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자료 ▒

스페인, 그 힘겨운 첫발을 내딛다

천하한량 2007. 8. 7. 20:23
CBS 특집 '과거사 청산, 가야할 머나먼 길’

- '스페인, 그 힘겨운 첫발을 내딛다.'(2005.12.15) -


 ......공화파 포로와 지지자들을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공화파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에 의해서 처형당했지요.

  내 아들이나 손자들에게 그 당시의 얘기를 하면 “아버지 할아버지, 이제 지겨워요.”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왜 맨날 그 얘기만 하려고 하세요? 그 얘기는 이제 다 지나간 일인데 더 해서 뭐하냐고요? 그걸 이제 그만 잊어버리세요.” 라고 말이죠.


  올해 82살의 노인, 안토니오 페르난데스, 그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왜 이처럼 오래된 1936년 여름의 악몽 같았던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일까?

  70년 전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는 세계곳곳의 식민지를 둔 제국에서 이제는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스페인, 눈부신 정치와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군부독재정권의 상처와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아직도 그 아픈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과연 1936년 스페인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현장을 찾아가는 CBS특별기획 '과거사 청산, 가야할 머나먼 길’ 오늘은 제2부 ‘스페인, 그 힘겨운 첫 발을 내딛다.’ 편을 보내 드립니다.


  정오뉴스입니다.

  정부종합청사 옆 산쿠안드라 쿠르즈 광장에 있던 프랑코총통 기마상이 오늘 새벽 2시 40분 경 전격 철거 됐습니다.

  정부가 동상철거를 심야시간에 하게 된 이유는 야당의 반대와 혹시 있을지 모를 프랑코 지지자들과의 물리적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관련 프랑코를 지지하는 야당 인민당 소속 알베르토 갈바르든 마드레쉐장은 정부가 시청으로부터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철거를 했다며 불쾌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지난 3월 17일 라디오방송 ‘고뻬’를 비롯해서 언론들은 마드리드 종합청사 앞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기마상이 사후 30년 만에 철거됐다고 보도했다.

  2003년 출범한 사회당 사파테로정부가 전국곳곳에 남아 있던 프랑코 동상을 철거하고 프랑코 시대를 기리기 위한 각종 기념물을 없애는 작업을 진행해오던 터였다. 이 날 언론들은 프랑코 기마상 철거작업이 시작되자 프랑코 지지자와 반대파들이 몰려들어 서로 야유와 환호를 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마드리드뿐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프랑코 독재의 흔적을 지우는 문제를 놓고서 찬반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저는 프랑코총통 기마상 철거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내 나이가 올해 67살인데 프랑코 독재가 한창일 때 젊은 시절을 보냈지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프랑코의 동상을 철거하고 독재자의 흔적을 없애는 일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프랑코가 과거에 나쁜 일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현대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인데 그 동상이나 유물을 없애기 보다는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주장과는 다르게 젊은이들은 동상철거에 찬성하는 의견이 다수다. 

  다니엘 마리아의 얘기다.


 전 아주 정당한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프랑코 시대는 스페인의 역사에서 굉장히 어두운 시대였는데 그런 어두운 시대를 나타내는 유적들이 그대로 여기에 남아있다는 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독일에 있었던 ‘히틀러’의 동상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시트의 흔적이었던 ‘무솔리니’의 동상이 철거된 것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독재의 흔적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코 시대의 흔적은 프랑코 기마상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코 시대의 많은 거리와 공원, 건물, 광장에는 프랑코와 그의 측근들을 기리기 위한 이름이 붙여졌다. 심지어는 카톨릭이 국교인 스페인의 여느 교회 정문에서조차도 조국과 하나님을 위해 순교했다는 그들의 이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쿠데타 시작일을 기념한 7월 18일 거리를 비롯해서 승리의 광장, 총통의 거리, 승리의 문 등은 현 정부의 개명 작업이 시작된 몇 년 전까지도 그대로 사용됐다.


