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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稿神道碑

천하한량 2006. 12. 13. 02:25
牧隱稿神道碑

 

  神道碑

 

有明朝鮮國元宣授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本國特進輔國崇祿大夫韓山伯。諡文靖公李公神道碑幷序。 003_511a

 

門人奮忠仗義,靖亂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兼判尙瑞司事,修文殿大提學,監春秋館事,領經筵書雲觀事晉山府院君河崙。撰。
中朝進士。以理學唱鳴東方。位至王國上相者。曰韓山牧隱先生李文靖公而已。至正乙巳秋。公與星山樵隱先生李文忠公同掌禮闈。崙以不才。幸而中試。 執摳衣之禮者三十餘年。公之卒也。乃緣職事。不得往哭于位。迄今悲不能已。今其季子種善。以陽村權近所撰行狀。來囑碑銘。崙誠恐不足以形容德美。然揆諸義。不敢辭。謹按。公諱穡。字穎叔。號牧隱。世居忠淸道韓州。曾祖諱昌世。贈版圖判書。祖諱自成。元朝贈祕書監丞。本國贈都僉議贊成事。考諱穀。元朝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本國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號稼亭。諡文孝公。中元朝元統癸酉制科。詩與文高一時。有集行于世。妣金氏。元朝遼陽縣君。本國咸昌郡夫人。以天曆戊辰五月辛 未生公。自幼穎悟絶倫。讀書輒成誦。至正辛巳。中本國成均試。年十四戊子。稼亭先生在元朝。爲中瑞司典簿。公以例補國子監生員。學益進。庚寅。稼亭還本國。明年正月卒。公奔喪終制。癸巳夏。魁本國禮闈試。授肅雍府丞。秋。中征東行中書省鄕試第一。甲午春。會試京師。對策殿庭。大爲讀卷官稱賞。中第二名及第。勅授應奉翰林文字,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歸本國須次。王待以殊禮。就加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乙未春。爲王府必闍赤。陞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自此本國除授。 皆兼館職。夏。如京師。禮任本院。冬。權經歷。公見天下將亂。托以母老。棄官東歸。丙申秋。本國改官制授吏部侍郞兼兵部郞中。以參文武之選。公嘗上言時政八事。其一。罷政房。復吏兵部選。故有是命。丁酉。試國子祭酒。知閣門。爲王府知印。遷右諫議大夫。戊戌。同僚皆以言事忤權貴左遷。王謂宰相曰。穡非衆人比。進拜樞密院右副承宣。累遷至左承宣。自是參掌機密凡七年。啓沃弘多。辛丑冬。紅寇陷王京。王南幸。公從王捍衛協贊。克成收復之功。策勳一等。賜以鐵券。癸卯。元朝授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本國授密直 提學,同知春秋館事。賜端誠輔理功臣之號。自是與聞國政。乙巳。同知貢擧。請行搜挾易書之法。丁未。元朝授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戊申。以判開城兼成均大司成。王欲興復學校。改創成均館。擇一時之有經術者。分授生徒。皆以他官兼學官。公每日與諸學官分授畢。相與討論辨析。竟日忘倦。學者得以變其舊習。儒風一新。夏。王試九齋生六經義。賜及第七人。命公讀卷。己酉。又知貢擧。請行三場通考之法。初。王搆魯國公主影殿于王輪寺東岡。俠小其地。更欲於馬巖西相地。尤極宏壯。侍中柳濯等上書諫止之。 王怒。下濯等獄欲誅之。命公製諭衆文。公請罪名。王數四罪。公對曰。此皆旣往之事。又法不應死。近日濯等上書請停影殿之役。雖以此罪之。國人必謂上書之故。