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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창업 10년 흥망사...

천하한량 2007. 10. 22. 17:39
그 많던 조개구이 다 어디로 갔나 [조인스]
‘반짝 창업’ 10년 흥망사
유행 좇아 창업했다 대부분 문 닫아…경쟁력부터 키워야 안 망해
이코노미스트 조개구이 전문점, 찜닭, 1000원 김밥 전문점, 막걸리주점…. 97년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반짝 유행했던 소자본 창업 아이템들이다. 패션에 유행이 있듯이 창업에도 유행이 있다. 창업 아이템은 ‘도입-성장-성숙-쇠퇴’라는 라이프 사이클을 거친다.

반면 반짝 업종은 ‘성장’과 ‘성숙’의 단계가 없다. 도입과 동시에 쇠퇴로 이어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이 반짝 창업 공화국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10년간 뜨고 진 반짝 사업들은 왜 성장과 성숙의 단계 없이 짧은 운명을 마감했을까.

이코노미스트가 창업 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원인을 분석했다. 반짝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소개한다. 국내 585만 자영업자들과 은퇴를 앞두고 창업을 꿈꾸는 직장인, 전직을 고민하는 샐러리맨들을 위한 창업 성공 노하우도 들여다봤다.

1998년 5월. 대기업 인사팀에 근무하던 이창혁(35)씨는 외환위기로 회사가 어려워지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생각에 의욕이 넘쳤다. 일찌감치 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퇴근 후 자주 들르던 조개구이 전문점.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집이었다.

‘내친 김에 창업이나 해볼까?’ 이씨는 아내와 함께 프랜차이즈 본사를 찾았다. 본사 직원은 손님들이 직접 생조개를 구워 먹기 때문에 재료를 다듬는 일손이나 특별한 요리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초보자도 쉽게 운영이 가능하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마음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대보증금 2000만원에 가맹비, 인테리어, 시설, 식기 자재 등 총 5000만원을 들여 조개구이 전문점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금세 부자가 될 것 같은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새벽까지 가게를 지켜야 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오픈 발’이라는 3개월의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 수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주변에 경쟁 점포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것.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격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수익이 더욱 악화됐다. 결국 6개월을 견디지 못했다. 조개구이 전문점은 문을 닫고 말았다.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유통업체에서 일하던 김장수(42·가명)씨. 그는 2001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월급쟁이 생활로는 더 이상 비전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

그는 퇴직금과 은행 빚을 얻어 5000만원을 투자해 상가 1층에 ‘압구정 김밥집’을 열었다. 처음엔 잘되던 김밥집은 바로 옆에 비슷한 김밥집이 새로 생기면서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는 1년이 채 안 돼 문을 닫은 후 ‘노래방’ 사업에 눈을 돌린다. 김밥집 정리를 한 돈과 부모 도움을 받아 2억원을 투자해 노래방 문을 열었다. 하지만 노래방 역시 이미 포화상태였다. 김씨의 노래방이 있는 상가에만 노래방 두 곳이 더 있었던 것.

뜻대로 장사가 안 되자 김씨는 나중엔 도우미까지 고용해 불법 영업을 하다 같은 건물 노래방 업주의 신고로 문을 닫았다. 김씨는 다시 컴퓨터 온라인 도박사업에 뛰어들었다.

외환위기 이후 소자본 창업 봇물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 사업 역시 오래가진 못했다. 사행성 게임으로 대변되는 ‘바다이야기’ 사건이 터지면서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

결국 김씨는 10년 동안 세 개의 유행 사업을 넘나들며 사업을 모색했지만 다 실패한 것이다. 그의 부인 역시 불안한 생계를 위해 미용사, 아파트 관리소 직원 등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현재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고 있는 김씨는 올 추석 고향 부모집에도 못 내려갔다.

위 두 사례만 놓고 봐도 유행 사업을 무조건 좇는 것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요즘 잘나가는 사업 어디 없을까?”에 집착해 수요가 몰리는 곳만 바라다보면 ‘공급 과잉’이라는 시장 악재와 만날 수밖에 없다.

전 재산을 다 털어 모으고 가족 돈, 은행 빚까지 끌어 모아 33㎡(10평) 남짓 가게 문을 열고 1년이 못 가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늘고 있다. 지난 9월 통계청 집계 결과 올해 1분기 자영업자는 585만9000명으로 전체 취업자 2284만1300명 중 25.8%를 차지했다. 1963년 자영업자 통계를 낸 이후 최저치다.

90년대 들어 27%대를 유지하던 자영업자 비중은 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99년 28%대까지 높아졌다가 그 뒤 줄곧 감소해 올해 25%대로 줄었다.

외환위기 직후 기업과 금융회사들의 대규모 인력 감축에 따라 실직한 직장인들이 대거 개인사업을 시작하면서 자영업 비중이 급증하다 공급 과잉을 초래했다. 이것이 도·소매, 음식·숙박업체들의 폐업과 도산으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된 것이다.

반짝 유행사업은 소비 트렌드와 맞물려 있다. 국내 자영업 판도는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전체적인 지각변동을 겪었다. 88올림픽 붐을 타고 외국계 라이선스 브랜드가 물 밀듯이 들어온 것. 웬디스, 하디스, 켄터키치킨 등 패스트푸드점들이 우후죽순 생겼고 도토루, 자뎅 등의 원두커피 전문점들이 곳곳에 문을 열었다.

라이선스 브랜드의 난립은 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간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테이블마다 전화기를 올려놓고 한 잔에 5000~6000원 하는 고급 커피 전문점이 생긴 것도 이때쯤이다. 90년대 상승가도를 달리던 외국계 라이선스 브랜드와 ‘고급화’ 매장들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다.

외환위기 때 타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곳은 대우자동차가 있던 인천 부평 상권. 화려한 패션 상권이던 이곳은 97년 이후 먹자골목으로 바뀐다. 소자본을 가지고 쉽게 창업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개구이 전문점은 대표적인 외환위기형 창업 아이템이었다. 서민들이 적은 돈을 들고 와 소주 한잔 하면서 애환을 달랠 수 있는 선술집 형태였기 때문이다. 창업컨설팅 전문가인 김상훈 스타트비즈니스 소장은 “97, 98년 당시 5000만~6000만원을 들고 와 잘되는 사업이 없겠느냐고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개구이 전문점은 채 1~2년을 못 버티고 하나 둘 문을 닫았다. 바닷가에서 수도권 지역까지 생물 조개를 공수해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다 적은 자본을 가지고 너도나도 쉽게 뛰어드는 바람에 공급 과잉이 일어났던 것. 시쳇말로 세 집 건너 한 곳은 조개구이집이 들어설 정도로 많이 생겨났다.

경기 침체기에 대박을 터뜨린 또 하나의 유행 아이템으로 소갈비살 전문점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가 대거 들어오던 시기라 소비자들은 ㎏당 9500원이면 맛있는 쇠고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