  지금 저희가 와 있는 이 빠스오델라까시에나 거리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번화가이고 신시가지의 중심거리인데요.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존재했었던 프랑코의 잔재로 남아있던 많은 거리들은 없어졌지만 이 거리도 역시 프랑코 독재의 한 흔적으로 남아있어서 예전에는 총통의 거리라고 불렀었던 거리인데 지금은 원래 이름이었던 빠스오델라 까시에나라는 이름으로 복구가 되어 있는 거리입니다.

  아직까지도 프랑코시대 때 삶을 살았던 스페인의 젊은이들도 기억을 하고 있는 그런 거리입니다.


  여행객들에게 관광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전몰자의 계곡,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심지어는 프랑코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이 전몰자 계곡을 과거청산의 상징인 평화공원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250㎞ 가량 떨어진 살마만카 시에서 농사를 짓는 마누엘곤잘레스의 얘기다.  


  저도 사회주의자들 중 전몰자의 계곡의 이름을 바꾸거나 아니면 아예 없애버리자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어요. 스페인 곳곳에서 프랑코 기마상을 없애고 거리 이름도 바꾸고 있는데 제가 살고 있는 이곳 살라만카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살라만카 광장에 프랑코 기마상이 여러 개가 있었죠.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이나 프랑코 반대파들은 프랑코 기마상에 오물을 던지거나 페인트로 그에 대한 욕설을 써놓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마을사람들이 깨끗이 씻어냈죠.


  프랑코가 죽은 지 30년이 되던 날이었던 지난 달 20일, 그의 묘역인 전몰자의 계곡에는  6,000여 명의 총인파가 몰려들었다. 마드리스 시내에서는 일부 지지자들이 철거된 프랑코기마상 복원을 요구하는 집회를 갖기도 했다.

  아직도 스페인 사회에는 프랑코 지지자들이 남아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프랑코는 참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농부로 이곳 살라만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요. 살라만카는 예로부터 물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코가 운하를 만들어서 북쪽으로부터 물을 끌어왔어요. 당연히 물문제가 한번에 해결됐죠. 프랑코 때문에 지금 우리가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치수사업을 잘한 프랑코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살라만카의 운하건설이나 전몰자의 계곡, 대규모 건설사업의 이면에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수많은 공화파 포로들의 희생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스페인 현대사는 우리처럼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다. 스페인 현대사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프란시스 프랑코’

  1963년 프랑코는 민주적으로 수립된 공화파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내전을 불러온다. 같은 민족인 공화파와 왕당파 간에 서로 총부리를 겨눈 내전의 피해는 엄청났다. 전사자 30만 명, 테러희생자 10만 명, 질병과 영양실조 사망자 60만 명, 당시 스페인 인구가 2천만 명이었던 점을 떠올려 본다면 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내전은 그야말로엄청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롤라로드리게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전의 피해자였다고 말한다. 


 간접적으로라도 스페인내전의 피해자가 한 명도 없는 가족은 아마 스페인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스페인에서 친인척 중에 누구든 적어도 한 사람은 전쟁을 치르면서 목숨을 잃거나 민간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죄도 없이 무고하게 처형됐다고 할 수 있죠.

  다시 말하면 스페인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스페인 내전의 피해자이자 그 당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70년 전의 내전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공무원 앙헬가르디오의 말이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께서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요. 바로 우리 할아버지께서 참전하셨기 때문이죠. 책에서도 많이 봤지만 스페인 내전은 우리 스페인의 같은 형제들끼리의 싸움이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내전은 우리 할아버지 대에 일어났던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형제들의 싸움이었기에 굉장히 가슴 아팠던 과거 역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깊은 마음의 상처로 남은 탓이었을까? 페르난데스에게는 70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내전이 한창일 때 우리 마을에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아주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우리 마을은 공화파 지지자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특히 피해가 컸습니다.

  바이아돌릿 인근지지역에 사는 500명 가량의 사람들 가운데 무려 80% 이상이 무참하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왕당파들은 시신도 수습하지 않은 채 그냥 들판에 버려뒀죠.