願王思之。王益怒。趣製愈急。公俯伏曰。臣安敢爲文以成其罪。王怒益甚。乃移居定妃宮。不許進膳。翌日。幸臣辛旽欲解王怒。請王下公獄。欲坐以不從王命。公曰。臣濫蒙上知。自布衣驟至達官。嘗謂有可以補上德者。必陳無隱。今王欲誅柳侍中。臣敢盡言者。第恐王之名不美於天下後世也。獄官具以聞。王遂感悟。放濯等出。使謂公曰。明日沐浴而朝。予將謝 之。厥後王益敬憚。辛亥。知貢擧。秋。拜政堂文學。加功臣號曰文忠保節贊化。王每召公見。必洒掃焚香曰。穡之學問。中國亦罕其比。烏敢不敬。九月。丁遼陽縣君憂。明年六月。王命起復本職。公力辭。癸丑冬。就封韓山君。甲寅秋。王薨。公自遼陽之逝。哀毀成疾。聞王薨。杜門不出者七年。丁巳。加推忠保節同德贊化之號。領藝文春秋館事。壬戌。拜判三司事。癸亥。復封韓山君。甲子。加府院。乙丑。拜檢校門下侍中。丙寅。又知貢擧。公凡五掌試。多知名士。戊辰。朝廷欲置鐵嶺衛。武臣崔瑩。挾僞主欲擧兵攻遼。軍至鴨綠江。我 太上王擧義回軍。執退瑩等。起公爲門下侍中。公曰。今國家有釁。王幼不能親朝。執政者當行。老臣敢自請。王及國人皆以公老且病固止之。公曰。臣受國恩至厚。常欲以死報之。苟得達國命於天子。雖死猶生。遂入朝敷奏詳明。高皇帝優禮待之。寵賚遣還。己巳夏。還國。秋。以疾請解繁務。乃拜判門下府事。冬。恭讓王立。有忌公不付己者。劾置長湍縣。庚午四月。移咸昌。五月。尹彝,李初之獄作。繫公等數十人于淸州。將用峻法。鍛鍊成罪。事叵測。而公以義命自處。不爲之動。天忽大雨。自朝至于日中。山崩水湧。城門壞。 館舍盡沒。問事官攀樹木僅免。驛聞于國。許皆放還。淸之父老相謂曰。有州來未有水災如此之劇。此殆公等所感也。王素知公無他。累次召還。忌公者輒斥之。辛未冬。公自咸昌被召還。復封韓山府院君。壬申四月。復貶衿州。六月。徙驪興。七月。我太上王卽位。忌公者誣公以罪。欲加極刑。公曰。吾平生不妄語。安敢誣服。死爲直鬼。亦無嫌矣。語聞王原之。移置長興府。同時見貶者。多賴公得全。冬。放歸韓州。乙亥秋。遊關東入五臺山。因留止。王遣使迎致。仍封韓山伯。待以故舊之禮。公進見而退。必送至中門。丙子夏 五月。公請往驪江避暑。初七日疾革。有僧至。欲語以其道。公揮之曰。死生之理。吾無疑矣。言訖而卒。年六十九。訃聞。王輟膳停朝三日。遣使致祭賻。葬以禮。諡曰文靖。十月。男種善等奉柩歸韓州。十一月甲寅。葬于加智原。公稟資淸粹。學問精敏。蚤承家訓。入齒辟雍。博文篤行。務盡性理之學。及還本國。勉進後生。以興起斯文爲己任。學者仰之如山斗。掌國辭命數十年。恒見稱於朝廷。爲詩文。操筆卽書。辭理精到。妙絶一時。有集五十五卷。樵隱博學有鑑識。尙論前輩。亦少許可。獨於公稱嘆不置曰。牧隱眞天才也。平 居待人接物。渾是一段和氣。當官處事。論議切至。確乎不可拔。及至爲相。務持大體。略無近名之累。平生不治生產。雖至屢空。不以爲意。晚年居閑。往往遊山水間。以自消遣。方外之人。有欲從遊者不拒。有求詩文者不靳。然以公達理之明。豈不知幻妄之說爲不足信哉。觀其易簀一語則可知已。夫人永嘉權氏。元朝明威將軍。本國花原君仲達之女。元朝大子左贊善。本國都僉議右政丞漢功之孫。有賢行能執婦道。不以有無溷公。生三男。長種德。推誠翊衛功臣知密直司事。次種學。簽書密直司事。登丙辰科。己巳。同知 貢擧。皆先公卒。次種善。司憲執義。登壬戌科。知密直男四。長孟㽥。判軍器監事。次孟畇。藝文直提學。登乙丑科。次孟畯。登壬申科。次孟畛。司僕直長。女二。長適瑞寧君柳沂。次適僉摠制河久。簽書男六。長叔野。司宰少監。次叔畦。司水注簿。次叔當。副司直。次叔畝。工曹議郞。次叔福。次叔畤。女適正尹李漸。執義男三。長季疇。二幼。銘曰。維韓之英。有翼稼亭。瓊琚厥辭。射策帝庭。於赫文靖。實維傳經。蚤入辟廱。大播其馨。聯中乙科。繼踵玉堂。厥鳴益大。國家之光。斂而東歸。師範一方。義理精微。 上接程張。文辭高古。下視蘇黃。道積厥躬。處事安詳。德與齒尊。位冠巖廊。奉使專對。見禮天王。歸來乞閑。進退其臧。維時多囏。天意杳茫。狼尾之㚄。國人心傷。泰山之頹。行路涕滂。嗚呼先生。德音不忘。子孫其承。福祿未央。我銘不諛。用示攸長。

