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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찌지리도 가난했던 집안의 장남들”

천하한량 2007. 10. 13. 01:49
우리는 찌지리도 가난했던 집안의 장남들”
60대가 된 골목친구 9명, 친목모임 ‘찌장회’ 만들고 20년간 우정 나눠
사업가·의사 등으로 자수성가, 전국에 흩어져 살아… 매년 두 번씩 부부동반 모임

앞길은 캄캄하고 동생들은 줄줄이고…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지
힘든 것이 당연한 줄 알았어… 누구나 다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내 인생은 없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산 거지… 동생들이 잘됐으니 보람이지 뭐
부자로 살았으면 재미없었을 것 같아… 내일이 뻔하니 스릴도 없을 테고
▲ 빈한했던 소년시절의 무대였던 광주 월산동을 배경으로 선 찌장회 멤버들. 왼쪽부터 홍상희·김귀식·방사원·송현곤·고태준·조수동·전석진·정정만씨. 사진은 광주 및 부산과 서울에서 찍은 뒤 합성했다.

1950년대 후반, 전남 광주시 변두리 월산동. 완만한 오르막이 시작하는 지점에 교회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좁은 골목길이 숨어있다. 손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골목길은 S자(字)를 늘여놓은 모양으로 25m 가량 이어지는데, 입구에는 탱자나무 담이 쳐져 있고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에 나무판자를 이어붙여 담을 세운 제과공장이 있다.


이 골목은 1946~1948년 사이에 태어난 사내아이 9명의 전용 놀이터였다. 코흘리개들은 국민학교는 제각각이었지만 방과 후에는 약속을 하지 않아도 이 골목으로 모여들었다. 이 좁은 골목길에선 진종일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공차기 놀이가 벌어졌다. 일부 꼬마들은 종종 지나가는 여학생을 가로막고 희롱하며 시시덕거렸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꼬마들은 종종 제과공장 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백설탕을 야금야금 파먹기도 했다.


가정환경은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 소년을 제외한 8명이 장남으로 동생들이 감자줄기의 감자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한국전쟁을 가까스로 넘긴 부모들이 그 동안 억눌렀던 욕구의 고삐를 풀고 ‘2세 작업’에 진력한 결과다. 베이비붐 세대가 월산동의 작은 골목길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운동이 등장하기 전이다. 피임법도 모르던 시절이라 어머니들은 애가 들어서면 낳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위생수준과 의료시설이 열악해 영아사망률 또한 높았다. 고태준 5남2녀, 김귀식 2남2녀, 방사원 6남, 송현곤 5남3녀, 전석진 5남2녀, 정정만 3남2녀, 조수동 1남2녀, 조희선 3남3녀, 홍상희 4남2녀.


골목길에서 정신없이 뛰어 놀던 시절, 소년들은 자신이 ‘집안의 장남’임을 의식할 수가 없었다. 소년들의 관계는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성인이 되어 인생을 개척해갈 때 장남이라는 지위가 이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못하고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든 친구(고태준·조희선·조수동),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된 친구(송현곤·정정만), 국립수산대학을 나온 뒤 원양어선을 타 사업가가 된 친구(전석진), 독학으로 대학을 나와 회사를 세운 친구(방사원),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가 된 친구(홍상희)….


성인이 된 친구들은 각기 가정을 꾸며 서울·수도권, 광주, 부산, 호주 시드니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몇 명씩 명절 때마다 만나며 친구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들이 친목모임을 결성하기로 한 것은 20년 전인 40대 초반이었다.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 고태준이 모임 결성을 제안했고, 골목길 친구 8명이 여기에 동의했다. 친목회 이름은 정정만의 아이디어로 ‘찌지리도 가난한 집의 장남들 모임’(약칭 찌장회)으로 정했다. 김귀식은 유일하게 차남이지만 사실상 홀어머니를 모시며 장남 역할을 하고 있어 찌장회 회원이 됐다. 찌장회는 봄·가을로 일년에 두 번, 장소를 바꿔가며 부부 동반 모임을 갖는다.


50여년 전 꼬마들의 놀이터였던 골목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광주가 발전하면서 변두리에 속했던 월산동이 현재는 광주의 중심가로 탈바꿈했다. 골목길에는 ‘덕림중앙2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흙길이 보도블록으로, 탱자나무담과 제과공장의 판자 담이 벽돌담으로 달라졌다. 골목길 입구에 홍상희 집, 골목길 중간에 전석진·조희선 집, 골목길 끝부분에 정정만의 집이 각각 옛날 그대로 남아있다.


