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중앙 2001년 07월호 >
잘 익은 벼이삭처럼 노릇한 빛깔에 그윽한 누룩과 국화香…
허시명의 우리 술 紀行 ④ ‘술 익는 마을 ’ 한산의 소곡주
(생략)
온동네에 소곡주 빚는 ‘장인들’
술동네가 존재했다. 모시로 유명한 한산이다. 한산에서는 모시를 삼듯 소곡주를 빚는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지만 한산의 여인들은 대부분 소곡주를 빚을 줄 알고, 많은 이들이 소곡주를 빚어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한산의 건지산 아래 한 동네에 들어갔다. 대문이 활짝 열린 집이 있었다. 마당에 비료 포대를 가득 실은 경운기가 있고, 주인은 논에 나가려고 준비중이었다.
“이 동네에서 소곡주 잘 빚는 집이 어디입니까?”
주인은 반색하며 주방 문턱에 선 안주인을 가리켰다.
“아 그러세요. 그럼 소곡주가 있겠네요?”
“그럼유.”
안주인의 표정도 밝았다.
“얼마입니까?”
“1.8ℓ짜리 한 병에 1만5,000원이네요. 드릴까유?”
“아뇨. 술 이야기를 들으러 왔어요.”
나는 남겨둔 다음 목적지 때문에 술을 살 형편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스박스라도 가져올 텐데…. 솔직하게 말한 것이 좀 꺼림칙했지만 모내기를 앞둔 바쁜 철에 안주인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 곧바로 목적을 밝혔다.
“제가 뭐 아는 게 있나유.”
안주인은 금세 꼬리를 감추려 들었다.
“무슨 재료를 씁니까?”
“똑같지유. 누룩하고 찹쌀하고 고추 좀 박고…. 다른 것은 안들어가유.”
나는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안주인은 부엌과 뒤안을 오가며 부산하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으려 했다. 주인 사내가 놉을 산 마을 사람 한 명과 논에 나가기 전에 입가심을 해야겠다며 술 한 병 내오라고 안주인에게 말했다. 안주인이 주안상을 봐 왔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한천을 사다 집에서 만든 묵에 김치 안주였다. 그런데 술은 소곡주가 아니었다.
“맥주를 마셔요?”
내가 물었다.
“소곡주 마시고는 일을 못해요. 앉은뱅이 술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취하는 줄도 모르고 취하기 때문에 까딱 잘못했다가는 논에 쳐박혀유.”
주인 사내는 내게도 맥주를 권했다.
“아주머니, 저는 아저씨가 드시는 소곡주 한 잔만 주시지요?”
나는 변죽 좋게 소곡주를 청했다. 안주인은 별로 탐탁찮은 표정으로 술을 내왔다. 냉장되어 있었지만 술은 약간 시큼했고, 달착지근하면서 진했다. 설 무렵 떴다면 얼추 4개월쯤 지난 술이었다. 누룩 냄새도 강했다. 도수는 높은 편이었다.
곡물과 누룩으로 빚는 약주는 통상 10도대를 유지한다. 12~13도짜리 술은 낮은 편이고, 14~16도짜리 술은 보통이며, 18~19도짜리 술은 높은 축에 든다. 약주 중에서 면천 두견주가 가장 높은 19도이고, 그 다음으로 한산 소곡주가 18도다. 일반 가정집에서 뽑는 술은 도수가 일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집에서 내놓은 술은 도수가 높았다.
소곡주를 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마당에서 전화를 받고 다시 술상으로 돌아오니 맥주 두 병은 이미 비워진 상태였다. 주인은 논으로 나가려고 경운기에 시동을 걸려 했다. 안주인도 따라 나서야 한다면서 나더러 그만 가보라고 했다.
“어어, 아직 소곡주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아주머니 소곡주 이야기 좀 들려 주세요.”
“저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만 가세요.”
돌아오는 안주인의 대답이 무심하고 밋밋했다. 나는 논으로 따라가면서 얘기를 들으려고 대문간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경운기의 엔진 소리가 골목에서 사라지도록 안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괜한 긴장감을 유발시킨 죄는 내게 있으니 서운한 감정 없이 물러서기로 했다. 술을 빚어 먹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파는 것은 아직은 실정법 위반이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허시명의 우리 술 紀行 ④ ‘술 익는 마을 ’ 한산의 소곡주
(생략)
온동네에 소곡주 빚는 ‘장인들’
술동네가 존재했다. 모시로 유명한 한산이다. 한산에서는 모시를 삼듯 소곡주를 빚는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지만 한산의 여인들은 대부분 소곡주를 빚을 줄 알고, 많은 이들이 소곡주를 빚어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한산의 건지산 아래 한 동네에 들어갔다. 대문이 활짝 열린 집이 있었다. 마당에 비료 포대를 가득 실은 경운기가 있고, 주인은 논에 나가려고 준비중이었다.
“이 동네에서 소곡주 잘 빚는 집이 어디입니까?”
주인은 반색하며 주방 문턱에 선 안주인을 가리켰다.
“아 그러세요. 그럼 소곡주가 있겠네요?”
“그럼유.”
안주인의 표정도 밝았다.
“얼마입니까?”
“1.8ℓ짜리 한 병에 1만5,000원이네요. 드릴까유?”
“아뇨. 술 이야기를 들으러 왔어요.”
나는 남겨둔 다음 목적지 때문에 술을 살 형편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스박스라도 가져올 텐데…. 솔직하게 말한 것이 좀 꺼림칙했지만 모내기를 앞둔 바쁜 철에 안주인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 곧바로 목적을 밝혔다.