 

 

신도비(神道碑)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의 원(元)나라로부터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선수(宣授)되었고 본국(本國)에서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정(文靖)인 이공(李公)의 신도비(神道碑) 병서(幷序) [하륜(河崙)]


문인(門人) 분충장의정란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靖亂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겸 판상서사사 수문전대제학 감춘추관사 영경연서운관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兼判尙瑞司事修文殿大提學監春秋館事領經筵書雲觀事)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은 찬(撰)하다.

중조(中朝)에서 진사가 되었고, 이학(理學)으로 동방을 창명(唱鳴)하고 지위가 왕국(王國)의 상상(上相)에 이른 이는 한산(韓山)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 문정공(李文靖公)뿐이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성산(星山) 초은 선생(樵隱先生) 이 문충공(李文忠公)과 함께 과시(科試)를 관장하였는데, 내가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다행히 과거에 합격하여 그 후 제자(弟子)의 예를 가져온 지 어언 3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공이 작고했을 적에 직사(職事)로 인하여 영위(靈位)에 가서 곡(哭)을 하지 못했으므로, 지금까지 슬픈 생각이 그지없다. 지금 공의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찬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내가 참으로 공의 훌륭한 덕을 제대로 형용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나, 의리로 보아서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색(穡),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인데, 대대로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에 살았다. 증조(曾祖) 휘 창세(昌世)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 휘 자성(自成)은 원조(元朝)로부터 비서감 승(祕書監丞)에 추증되고 본국(本國)에서는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곡(穀)은 원조의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 되었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가 되었는데, 호는 가정(稼亭)이고,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원조의 원통(元統) 계유년 제과(制科)에 합격하였고, 시문(詩文)이 한 시대에 뛰어났으며, 문집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비(妣) 김씨(金氏)는 원조로부터 요양현군(遼陽縣君)이 되고, 본국에서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이 되었는데, 천력(天曆) 무진년 5월 신미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글을 읽는 족족 외워 버렸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본국의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나이 14세 때인 무자년에는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원조(元朝)에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으므로, 공이 관례에 따라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 들어가서 학문이 더욱 진취되었다. 경인년에는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그 명년 정월에 작고하자, 공이 분상(奔喪)하여 삼년상을 마쳤다.
계사년 여름에는 본국의 과거에 장원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고, 가을에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향시(鄕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갑오년 봄에는 경사(京師)의 회시(會試)에 참예하여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한 것이 독권관(讀券官)의 칭상(稱賞)을 크게 받아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하여 응봉한림문자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에 칙수(勅授)되었다. 그 후 본국에 돌아와서 등용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더해 주었다. 을미년 봄에는 왕부(王府)의 필도치(必闍赤)가 되고 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승진되었다. 이로부터 본국에서 벼슬을 제수함에 있어서는 모두 관직(館職)을 겸대시켰다. 여름에는 경사에 가서 본원(本院)에 임용되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 되었는데, 공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가을에는 본국의 관제(官制)가 바뀜에 따라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吏部侍郞兼兵部郞中)에 제수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에 참여하였다. 공이 일찍이 시정(時政)에 관한 여덟 가지 일을 상언(上言)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가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이부ㆍ병부의 인재 선발하는 규정을 복구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으므로, 이 임명이 있었던 것이다. 정유년에는 시국자좨주 지각문(試國子祭酒知閣門)이 되고, 이어 왕부 지인(王府知印)이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전임되었다.
