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은고자료 ▒

牧隱稿碑陰記

천하한량 2006. 12. 13. 02:26
牧隱稿碑陰記

 

  碑陰記

 

碑陰記 003_514a

 

先祖韓山伯神道碑。門人河文忠公。永樂乙酉冬。所撰也。今夏。始得貞石而鐫刻。至秋乃畢。叔父留後公。命孟畇記山來坐向書諸碑陰。又曰。余觀碑文。自授肅雍府丞。至封韓山伯。竝不書散官。蓋簡其文也。然 年譜在。可攷也。其碑文所載子孫。今皆成立陞秩。至於顯達者寔多。後生親孫若曾玄男女亦衆矣。不可不錄示後裔也。其悉記之。倂載碑陰。孟畇不敢辭。謹記之。先祖墓在韓山郡猉獜峯之南麓丑艮之山癸坐丁向。東南距郡治五里。謹稽山來自鴻山之永興山。折而東南三十餘里。崒然停峙。是爲猉獜峯。原其所自。實出於長白山也。峯之下加智之原。龍虎與案。蜿蜒環擁。佳氣沖融。嗚呼。天慳地祕。以待賢哲之吉兆歟。卽墓之巽方三十三步。樹立豐碑。以記德美。昭示無窮。又序次子孫之名。具列如左。長男吾先君。 知密直司事諱種德。娶門下評理柳惠孫之女。生四男二女。長孟㽥。仁寧府司尹。次孟畇。次孟畯。別將。早亡。季孟畛。漢城府尹。女長適瑞寧柳沂。次適都摠制河久。府尹三男三女。長衍基。司憲監察。次裕基。次保基。讀書。女長適敦寧府判官李厚。次適司瞻直長李椅。次適都染錄事金自行。監察二男三女。長澍。次渰。皆幼。瑞寧二男。長方善。次方敬。仲男簽書密直司事諱種學。娶門下侍中李春富之女。生六男一女。長叔野。光州牧使。次叔畦。晉州牧使。次叔當。右軍僉摠制。今皆云亡。次叔畝。同知中樞院事。次叔福。及第。季叔 畤。工曹參判。女適全州府君李漸。光牧一男二女。男蓄。戶曹正郞。女長適漢城判官安崇信。次適書雲副正李元根。正郞一男一女。皆幼。晉牧五女。長適監牧官柳諍。次適陵直郭汾。次適幼學全克敬。次適幼學李思南。次幼。僉摠制三男。長思。司譯院注簿。次畏。陵直。次異。東部錄事注簿。一男二女。皆幼。陵直一女。幼。錄事一男一女。皆幼。同知二男四女。長菑。原平都護府副使。次畬。司憲監察。女長適宜寧監務河孟晊。次適工曹佐郞安崇孝。次適通禮門奉禮金理。次幼。副使二男二女。長壽垠。餘幼。監察二男二女。長仁堅。次 義堅。皆幼。及第二男二女。長文埤。次文疆。女長適軍資錄事尹濱。次適幼學柳仲諲。文埤一男。幼。參判一女。適典農直長李敬賢。府尹一男一女。男義山。司正。女適集賢殿正字金文孝。季男開城留後司留後諱種善。娶參贊門下府事致仕權鈞之女。生一男。季疇。戶曹正郞。後娶吉昌君權近之女。生四男二女。長季疄。判司譯院事。次季甸。集賢殿修撰。中丁未年親試。次季畹。殿直。中壬子年成均試。次季町。讀書。女長適江華都護府副使李伯常。次適陵直金崇老。正郞一男四女。男塏。女長適幼學李徽。次適幼學李賁然。 餘幼。判事四男二女。長塾。次壎。次垓。次坰。皆幼。修撰二男三女。長堉。次堣。皆幼。殿直一男一女。男堧。皆幼。陵直一男一女。皆幼。外玄孫男女共五十餘。文繁不悉書名氏。婚姻有姓李者。皆非一李也。子孫衆多。而奕世簪纓。致位通顯。至於孟畇之不肖。亦得濫歷中外。至參廊廟。豈非積德流慶之所及也。古人云德厚者流光。本深者末茂。信哉。且洪武乙丑秋。大明國子學錄張溥,典簿周倬。奉使而來。望見我祖於稠人之中。問諸譯者曰。彼立第幾者。精粹有道人也。不是李先生某耶。譯者答曰是。卽前相語甚敬。 歲戊辰。以明年賀正使赴京師。高皇帝一見知其賢。賜語移時。及退。目送之曰。堪畫。蓋美其風度也。永樂癸未。太僕少卿祝孟獻奉使到國。以事久留。間求見牧隱文集。嘆服無已。又索閱行狀。亦甚景慕。因賦詩以表景仰之心。時在旁者請曰。大人嘆服景慕如此之切。幸作序以冠卷首。祝君曰。吾豈敢爲。當俟還朝。請於縉紳之能文者製送。其後乃送國子助敎羊城陳璉所撰墓誌銘。其序事則本於陽村先生所撰行狀。而欲變措辭。有致失實處。然論德行則亦本陽村之辭。而小加損益。至於論文章則日。爲文辭典實 豐鬯。興致本乎風雅。言論迪乎德義。和平之音。正大之氣。藹然見於編帙之間。銘一句云。惟公製作。華衮之章。又云。使公獲仕天朝。必能大推所蘊。受知天子。建立勳名。垂輝竹帛。則罔俾王思禮專美於有唐矣。惜乎。仕止一國。未究厥施。可勝惜哉。觀此總結之語。則陽村之所未道也。必也見其文集。知其爲人。而不敢以外國人下視之。稱揚讚美。至於如此。其誠服也無疑矣。我祖道德之崇。文章之盛。不唯東方之人仰之如山斗。以高皇帝之明。一見知賢。又若張學錄,周典簿。中朝聞人也。亦且甚敬。必有盛德光 輝。接於人者故也。祝少卿,陳助敎之嘆服讚美。豈非文章之妙脗合於風雅也耶。故倂著云。宣德八年八月下澣。正憲大夫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孫孟畇。謹記。