“제가 뭐 아는 게 있나유.”
안주인은 금세 꼬리를 감추려 들었다.
“무슨 재료를 씁니까?”
“똑같지유. 누룩하고 찹쌀하고 고추 좀 박고…. 다른 것은 안들어가유.”
나는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안주인은 부엌과 뒤안을 오가며 부산하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으려 했다. 주인 사내가 놉을 산 마을 사람 한 명과 논에 나가기 전에 입가심을 해야겠다며 술 한 병 내오라고 안주인에게 말했다. 안주인이 주안상을 봐 왔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한천을 사다 집에서 만든 묵에 김치 안주였다. 그런데 술은 소곡주가 아니었다.
“맥주를 마셔요?”
내가 물었다.
“소곡주 마시고는 일을 못해요. 앉은뱅이 술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취하는 줄도 모르고 취하기 때문에 까딱 잘못했다가는 논에 쳐박혀유.”
주인 사내는 내게도 맥주를 권했다.
“아주머니, 저는 아저씨가 드시는 소곡주 한 잔만 주시지요?”
나는 변죽 좋게 소곡주를 청했다. 안주인은 별로 탐탁찮은 표정으로 술을 내왔다. 냉장되어 있었지만 술은 약간 시큼했고, 달착지근하면서 진했다. 설 무렵 떴다면 얼추 4개월쯤 지난 술이었다. 누룩 냄새도 강했다. 도수는 높은 편이었다.
곡물과 누룩으로 빚는 약주는 통상 10도대를 유지한다. 12~13도짜리 술은 낮은 편이고, 14~16도짜리 술은 보통이며, 18~19도짜리 술은 높은 축에 든다. 약주 중에서 면천 두견주가 가장 높은 19도이고, 그 다음으로 한산 소곡주가 18도다. 일반 가정집에서 뽑는 술은 도수가 일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집에서 내놓은 술은 도수가 높았다.
소곡주를 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마당에서 전화를 받고 다시 술상으로 돌아오니 맥주 두 병은 이미 비워진 상태였다. 주인은 논으로 나가려고 경운기에 시동을 걸려 했다. 안주인도 따라 나서야 한다면서 나더러 그만 가보라고 했다.
“어어, 아직 소곡주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아주머니 소곡주 이야기 좀 들려 주세요.”
“저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만 가세요.”
돌아오는 안주인의 대답이 무심하고 밋밋했다. 나는 논으로 따라가면서 얘기를 들으려고 대문간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경운기의 엔진 소리가 골목에서 사라지도록 안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괜한 긴장감을 유발시킨 죄는 내게 있으니 서운한 감정 없이 물러서기로 했다. 술을 빚어 먹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파는 것은 아직은 실정법 위반이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시집와서 배운 술 빚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한산에서 전면적으로 빚어지고 있다는 소곡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번뜩 명절 때 서천 출신 시인에게서 소곡주 한 병을 선물받아 마셨다는 선배 생각이 났다. 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인의 연락처를 받고, 곧바로 연락했다. 핸드폰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서천 시인은 자신의 이모가 한산에 사시는데, 소곡주를 잘 담그신다며 선뜻 이모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시인의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한산의 건지산 아래 성외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일흔이 넘었고, 아들딸들이 객지에 나가 살기 때문에 혼자 무료하게 지내고 있었다. 서천읍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40년 전에 한산으로 이사왔다고 했다.
시인의 이모에게서 편안하게 소곡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술 빚는 법은 이사 와서 이 동네 사람들한테 배웠지. 너나할 게 없이 집집마다 빚은께 안빚을 수가 없시유. 고추 농사지어 팔듯이, 생활에 보탬이 되니께. 어떨 때는 농사짓는 사람보다도 낫어유, 많이 하는 사람은 쌀 열 가마도 하고, 한디 나는 한 가마밖에 안해. 소곡주를 빚을라믄 멥쌀 한말을 방앗간에서 빻아요. 그리고 흰무리(백설기)를 쪄. 술독에 물을 붓어야 돼. 찹쌀 한말에 대병으로 4병씩, 한 가마 할라믄 40병을 붓어야제. 거기다 누룩 80㎏ 한 가마를 붓고, 1주일이나 닷새쯤 발효시켜. 부웅 하고 끓고 나서 가라앉으믄 밑술이 다 되지.
덧술은 찹쌀 80㎏을 고두밥을 쪄서 잘 식혀 넣어야 혀. 뜨뜻헌 것 넣으면 시까 무서운께. 고두밥을 붓고 비벼요. 덧술할 때 물은 더 안들어가니께, 찰박찰박 물기가 없어. 불 안 때는 방에다 해놔. 아침에 해 놓으면 저녁 때믄 빠갈빠갈 소리가 나, 바실바실 비오는 소리 같어. 가스가 올라와서 눈이 매워. 그럼 뚜껑을 활딱 열어놔야 혀. 며칠 지나 술이 부욱하고 올라왔다가 내려가면 소리가 줄어들고 잠잠해져. 그럼 뚜껑 딱 닫아놓고 술 뜰 때나 열어 봐.”
“멥쌀·찹쌀·누룩 말고 다른 재료는 안들어갑니까?”
“고두밥 비빌 때 엿기름을 한줌, 삭으라고 넣어요. 고추도 서너 개 박아. 잡귀를 물리친다고…. 메주콩도 한줌 넣고. 콩은 남들이 넣은께 나도 넣지. 무슨 영문으로 넣는지 나도 몰라. 콩은 발효되고 나서도 그대로 있어.”
