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은고자료 ▒

牧隱先生文集序

천하한량 2006. 12. 13. 02:14
牧隱先生文集序

 

  序

 

牧隱先生文集序[權近] 003_500a

 

有天地自然之理。卽有天地自然之文。日月星辰得之以照臨。風雨霜露得之以變化。山河得之以流峙。草木得之以敷榮。鳶魚得之以飛躍。凡萬物之有聲色而盈兩儀者。莫不各有自然之文焉。其在人也。大而禮樂刑政之懿。小而威儀文辭之著。何莫非此理之發現也。物得其偏。而人得其全。然因氣稟之所拘。學問之所造。能保其全而不偏者鮮矣。聖人猶天地也。六籍所載。其理之備。其文之雅。蔑以加矣。秦漢已前。其氣渾然。曹魏以降。光岳氣分。規模蕩盡。文與 理固蓁塞也。唐興。文敎大振。作者繼起。初各以奇偏。僅能自名。逮至李,杜,韓,柳。然後渾涵汪洋。千彙萬狀。有所總華。宋之歐,蘇。亦能奮起。追軼前光。嗚呼盛哉。吾東方牧隱先生。質粹而氣淸。學博而理明。所存妙契於至精。所養能配於至大。故其發而措諸文辭者。優游而有餘。渾厚而無涯。其明昭乎日星。其變驟乎風雨。巋然而崒乎山岳。霈然而浩乎江河。賁若草木之華。動若鳶魚之活。富若萬物各得其自然之妙。與夫禮樂刑政之大。仁義道德之正。亦皆粹然會歸於其極。苟非稟天地之精英。 窮聖賢之蘊奧。騁歐,蘇之軌轍。升韓,柳之室堂。曷能臻於此哉。自吾東方文學以來。未有盛於先生者也。嗚呼至哉。永樂二年秋七月日。門人純忠翊戴佐命功臣正憲大夫參贊議政府事,判刑曹事,寶文閣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世子左賓客吉昌君權近。序。

 

 

목은 선생 문집(牧隱先生文集) 서(序) [권근(權近)]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理]가 있으면 곧 천지자연의 문채[文]가 있는 것이므로, 일월성신(日月星辰)은 그것을 얻어서 사방을 비추고, 풍우상로(風雨霜露)는 그것을 얻어서 변화하며, 산하(山河)는 그것을 얻어서 흐르기도 하고 우뚝 솟기도 하며, 초목(草木)은 그것을 얻어서 꽃을 피우고, 연어(鳶魚)는 그것을 얻어서 날기도 하고 뛰기도 하니, 성색(聲色)을 갖추고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는 모든 만물이 각각 자연의 문채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의 아름다움과 작게는 위의문사(威儀文辭)의 드러남이 어찌 이 이치의 발현(發現) 아닌 것이 있겠는가. 다른 사물들은 그 한쪽만을 얻었고 사람은 그 온전한 것을 얻었다. 그러나 사람 또한 기품(氣稟)의 얽매인 바와 학문(學問)의 성취한 바에 따라서 그 온전함을 보존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자가 드물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천지와 같아 육경(六經)에 실려 있는 구비된 이치와 우아한 문채는 무엇으로도 그 위에 더할 수가 없다.
진한(秦漢) 시대 이전에는 그 기(氣)가 혼연(渾然)하였는데, 조위(曹魏) 시대 이후로는 천지의 기가 분열됨으로써 규모(規模)가 모조리 없어져서 문채와 이치가 진실로 막혀 버렸다. 그러다가 당(唐)나라가 일어나 문교(文敎)를 크게 진흥시킴으로써 작자(作者)들이 계속하여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각기 단편적으로 겨우 자기 나름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그 후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에 이르러서야 그 규모가 광대해져서 천휘 만상(千彙萬狀)이 모두 한데 모이게 되었으며,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또한 분발하여 일어나서 전인의 규모를 따라잡아 앞질렀으니, 아, 성대하도다.
우리 동방(東方)의 목은 선생(牧隱先生)은 자질이 순수하고 기가 맑으며, 학문이 해박하고 이치가 밝아서, 속에 간직한 것은 지정(至精)한 이치에 묘하게 계합(契合)하였고, 배양한 것은 지대(至大)한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능히 짝하였다. 그러므로 그 문사(文辭)에 펼쳐진 것들이 침착하여 여유가 있고 혼후하여 한량이 없다. 그 밝음은 일성(日星)보다 더 빛나고, 그 변화하는 것은 풍우(風雨)보다 더 신속하며, 우뚝이 뛰어나서 산악(山岳)보다 더 높고, 세차게 흘러서 강하(江河)보다 더 광대하며, 화려한 꾸밈은 마치 초목의 꽃과 같고, 동(動)하는 것은 마치 연어의 활발함과 같으며, 풍부함은 마치 만물이 각각 그 자연의 묘(妙)를 얻은 것과 같다. 그리고 예악형정(禮樂刑政)의 거대한 일과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중정(中正)함도 모두 순수하여 그 중정한 법칙에 귀합(歸合)되었으니, 진실로 천지의 정영(精英)을 타고나서 성현(聖賢)의 심오한 도를 다 연구하고 구양수, 소식의 궤철(軌轍)을 달려서 한유, 유종원의 실당(室堂)에 오른 이가 아니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 동방에 문학(文學)이 있어 온 이후로 선생보다 더 훌륭한 분은 없었으니, 아, 지극하도다.
영락(永樂) 2년(1404, 태종4) 가을 7월 일에 문인(門人) 순충익대좌명공신(純忠翊戴佐命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참찬의정부사 판형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 세자좌빈객(參贊議政府事判刑曹事寶文閣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世子左賓客)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은 서(序)하다.