성칼럼니스트 정정만씨는 “물려받은 재산은 없고 의무만이 짓누르던 시절을 보낸 장남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친목을 다지자는 모임”이라고 말했다.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송현곤씨는 “만날 때마다 똑같은 얘기가 나오는데도 부인들은 그렇게 재미있어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주차장관리업을 하는 조수동씨는 “약속이 잡히면 언제나 가슴이 설레는 모임”이라고 덧붙인다

▲ 중학교 2학년 때인 어느 눈 오는 날, 월산동 홍상희의 집 마당에서 전석진(왼쪽)과 정정만이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고태준ㆍ조희선ㆍ정정만ㆍ전석진은 홍상희의 생일에 초대 받아 점심을 먹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돌아가면서 찍었다. 홍상희가 아버지의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찌장회 멤버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중학교 시절 사진이다.

부산에서 수산회사를 운영하는 전석진씨는 코흘리개 꼬마들 중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전씨는 찌장회 멤버들 사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통한다. 500톤급 원양어선을 두 척 보유하고 있으며 육·해상 직원만 70명이 넘는다.


전석진씨는 5남2녀의 장남이었다. 부친과는 나이 차가 불과 18살밖에 나지 않았다. 남동생 3명은 영아기 때 죽고, 막내 남동생은 대학생 때 사고로 잃었다. 그의 친구들은 전석진이 2남2녀의 장남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전석진씨는 “나는 어려서부터 장남이면서 집안의 지주역할을 도맡아야 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는 잠깐 경찰공무원을 했지만 생활능력이 없었고 거의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도맡은 어머니는 전남 함평 시장으로 가서 건어물 장사를 했다. 나는 이른 새벽 건어물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첫 버스를 타러 가는 어머니를 배웅했고 밤 9시 넘어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어머니를 마중 나가 어머니의 짐을 받아 와야 했다. 어머니가 셈을 못했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 장사를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석진씨는 집안형편 때문에 사립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부산의 국립수산대학에 입학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 1973년 5월, 아들이 백일을 막 지났을 때 그는 30개월 걸리는 라스팔마스행(行) 원양어선을 탔다. 원양어선을 탄 지 2년 만인 1975년, 동원산업 소속 원양어선의 선장이 되었다. 그리고 ‘라스마팔마스 원양어업 역사상 최단 시간에 가장 돈을 많이 번 선장’이라는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다.


전석진씨는 선장이 되고 나서 ‘30개월-80만달러’ 계약으로 배를 탔으나 183만달러라는 어획고를 올렸다. 전석진씨는 이후 선장을 두 번 더 맡았고 1981년까지 배를 탔고 1982년 현재의 수산회사를 설립했다. 가장이자 집안의 지주로서 살아온 세월에 대해 전석진씨는 이렇게 말한다.


“수산대 등록금을 제외하고 가족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평생 손 벌려본 일이 없다. 내게는 애초부터 기댈 언덕이 없었다. 모든 것을 혼자 계산하고 보태고 빼야 했다. 4남매가 대학 공부를 하려면 내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여동생 둘을 내가 공부시켰고 출가시켰다.”

전석진씨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가장 가슴이 쓰렸던 부분은 ‘어머니 이야기’였다. 그는  어머니를 지켜주는 일도 해야 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어머니를 학대하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줘야 했다. 어머니는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생각에 아버지에게 한마디 말도 못하고 평생을 사셨다. 어머니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기 때문에 장남인 내가 어머니를 지켜야 했다. 아버지를 거역한 일이 없지만, 어머니를 지켜주려고 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했다.”


조희선씨도 몹시 가난했다. 아버지가 농협 임시직으로 잠깐 다녔을 뿐 오랜 세월을 어머니가 품을 팔아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는데 너만 대학에 보낼 수는 없다”는 아버지의 방침에 그는 눈물을 머금고 공고에 진학했다. 그는 공고에 입학한 첫날 제도기를 들고 홍상희의 집을 찾아와 눈물을 펑펑 쏟았다. 홍상희씨는 “희선이가 ‘나 멀리 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회고한다.