“술은 아무 때나 빚습니까?”
“아녀 글안해. 우리 겉은 사람은 1년에 딱 한번 음력 9월20일 경이 되믄 다 혀. 그러면 설 명절 때까지 100일이 되니께. 이것이 백일주거든. 100일이 돼야 술맛이 나. 그러고 말어.”
“누룩은 직접 딛으세요?”
“방앗간에 누룩틀이 있어 갖고 밀을 산더미처럼 갖다 놓고 해달라면 해주지. 음력 7월이면 일제히 누룩을 딛지. 옛날에 여기서 농사지은 밀은 더 좋았는디 요즘은 수입밀이라 약하다 했싸요.”
수입밀로 딛는 누룩이라 발효시키는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누룩에 곰팡이가 잘 피어야 하는데, 수입 밀에는 방부제를 쳤으니 생기는 문제다.
“이 동네에서 술 잘한다고 소문난 집은 어딘가요?”
“뭐 있간디? 아무리 잘한다는 사람도 이 술독하고 저 술독하고 맛이 다르고 헐 때마다 맛이 다른디. 무엇보다 첫째는 누룩이 잘 돼야 혀. 옛날 소곡주는 앉은뱅이 술이라고 찹쌀 한 말에 술 두병쯤 뺐어. 술이 독한디, 확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가. 찹쌀술이라 다른 것 안넣어도 달아. 그러니 찐덕찐덕해서 술상에 잔이 달라붙을 정도여. 시방 찹쌀 한말에 네병을 내도 찐덕거리는디, 옛날에는 두병 나왔으니 얼마나 찐덕거렸겠어. 그렇게 해서 팔아먹으니 타산이 안맞아.”
“누가 사갑니까?”
“다 친분대로 객지에서 와서 가져가요. 지나가다 소곡주 파는 집 어디냐고 물어보는 사람 쌨어요. 가지갈 사람들이 매년 찾아와. 또 아들 딸들이 사가. 돈 내놓고 선물한다고. 어짜피 선물하면 돈 드니께. 여나무병씩 가져가면 우리겉은 집은 팔 것도 없어. 어쨌든 팔기는 전부 다 팔제. 생활에 보탬이 되니께. 한산 모시 하대끼.”
“아 그래요? 그럼 여태까지 저만 몰랐군요. 지금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집에는 없고. 이웃에 백일주 해놓은 것 아직까지 있는께 사고 싶으믄 사시고…. 정월에 떠서 냉장고에 넣어놓은 것도 있고, 늦게 박아서 술독에 그대로 있는 것도 있어. 공기가 안통하게 해놓으면 끄덕없어. 늦게 찾는 사람 있은께 그렇게들 해놔.”
“술을 빚어서 낭패는 안보십니까?”
“왜, 소주 내리믄 낭패보는 거여. 맛이 시거나 잘 안되면 소주 내려 버리지. 불소주 한병에 2만5,000~3만원을 받아도 몇 병이나 내리것시유? 소곡주 너댓병 해야 불소주 한병이나 받을까. 작년 정월에는 재미봤시유. 한 가마니 했는데 괜찮했어.”
얼마를 벌었을까 따져 보았다. 그는 찹쌀 한가마니 술을 빚어서 대병으로 35병을 냈다. 한병에 1만5,000원에 팔았으니 모두 52만5,000원을 받았다. 지지난해 찹쌀은 한가마니에 25만원쯤 했고, 밀 한 가마니 값과 방앗간에서 누룩 딛는 값을 제하고 나면, 인건비를 따로 치지 않고 2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 그런데도 그는 괜찮은 벌이라고 했다.
“노느니 그거라도 해서, 인건비 먹는 거여. 애들 가져가면 술값만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용돈도 끼워 주니께. 쌀금이 올랐은께, 술값을 1만7,000원 달라니께 비싸다고 안 가지가. 먹는 사람들이 더해요. 헐 수 없이 1만5,000원에 팔았지.”
동네 가게에서도 소곡주를 팔았다. 허가받은 양조장에서 빚은 술도 있지만 집에서 빚은 술도 있었다. 가격은 상점마다 달랐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주인이 담근 소곡주를 대병 한병에 3만원에 팔았고, 마시고 남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음식점을 나서며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올려다보니 한산이라는 동네가 묘하게 여겨졌다. 이 동네야말로 박목월의 ‘나그네’가 구름에 달 가듯 가다 들어서는 술 익는 마을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산에서 전면적으로 빚어지고 있다는 소곡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번뜩 명절 때 서천 출신 시인에게서 소곡주 한 병을 선물받아 마셨다는 선배 생각이 났다. 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인의 연락처를 받고, 곧바로 연락했다. 핸드폰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서천 시인은 자신의 이모가 한산에 사시는데, 소곡주를 잘 담그신다며 선뜻 이모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시인의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한산의 건지산 아래 성외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일흔이 넘었고, 아들딸들이 객지에 나가 살기 때문에 혼자 무료하게 지내고 있었다. 서천읍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40년 전에 한산으로 이사왔다고 했다.