  우리 마을에 안토니오낀따라 시장이 처형 당했을 때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마을 주민들은 옆집의 문을 몰래 두들기면서 “프랑코파들이 시장님을 죽였다.”하고 말을 전하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스페인 현대사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쟁의 종지부는 찍었지만 이후 36년 동안 프랑코는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철권통치를 휘두른다. 공화파 인사들에 대해서 탄압과 보복을 가했음을 물론이다.

  마드리드대에서 현대사를 가르치는 후안파블로 아스프로와 교수의 말이다.


 내란이 끝난 후로도 프랑코의 독재정의 초창기인 1945년까지 공화파를 비롯한 반대파들에 대해서 극심한 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대략적으로 그 당시 3만여 명 정도가 공개적으로 처형됐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투옥 돼 고문을 당하거나 혹은 유배돼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만명의 공화파와 관료와 시민들이 독재정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로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975년 프랑코의 죽음은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분수령이 된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내전기와 프랑코 독재정 기간 중에 있었던 각종 만행에 대한 진상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국민적인 화해만을 얘기할 뿐이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프랑코가 죽자 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던 현 까를로스 국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프랑코의 죽음이 프랑코체제의 붕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곧 스페인 사회가 극진적이 아닌 점진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독재체제를 청산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다. 거기에는 또한 급진적인 방식의 과거청산이 자칫 또 다른 갈등요인으로 작용할 것을 두려워한 국민정서도 깔려있었다.

  과거의 아픈 상처는 그대로 엎어둔 채 정치,경제 발전을 추구하기로 국민적 합의가 모아진 것이다. 바로 1977년에 맺어진 이른바 망각협정으로 불리우는 정치사회적 제휴의 결과였다. 


  그러니까 프랑코가 죽은 직후인 1975년부터 82년 사이에 내전에서 죽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법이 통과됐고요. 역시 공화파로 독재정 시대에 추방당했던 사람들 가운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사회적 위치를 보장해 주는 사회보상법도 마련됐습니다. 그리고 내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공화파를 지지했던 민간인 피해들에 대해서도 사회경제적 보상을 보장 해 주는 그런 법령들까지도 통과됐습니다.

  

  아스프로와 교수는 왕당파 뿐만이 아니라 패자인 공화파 가족들에 대해서도 피해보상이 이루어졌던 점이 정치사회적 제휴라는 사회적 합의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었을까?

  프랑코 사후 그에 반대하는 단체나 희생자 단체 같은 것이 생겨났을 법도 하지만 하나도 출범하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정 당시 탄압을 받았던 공화파를 위한 보상위원회나 또 그 보상을 받기 위한 공식적인 행사나 활동이 없었다는 얘기다.

  엘문도 신문, 빅토리아 프레고 편집국장의 말이다.

 

  스페인내전과 프랑코 독재정 이후 희생자 가족이나 그들을 위한 협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봐야했던 스페인 사람들로서는 또 다른 갈등과 대립이 되풀이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죠. 단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해보자는 취지의 단체정도가 있던 걸로 압니다.

  예컨대 스페인내전의 분수령이 됐던 똘레도예 알카사르 전투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협회나 스페인내전 당시의 기억을 회복하자는 협회 등 과거를 다시 한번 더 기억하자는 취지의 추모단체들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여건 속에서 스페인은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모범적인 나라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 사회당 사파테르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과거사 청산은 일절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들의 집단적인 망각 속에 존재할 따름이었다.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본격 출범합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수석부총리인 마리아 테레사를 위원장으로 행정부와 의회, 학계 전문가 등 모두 12명으로 이뤄집니다.

  위원회는 민주주의를 지켜려다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위원회는 앞으로 스페인내란 전쟁과 프랑코 총통 집권 당시 불명예스럽게 숨졌던 수많은 희생자들의 실상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암매장된 유골의 신원과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조사활동을 주관하게 되며 결론적으로는 피해자들에 대해서 도덕적, 사법적으로 복원시키기 위한 종합보고서를 내놓게 됩니다.