 牧隱先生文集序


  序

 

牧隱先生文集序[李詹] 003_501a

 

文辭。德之見乎外者也。和順之積。英華之發。有不容掩者矣。文辭與政化流通。體制隨世道而升降。音節因風氣而變遷。苟有稟光嶽英靈之氣。洞性命精微之理。達事物無窮之變。則其雄深雅健。要妙精華。可以配元氣而伴造化。何世降風變之足慮哉。韓山牧隱先生。生而穎悟。好學博聞。入中國齒璧雍。所造益深。汪洋高大。捷高科遊翰苑。歸仕本國。歷官四十餘年。位至侍中。冠冕斯文。凡國家辭命制敎銘頌之文。必需公乃成。又以興起斯文爲己任。訓進後學。孜孜無倦。陳說大義。辨析微言。使之煥然氷釋。東方性理之學。繇是乃明。五知貢擧。一時名士。皆 出門下。且累年移疾閑居。容接賓客。雖異端者至。亦不麾之。士大夫墓隧碑碣。讌游餞行。以至浮屠方外之作。有求輒應。下筆如神。初不用意。妙臻其極。兼總條貫。蔚爲大家。有詩若文五十五卷。郁乎富哉。眞所謂配元氣而伴造化者矣。一日。季男司憲執義種善來諗予曰。先君遺稿板刊。垂欲告成。請序卷端。余曰。余。公之客也。辱公之知。學術疏荒。無能報效。況敢冒昧而序其文乎。昔者公之試文於禮部也。大司徒歐陽文公大加稱賞。置之高第。其必有志同氣合者矣。評其文者有曰。意雄而辭贍。如黑雲四興。雷電恍惚。兩雹交下。及其雲散雨止。 長空萬里。一碧如洗。可謂奇偉不凡者矣。假使斯人見公之文。想亦以此評之也。其若義理上接程,張。文辭下視蘇,黃。則浩亭之文盡之矣。浩浩滔滔。如江河注海。則陽村之言蔽之矣。余奚庸贅哉。永樂二年歲在甲申五月重午日。門人正憲大夫知議政府事,判工曹事,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李詹。序。

 

목은 선생 문집(牧隱先生文集) 서(序) [이첨(李詹)]