시인의 이모에게서 편안하게 소곡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술 빚는 법은 이사 와서 이 동네 사람들한테 배웠지. 너나할 게 없이 집집마다 빚은께 안빚을 수가 없시유. 고추 농사지어 팔듯이, 생활에 보탬이 되니께. 어떨 때는 농사짓는 사람보다도 낫어유, 많이 하는 사람은 쌀 열 가마도 하고, 한디 나는 한 가마밖에 안해. 소곡주를 빚을라믄 멥쌀 한말을 방앗간에서 빻아요. 그리고 흰무리(백설기)를 쪄. 술독에 물을 붓어야 돼. 찹쌀 한말에 대병으로 4병씩, 한 가마 할라믄 40병을 붓어야제. 거기다 누룩 80㎏ 한 가마를 붓고, 1주일이나 닷새쯤 발효시켜. 부웅 하고 끓고 나서 가라앉으믄 밑술이 다 되지.
덧술은 찹쌀 80㎏을 고두밥을 쪄서 잘 식혀 넣어야 혀. 뜨뜻헌 것 넣으면 시까 무서운께. 고두밥을 붓고 비벼요. 덧술할 때 물은 더 안들어가니께, 찰박찰박 물기가 없어. 불 안 때는 방에다 해놔. 아침에 해 놓으면 저녁 때믄 빠갈빠갈 소리가 나, 바실바실 비오는 소리 같어. 가스가 올라와서 눈이 매워. 그럼 뚜껑을 활딱 열어놔야 혀. 며칠 지나 술이 부욱하고 올라왔다가 내려가면 소리가 줄어들고 잠잠해져. 그럼 뚜껑 딱 닫아놓고 술 뜰 때나 열어 봐.”
“멥쌀·찹쌀·누룩 말고 다른 재료는 안들어갑니까?”
“고두밥 비빌 때 엿기름을 한줌, 삭으라고 넣어요. 고추도 서너 개 박아. 잡귀를 물리친다고…. 메주콩도 한줌 넣고. 콩은 남들이 넣은께 나도 넣지. 무슨 영문으로 넣는지 나도 몰라. 콩은 발효되고 나서도 그대로 있어.”
“술은 아무 때나 빚습니까?”
“아녀 글안해. 우리 겉은 사람은 1년에 딱 한번 음력 9월20일 경이 되믄 다 혀. 그러면 설 명절 때까지 100일이 되니께. 이것이 백일주거든. 100일이 돼야 술맛이 나. 그러고 말어.”
“누룩은 직접 딛으세요?”
“방앗간에 누룩틀이 있어 갖고 밀을 산더미처럼 갖다 놓고 해달라면 해주지. 음력 7월이면 일제히 누룩을 딛지. 옛날에 여기서 농사지은 밀은 더 좋았는디 요즘은 수입밀이라 약하다 했싸요.”
수입밀로 딛는 누룩이라 발효시키는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누룩에 곰팡이가 잘 피어야 하는데, 수입 밀에는 방부제를 쳤으니 생기는 문제다.
“이 동네에서 술 잘한다고 소문난 집은 어딘가요?”
“뭐 있간디? 아무리 잘한다는 사람도 이 술독하고 저 술독하고 맛이 다르고 헐 때마다 맛이 다른디. 무엇보다 첫째는 누룩이 잘 돼야 혀. 옛날 소곡주는 앉은뱅이 술이라고 찹쌀 한 말에 술 두병쯤 뺐어. 술이 독한디, 확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가. 찹쌀술이라 다른 것 안넣어도 달아. 그러니 찐덕찐덕해서 술상에 잔이 달라붙을 정도여. 시방 찹쌀 한말에 네병을 내도 찐덕거리는디, 옛날에는 두병 나왔으니 얼마나 찐덕거렸겠어. 그렇게 해서 팔아먹으니 타산이 안맞아.”
“누가 사갑니까?”
“다 친분대로 객지에서 와서 가져가요. 지나가다 소곡주 파는 집 어디냐고 물어보는 사람 쌨어요. 가지갈 사람들이 매년 찾아와. 또 아들 딸들이 사가. 돈 내놓고 선물한다고. 어짜피 선물하면 돈 드니께. 여나무병씩 가져가면 우리겉은 집은 팔 것도 없어. 어쨌든 팔기는 전부 다 팔제. 생활에 보탬이 되니께. 한산 모시 하대끼.”
“아 그래요? 그럼 여태까지 저만 몰랐군요. 지금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집에는 없고. 이웃에 백일주 해놓은 것 아직까지 있는께 사고 싶으믄 사시고…. 정월에 떠서 냉장고에 넣어놓은 것도 있고, 늦게 박아서 술독에 그대로 있는 것도 있어. 공기가 안통하게 해놓으면 끄덕없어. 늦게 찾는 사람 있은께 그렇게들 해놔.”
“술을 빚어서 낭패는 안보십니까?”
“왜, 소주 내리믄 낭패보는 거여. 맛이 시거나 잘 안되면 소주 내려 버리지. 불소주 한병에 2만5,000~3만원을 받아도 몇 병이나 내리것시유? 소곡주 너댓병 해야 불소주 한병이나 받을까. 작년 정월에는 재미봤시유. 한 가마니 했는데 괜찮했어.”
얼마를 벌었을까 따져 보았다. 그는 찹쌀 한가마니 술을 빚어서 대병으로 35병을 냈다. 한병에 1만5,000원에 팔았으니 모두 52만5,000원을 받았다. 지지난해 찹쌀은 한가마니에 25만원쯤 했고, 밀 한 가마니 값과 방앗간에서 누룩 딛는 값을 제하고 나면, 인건비를 따로 치지 않고 2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 그런데도 그는 괜찮은 벌이라고 했다.