  지난해 9월 10일 스페인의 언론들은 범정부차원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과거사청산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덮어두기로 했던 스페인이 3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프랑코동상 철거나 집단 암매장 유해발굴에 나서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진상조사위원회 출범은 2002년 11월, 스페인 의회가 프랑코를 독재자로 규정하고 내전과 그 이후 프랑코 정부가 집단학살해 암매장한 행방불명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예를 갖춰 다시 안장하는 것을 지원한다는 결정의 후속조처이기도 했다.

  위원회가 출범하게 된 배경에는 2004년 총선 직후 사회당 정부의 연립정권 구성도 크게작용했다. 엘문도 신문 프레고 편집국장의 말이다. 


 현재 스페인의 집권당인 사회당은 절대다수의 의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 소수당들과 연합정권을 만들어야 했지요. 연합정권의 파트너가 바로 ‘이알씨’ 그러니까 까딸로니아 바로셀로나 지역의 공화당이었습니다.

  사회당이 이들과 연합정권을 꾸리기 위해서는 이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줘야 했습니다. 바로 이들은 과거사청산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구성을 내걸었죠.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전년도의 과거사진상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치사회적 제휴가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서 출범한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활동에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집권당인 사회당 패드로 유니오스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진상조사위 활동은 이 사회적 합의를 깨지 않고 그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게 됩니다. 당시 행위의 정당성이나 어떤 잘잘못을 가리고 그에 따라 책임을 묻거나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데요.

  따라서 진상조사위원회 출범은 당시 스페인에서 공화정이란 새로운 정치이념을 주장하다 프랑코 정권에 의해 처형되거나 집단 암매장된 사람들의 신원을 복원시켜 주는데 첫 번째 의의가 있고요. 그 다음으로는 당시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감수해야만 했던 고통과 불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


  스페인의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이처럼 책임자 처벌보다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사를 들춰내다 보면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문제점들이 더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엘문도 신문사 프레고 편집국장은 진상조사위 출범 이후 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랑코 시대에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 가운데는 공화파 뿐만이 아니라 프랑코를 지지했던 왕당파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한 쪽만이 당한 게 아니라 프랑코를 지지했던 쪽이나 반대했던 양쪽 모두에게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거죠.

  따라서 진상조사위원회가 사회당 정부 하에서 출범하긴 했지만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 모두의 고통과 희생을 조사하는 위원회가 될 것입니다.“”


  마드리드공항 인근에 자리한 빠라꾸에요 묘역, 큰 십자가가 세워진 야트막한 구름 아래로 많은 묘비가 세워져있다. 얼핏 봐서는 여느 공동묘지와 다를 것이 없다. 인근 마을들 주민들 중에서도 빠라꾸에요가 어떤 묘역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빠라꾸에요 묘역은 어떻게 생겨나게 됐을까?

  빠라꾸에요 희생자 가족협회 조사위원 호세마누엘 에스펠레타의 말이다. 



  이 묘역이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6년 11월 7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공화파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피난을 가기에 앞서 공화파들은 다섯 군데에 마드리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공화파에 반대하는 수감자들을 재판도 없이 그냥 처형해 버립니다. 교도소에서 처형한 수백여구의 시신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서 이 묘역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화정에 반대했던 카톨릭 신부들 상당히 많이 처형돼서 이곳에 묻혔죠.

  그러니까 이곳은 전쟁참전자들의 묘역이 아니라 공화파에 반대했던 민간인들이나 카톨릭 사제들이 학살을 당해 묻힌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 빠라꾸에요 묘역은 스페인내전 중에 공화파 못지않게 많은 왕당파들, 프랑코 지지자들도 희생됐음을 확인해 주는 곳이다. 


