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은자료실 ▒

제현의 서술[諸賢?述] -삼봉집 정도전(鄭道傳)-

천하한량 2007. 6. 15. 01:08

 제현의 서술[諸賢?]

 

 

 

 

정삼봉 금남잡제 서 병진 [鄭三峯錦南雜題序 丙辰]

연성(連城)의 구슬은 곤강(崑岡 곤륜산(崑崙山))이라 해서 항상 나는 것이 아니고, 천리마(千里馬)는 기야(冀野 말이 많이 나는 기주(冀州))라고 항상 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주는 성품을 타고난 생물(生物)로서는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충신(忠信)과 재덕(才德)의 바탕을 얻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바다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삼봉 정선생(鄭先生)은 나의 동년(同年 같은 해에 과거한 것)의 친구다. 지정(至正) 임인년(공민왕 11 1362) 겨울에 우리 홍문정공(洪文正公 문정은 홍언박(洪彦博)의 시호(諡號))이 과장(科場)에 도시관(都試官)이 되어서 선비를 뽑는 데 선생이 선발되었으니 그때에 선생은 나이가 젊고 기운이 왕성하였으며, 문장이 민첩하고 신기하여서 그때 사람들이 모두 특이하게 생각하여 작은 성공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았었다.

그 뒤에 부모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을 고향에 들어앉아서 경적(經籍)만을 연구 토론하니, 그 문하에 출입하는 제자들도 이단(異端)을 철저히 분석하게 되었다. 멀게는 천지(天地)와 하악(河岳)을 연구하고, 절실한 것으로는 성명(性命)과 의리(義理)를 연구하여, 밝기는 일월 같고, 보이지 않는 데도 통하는 것은 귀신같았다. 그리고 날마다 사용하는 인륜(人倫)의 일과 황왕 세도(皇王世道) 의 변천하는 길이며, 법령 제도(法令制度)의 손익(損益)과 예악 형정(禮樂刑政)의 득실(得失)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고 널리 생각하여 그 이치를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리 선왕(先王)은 널리 선비를 찾아서 문ㆍ가(文理)를 천명했으며, 또 교ㆍ묘(郊廟) 제사의 예악(禮樂)에 대하여 더욱 힘썼다. 그러나 그 책임을 맡길 사람이 쉽지 않았는데, 선생만은 ‘문학을 널리 아는 것이 윤리(倫理)를 밝히고 인재를 양성할 수 있으며, 기국과 지식의 밝은 것이 넉넉히 예악의 근본을 알아서 신과 사람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해에 성균과 태상 두 곳의 박사(博士)로 제수하여 사예(司藝)까지 되었으니, 이렇게 전적으로 맡긴 것은 영화스러운 일이었다.

지난해 여름에 선생이 충직한 생각으로 국가의 일을 말하여, 집권자의 비위를 거스르다가 호남(湖南)으로 유배(流配)되었었다. 나는 그때에 여러 차례 그 집에 갔었다. 선생은 셋방 하나를 빌어 좌우에 도서(圖書)를 벌여 놓았으며, 갖옷과 베옷 한 벌로 겨울과 여름을 지내며, 나물 반찬으로 아침저녁 끼니를 이으면서, 성현ㆍ인의ㆍ도덕에 대한 학설을 설명하여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판가름을 밝히니, 남방(南方)의 학자들이 많이 와서 배웠다.

강의하는 여가에 스스로 시()와 문() 약간 편(若干篇)을 저술하여 엮어 책으로 만들어서 당신의 뜻을 표시하고, 그 제목(題目)을 《금남잡제(錦南雜題)》라 했으니, 그 문장은 옛날 사람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고, 그 단장구(短長句 짧고 긴 글귀를 섞어 지은 시)도 또한 아야(雅野) 일본(一本)에 야()가 야()로 되었음. 의 태도에까지 이르렀으니, 여러 사람들의 장점(長點)만을 모아서 일가(一家)의 말을 만든 것이다. 쫓겨난 것을 걱정하고 분하게 여기는 말은 털끝만큼도 없고, 다만 충신(忠信)과 도의(道義)의 생각만이 뚜렷하게 말 사이에 넘치니 참으로 경중(輕重)을 아는 대장부(大丈夫)가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대저 얻으면 좋아하고 잃으면 슬퍼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선생은 그렇지 않았으니 그가 귀양온 것도 충신(忠信)한 까닭이 아님이 없고, 그가 자처(自處)하고 지내는 것도 의리(義理)로 안심(安心)하지 않는 것이 없다. 부귀를 뜬구름같이 생각하고, 공명을 초개같이 생각하여, 산림(山林 빈천하여 산 속에 사는 것)과 조시(朝市 부귀하여 조정과 도시에 사는 것)를 똑같이 보고, 사생(死生)과 궁달(窮達)에 한결같은 절개를 지켜서, 아침에 도()를 들어 알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고, 생명을 포기하고라도 의리는 지키는 것을 위주로 하려 했으니, ()를 믿음이 독실하고 스스로 아는 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傳 《역경》 건괘(乾掛)의 전())에 이른바 ‘남에게 옳다는 말을 듣지 못해도 민망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선생을 두고 한 말이다.