무술년에는 동료들이 모두 시사(時事)를 말한 것 때문에 권귀(權貴)에게 거슬리어 좌천되었는데,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은 뭇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고,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에 승진 임명하였다. 그 후 누천(累遷)하여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무릇 7년 동안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왕을 성심으로 인도한 것이 매우 많았다.
신축년 겨울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킴으로써 왕이 남쪽으로 행행하게 되자, 공이 왕을 시종하면서 호위하고 협찬하여 회복(恢復)의 공을 이루어 냈으므로,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록(策錄)하여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는 원조(元朝)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제수되었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에 제수되고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을사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책을 휴대하고 과장(科場)에 들어가는 자를 수검(搜檢)하는 법과 다른 사람을 시켜 답안지(答案紙)를 일률적으로 고쳐 쓰게 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정미년에는 원조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제수되었다.
무신년에는 판개성(判開城)으로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하였다. 이때에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성균관을 고쳐 짓고 한 시대의 경술(經術)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생도(生徒)들을 나누어 교수(敎授)하게 함으로써 모두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학관(學官)을 겸하게 되었다. 이때 공은 매일 여러 학관들과 더불어 생도들에게 교수를 마치고 나서는 서로 모여 앉아 토론하고 변석하면서 종일토록 피곤함도 잊었다. 그리하여 학자들이 잘못된 구습(舊習)을 고치게 되어 유풍(儒風)이 일신되었다. 여름에는 왕이 구재(九齋)의 생도들에게 육경(六經)의 경의(經義)를 시험 보여 7인에게 급제를 내리면서 공에게 명하여 시권(試券)을 읽게 하였다. 기유년에는 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삼장(三場)을 통고(通考)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전에 왕이 왕륜사(王輪寺)의 동쪽 언덕에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지었는데, 그 땅이 협소하다 하여 다시 마암(馬巖)의 서쪽에 땅을 골라서 더할 수 없이 으리으리하게 지으려고 하므로,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이 상서하여 그것을 정지하도록 간하자, 왕이 노하여 유탁을 하옥시키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공에게 명하여 여러 사람에게 유시하는 글을 지으라고 하자, 공이 그 죄명(罪名)을 물으니, 왕이 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요, 또 법으로 보아서도 죽음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요즘 유탁 등이 상서하여 영전의 일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비록 이 일로 죄준다 하더라도 국인(國人)들은 반드시 상서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 점을 생각하소서.”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글을 지으라고 더욱 급히 재촉하자, 공이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글을 지어서 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왕이 더욱 몹시 노하여 정비궁(定妃宮)으로 처소를 옮겨 가서 진선(進膳)도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튿날 행신(幸臣) 신돈(辛旽)이 왕의 노염을 풀게 하기 위해 왕에게 청하여 공을 하옥시키고 왕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적용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상의 알아주심을 입어 포의(布衣)로부터 갑자기 달관(達官)에 이르렀으므로, 항상 상의 덕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만 있으면 반드시 숨김없이 진달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유 시중(柳侍中)을 죽이려고 하므로, 신이 감히 할 말을 다한 것은 다만 왕의 명성이 천하 후세에 불미스럽게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였는데, 옥관(獄官)이 공의 말을 갖추 왕에게 아뢰자, 왕이 마침내 느끼어 깨달아서 유탁 등을 석방하고, 사람을 시켜 공에게 이르기를, “명일에 목욕(沐浴)하고 조회하도록 하라. 내가 장차 사과하겠다.” 하였다. 그 후로는 왕이 더욱 공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신해년에는 지공거가 되었다. 가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文忠保節贊化)라는 공신의 호가 더해졌다. 왕이 매양 공을 소견(召見)할 적에는 반드시 방을 청소하고 향을 피우면서 이르기를, “이색의 학문은 중국에서도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문데,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에는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다. 명년 6월에 왕이 명하여 본직(本職)에 기복(起復)시키려 하였으나, 공이 극력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갑인년 가을에는 왕이 훙하였다. 공은 요양현군이 작고한 후로 지나치게 슬퍼한 것이 병이 되었는데, 게다가 왕이 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후 7년 동안이나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정사년에는 추충보절동덕찬화(推忠保節同德贊化)의 호가 더해지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계해년에는 다시 한산군에 봉해졌고, 갑자년에는 부원(府院)이 더해졌다. 을축년에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병인년에는 또 지공거가 되었다. 공은 모두 다섯 번 시험을 관장하여 지명인사(知名人士)가 많이 나왔다.