  1936년 말에 대학살이 일어났고 그 시신들을 매장을 했는데요. 지금 빠라꾸에요에 묻혀있는 유해는 대략 5천 명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 소나무 밑에 묻혀 있는 7번 묘역 같은 경우는 학살당해 옮겨진 시신위에다 시신을 또 쌓아놓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묻혀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빠라꾸에요 묘역에는 대략 7천에서 8천명의 시신이 묻혀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빠라꾸에요 희생자 가족협회’, 모임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 등 가족들이 빠라꾸에요 묘역에 안장된 내전의 피해자들이다. 스페인내전의 희생자 후손들이 모여 단체를 꾸리고 오늘날까지 묘역을 관리하는 이유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빠라꾸에요 희생자 가족협회 앙헬가스꼬네스 회장이다.  


  희생자가족협회가 하는 일 가운데는 우선 매달 첫 번째 주일 날 12시에 미사를 드리는 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매년 11월 7일이 되면 대주교님까지 참석한 가운데 모든 희생자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추모회를 갖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안장이 확인된 5천여 명에 대해서는 사망 당시의 상황이나 행적을 적어 문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이 자리를 근거로 여기에 묻혀 있는 사람의 가족이 나타나거나 확인이 되면 그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70년 전에 숨진 조상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매달 모여 미사를 드리고 추모회를 갖고 있는 빠라꾸에요 희생자 가족협회, 정부로부터 어떤 보조금도 받지 않고 회원들의 회비로 협회를 꾸려나가는 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가스꼬네스 회장의 말을 들어보자. 


  협회는 정부차원에서의 어떤 보조금도 받지 않고 천여 명 정도 되는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회원들의 가장 큰 바람이랄까요, 희망은 여기에 잠들어 있는 영혼들이 안식하고 우리들이 그들에 대한 기억을 계속해서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회원들은 여기가 성역화 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사회적인 운동으로 승화한다거나 보상을 받는다거나 정치적으로 이슈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그렇다. 그들은 내전 중에 숨진 영혼 하나 하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고 또한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는 일도 전혀 원치 않았다. 단지 70년 전의 그들이 어떻게 숨져서 이곳에 묻혔는지를 기억하고 그 영혼들이 편안히 잠들기를 기도하고 기억하려 할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빠라꾸에요 묘역 안 성당에 있는 그림을 설명하는 까스꼬네스 회장은 ‘용서’와 ‘기억’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이 성당 안에 걸려 있는 그림 가운데 주목해 볼 그림은 바로 이 ‘빠라꾸에요의 학살’이란 작품인데요. 공화파와 왕당파 간의 충돌로 양측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나온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 회원들의 가장 큰 염원을 나타내는 표어가 바로 이 그림 밑에 적혀 있는데요.

  ‘스페인 사람들이여 이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용서하자. 그러나 결코 잊지는 말자’ 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는 바로 우리 회원들과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음속으로 드리는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일들을 모두 용서하되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자는 거예요.


  지난해 6월 24일 마드리드 시내 리바시바시아 지역에 한 야외공연장 대규모 행사 하나가 오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만여 명의 시민들과 회원들이 함께한 가운데 열린 이 행사는 ‘역사기억복원협회’

  과거역사를 기억하고 복원하자는 협회가 마련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이름을’ 이라는 슬로건 아래 이름을 내세울 수도 없이 불명예스럽게 죽어간 이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단체다. 이날 행사는 과거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마드리드 협회가 마련한 것이다.


 과거 스페인 역사에서 새로운 정치시스템이었던 공화정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내전으로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희생자들은 여태까지 그들의 죽음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불명예스럽게 남아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유골도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여러분! 그들은 다름 아닌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의 할아버지요, 아버지들입니다. 당시에 억울하고 불명예스럽게 숨진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는 일에 여러분들이 산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 함께 참여합시다.


  역사기억복원협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단체로 2002년부터 전국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치사회적 제휴를 이유로 과거사청산을 외면해 온 정부보다 한 발 앞서 나간 셈이다.

  최근 몇 년 발렌시아, 세고비아, 살라만카, 바이아돌릿 등 전국적으로 30여개의 단체들이 만들어져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250㎞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이아돌릿, 인구 20만명의 조그만 교역도시 바이아돌릿에 있는 과거기억복원협회를 찾아가 봤다.