“노느니 그거라도 해서, 인건비 먹는 거여. 애들 가져가면 술값만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용돈도 끼워 주니께. 쌀금이 올랐은께, 술값을 1만7,000원 달라니께 비싸다고 안 가지가. 먹는 사람들이 더해요. 헐 수 없이 1만5,000원에 팔았지.”
동네 가게에서도 소곡주를 팔았다. 허가받은 양조장에서 빚은 술도 있지만 집에서 빚은 술도 있었다. 가격은 상점마다 달랐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주인이 담근 소곡주를 대병 한병에 3만원에 팔았고, 마시고 남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음식점을 나서며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올려다보니 한산이라는 동네가 묘하게 여겨졌다. 이 동네야말로 박목월의 ‘나그네’가 구름에 달 가듯 가다 들어서는 술 익는 마을이었다.
누룩을 적게 사용해 빚은 술’
한산에서 세금 내면서 소곡주를 빚어 파는 곳은 딱 한 곳이 있다. 한산모시전시관 맞은편에 있는 한산소곡주 양조장(041-951-0290)이다. 이 집도 시인의 이모집처럼 건지산 아래 마을에서 소곡주를 빚었다. 밀주 단속을 한참 하던 시절에도 도지사나 군수가 잔치때 쓰겠다고 몰래 주문할 정도로 소문난 집이었다.
그 집 안주인이 김영신(1916∼97)씨였다. 소문이 높아져 1979년에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받았다. 김씨의 친정집은 대대로 한산면 호암리에 살면서 소곡주를 빚어왔다. 그 집안에 밝혀진 소곡주 계승 경로만도 300년을 거슬러올라가 1664년생인 전주 이씨 할머니에게까지 이른다.
술들이 모두 그렇지만, 언제 처음 소곡주가 빚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소곡주는 한산에서만이 아니라 나라 안에서 널리 빚던 술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에 살던 안동 장(1598∼1681)씨가 지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쇼곡쥬’라고 소개된 것이 가장 오래 된 기록으로 보인다. 구전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했을 때 여자들이 소복(素服)을 입고 술을 빚었다고 해서 '素酒’라고 썼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산의 건지산성은 백제인들이 마지막 부흥 운동을 벌였던 주류산성으로 비정되는 곳이기도 해서, 소곡주는 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술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누구도 입증할 수 없고, 얼토당토 않다고 무찌를 수도 없는 얘기다. 다만 소곡주가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마셨던 술임에는 틀림없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1786∼1855)가 지은 ‘농가월령가’ 정월 편에서는 ‘며느리 잊지 말고 소곡주 밑하여라, 삼춘(三春) 백화시(百花時)에 화전(花煎) 일취(一醉)하여 보자’고 노래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게 단단한 역사를 지닌 소곡주가 한산에만 남아 있다. 소곡주가 나오고, 모시로 유명한 한산은 금강 하류인 충청남도 서천군에 속한 한산면이다.
고려 왕권의 마지막 보루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한산 이씨로 이곳 출신이다. 이색은 한산팔영(韓山八詠)을 짓고 그 서두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우리집 한산은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에 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로부터 천하가 모두 우리나라에 한산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즉 그 좋은 경치를 노래에 실어 전파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색과 그의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기에 문명을 떨친 한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산에는 이색의 무덤과 그를 기린 문헌서원이 있다. 황진이가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서경덕·박연폭포·황진이를 꼽았는데, 나는 한산삼절(韓山三絶)로 목은 이색, 한산 모시, 한산 소곡주를 꼽으련다.
한산에서 세금 내면서 소곡주를 빚어 파는 곳은 딱 한 곳이 있다. 한산모시전시관 맞은편에 있는 한산소곡주 양조장(041-951-0290)이다. 이 집도 시인의 이모집처럼 건지산 아래 마을에서 소곡주를 빚었다. 밀주 단속을 한참 하던 시절에도 도지사나 군수가 잔치때 쓰겠다고 몰래 주문할 정도로 소문난 집이었다.
그 집 안주인이 김영신(1916∼97)씨였다. 소문이 높아져 1979년에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받았다. 김씨의 친정집은 대대로 한산면 호암리에 살면서 소곡주를 빚어왔다. 그 집안에 밝혀진 소곡주 계승 경로만도 300년을 거슬러올라가 1664년생인 전주 이씨 할머니에게까지 이른다.
술들이 모두 그렇지만, 언제 처음 소곡주가 빚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소곡주는 한산에서만이 아니라 나라 안에서 널리 빚던 술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에 살던 안동 장(1598∼1681)씨가 지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쇼곡쥬’라고 소개된 것이 가장 오래 된 기록으로 보인다. 구전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했을 때 여자들이 소복(素服)을 입고 술을 빚었다고 해서 '素酒’라고 썼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산의 건지산성은 백제인들이 마지막 부흥 운동을 벌였던 주류산성으로 비정되는 곳이기도 해서, 소곡주는 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술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누구도 입증할 수 없고, 얼토당토 않다고 무찌를 수도 없는 얘기다. 다만 소곡주가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마셨던 술임에는 틀림없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1786∼1855)가 지은 ‘농가월령가’ 정월 편에서는 ‘며느리 잊지 말고 소곡주 밑하여라, 삼춘(三春) 백화시(百花時)에 화전(花煎) 일취(一醉)하여 보자’고 노래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게 단단한 역사를 지닌 소곡주가 한산에만 남아 있다. 소곡주가 나오고, 모시로 유명한 한산은 금강 하류인 충청남도 서천군에 속한 한산면이다.