 

 

비음기(碑陰記)
비음기(碑陰記) [이맹균(李孟畇)]


선조(先祖) 한산백(韓山伯)의 신도비(神道碑)는 문인 하 문충공(河文忠公)이 영락(永樂) 을유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좋은 빗돌을 얻어 각자(刻字)를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마쳤는데, 숙부(叔父) 유후공(留後公)께서 나에게 산맥(山脈)이 내려온 근원과 좌향(坐向)을 기록해서 비석 후면에 쓰도록 명하시고, 또 이르기를, “내가 비문(碑文)을 보건대,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면서부터 한산백에 봉해지는 사이의 산관(散官)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글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年譜)가 있으니, 관직은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 기재된 자손들이 이제는 모두 성립하여 관질(官秩)이 승진되어서 현달(顯達)한 지위에 이른 자가 실로 많고, 비문을 지은 이후에 태어난 친손(親孫)과 증손(曾孫), 현손(玄孫) 또한 많으니, 이들을 다 기록해서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빠짐없이 다 기록해서 모두 비석 후면에 기재하라.” 하시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선조의 묘는 한산군(韓山郡) 기린봉(麒麟峯)의 남쪽 기슭 축간(丑艮)의 산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한산군 소재지와의 거리는 5리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 산맥은 홍산(鴻山)의 영흥산(永興山)으로부터 내려왔는데, 영흥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내려와서 우뚝 솟은 것이 바로 기린봉이니,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 것이다. 기린봉 아래 가지(加智)의 언덕은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안산(案山)이 굼틀거리며 빙 둘러 옹위하여 가기(佳氣)가 충만하니, 아, 하늘과 땅이 아끼고 숨겨 두었다가 현철(賢哲)한 이의 좋은 묏자리가 되기를 기다렸던가? 묘의 손방(巽方)으로 33보(步)가 되는 곳에 큰 비석을 세워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고, 또 자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서 다음과 같이 갖추 열거하는 바이다.
선조의 장남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휘 종덕(種德)인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유혜손(柳惠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맹유(孟㽥)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이고, 그다음은 맹균(孟畇)이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별장(別將)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 맹진(孟畛)은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이다. 장녀는 서령(瑞寧)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연기(衍基)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그다음 유기(裕基)와 보기(保基)는 글을 읽고 있으며, 장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이의(李椅)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도염서 녹사(都染署錄事) 김자행(金自行)에게 시집갔다. 감찰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주(澍)이고, 다음은 엄(渰)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방선(方善)이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다.
중남(仲男)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휘 종학(種學)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숙야(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진주 목사(晉州牧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인데, 지금 모두 사망하였다. 그다음 숙묘(叔畝)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그다음 숙복(叔福)은 급제하였으며, 막내 숙치(叔畤)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광주 목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1남 축(蓄)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장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안숭신(安崇信)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이원근(李元根)에게 시집갔다. 정랑의 1남 1녀는 모두 어리다. 진주 목사는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감목관(監牧官) 유쟁(柳諍)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능직(陵直) 곽분(郭汾)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유학(幼學) 전극경(全克敬)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사남(李思南)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어리다. 첨총제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思)는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이고, 그다음 외(畏)는 능직이며, 그다음 이(異)는 동부 녹사(東部錄事)이다. 주부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능직의 1녀는 어리다. 녹사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동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치(菑)는 원평도호부 부사(原平都護府副使)이고, 그다음 여(畬)는 사헌부 감찰이며, 장녀는 의령감무(宜寧監務) 하맹질(河孟晊)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숭효(安崇孝)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김리(金理)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부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은(壽垠)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견(仁堅)이고, 그다음은 의견(義堅)이며, 모두 어리다. 급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문비(文埤)이고, 차남은 문강(文疆)이며, 장녀는 군자감 녹사(軍資監錄事) 윤빈(尹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유중인(柳仲諲)에게 시집갔다. 문비의 1남은 어리다. 참판의 1녀는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 이경현(李敬賢)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 의산(義山)은 사정(司正)이고, 1녀는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 김문효(金文孝)에게 시집갔다.