조희선씨는 공고를 졸업하자마자 잠시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그리고 해군에 입대, 해군 부사관으로 제대했다. 고려원양어선을 1년간 탄 뒤 일본 원양어선을 4년여 탔다. 1979년에 호주 시드니에 정착해 그곳에서 교포 처녀와 결혼한 그는 자영업과 건축개발업에 종사했다. 조희선씨는 “나를 위해 그렇게 고생하신 어머니에게 내가 잘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 말하곤 한다.


조수동씨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시밭길 인생이 시작됐다.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친정인 서울로 올라가면서 그는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돼버렸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안의 가장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낮에는 동사무소 사환으로 일하며 힘들게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배를 타고 있던 친구(조희선)가 “다 잊어버리고 배나 타자”고 권했다. 조수동씨는 여수에서 2개월짜리 선원코스를 거쳐 선원수첩을 발급 받았다. 배를 타려고 하자 친척이 “조리사 면허를 따고 타는 게 낫다”고 권유했다. 이렇게 되어 1976년에 승선해 1984년까지 상선의 조리실에서 일했다. 배 타기를 그만둔 뒤 그는 몇 가지 자영업에 손댔고 현재는 부산 대현동에서 주차장관리업을 한다.

▲ 월산동 골목길을 다시 찾은 송현곤·김귀식·홍상희씨(왼쪽부터)가 “전석진이 살던 집이 그대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태준씨는 오랜 건설회사 근무를 거쳐 현재 예평건설 부사장으로 있다. 5남2녀의 장남인 고태준씨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초등학교 교원양성소를 거쳐 거문도에서 1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방위로 군복무를 마친 뒤 주택공사 계열사에 노무주임으로 입사했다.


“당시는 중동건설 붐을 타고 있을 때라 중동에 나가면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동생들 학비를 대주기 위해서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혔다. 미륭건설에 스카우트돼 조립주택 기술자가 부족하던 중동 현장으로 나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2년 반, 주베일에서 1년 각각 근무했다. 이때 번 돈으로 전셋집을 전전하던 부모님 집을 사드렸다.”

이후 고태준씨는 강남종합건설로 옮겨 14년을 근무했다. 이때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자그마한 건물도 장만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중풍으로 투병한 부모님을 10년간 돌봤다. 고태준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교사를 그만둔 직후였다고 말한다.


“교사 퇴직금(34만원)을 받아 그 돈을 대학생인 동생들 학비로 주고 입대했다. 그렇게 군에 입대했는데 신체검사 결과 폐결핵이 나타나 귀향조치를 받았다. 집에서 방위 근무 판정 때까지 7~8개월을 기다릴 때가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다.” 


고태준씨는 결혼 후 15년간 부모의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를 책임졌다. 그 결과 동생 6명 중 4명이 대학을 마쳤다. 현재 전부 자기 몫을 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다섯째 동생은 중앙부처 과장으로 있고, 막내 동생이 경기도청 과장으로 있다. 그는 “아내는  수년간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 수발을 들었다”면서 “아내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BNM대표 방사원씨의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나는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쳐주겠으니 그 다음은 네가 동생들을 책임져라”고 선언했다. 방사원씨는 한양대 원자료력공학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었다. 겨우 친척에게 빌려서 낸 뒤 입학과 동시에 행당동에서 입주과외를 시작했다. 일단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한 그는 과외를 2~3개 더해 용돈과 책값을 벌었다. 이런 생활을 졸업 때까지 계속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해 4년 동안 줄곧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과외로 번 돈의 일부를 동생들 학비로 보내줬다. 집에서 10원도 갖다 쓰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 것이다. 학교에선 교수가 되라며 붙잡았지만 그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원자력연구소 근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전자회사에 근무하면서 VCR 헤드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후 선경(SK 전신)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까지 지냈다. 1989년 마그네슘 정밀주조 부품회사인 ㈜BNM을 창립했다. 현대·기아자동차에 납품하고 일부 GM대우에 납품한다. 방사원씨는 “나는 신혼생활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결혼과 함께 다섯째 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다섯째 동생이 재수를 했는데 동생의 재수 비용까지 내가 책임졌다. 동생 다섯 명을 모두 대학 공부를 시켰다. 그 중 세 명이 현재 교수로 있다. 고생은 했지만 형제들이 잘되니까 뿌듯하다. 집사람이 굉장히 잘했다. 누가 6형제 장남 집에 시집 오겠나? 어머니가 천식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아내가 수발을 다해드렸다. 부모님께 아파트도 사드렸다.”