고려 왕권의 마지막 보루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한산 이씨로 이곳 출신이다. 이색은 한산팔영(韓山八詠)을 짓고 그 서두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우리집 한산은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에 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로부터 천하가 모두 우리나라에 한산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즉 그 좋은 경치를 노래에 실어 전파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색과 그의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기에 문명을 떨친 한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산에는 이색의 무덤과 그를 기린 문헌서원이 있다. 황진이가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서경덕·박연폭포·황진이를 꼽았는데, 나는 한산삼절(韓山三絶)로 목은 이색, 한산 모시, 한산 소곡주를 꼽으련다.
이슬에 바랜 누룩향과 들국화향에 취해
현재 한산 소곡주 양조장에서는 시어머니 김영신씨의 후계자로 며느리 우희열(62)씨가 충남 무형문화재 3호?승계했다. 그는 아들 나장연씨 내외와 함께 소곡주를 빚고 있다. 30대 중반의 나씨는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했는데, 졸업하자마자 곧장 고향으로 내려와 술 빚는 일에 뛰어들었다.
나장연씨는 만나자마자 내게 소곡주 한 잔부터 권했다. 잘 익은 벼이삭처럼 노릇한 술에서는 그윽한 누룩 향이 풍겼다. 시원한 맥주나 독한 소주나 양주가 익숙한 세상이지만, 이 누룩 향이 본디 우리 선조들의 코끝에 맴돌던 술 냄새다. 술잔을 기울이니 입안에 달콤쌉싸름한 맛이 감돌고, 술잔은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혀에 알알한 기운이 돌았다.
나씨는 술 맛을 좌우하는 것은 첫번째가 물이고, 두번째가 누룩, 세번째가 온도라고 했다. 소곡주는 염분이 없고 철분을 약간 함유한 한산의 건지산 물로 담가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서천에서 소곡주를 담는 사람들도 건지산 물을 가져다 빚을 정도라고 한다. 건지산 물이 좋다는 얘기는 양조장에서 고개 하나 너머, 목은 이색의 무덤이 있는 문헌서원 관리인으로부터 실감나게 들었다. 여름에 모기에 물려 가렵다가도 그 물에 목욕하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진짜 약수라고 했다.
한산 소곡주 양조장의 술은 앞서 얘기한 시인 이모의 술 빚는 방식과 약간 차이가 난다. 원료를 섞는 비율이 다르고, 들국화가 추가된다. 시인 이모는 찹쌀과 누룩을 같은 비율로 넣어 빚었다. 누룩이 많이 들어가는 편인데, 누룩을 많이 넣으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드는 대신 누룩의 잡냄새가 많이 나게 된다. 그러므로 되도록 누룩을 적게 써서 술이 되게 하는 것이 고수(高手)들의 전략이다.
양조장에서는 계약재배한 통밀로 손수 만든 누룩과 곡자 공장의 누룩을 섞어 쓴다. 잘 딛어진 누룩은 절구에 빻아 가을 이슬에 너댓새 바래어 잡냄새를 제거한 뒤 사용한다. 들국화 잎은 덧술할 때 자루에 담아 술에 넣어 둔다. 들국화 향이 술에 스미게 하기 위해서다. 메주콩은 신맛을 빨아들인다고 해서 넣는다. 그리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邪)의 의미로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로 술을 젓고, 술 속에 붉은 고추 서너 개를 꽂아 놓는다.
흔히 약주는 15~30일이면 완성된다. 그에 견주면 소곡주는 100일이 걸리는 백일주다. 백일주는 약주에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민속주에서 송화백일주나 계룡백일주처럼 소주를 두고 백일주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소주를 내린 뒤 100일 동안 보관하여 숙성시켰다는 의미다. 소주는 오래 보관할수록 맛이 좋아진다. 대개는 3년이 경과할 때까지 완만하게 좋아지는데, 그 뒤로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고들 한다. 그러므로 소주의 백일주는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백일주보다는 이백일주가 낫고, 이백일주보다는 삼백일주가 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약주의 백일주는 다르다. 약주에는 이백일주 삼백일주가 없다. 백일주는 약주로서는 가장 오래 발효시킨 술이다. 발효 기간이 길수록 그만큼 술 빚기가 어렵고 실패할 확률도 높아진다. 대신 속성으로 빚은 술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맛도 깊고 은근하다. 경주 교동법주를 높이 치는 이유도 백일주이기 때문이다.
백일주 한산 소곡주는 18도로, 도수도 높은 편이다. 예전에는 소곡주 술독을 땅에 묻어 담았다. 한겨울을 나는 술이 얼지 않고 일정한 온도에서 숙성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덧술이 한번 끓어오르고 나면 뚜껑을 닫고 아예 황토로 덮어 버렸다. 밀주 단속이 심할 때는 산 밑에 독을 묻어두고 흙으로 덮었다. 땅에 묻지 않은 독은 짚단 속에 깊이 박아 두었다.
이런 예전 방식에 가장 흡사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소곡주 양조장에서는 지하에 제조장을 마련하고 항아리를 땅에 묻었다. 물론 생산량이 늘어날 때는 스테인레스 술통도 사용한다.
나장연씨는 똑같은 공정과 정성으로 술을 빚어도 한배에서 나온 형제보다 더 제각각인 것이 술맛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땅에 묻힌 술항아리를 열고 술 국자로 술을 떠준다. 아니나 다를까 술맛이 모두 달랐다. 단 맛에서부터 상쾌하고 개운한 맛까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술을 야금야금 받아먹으며 술도가를 둘러보고 나니 취기가 돌았다.
