심는 묘삼을 어떻게 조달해왔지요?
“강원도 삼척에 사는 3대째 심마니 박재영씨를 알게 돼, 그분이 뜻을 이해하고 행사 때마다 대가 없이 500주씩 기부합니다. 오래 전부터 심마니들은 산삼을 발견하면 산삼 씨앗을 거둬 산에 뿌려 키웠지요.
산에서 씨를 뿌려 기른 ‘산양(山養)’ 산삼을 통칭 ‘장뇌삼’이라고 합니다. 산삼 꼭대기에는 꽃처럼 달린 ‘뇌두’가 있어요. 일 년에 하나씩 생깁니다. 해가 갈수록 뇌두가 길어지기 때문에 ‘장뇌삼’이라고 불러요. 뇌두는 토양이나 생육조건이 바뀌거나 홍수와 가뭄에는 잘 안 생깁니다. 그래서 뇌두 숫자와 산삼 나이가 꼭 일치하지 않아요. 이 때문에 사기꾼들이 10년쯤 된 산삼을 50년 된 것이라고 ‘구라’를 쳐도 일반인은 속아넘어갑니다. 또 고객을 산 속으로 데려와 진짜 산삼을 발견한 양 ‘심봤다!’라는 쇼도 합니다. 포도주의 맛을 감별하는 소믈리에처럼 우리에게는 ‘산삼 소믈리에’가 필요하죠.”
그는 앞으로도 산삼을 심겠지만, 우리는 캐는데 더 관심이 있다.“산삼은 어디서 잘 자랍니까?”
“보통 동북향에서만 자란다고 말하지만 방향은 상관없어요. 소나무나 침엽수 밑에서는 그 나무의 기가 워낙 세 자라지 못해요. 활엽수 아래 부엽토(腐葉土)에서 자라고. 오전 10시까지는 햇빛이 들어와도 괜찮지만 그 이후로는 햇살이 잘 안 들어오는 곳에 산삼이 있죠. 외국 관광객들에게 산삼 캐기 체험은 관광 상품이 됩니다. 이는 우리말을 전파할 기회도 되겠죠. 산삼을 캐려면 산신령의 점지가 있어야 하는데, 산신령은 우리 말밖에 할 줄 모르거든요.”
그는 만족스러운 듯 또 흐흐흐 웃었다. 그가 산삼에 얽히게 된 인연은 이렇다. 후배산악인들과 함께 오대산을 등반하는 중이었다. 대장이던 그는 후미에서 쉬엄쉬엄 걸었다. 바로 그때 조막손 같은 잎을 가진 어떤 풀이 눈 앞에서 “나 산삼이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숱한 산행을 해왔지만 오늘 이렇게 만나다니.
“산삼은 군락(群落)을 짓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주변을 살펴봤습니다. 과연 열다섯 뿌리나 됐어요. 머릿속에 금세 모두 1억원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왔고, 들은 풍월이 있어 “심봤다!”를 세 번 외치려고 했지요.
- 후배들과 산 오르다 산삼 발견 · 욕심이 생겨 말안하고 숨겨 · 나중에 보니 산삼 아닌 돌단풍…이에 깨달음 얻어 蔘심기 시작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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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겁니다. 왜 그랬느냐, 산삼을 발견한 걸 알리면 후배들과 나눠 먹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는 후배들에게 안 들키게 바위 뒤에 딱 붙었지요. 후배들이 산모퉁이를 완전히 돌아간 뒤에야 몸을 일으켜 다시 산삼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산삼으로 봤던 게 산삼이 아니라 비슷하게 닮은 ‘돌단풍’이었어요.”
그는 창피한 마음으로 헐레벌떡 뒤쫓아갔고, 후배들에게는 ‘볼일 보고 늦었다’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날 밤 텐트 안에 누워있으니 ‘산신령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단풍은 물가에 있어야 한다. 그곳은 능선이다. 돌단풍이 있을 수 없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후배들과 나누기 싫어한 그 놀부 심보를 고약하게 여긴 산신령이 다른 풀로 바꿔치기 하다가, 워낙 급한 김에 돌단풍으로 위장시킨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후배들에게 털어놓은 뒤, 다시 찾으러 되돌아갔지요. 저는 산길을 찾는데 도사입니다.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을 찾아냈지요. 바위는 그대로 있었어요. 그런데 산삼도 돌단풍도 없는 겁니다.”
이럴 경우 보통 사람이라면 눈이 헷갈린 해프닝으로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달랐다.
“이 모든 불행이 산삼이 이 땅에서 멸종되었기에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지요. 나처럼 ‘불운한’ 산꾼을 다시는 만들지 말자, 그러려면 이 땅의 산들을 예전처럼 산삼밭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텐데….”
‘박구라’로 통하는 그의 입심은 가끔 사실과 픽션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이 점을 지적하자, 그는 “최형이 사실로 입증해주세요”라고 했다. 여하튼 그는 전국의 산을 산삼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의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당시 ‘토종(土種) 문화’ 운동을 벌이던 이덕영(나중에 발해 탐사를 위해 뗏목을 타고 가다가 사망함)과 의기투합했고, 서울 인사동 주변에서 맴도는 문화계 인사들과 산악인들을 모아 ‘농심마니’를 결성한 것이다.