문사(文辭)는 덕이 밖으로 발현된 것이니, 화순(和順)함이 속에 쌓여 영화(英華)가 겉으로 발현되는 것은 참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문사는 정화(政化)와 더불어 유통하고, 체제(體制)는 세도(世道)에 따라서 오르내리며, 음절(音節)은 풍기(風氣)를 인해서 변천하는 것이니, 진실로 삼광 오악(三光五嶽)의 영령(英靈)의 기를 타고나서 성명(性命)의 정미(精微)한 이치를 환히 깨닫고 사물(事物)의 무궁한 변천을 통달한다면, 그 웅심아건(雄深雅健)함과 요묘(要妙)한 정화(精華)가 원기(元氣)와 짝하여 조화(造化)와 동등해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세상이 내려감에 따라 풍기가 변하는 것을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한산(韓山) 목은 선생은 막 나서부터 총명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 널리 들어 알았으며, 중국(中國)에 들어가서는 태학(太學)의 유생(儒生)이 되어 학문의 조예가 더욱 깊어지고 규모가 높고 광대해져서 고과(高科)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그러다가 본국(本國)에 돌아와 벼슬하여 40여 년 동안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문(斯文)의 으뜸이 되어 국가의 모든 사명(辭命), 제교(制敎), 명송(銘頌) 등의 글은 반드시 공의 손을 빌려서 이루어졌다. 또 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후학(後學)들을 가르치는 데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하되, 대의(大義)를 자세히 설명하고 미언(微言)을 낱낱이 변석(辨析)하여 얼음이 녹듯 의문이 환히 풀리게 하였으니,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이로 말미암아 밝아지게 되었다.
선생은 다섯 번이나 공거(貢擧)를 관장하여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나왔고, 또 수년 동안 병으로 휴직하고 한가히 지내면서 빈객(賓客)을 접대할 적에는 아무리 이단(異端)을 주장하는 사람이 오더라도 물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사대부(士大夫)의 묘도(墓道)에 세우는 비갈(碑碣)이나 잔치를 베풀고 떠나는 이를 송별하는 글로부터 방외(方外)의 부도(浮屠)에 관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요구만 있으면 그냥 받아들여서 붓을 들고 신(神)처럼 줄줄 써 내려가되, 처음부터 마음을 쓰지 않고도 묘하게 그 최선의 경지에 이르고 겸하여 온갖 조리(條理)를 총괄해서 성대히 대가(大家)가 되었다. 시문(詩文) 55권이 있어 성대하고도 풍부하니, 참으로 이른바 원기(元氣)와 짝하여 조화(造化)와 동등하게 된 결과로다.
하루는 선생의 계남(季男)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이종선(李種善)이 와서 나에게 고하기를, “선군(先君)의 유고(遺藁)의 판각(板刻)이 거의 다 이루어졌으니, 권단(卷端)에 서문을 써 주소서.” 하였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쓰는 바이다.
나는 공(公)의 문객(門客)으로 욕되이 공의 알아줌을 입었으나, 학술(學術)이 거칠어서 은혜에 보답도 하지 못하는 터인데, 더구나 감히 함부로 그 문(文)에 서문을 쓸 수 있겠는가. 옛날에 공이 예부(禮部)에서 문장을 시험볼 적에 당시 대사도(大司徒)였던 문공(文公) 구양현(歐陽玄)이 공을 대단히 칭상(稱賞)하고 고제(高第)를 내렸으니, 반드시 의기가 서로 투합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양현의 글을 평하는 이가 말하기를, “뜻이 웅건하고 문사(文辭)가 풍부하여 마치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천둥 번개가 요란한 가운데 비와 누리가 섞여 내리다가,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그침에 미쳐서는 만리의 장공(長空)이 씻은 듯이 푸른빛 일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뛰어나서 범상치 않은 문장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으니, 만약 이 사람이 공의 글을 보았더라도 아마 또한 이런 말로 평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리(義理)는 위로 정자(程子)ㆍ장자(張子)에 연접하고, 문사는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을 내려다보았던 데에 대해서는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그의 글에서 남김없이 말하였고, 호호(浩浩)하고 도도(滔滔)하여 마치 강하(江河)가 바다로 쏟아져 흐르는 것과 같은 문장의 기상에 대해서는 양촌(陽村)의 말에 총괄되었으니, 내가 어찌 거기에 덧붙일 것이 있겠는가.
영락(永樂) 2년 갑신 5월 중오일(重午日)에 문인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知議政府事判工曹事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 이첨(李詹)은 서하다.


'▒ 목은고자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0) 2006.12.13
牧隱先生年譜  (0) 2006.12.13
牧隱稿Ⅲ(목차)  (0) 2006.12.11
牧隱稿Ⅱ(목차)  (0) 2006.12.11
牧隱稿Ⅰ(목차)  (0) 2006.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