별로 마신 것 같지 않은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약주는 손끝 발끝부터 취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좋지 않은 술은 머리부터 취한다. 머리부터 취하다 보니 손발에 힘이 남아돌아 제멋대로 설쳐댄다. 그래서 깨부수고 때리고 사고를 치게 된다.
옛날 선비들이 약주를 마시고 시를 읊고 거문고를 즐겼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몸은 취했지만 머리만은 멀쩡했으니 가능했을 법하다. 소곡주는 이러한 약주의 특징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그것은 소곡주에 붙은 앉은뱅이술이라는 별명에서 입증된다.
앉은뱅이술에 얽힌 유래로는 세가지가 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목을 축이려고 주막에서 소곡주를 홀짝이다 저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앉은뱅이가 되어 과거 시험 날짜를 놓쳤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술독을 열고 술맛을 보던 며느리가 술에 취해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었다는 얘기다. 세번째는 도둑이 물건을 훔치다 술독을 발견하고는 그 술을 떠먹고 일어나지 못해 붙잡혀 앉은뱅이술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세 이야기 모두 술 마신 사람은 정작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지다. 손끝 발끝부터 취하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예전부터 소곡주가 시거나 제맛을 내지 못하면 소주를 내려 먹었다. 이를 한산 사람들은 불소주라고 부른다. 소곡주 양조장에서도 18도짜리 약주와 함께 43도짜리 불소주를 내놓고 있다. 그리고 한산 지방의 오랜 관행을 살려 1.8ℓ짜리 대병에 살균하지 않은 생주를 담아 판다.
나장연씨가 지난 10년 동안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소곡주를 빚어 오면서 도달한 결론은 개량화된 술이 아니라 가장 전통적인 술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했다. 한산에 익명의 소곡주가 무수히 많지만 한산 소곡주 양조장에서 빚는 실명의 소곡주가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옛맛을 되살린 술이 되게끔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익명의 소곡주를 탈법적인 밀주라고 매도하지 않고, 건강한 동반자로 포용하고 있는 젊은 나장연씨의 생각이 고맙다.
‘눈이 맑은 여자같은 소곡주여!’
이제 와서 밝히는데, 소곡주는 내 첫사랑의 술이다. 내가 처음 접했던 약주며, 처음으로 맛과 향을 음미하면서 마셔 본 술이다. 그 첫잔에 나는 소곡주에 사로잡혔고, 오래도록 소곡주를 잊지 못했다. 그 첫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다시 소곡주를 마시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내 혀와 코가 예전 맛을 배반하면 어쩌나. 내 코와 혀의 감각이 옛날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렸으면 어쩌나. 그래서 다시 소곡주를 맛보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올해도 소곡주는 배반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맛보았던 그 자리에, 약주의 감동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술을 알아갈수록 소곡주의 매력이 새롭게 발견되니 나의 첫 판단이 그릇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돌아보건대 처음 소곡주를 마시고 취해 잠들었던 밤, 나는 소곡주를 두고 이렇게 읊조렸다.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은 소곡주여!”
현재 한산 소곡주 양조장에서는 시어머니 김영신씨의 후계자로 며느리 우희열(62)씨가 충남 무형문화재 3호?승계했다. 그는 아들 나장연씨 내외와 함께 소곡주를 빚고 있다. 30대 중반의 나씨는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했는데, 졸업하자마자 곧장 고향으로 내려와 술 빚는 일에 뛰어들었다.
나장연씨는 만나자마자 내게 소곡주 한 잔부터 권했다. 잘 익은 벼이삭처럼 노릇한 술에서는 그윽한 누룩 향이 풍겼다. 시원한 맥주나 독한 소주나 양주가 익숙한 세상이지만, 이 누룩 향이 본디 우리 선조들의 코끝에 맴돌던 술 냄새다. 술잔을 기울이니 입안에 달콤쌉싸름한 맛이 감돌고, 술잔은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혀에 알알한 기운이 돌았다.
나씨는 술 맛을 좌우하는 것은 첫번째가 물이고, 두번째가 누룩, 세번째가 온도라고 했다. 소곡주는 염분이 없고 철분을 약간 함유한 한산의 건지산 물로 담가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서천에서 소곡주를 담는 사람들도 건지산 물을 가져다 빚을 정도라고 한다. 건지산 물이 좋다는 얘기는 양조장에서 고개 하나 너머, 목은 이색의 무덤이 있는 문헌서원 관리인으로부터 실감나게 들었다. 여름에 모기에 물려 가렵다가도 그 물에 목욕하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진짜 약수라고 했다.
한산 소곡주 양조장의 술은 앞서 얘기한 시인 이모의 술 빚는 방식과 약간 차이가 난다. 원료를 섞는 비율이 다르고, 들국화가 추가된다. 시인 이모는 찹쌀과 누룩을 같은 비율로 넣어 빚었다. 누룩이 많이 들어가는 편인데, 누룩을 많이 넣으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드는 대신 누룩의 잡냄새가 많이 나게 된다. 그러므로 되도록 누룩을 적게 써서 술이 되게 하는 것이 고수(高手)들의 전략이다.
양조장에서는 계약재배한 통밀로 손수 만든 누룩과 곡자 공장의 누룩을 섞어 쓴다. 잘 딛어진 누룩은 절구에 빻아 가을 이슬에 너댓새 바래어 잡냄새를 제거한 뒤 사용한다. 들국화 잎은 덧술할 때 자루에 담아 술에 넣어 둔다. 들국화 향이 술에 스미게 하기 위해서다. 메주콩은 신맛을 빨아들인다고 해서 넣는다. 그리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邪)의 의미로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로 술을 젓고, 술 속에 붉은 고추 서너 개를 꽂아 놓는다.