“강찬모(화가), 김홍성(시인), 전유성(개그맨), 최성각(소설가) 등 문화계 ‘또라이’들은 잘 따라주는데, 산악인들은 ‘인식이 형이 제 정신이 아니다’고 보는 겁니다. 첫 행사를 마치고 술자리에서 한 후배산악인이 내게 ‘형, 제발 이런 미친 짓 하지 말라’며 울었어요. 그래서 다음 2회 때부터는 산악인들을 몰아냈습니다(웃음).”
후배 산악인들도 더 이상 그를 산악인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인식이 형은 산을 떠났다”라고. 최고 기량의 클라이머가 어느 날부터 자일을 묶지 않게 된 것은 산악계의 미스터리였다. 한때 산꾼의 ‘형(兄)’이었던 그가 전문적인 등반을 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됐다.
그가 산에 미쳐 ‘자기 해방에 몸부림 치며 끝 모를 절벽에 몸을 던지는 알피니스트들의 역설적인 삶이 인간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불가능과 영원에 대한 끊임없는 충동질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등반의의와 산으로 형상화되는 궁극적 실체와 그 산을 찾아 오르는 인간과의 관계…’’삶의 비밀이 함축되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올라가서는 내려가야만 하는 산이다. 삶이 조망되는 길은 대개의 사람이 피하는 높고 가파른 험로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라는 격정적인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건만.“전국의 산을 산삼밭으로 만들겁니다”
―어떻게 해서 산에 빠졌습니까.
“고등학교 시절 대구에서 산악전문 사진가 김근원씨의 한라산 등반 사진전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 중에서 눈 내리는 산 속에 홀로 한 사내가 서 있었지요. 순간 그 사내가 바로 저라는 전율이 왔어요. 그때부터 등반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산에 다니면서 산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게 산에 미쳐 다니다가, 왜 갑자기 등반을 멈췄나요?
그는 머뭇거렸다.
“사람에게는 ‘때(時)’라는 게 있는 거죠. 난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 95년 파리로 건너가면서 완전히 등반을 그만 뒀지요.”
나는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당시 내게 등반은 고독한 골짜기에 홀로 서 있는 고독한 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등반행위는 점점 레저나 스포츠처럼 되어갔지요. 대중에게 보여주려는 듯한 등반, 마치 광대놀음 같았습니다. 나는 깊은 회의와 슬픔에 빠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등반은 꼭 다시 할 거요. 아직 체력은 20~30대 수준이니,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멋진 극한의 등반을 할 수 있겠지요.”
―지금껏 괜찮게 살아온 것 같습니까?
“그건 몰라도 치열하게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처럼 일상에 묶여있는 눈에 그는 ‘멋있는’ 자유인일지 모르나, 숱한 세월 동안 그를 남편으로 혹은 아비로 둔 가족은 어떠했을까.
“나는 자유를 누렸지만 가정은 버려졌어요. 특히 아내에게 면목이 없지요. 물론 생계를 책임지는 기본의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되돌아갈 수 있다면 결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산에 산삼 씨앗은 뿌리고 다녔지만, 이 세상에 나 같은 종자는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많이 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다 잘 자라줬으니 고맙지요.”
소설 쓰고 山도 타는 인사동 문화계 터줏대감
박인식은한마디로 서울 인사동의 ‘터줏대감’이다. 이 골목에서 문화·예술·출판계 인사들은 그를 중심으로 논다. 한때는 “사는 게 바람 같다”며 ‘풍(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로 “박풍” “최풍” “강풍”이라고 부르고 다녔다. 그는 밤늦게까지 눈을 껌벅거리며 이들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거나 포커를 치거나 잡담을 한다.
최근 그는 부인에게 “이제부터 창작에 모든 걸 걸겠다. 나를 내버려달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서울에 작업실까지 갖춰놓고 의욕을 불태우는 중이다. 이번에 귀국할 때도 자신의 장기(長技)라는 연애, 여행, 음식 등을 소재로 한 다섯 권짜리 장편소설까지 들고 나타났다.
그가 지금껏 쓴 책으로는 산악소설 ‘백두대간’ ‘대륙으로 사라지다’, 그와 함께 놀았던 사람들에 대한 실명소설 ‘인사동블루스’, 히말라야 순례기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산악인 평전 ‘사람의 산’, 인상파 화가를 찾아가는 미술기행기 ‘햇살 속에 발가벗은’ 등이 있다.
그는 연세대 산악부 출신으로, 지구물리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당시 전임 강사 자리를 받았으나 알프스 원정 계획 때문에 이를 포기했다. 1981년 조선일보 월간 ‘산’에 기자로 입사해 2년 만에 퇴사했다. 그 직후 알프스 산군(山群)인 프랑스 샤모니에서 1년을 보냈다. 되돌아와 다시 ‘산’지에서 89년까지 근무했다. 그 뒤 ‘사람과 산’의 편집장과 발행인을 지냈다.
1991년부터는 완전히 직장을 그만뒀다. 그는 지금까지 알래스카 산군, 안데스산맥, 네팔 히말라야, 천산산맥, 곤륜산맥, 카라코럼 산맥, 파미르 고원, 유럽 알프스 등을 숱하게 떠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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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삼을 심되 결단코 자기가 캐먹지는 않는다, 이 약속을 지켜왔어요. 우리는 캐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삼을 심기 전날 밤새 술 마시며 신명 나게 놉니다. 다음날 아침 술이 덜 깬 상태로 산에 오릅니다. 그러니 산삼을 심고도 어디 심었는지 모르게 되죠.” /이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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