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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 of which I'm certain
I've lived a life that's full I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Regrets,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 without exemption.
I planned each charted course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But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Yes, there were times,
- I'm sure you knew
When I bit off
- more than I could chew
But through it all
- when there was doubt
I ate it up and spit it out.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I've had my fill,
- my share of losing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 not in a shy way
Oh, no, oh, no not me I did it my way
For what is a man,
-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aught. To say the things
-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 of one who kneels
The record shows
-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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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s,
- it was m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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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와
인생의 마지막 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나의 벗이여, 이제 사심없이
- 내가 자신있게 살아온
- 나의 인생을 밝히고 싶군요.
- 난 나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왔고
-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을 겪어왔습니다.
-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난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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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의 후회도 없지는 않아요
- 그러나 다시금 되새길 만한 후회는 없었지요
-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했고
힘들었던 고난의 일들을
- 아무런 편법도 쓰지 않고 다 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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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모든 인생의 길을 계획했고
- 그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걸어왔습니다.
-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난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거지요.
그래요, 친구도 알고 있으리라 확신하지만
- 난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에도
- 터무니 없이 대들기도 했었던
-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겪어오면서도
- 행여 의심스러웠을 때는
그 모든걸 다 먹었다가도 뱉어내버렸죠 난 모든 것에 맞서서 자신있게 견뎌냈어요
- 그래요 난 내 방식대로 살아온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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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사랑도 했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 소유하는 만족감도 얻었고,
- 잃어 버리는 좌절감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눈물을 거두고 나니
- 그 모든 것이 우스웠다는걸 알 게 됩니다.
- 내가 해온 그 모든 일들을 생각해보면
-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 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아녜요, 난 부끄럽게 살지 않았어요
- 난 내 방식대로 살아온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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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란 무엇을 위해 사는가
- 남자란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
-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는거지요
-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 얘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무릎을 꿇고 말하는 그런
- 비굴한 자들의 말이어서는 안되는거지요
- 지난 세월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 내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이죠
- 난 내 방식대로 살아온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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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요,
- 그것이 바로 내가 걸어온 인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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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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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y W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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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랭크 시나트라의 걸작으로 너무도 유명한 발라드지만, 원곡은 샹송 <Comme D'Habitude>(평상처럼)라는 타이틀로, 1967년에 가수 클로드 프랑소와(Claude Francois)가 질 티보와 함께 작사하고, 자크 루보(J. Revaux)와 함께 작곡했다. 영어 가사는 풀 앙카의 작품으로, 68년 말경 앵카는 존경하는 시나트라를 위해 가사를 써서 <My Way>라고 했다. 일설에 의하면, 시나트라가 은퇴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사했다고도 일컬어지는데, 출판은 1969년이다. 시나트라의 레코드는 같은 해 3월부터 히트하여, 빌보드에서 8위까지 상승하고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앵카는 이 곡으로 20만 달러가 넘는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원작자 클로드 프랑소와는 1978년 3월 11일 파리의 자택에서 전구를 바꿔 끼우려다가 감전하여 39세로 타계했다. 단연 프랭크 시나트라가 훌륭하다. 힘찬 확신에 찬 그의 노래에는 인생과 맞붙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온 남자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깊은 맛이 있어서, 정녕 듣는 이를 감동시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그 밖에 엘비스 프레슬리, 글렌 캠블, 톰 존스, 아니타 카 싱어즈, 폴 앙카, 셜리 베시 등의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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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ank Sinatra :::::
1997년 82세인 프랭크 시나트라는 '전후(戰後)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팝 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프랭크는 지난 95년 80세를 기념하는 라이브 앨범 「Sinatra 80th·Live In Concert」와 히트곡집 「Sinatra 80th·All The Best」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84년 11월의 공연을 담은 전자의 앨범에는 보너스 트랙으로, 프랭크의 대표 히트곡중 하나인 가 빅 테너 루치아노 파파로티와 듀엣으로 수록되어 이채를 띠기도 했다. '노래하고 연기하는 신사' 프랭크는 1940∼60년대의 전성기에 걸쳐 수많은 곡을 히트시킨 최고의 싱어이자, 여러 영화에도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로 대표되는 스탠더드 팝 싱어로만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재즈의 새로운 붐이 조성된 1990년대 중반부터는 으로 대표되는 재즈 싱어로 새로운 인기를 얻고 있다.