  바이아돌릿 과거기억복원협회가 생긴 것은 2002년 10월쯤, 바이아돌릿 지역의 내전 당시의 실종자들에 대한 신원확인과 불법암매장된 시신들을 발굴해 재안장해 주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을 정리해 문서화하는 작업을 주로하고 있다.

  회원들은 현재 250여 명으로 매년 30유로의 회비를 부담한다. 사무실은 바이아돌릿대학교 안에 있다. 이들의 취지를 알아준 바이아돌릿대학교 측이 사무실 공간을 영구임대해 준 것이다.


  매주 목요일 회원들이 사무실에 모입니다.

  한주 동안 진행했던 주요업무들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거나 토론을 벌이기도 하죠. 발굴작업을 진행하게 될 때 생겨나는 출장비를 비롯한 재정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 받게됩니다.

  더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는 희생자 가족들이 발굴을 의뢰한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신청자가 어떤 증언을 했는지 서로 정보를 주고 받죠. 자기 가족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회원들은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바이아돌릿대학교 교수이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꼬로시아 라나스파 역시 내전 중에  삼촌 두 명을 잃은 피해자다.

  그녀는 바이아돌릿협회가 민원접수팀을 비롯해서 증언을 맡는 인터뷰팀, 유골발굴을 맡는 고고학발굴팀, 문서화하는 작업을 맡는 팀 등 모두 6개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 준다.

  ...바이아돌릿협회 리카르도 브라도 회장의 얘기다.  


  바이아돌릿은 내란 당시 공화파정권이 들어서 있어서 쿠데타군, 그러니까 왕당파들에 의한 피해자 가장 컸던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정말 많은 반인륜적인 학살이 일어났죠.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그 피해 상에 대한 증언을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문서화 하는 일이죠.

  물론 집단암매장관련 조사요청이 들어오면 발굴조사를 요청한 희생자 가족들 중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는 분들과의 인터뷰가 먼저 이뤄집니다.

  누가 왜 부당하게 처형당했는지, 어디에 암매장된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한 증언을 들은 다음에는 고고학 발굴팀이 사전현장 조사를 벌이고 바로 발굴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비참한 시대를 살아온 얘기들을 이제서야 하기 시작했다.

  바이아돌릿협회 홈페이지에 적힌 글귀다.

  ‘아무리 오래 전 얘기라고 하지만 어찌 가슴 아픈 사연이 남아있지 않을까?’

  라나스파는 유골발굴작업에 들어갈 때마다 그런 사연을 접하게 된다고 말해 준다.


 얼마 전 저희 협회에서 바이아돌릿 인근 올리바레스라는 마을에서 유골발굴 작업을 벌였는데요. 모두 여섯 골의 유골이 발견 됐습니다. 유골에는 총알이 여러 개씩 박혀 있어서 이들이 당시에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당했는지 알 수 있었죠.

  유골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발견됐어요. 형제였던 두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죽었던 거죠.

  유골들은 모두 그대로 다시 마을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70년 만에 제대로 안식할 수 있게 된 거죠.

  

  바이아돌릿협회는 시민단체 성격을 띄고 있어서 정부로부터 어떤 재정적인 지원도 받고 있지 않다. 발굴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어 보였다.

  브라도 회장은 경제적인 문제 못지않게 정부와의 협조와 행정적인 지원이 아쉽다고 말한다.


 프랑코 총통 사후 과도기에 제정된 사회정치적 제휴라는 법령이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페인 내전 중에 일어났던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지방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문서들을 보고 싶어도 열람해 볼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문서화 작업을 제대로 하려면 지금 현재 지방정부 등에 보관 되어 있는 문서들을 참조해야 될 부분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게 바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유골발굴 작업을 할 때 필요한 많은 기계와 장비, 기구들이 필요한데요. 이들을 구입하는데 들어가는 재원마련도 관건 중의 하나입니다.