흔히 약주는 15~30일이면 완성된다. 그에 견주면 소곡주는 100일이 걸리는 백일주다. 백일주는 약주에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민속주에서 송화백일주나 계룡백일주처럼 소주를 두고 백일주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소주를 내린 뒤 100일 동안 보관하여 숙성시켰다는 의미다. 소주는 오래 보관할수록 맛이 좋아진다. 대개는 3년이 경과할 때까지 완만하게 좋아지는데, 그 뒤로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고들 한다. 그러므로 소주의 백일주는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백일주보다는 이백일주가 낫고, 이백일주보다는 삼백일주가 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약주의 백일주는 다르다. 약주에는 이백일주 삼백일주가 없다. 백일주는 약주로서는 가장 오래 발효시킨 술이다. 발효 기간이 길수록 그만큼 술 빚기가 어렵고 실패할 확률도 높아진다. 대신 속성으로 빚은 술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맛도 깊고 은근하다. 경주 교동법주를 높이 치는 이유도 백일주이기 때문이다.
백일주 한산 소곡주는 18도로, 도수도 높은 편이다. 예전에는 소곡주 술독을 땅에 묻어 담았다. 한겨울을 나는 술이 얼지 않고 일정한 온도에서 숙성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덧술이 한번 끓어오르고 나면 뚜껑을 닫고 아예 황토로 덮어 버렸다. 밀주 단속이 심할 때는 산 밑에 독을 묻어두고 흙으로 덮었다. 땅에 묻지 않은 독은 짚단 속에 깊이 박아 두었다.
이런 예전 방식에 가장 흡사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소곡주 양조장에서는 지하에 제조장을 마련하고 항아리를 땅에 묻었다. 물론 생산량이 늘어날 때는 스테인레스 술통도 사용한다.
나장연씨는 똑같은 공정과 정성으로 술을 빚어도 한배에서 나온 형제보다 더 제각각인 것이 술맛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땅에 묻힌 술항아리를 열고 술 국자로 술을 떠준다. 아니나 다를까 술맛이 모두 달랐다. 단 맛에서부터 상쾌하고 개운한 맛까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술을 야금야금 받아먹으며 술도가를 둘러보고 나니 취기가 돌았다.
별로 마신 것 같지 않은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약주는 손끝 발끝부터 취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좋지 않은 술은 머리부터 취한다. 머리부터 취하다 보니 손발에 힘이 남아돌아 제멋대로 설쳐댄다. 그래서 깨부수고 때리고 사고를 치게 된다.
옛날 선비들이 약주를 마시고 시를 읊고 거문고를 즐겼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몸은 취했지만 머리만은 멀쩡했으니 가능했을 법하다. 소곡주는 이러한 약주의 특징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그것은 소곡주에 붙은 앉은뱅이술이라는 별명에서 입증된다.
앉은뱅이술에 얽힌 유래로는 세가지가 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목을 축이려고 주막에서 소곡주를 홀짝이다 저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앉은뱅이가 되어 과거 시험 날짜를 놓쳤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술독을 열고 술맛을 보던 며느리가 술에 취해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었다는 얘기다. 세번째는 도둑이 물건을 훔치다 술독을 발견하고는 그 술을 떠먹고 일어나지 못해 붙잡혀 앉은뱅이술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세 이야기 모두 술 마신 사람은 정작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지다. 손끝 발끝부터 취하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예전부터 소곡주가 시거나 제맛을 내지 못하면 소주를 내려 먹었다. 이를 한산 사람들은 불소주라고 부른다. 소곡주 양조장에서도 18도짜리 약주와 함께 43도짜리 불소주를 내놓고 있다. 그리고 한산 지방의 오랜 관행을 살려 1.8ℓ짜리 대병에 살균하지 않은 생주를 담아 판다.
나장연씨가 지난 10년 동안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소곡주를 빚어 오면서 도달한 결론은 개량화된 술이 아니라 가장 전통적인 술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했다. 한산에 익명의 소곡주가 무수히 많지만 한산 소곡주 양조장에서 빚는 실명의 소곡주가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옛맛을 되살린 술이 되게끔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익명의 소곡주를 탈법적인 밀주라고 매도하지 않고, 건강한 동반자로 포용하고 있는 젊은 나장연씨의 생각이 고맙다.
‘눈이 맑은 여자같은 소곡주여!’
이제 와서 밝히는데, 소곡주는 내 첫사랑의 술이다. 내가 처음 접했던 약주며, 처음으로 맛과 향을 음미하면서 마셔 본 술이다. 그 첫잔에 나는 소곡주에 사로잡혔고, 오래도록 소곡주를 잊지 못했다. 그 첫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다시 소곡주를 마시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내 혀와 코가 예전 맛을 배반하면 어쩌나. 내 코와 혀의 감각이 옛날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렸으면 어쩌나. 그래서 다시 소곡주를 맛보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올해도 소곡주는 배반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맛보았던 그 자리에, 약주의 감동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술을 알아갈수록 소곡주의 매력이 새롭게 발견되니 나의 첫 판단이 그릇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돌아보건대 처음 소곡주를 마시고 취해 잠들었던 밤, 나는 소곡주를 두고 이렇게 읊조렸다.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은 소곡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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