- 프랭크의 가계(家係)는 빙 크로스비, 냇 '킹' 콜, 팻 분의 가계처럼 유명한 연예인 집안이다. 딸 낸시 시나트라와 아들 프랭크 시나트라 Jr.도 싱어이자 배우다. 프랭크는 또한 여배우 에바 가드너(1951∼57년까지), 미아 패로우 (1966∼68년까지)와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뉴 저지 호보켄에서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난(1915.12.12일, 본명: Francis Albert Sinatra) 프랭크는 역시 전설적인 싱어이자 배우인 빙 크로스비(1903∼1977)의 노래를 좋아하며 싱어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보켄 지방 밴드 포어의 멤버를 거쳐 뉴 저지의 주점 루스틱 캐빈의 급사장겸 사회자이자 싱어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첫 부인 낸시 바바라와 결혼한(1939.2.4일) 해 6월에는 해리 제임스 밴드의 창단 멤버이자 싱어가 되었다. 그리고 7월에 와 같은 곡을 발표했다. 1940년 1월에는 토미 돌시 밴드의 싱어로 스카웃되며 더욱 줏가를 높혔다. 그해 6월 8일에는 프랭크처럼 싱어이자 배우가 되는 딸 낸시 시나트라가 태어났다. 딸의 이름은 토미 돌시가 지어주었다. 프랭크의 45년 히트곡인 는 바로 딸에 대한 노래이다.
- 토미 돌시 밴드에서 활동하며 프랭크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호흡기법을 비롯한 노래 스타일을 완벽하게 다듬어 나갔다. 그리고 42년부터 솔로로 출발, 43년에 을 히트시켰다. 이 곡은 해리 제임스 밴드 시절의 원곡인데, 솔로 데뷔 곡으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한 이 곡으로부터 프랭크는 사춘기 소녀 팬들의 우상으로 병적인 열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히트하던 43년에는 미셀 모르간, 톨 메와 함께 영화 "Higher And Higher"에 출연하며 배우로도 데뷔했다. 그리고 53년 영화 "From Here To Eternity"로는 아카데미 남우조연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 프랭크가 출연한 주요 영화는 빙 크로스비,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주연한 56년의 "상류사회"를 비롯하여 "닺을 올려라" "아가씨와 건달들" "황금의 팔" "포옹" "밤의 표범" "달려오는 사람들" "하이 호우프" "캉캉" "오우션과 11인의 전우" "황야의 세 상사" "시카고 7인" 등이다.
- 44년 1월 10일에는 역시 싱어가 되는 장남 프랭크 시나트라 Jr.가 태어났다. 장남은 19세이던 63년에 아버지처럼 토미 돌시 밴드의 싱어로 음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아들이 태어나던 해 10월, 프랭크는 뉴욕의 파라마운트 극장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은 구름같이 몰려든 소녀 팬들이 흥분하여 기절하는 소동을 빚어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문제가 된 공연이긴 했지만 당시 그의 인기정도를 말해주는 예라 할 수 있다.
- 48년 6월 20일에는 차녀 크리스틴 시나트라가 태어났다. 하지만 1950년 10월 프랭크는 부인 낸시 바바라와 이혼에 이르고 말았다. 55년 오늘날의 빌보드 핫100 싱글 차트가 신설되자마자 프랭크가 레이 앤쏘니 앤드 히스 오케스트라 함께 녹음한 곡 19위에 이어 1위, 5위, <(Love Is) The Tender Trap> 7위, 그리고 56년 3위, 57년 2위, 58년 6위를 차지하는 히트가 계속되었다. 57년 7월, 프랭크는 두번째(모두 네번 결혼) 부인 에바 가드너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청산했다.
- 1960년 12월에는 소속 음반사인 캐피톨과의 계약만료에 따라 현재까지도 많은 아티스트들의 히트 앨범을 발매하고 있는 자신의 레이블 '리프라이즈'를 설립했다. 리프라이즈 초기 소속 아티스트들은 딘 마틴(프랭크의 80세 생일기념을 막 넘긴 95년 12월 25일 78세의 나이로 사망), 새미 데이비스 Jr., 트리니 로페즈 등이다.