계남(季男)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휘 종선(種善)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권균(權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계주(季疇)를 낳았는데, 계주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다. 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딸에게 재취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계린(季疄)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이고, 그다음 계전(季甸)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인데 정미년 친시(親試)에 급제하였으며, 그다음 계원(季畹)은 전직(殿直)인데 임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그다음 계정(季町)은 글을 읽고 있다. 장녀는 강화도호부 부사(江華都護府副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능직 김숭로(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개(塏)이고, 장녀는 유학 이휘(李徽)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분연(李賁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판사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塾)이고, 그다음은 훈(壎)이며, 그다음은 해(垓)이고, 그다음은 경(坰)이며, 모두 어리다. 수찬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육(堉)이고, 그다음은 우(堣)이며, 모두 어리다. 전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연(堧)이고, 모두 어리다. 능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현손(外玄孫)은 모두 50여 인이나 되므로, 글이 많아서 명씨(名氏)를 다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혼인(婚姻)한 가운데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모두 우리와 같은 이씨가 아니다.
자손이 많고 대대로 높은 관작이 나서 통현(通顯)한 지위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나처럼 불초한 사람도 외람되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쳐 낭묘(廊廟)의 직임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덕(積德)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많이 쌓은 자는 덕택이 먼 후세까지 전해지고, 근본이 깊은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로다.
또 홍무(洪武) 을축년 가을에 명(明)나라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 전부(典簿) 주탁(周倬)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 선조를 바라보고는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저 몇째 번에 서 있는 이는 순수한 유도인(有道人)인데, 저분이 바로 이 선생(李先生) 모(某)가 아닌가?” 하므로, 역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앞으로 다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무진년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는 고황제(高皇帝)가 한 번 보고 선조의 어짊을 알고는 한참 동안 말을 나누어 주고, 선조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물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그려 놓음 직하다.”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풍도(風度)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명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일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간에 목은 문집을 구하여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또 행장(行狀)을 구하여 열람하고는 또한 매우 사모하여 시(詩)를 지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자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이렇게 간절히 탄복하고 사모하시니, 서(序)를 지어서 권수(卷首)에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축군(祝君)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의당 환조(還朝)하여 글 잘하는 조신(朝臣)에게 청해서 지어 보내겠다.” 하였다. 과연 그 후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양성(羊城) 진련(陳璉)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을 보내왔는데, 사적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양촌 선생(陽村先生)이 찬한 행장에 근본하여 조사(措辭)를 변개하려다가 오히려 실상을 잃게 된 곳이 있다. 그러나 덕행을 논함에 있어서는 역시 양촌의 말에 근본하여 약간 손익(損益)을 가하였고, 문장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문사(文辭)가 전실(典實)하고 풍창(豐鬯)하되, 흥치(興致)는 풍아(風雅)에서 근본하였고, 언론(言論)은 덕의(德義)에 도달하였으므로, 화평한 음조와 정대한 기운이 편질(編帙)의 사이에 성대히 드러난다.” 하였고, 명(銘)의 한 구절에는, “오직 공이 제작한 것은 화곤처럼 문채가 나도다.[惟公製作 華袞之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공이 천조(天朝)에서 벼슬을 했다면 반드시 평소에 온축(蘊蓄)한 것을 크게 펴서 천자(天子)에게 알아줌을 받았을 것이니, 그래서 훈명(勳名)을 수립하여 역사(歷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더라면 왕사례(王思禮)만 유독 당(唐)나라에 훌륭한 공훈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 나라에서만 벼슬을 하여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총결(總結)의 말을 보면 이는 양촌이 하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문집을 보고 그 위인을 알아서, 감히 외국 사람이라 하여 낮게 보지 못하고 칭찬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 성심으로 감복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우리 선조의 도덕의 숭고함과 문장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동방 사람들만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사모할 뿐 아니라, 고황제의 명철함으로도 한 번 보고 그 어짊을 알았었고, 또 장 학록(張學錄), 주 전부(周典簿) 같은 이들은 중조(中朝)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역시 매우 공경하였으니, 반드시 성덕(盛德)의 광휘가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 소경(祝少卿), 진 조교(陳助敎)의 탄복하고 칭찬한 것도 어찌 문장의 오묘함이 풍아에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내는 바이다.
선덕(宣德) 8년 8월 하한(下澣)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참찬 집현전대제학 겸 성균대사성(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 손(孫) 이맹균(李孟畇)은 삼가 기록하다.


 

[주D-001]왕사례(王思禮) : 본디 고구려(高句麗) 사람으로 당(唐)나라에 들어가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안남(安南) 지방을 공략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뒤에 벼슬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하동절도 부대사(河東節度副大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 목은고자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牧隱詩稿卷之一(辭)  (0) 2006.12.13
牧隱稿畫像讚  (0) 2006.12.13
牧隱稿神道碑  (0) 2006.12.13
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0) 2006.12.13
牧隱先生年譜  (0) 2006.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