무진년에는 명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위주(僞主)를 끼고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행군하여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렀을 때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의거(義擧)로 회군(回軍)하여 최영 등을 체포해서 물리치고 공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지금 국가에 불화가 있는데, 왕은 어려서 친조(親朝)할 수 없고 집정자(執政者)가 의당 가야겠으니, 노신(老臣)이 감히 자청한다.” 하니, 왕과 국인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이 있다 하여 굳이 만류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신이 지극히 두터운 국은(國恩)을 받았기에 항상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자(天子)에게 국명(國命)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마침내 입조(入朝)하여 그간의 사실을 자세하게 아뢰니, 고황제(高皇帝)가 두터운 예로 공을 대우하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기사년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가을에는 병으로 인해서 바쁜 직무에서 해면되기를 청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에는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공이 자기에게 붙지 않은 것을 꺼리던 자가 있어 공을 탄핵하여 장단현(長湍縣)으로 폄척하였다.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 5월에는 윤이(尹彝)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공 등 수십 인을 청주(淸州)로 체포해다가 장차 준법(峻法)을 적용해서 죄를 얽어 만들려고 하여 일이 자못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공은 천명(天命)으로 자처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비가 아침부터 정오까지 내리어 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넘쳐서 성문(城門)이 붕괴되고 관사(館舍)가 모두 물에 잠기어, 문사관(問事官)이 나무를 부여잡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역참을 통하여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모두 방환(放還)하도록 윤허하였다. 그래서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이르기를, “청주가 생긴 이후로 이렇게 극심한 수재(水災)는 없었으니, 이는 자못 공 등이 신명을 감동시킨 소치이다.” 하였다. 왕은 본디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잘 알고 누차 소환(召還)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가 매양 다시 폄척하곤 하였다.
신미년 겨울에는 공이 함창으로부터 소환되어 한산부원군에 다시 봉해졌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척되었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7월에는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던 자가 공에게 거짓 죄를 얽어서 극형을 가하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무복(誣服)을 한단 말인가. 죽어도 곧은 귀신이 되면 또한 혐의로움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전해지자, 왕이 공을 용서하여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안치시키니, 공과 동시에 폄척된 사람들도 공을 힘입어 생명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 이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주로 돌아갔다.
을해년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왕이 사자를 보내서 공을 맞이하여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친구의 예로 대우하였으며, 공이 왕을 뵙고 물러 나올 적에는 왕이 반드시 중문(中門)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병자년 5월에는 공이 여강(驪江)으로 가서 피서(避暑)를 한다고 청하였다가, 7일에 병이 위독해졌다. 이때 어떤 중이 와서 공에게 불도(佛道)를 말하려고 하자, 공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하기를, “사생(死生)의 이치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없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작고하니, 향년이 6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음식을 철폐하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으며, 사자를 보내어 치제(致祭)와 부증(賻贈)을 내려서 예장(禮葬)을 하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10월에 아들 종선(種善) 등이 영구(靈柩)를 받들고 한주로 돌아와서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하고 학문이 정밀하고 예민하였으며, 일찍부터 가훈(家訓)을 받들고 중국의 태학(太學)에 들어가 글을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힘써 다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돌아와서는 후생(後生)들을 힘써 진취시키면서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학자들이 공을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숭앙하였다. 국가의 사명(辭命)을 수십 년 동안 관장할 적에는 항상 중국 조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시문(詩文)을 지을 적에는 붓을 잡은 즉시 써 내려갔는데, 사리(辭理)가 아주 정밀하여 한 시대에 절묘(絶妙)하였다. 문집 55권이 있다.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은 박학하고 감식(鑑識)하는 안목이 있어 전배(前輩)들을 논함에 있어서도 인정을 하는 일이 드문데, 유독 공에 대해서만은 칭탄하여 마지않으면서 말하기를, “목은은 참으로 천재(天才)이다.” 하였다.