- 장녀 낸시 시나트라도 아버지의 레이블에서 데뷔하여 차례로 66년 싱글 차트 1위곡 , 7위곡 , 5위곡 , 그리고 아마도 우리에게는 가장 애청곡일 67년 49위곡 , 또한 아버지와의 듀엣인 67년 1위곡 등을 히트시키며 1960년대 중반을 풍미한다. 원래 낸시 시나트라는 59년에 아버지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함께 하던 TV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연예계에 입문했다. 아버지의 레이블에 소속되어 히트 활동을 하면서 배우로도 활약했는데, 첫 출연 영화는 아버지와 데보라 커, 딘 마틴 등이 주연한 65년 영화 "Love And Marriage"이다. 낸시 시나트라는 아버지가 리프라이즈를 설립하던 1960년에 역시 싱어이던 토미 샌즈와 결혼했다. 하지만 5년만에 역시 아버지처럼 이혼하고 말았다.
- 62년 1월, 프랭크는 자신과 함께 1960년 영화 "캉캉"에서 공연한 여배우 줄리엣 프라우즈와 약혼을 했다. 하지만 이 약혼은 한달만에 깨어지고 말았다.
- 과 가 차례로 싱글 차트 1위와 4위를 차지하던 66년 7월, 프랭크는 여배우 미아 패로우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 결혼도 2년만에 이혼으로 끝나고 만다. 미아 패로우는 1970년 9월 유명한 클래식 음악가 앙드레 프레빈과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79년 1월에는 이혼으로 또한번 세인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 67년에 프랭크는 딸 낸시 시나트라와의 듀엣 곡 를 노래해 싱글 차트 5번째이자 마지막 1위를 차지했다.
- 69년에 프랭크는 저 유명한 팝의 고전 <My Way>를 발표했다. 이 곡은 원래 67년에 발표된 샹송 (평상처럼)으로, 작곡하고 노래한 오리지널 아티스트인 클로드 프랑소와는 파리의 자택에서 감전사고로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사망(1978.3.11일)한 사연이 있다. 샹송 가 어떻게 로 리메이크 되었을까. 68년에 프랭크는 연예계 은퇴를 발표했고, 이에 가장 놀란 사람은 프랭크를 누구보다 존경하던 싱어/송라이터인 폴 앵카였다. 그래서 폴 앵카는 자신이 좋아하던 샹송 의 멜로디에다 영어가사를 붙혀 프랭크에게 선사했다. 프랭크도 이 곡에 크게 만족하여 은퇴직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한 것이다. 프랭크의 수많은 히트곡중 는 그의 자전적인 곡이다. 이 곡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히트한 팝 음악의 고전이자 삶의 송가가 되었다. 황혼기에 접어든 한 인간이 살아온 과거를 숨김없이 표현한 가사로 된 이 곡을 선사한 폴 앵카는 "는 프랭크가 노래해야만 빛을 발하는 곡"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은퇴 직전에 있던 프랭크의 곡으로 는 적격이었다. 비록 이 곡은 69년 싱글 차트 27위까지 진입하는데 그쳤으나 싱글 차트와는 관계없이 아직까지도 세계적으로 가장 애청되는, 팝 팬이라면 모르는 이 없는 프랭크의 대표 히트곡이 되었다. 또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곡을 리메이크해 오고 있는데 브록 밴튼의 1970년 곡, 엘비스 프레슬리의 77년 곡, 그리고 각색한 폴 앵카의 곡이 대표적인 리메이크 히트곡이다.
- 71년 3월, 프랭크는 공식은퇴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LA 무대를 마지막으로 30여년에 걸친 연예생활을 마감했다. 하지만 아직도 활약할 수 있는 나이에 무대를 떠난 그를 팬들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가 위대한 프랭크를 구하고 있다. 그가 복귀하기만을 학수고대할 것인가'라는 구호가 나돌기도 했다.