 

  아쉬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역사기억복원협회가 공식적인 기관이 아니다보니 협회가 조사하고 문서화한 자료들이 공식적으로 인증 받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라나스파는 바이아돌릿협회가 들춰내서 밝혀진 진실들을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웠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우리 단체가 하는 활동이나 우리가 만든 문서들이 정부당국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내전 당시 일어났던 여러 진실들이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에서 실렸으면 해요. 그래서 학생들이 과거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진실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희생자가족들에 대한 보상문제입니다. 몇 년 전 희생자 가족들에게 1900유로 정도의 일시적인 보상금만이 주어졌을 뿐인데요. 우리가 만든 문서들이 역시 나중에 이런 경제적인 보상을 하는데 중요한 근거자료로 쓰였으면 합니다.


  바이아돌릿에서 보여지듯 정부보다 한발 앞서 시작된 민간차원의 과거사정리와 재평가 작업은 조용하면서도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민간영역 차원에서의 과거사진상규명노력과는 다르게 스페인정부 차원의 과거사진상 활동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진상조사위원회가 그 동안의 활동을 종합한 보고서를 내년 초쯤 내놓을 예정이지만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단지 보고서에 그치지 않고 법령화 되어야 하지만 당장 야당의 반대에 부딪칠 공산이 크다. 그러다보니 진상조사위원회 활동과 관련해서는 우선 당장 야당을 설득해 이를 법령화하는 일이 첫 번째 관건이다.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호세알바레스 훈꼬 위원의 말이다. 


  진상조사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가 정치권의 합의를 거쳐 법례화가 되어야 하는데요. 정치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과거사를 다루는데 있어 당사자의 문제를 균형 있게 다루려고 하지만 승자라고 할 수 있는 왕당파보다는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공화파의 문제를 더 많이 보고서에 담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과거사청산에 반대해 온 야당인 국민당의 문제제기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현재 정치상황을 봤을 때 여당이 야당에 협조요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법령화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진상조사위원회출범과 과거사청산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단 야당만이 아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스페인사회에는 아직도 프랑코 시대를 잊지 못하는 프랑코 지지자들이적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코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의 업적을 정리하고 있는 프랑코 재단도 그 중 하나다.

  펠릭스, 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프랑코 총통이 숨진 이후 1982년 사회당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8년간의 과도기적인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모든 국민이 동의한 가운데 ‘정치사회적 제휴’라는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법령은 유효합니다.

  그 법령은 내란전쟁과 프랑코총통 집권당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서로 용서하고 잘잘못을 가리지 않기로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데 당시에 죽거나 추방당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반대로 프랑코를 지지했던 것 때문에 숨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보상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야말로 과거에 대해서 더 이상 서로 묻지 않고 용서하기로 한 정치사회적인 대제휴였던 셈이죠.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과거사청산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법령위반이예요.


  스페인 과거사청산의 방향이 불명예스럽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과 명예회복을 해 주는데 맞춰져 있기에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70년 전의 과거사를 들춰낸다는 것은 또 다른 국민적인 혼란과 갈등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지침이자 교훈을 만들어가기에 앞서 자칫 잘못하면 오늘 당장 국민이나 분열이 갈등 속으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상조사위원회 훈꼬 위원은 염려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렇습니다. 보고서는 자칫 좋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겠죠. 예컨대 어떤 사람이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해 과거에 나의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누구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고 해봅시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던 이 두 사람 사이에 혹시 전에 없던 충돌이나 갈등을 불러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겠죠. 이렇게 되면 부작용만 불러 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과거사청산을 바라보는 스페인이란 나라의 국민적 공감대는 우선 내전이나 프랑코총통 시대 때와 같은 독재정이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요컨대 과거사조사가 또 다른 갈등이나 혼란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거죠.


  진상조사위원회 훈꼬위원은 오히려 과거사청산과 진실규명을 가로막는 두 번째 관건으로 국민적인 두려움을 꼽았다


 진상조사위원회가 활동을 해나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난관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려움 중에서 우선 꼽을 수 있는 게 국민적인 두려움인데요. 국민적 두려움이라는 건 뭐냐하면 예를 들어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부당하게 처형당한 분들도 많겠지만 반대로 같은 동포요, 형제를 무고하게 죽인 후손들도 있을 거라는 거죠.