공이 평상시에 인물(人物)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혼연한 일단(一段)의 화기(和氣)뿐이지만, 벼슬자리에 앉아 일을 처리할 적에는 논의가 지극히 적절하여 확고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힘써 견지하고 조금도 명예를 추구하는 누(累)가 없었다. 평생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았고 비록 끼니를 자주 거르는 지경에 이르러도 개의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가히 지내면서 이따금 산수(山水)의 사이를 유람하여 심심소일을 하였는데, 그간에 방외인(方外人)이라도 혹 종유하려는 이가 있으면 거절하지 않았고, 시문을 요구하는 이가 있어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공처럼 이치를 달관한 명철함으로써 어찌 불가(佛家)의 환망(幻妄)된 설(說)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 임종시의 한 마디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부인(夫人) 영가 권씨(永嘉權氏)는 원조(元朝)의 명위장군(明威將軍)이 되고 본국에서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진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조에서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고 본국에서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이 된 한공(漢功)의 손녀인데, 어진 행실이 있어 부도(婦道)를 잘 수행하여 있고 없는 것 때문에 공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3남을 낳았다. 장남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이고, 그다음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인데, 병진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으나, 모두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그다음 종선(種善)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인데, 임술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지밀직(知密直)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 맹유(孟㽥)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이고, 그다음 맹균(孟畇)은 을축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이 되었으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다음 맹진(孟畛)은 사복시 직장(司僕寺直長)이다.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첨총제(僉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첨서는 6남을 두었는데, 장남 숙야(叔野)는 사재소감(司宰少監)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사수 주부(司水注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부사직(副司直)이고, 그다음 숙묘(叔畝)는 공조 의랑(工曹議郞)이며, 그다음은 숙복(叔福), 숙치(叔畤)이다. 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집의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계주(季疇)이고 둘은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직 한산의 뛰어난 영재 / 維韓之英
훌륭한 가정이 있었으니 / 有翼稼亭
주옥같이 화려한 문사로 / 瓊琚厥辭
중국의 과거에 급제하였고 / 射策帝庭
아 혁혁한 문정공에게 / 於赫文靖
실로 경학을 전수하였네 / 實維傳經
문정은 일찍 태학에 들어가 / 蚤入辟廱
그 명성 크게 전파하고 / 大播其馨
연이어 을과에 급제하여 / 聯中乙科
뒤이어 한림원에 들어가서 / 繼踵玉堂
명성이 더욱 크게 알려지니 / 厥鳴益大
국가의 광영이었네 / 國家之光
그만두고 동으로 돌아와선 / 斂而東歸
온 나라의 사범이 되었는데 / 師範一方
의리는 정하고 치밀하여 / 義理精微
위로 정자(程子) 장자(張子)를 접하였고 / 上接程張
문사는 고상하고 고아하여 / 文辭高古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을 내려보았네 / 下視蘇黃
도가 그 몸에 축적되었기에 / 道積厥躬
처사가 안온하고 자상했으며 / 處事安詳
덕과 연치가 함께 높아서 / 德與齒尊
지위가 조정의 으뜸이었네 / 位冠巖廊
사명 받들고 중국에 가서는 / 奉使專對
천왕에게 예우를 받았고 / 見禮天王
돌아와선 사직을 요청하니 / 歸來乞閑
진퇴를 다 바르게 했도다 / 進退其臧
오직 시기가 어려움이 많고 / 維時多艱
하늘의 뜻 또한 아득하여 / 天意杳茫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니 / 狼尾之疐
나라 사람들 마음 아파했네 / 國人心傷
태산이 마침내 무너지니 / 泰山之頹
길 가는 사람도 눈물 흘렸네 / 行路涕滂
아 선생이여 / 嗚呼先生
훌륭한 덕음을 잊을 수 없네 / 德音不忘
자손들이 모두 계승했으니 / 子孫其承
복록이 길이 다하지 않으리 / 福祿未央
내 명이 아첨한 말 아니니 / 我銘不諛
이로써 먼 후세에 보이리라 / 用示攸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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