성칼럼니스트 정정만씨는 5남매의 장남이다. 위로 2살 터울의 누나가 있지만 일찍이 출가했다. 밑으로 남동생 2명, 여동생 1명이 있다. 대학(연세대 의대)에 진학한 후 정정만은 “빈곤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세브란스병원 잔류를 포기하고 입대를 서둘렀다. 군대 문제를 해결해야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입대를 한 달 앞둔 1972년 1월, 그는 월산동 고향집을 찾았다. 그러나 고향집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 분위기는 참담했다. 아버지는 직장(농협)을 퇴직한 상태였고 설상가상 바로 아래 동생은 사업에 실패했다. 대학 1학년생인 여동생과 중학교 2학년인 막내 동생이 있었고 수입원이라곤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날 부르셨다. ‘너, 꼭 미국 가야만 하니?’ 평소엔 별로 말씀이 없는 아버지였다. ‘백지 두 장만 가져 오려무나’ 아버지는 한참 동안 흰 여백에 뭔가 적어 넣었다. 당신 성함부터 어머니 성함 그 아래에 동생들의 한자 이름이었다.

너, 가장이 뭔지 아니? 국가에는 국가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있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있다. 가정을 이끌어가는 책임자가 가장이다. 내가 여태까지 가장을 해왔지만 더 이상 능력이 없어 가장의 직위를 너에게 넘기고자 한다. 이것이 네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의 명단이다.’ 아무런 책임감이나 어떤 의미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다른 한 장의 백지엔 깨알 같은 숫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이것이 네가 갚아야 할 부채다.’ 나는 졸지에 몰락 직전에 있는 집 가솔의 가장이 된 것이다.”

그는 미국행(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미국 유학 시험을 준비한 친구 세 명은 군 복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현재 그들은 미국 새너제이에서 산부인과 의사, 시카고에서 방사선과 의사, 예일대 마취과 교수로 각각 근무하고 있다.)

그는 세브란스병원 수련의를 거쳐 개업해 돈을 벌었고 동생들과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가난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정말 눈물을 많이 흘렸다”면서 “낙오감과 고립감으로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광주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송현곤씨는 8남매의 장남이었지만 아버지가 철도청 공무원으로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17평이었는데, 우리 가족 10명 외에 시골 친척들 4~5명까지 올라와 지내서 집안이 항상 우글우글했다. 어머니는 항상 도시락을 10개씩 싸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퇴직한 뒤로 동생들 부양 책임이 장남인 그에게 주어졌다. 당시 그는 조선대 의대를 나와 의과대 조교수로 있었다. 대학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어린 동생들 학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종합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송현곤씨는 “종합병원을 거쳐 현재 병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대학에 남아 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고 말했다.


 

홍상희씨는 사레지오중고를 나와 조선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조선대 부속고를 거쳐 현재 조선대 여자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재직 중이다. 형제들도 모두 대학을 나왔다. 찌장회 멤버 중 상대적으로 가장 순탄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홍상희씨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베풀기를 좋아했는데, 4남2녀 역시 이런 부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홍상희씨는 “우리 친구들이 그렇게 많이 우리집에 놀러 와 밥을 먹고 갔는데, 우리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안 하셨다”고 회상한다.


 

김귀식씨는 광주서중과 사레지오고를 나와 조선대를 졸업했다. 조선대 병원 원무과 근무를 거쳐 오랜 기간 친구(송현곤씨)의 병원 사무장을 지냈다. 최근 송정리 부근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찌장회 멤버 중 한 사람은 “자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녀가 많아야 두 명인 요즘 세태에 장남의 개념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찌장회 멤버들이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의 60대들이 걸어온 고단한 세월의 축소판이다. 대서양과 남태평양 어장에서, 모래바람이 부는 중동 건설현장에서 그들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 참고 인내했다.


 

60줄에 들어선 찌장회 멤버들. 그들은 장남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때는 힘든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으니까. 그때는 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나?” 방사원씨는 “솔직히 내 인생은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었다”면서 “하지만 동생들이 모두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내가 복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고태준씨는 “이제 와서 보니 부자로 살았으면 재미 없었을 것 같다. 미래를 모르니까 개척하면서 스릴 있게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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