  이들은 당연히 부당한 행위를 했던 자신의 할아버지의 과거사가 밝혀지는 것을 꺼려할 수밖에 없겠죠. 과거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 나가는데 이들은 비협조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이것이 바로 과거 청산의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하나의 기술위원회로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활동의 최종목표다. 그 보고서를 토대로 관련입법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실질적인 과거사청산작업이 시작되는 것이기에 보고서 내용에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담겨지게 될지 훈꼬 위원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보고서는 1936년 스페인내전부터 현재까지 있어 왔던 과거의 잘못된 행위나 부당한 평가에 대해서 재평가하고 이를 바로잡아 공식 문서화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부당하게 처벌 받았던 사람들의 신원과 명예를 회복시켜준 이후 그들을 추모할 수 있는 기념사업을 벌이는 일입니다.

  세 번째로는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을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를 담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조사된 자료들과 공식화된 문서를 한데 모아 공식기념재단이나 혹은 기념연구소를 만들어서 과거의 기록들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은 그동안 왜곡됐던 과거역사를 바로잡아 미래의 스페인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보다 정확하게 알게 하는데 있다.

  물론 과거사청산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적지 않은 문제들이 예상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들 또한 적지 않다.

  훈꼬 위원의 말이다.


 진상조사위원회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선 법적인 문제죠. 프랑코시대의 희생자들은 당시에 처벌을 받으면서 원래 가지고 있었던 공직이나 재산 같은 것들을 모두 압류 당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복원시켜주느냐의  법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희생자들의 후손들에 대한 보상문제인데요. 그 할아버지가 받았어야 했을 연금이나 몰수된 재산의 경우 지금에 와서 누구에게 어떻게 보상해 주느냐의 문제가 생긴 거죠.

  그 다음으로는 수없이 묻혀있는 유골들의 복원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장소에 유골이 묻혀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는데 만약 거기에 어떤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면 그 건물을 무너뜨리고 유골을 수습해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둬야 할지 등 결정하기 쉽지 않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


  우선 이번 결정으로 그간 묻혀 있던 과거사의 진상이 하나 둘씩 밝혀지면 자연히 불법행위의 책임자들 또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아직 생존해 있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의 반발도 예상된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그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 역시 난제 중에 하나다. 스페인 과거사 문제를 주제로 글쓰기를 해  온 영국인 작가 이안 깁슨의 말이다.   


  사실 50년이나 70년 전의 얘기를 제대로 말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금 하루라도 빨리 좀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서 과거역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더 늦춰진다면 그때는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원래 지난 6월까지가 활동시한이었지만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정확하게 언제까지 활동을 계속할 것인지 아직 그 일정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다. 일을 추진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과 진통을 겪고서 이제 막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출범시킨 우리가 스페인의 과거사청산과정에서 주목해 봐야 할 점은 뭘까?

  마드리드대 후안파블로 아스프로와 교수의 말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개인의 과거사청산과 관련해서는 스페인 공화파를 창시했던 세누얼마누엘 아사니아의 지적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스페인 공화파를 이끌었던 아사니아는 내란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내란의 해법을 제시했어요. 그가 제시한 해법은 세 단어로 말할 수가 있는데. 바로 평화, 유감 그리고 용서입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대립과 갈등을 가져오지 않을 평화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밝히는 유감 그리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용서가 관건이라고 봤던 거죠.

  70년 전에 공화파를 만들었던 아사니아의 제안이 바로 스페인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의 결론이 돼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다시 명예롭게 하고 법적인 책임을 묻기보다는 과거를 용서하되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

  이제 스페인은 불행했던 과거사를 극복하고 망각 속에 화해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국민적 화해를 이루려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에 커다란 첫걸음을 이제 막 힘겹게 내딛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아 보인다. 뒤늦게서야 그 힘겨운 첫걸음을 내딛은 스페인의 과거사청산이 앞으로 어떤 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 극우 국가주의편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이탈리아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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