- 이렇게 되자 결국 은퇴 2년만인 73년 11월, NBC-TV의 특별 프로그램 'Ole Blue Eyes Is Back'을 통해 다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재기한 이듬해인 74년 5월에는 장녀 낸시 시나트라가 딸을 출산하여 프랭크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재기한 이후 75년에는 자전적 영화 "My Way"에서 열연했고, 1980년 영화 "New York, New York"의 동명의 주제곡으로 같은 해 싱글 차트 32위를 차지하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비록 은퇴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팬들은 프랭크가 무대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는 자체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 93년에는 「Duets」라는 타이틀의 아주 이색적인 기획 앨범이 발표되었다. '팝의 교황'이라는 프로듀서 필 라몬이 제작한 이 앨범에는 프랭크가 샤를르 아즈나브르, 토니 베네트, 라이자 미넬리, 루써 밴드로스, 아레싸 프랭클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칼리 사이몬, 나탈리 콜, 애니타 배이커, 글로리아 에스테판, U2의 보노, 케니 G와 듀엣으로 노래한 곡을 수록했다. 프랭크의 음악적 동료, 또한 후배들과 함께 한 「Duets」는 화제와 함께 발표되자마자 93년 11월 빌보드200 앨범 차트 2위로 진입하는 놀라움을 보였고, 더블 플래티넘을 획득했다. 「Duets」의 앨범 차트 2위는 팝 음악 역사상 '최고령 아티스트의 앨범 차트 1위 근접' 기록이다. 이전까지 이러한 기록 보유자는 루이 암스트롱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64년에 「Hello, Dolly!」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당시 나이는 프랭크보다 훨씬 아래인 62세였다. 「Duets」의 성공은 94년 「Duets Ⅱ」로 이어졌다. 이 앨범에서 프랭크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스티비 원더, 패티 라벨, 윌리 넬슨, 닐 다이어몬드, 린다 론스태드, 루이스 미구엘, 존 세카다 등 동료들과 후배, 그리고 장남인 프랭크 시나트라 Jr. 등과 함께 듀엣을 이루었다. 「Duets Ⅱ」는 94년 12월 앨범 차트 9위까지 진입했다. 이 앨범은 전작만큼의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프랭크에게 96년 제38회 그래미의 '최우수 트레디셔널 팝 보컬 퍼포먼스'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 97년 미국 하원은 국민적 대중 아티스트 프랭크에게 의회가 국민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미국의회 금메달'을 수여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수상 소감에서 "고향 뉴 저지주에서 웨이터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꿈도 꾸지 못한 영광이다. 이 기쁨을 나와 함께 일한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2백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의회 금메달'은 원래 군인들에게 수여하던 훈장이었으나 1900년대에 들어 정치, 과학, 체육, 예술, 연예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도 수여해 오고 있다.
- 현재 고령인 프랭크는 가슴통증으로 자주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병원측은 프랭크가 심장병으로 계속 고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프랭크의 음악은 멈추지 않아 97년에는 리프라이즈 레이블의 세계 배급사인 워너뮤직을 통해 또다른 히트곡집 「My Way-The Very Best Of Frank Sinatra」가 선보였다. 「My Way-The Very Best Of Frank Sinatra」는 아마 '프랭크의 생전에 발매된 마지막 편집음반'이 될지도 모른다.
- [ From Ipcp.edunet4u.net/~p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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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nd : 생의 마지막 순간, 종말
- *the final curtain : 인생의 마지막 커튼(장), 즉 모든 것의 종말
- *I'm certain : 내가 확신하고 있는, 확신에 찬, 자신있게 살아온
- *a life that's full : 충만한, 충실한 인생, 즉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
- *each and every highway : 모든 길, 즉 안해본 일이 없다. 수많은 일을 해왔다.
- *see through : …을 해내다, 성취하다. [남]을 끝까지 도와주다(뒤를 보아주다).
- …을 간파하다, 꿰뚫어보다; …을 이해하다.
- see a scheme through 계획대로 해내다. - see a person through his troubles
- 곤경에 처한 사람을 끝까지 도와주다; 끝까지 돌봐주어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다.
- see through a brick wall 통찰력이 매우 예리하다 - see through a person 인품을 꿰뚫어보다.
- *exemption : <美>[소득세 신고서에 기재하는] 공제 대상 항목[부양 가족 따위]; 면세품
- 면제(immunity), 해제.
- exemption from punishment(taxation) 형의 면제(면세).
- *chart : …을 도표(해도)로 만들다. …을 계획하 다.
- chart a course of action 행동방침을 계획하다.
-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 씹을 수 없는 것은 물어 뜯었다.
- 즉,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에도 터무늬 없이 도전했던 적이 있었다.
- *spit : 침을 뱉다; 비유적 모욕하다.
- spit at (or on) …에 침을 뱉다; …을 모욕하다 - spit in one's hands 손에 침을 바르고 벼르다
- *tall : [구어] 거창하게, 과장하여, 의기양양하게(proudly)
- talk tall 허풍을 떨다, 대포를 놓다. - walk tall 으스대고 걷다.
- *fill : 용기 가득[한 양]. (one's ∼) 그득함, 충분, 만복.
- drink (eat, have) one's fill 양껏 마시다(먹다) - grumble one's fill 잔뜩 불평하다 - have one's fill of sorrow 슬픔을 충분히 맛보다
- *take the blows : 어떤 일들을 격다.(주로 안 좋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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