! 우리 나라 땅덩이는 비록 좁으나 산수의 아름다움은 천하에 제일이어서 산악의 기운이 모여, 문무(文武)의 훌륭한 인재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아마 모르긴 하나 지금 하늘이 선생을 낸 것은 장차 문장(文章)으로 세상을 울리려는 것이냐? 도학(道學)을 사람에게 전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장차 높은 풍도(風度)와 높은 절개로 퇴패(頹敗)하는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인가? 이 세 가지는 다 숭상할 만한 것이다.

내가 말도 잘 되지 않는 글로 그 책 끝에 붙이는 것은 다만 충신(忠信)ㆍ재덕(才德)을 구비한 사람이 이 나라에서 난 것을 사랑하며, 또 후세의 군자(君子)로서 상우(尙友) 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생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동년우(同年友) 기장(機張) 이유중유(?仲有 중유는 자임)는 씀.

 

 

삼봉에게 줌[贈三峯]

나라를 돕고 세상을 바로잡으려던 계획 다 틀렸으니 / 輔國匡時術己疎

어려서 나온 나 머리털 하얗게 센 것을 슬퍼하네 / 自嗟童習白紛如

숨어 있는 우리 삼봉과 뉘라서 비교할 것이냐 / 三峯隱者誰能似

처음에 세운 그 뜻 평생 변함없이 지키는구나 / 不變平生立志初

 

 

또 계해 가을[癸亥秋]

정생이 머나먼 길 떠나가니 / 鄭生東去路悠悠

철령 가을바람에 화각이 운다 / 鐵嶺關高?角秋

군막에 누가 제일가는 사람이냐 / 入幕賓中誰第一

유양이 남루에서 달구경 하겠네 / 月明人倚庾公樓

 

 

정종지 시문록 발 갑자 가을 [鄭宗之詩文錄跋 甲子秋 ]

삼봉 도자(三峯道者) 정종지는 뜻을 세운 것이 대단히 높았으니 그가 학문하는 데 연구하여 밝히는 것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과 같고, 저술하는 것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호)과 같았으니, 은미(隱微)한 말을 분석하고, 고조(古調)를 화답하는 데는 한때의 거벽(巨擘)들이 모두 팔짱만 끼고 앉아서 감히 겨루지를 못하더니, 내가 이 시문록을 보니 과연 그렇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 종지를 다 말했다고 할 수 없다.

그가 벼슬에 나가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꼭 하고, 어떤 일을 당해도 그는 회피할 줄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君子)로서도 우리 종지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거늘 하물며 지금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어느 날 그가 지은 시문을 가지고 와서, 그 끝에 발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병이 있고 또 게을러서, 즉시 그 책임을 벗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강남(江南)에 가면서 이 시문을 가지고 가게 되니, 나는 종지의 사람됨을 대강 기록하여 우리 종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문장도 있고 절의도 있으니, 중원(中原)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어찌 감히 우리 종지를 소홀히 여길 것인가?

홍무 갑자년(우왕 10 1384) 7.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발()을 쓴다.

[]

삼봉 정군(鄭君) 종지는 총명한 자질로 도()를 좋아하고, ()을 숭상하여 사림(士林)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도를 의논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높은 안목으로 독특한 주장을 세워서 조금도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시원하고 순수하여 성리학(性理學)에서 우러나왔다.

! 옛 글에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모범이 될 말을 남긴다.’ 하더니, 지금 나는 이를 종지에게서 보았다.

동고(東皐) 권중화(權仲和)는 씀.

【안】 권중화는 여조(麗朝)의 찬성(贊成)이니, 본조(本朝)에 와서 예천백(醴泉伯)이 되었다.

 

 

정삼봉 시문 서(鄭三峯詩文序)

홍무 18(우왕 11 1385) 9월에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고려국(高麗國)에 사신으로 와서 객관(客館)에 거의 달포나 머무르면서 성균사성(成均司成) 정종지와 더불어 많은 토론(討論)을 하였다. 종지는 순박하고 독실한 자질로 많은 학식이 있어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 그 나라에서 벼슬하여 군영(?)의 우두머리가 되니, 국왕(國王)은 그 행실을 가상히 여기고 성균관(成均館)의 영수를 제수하여 학자들의 스승으로 만들었다.

종지는 처음 벼슬길에 나가면서 성균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를 두고 지은 시와 문이 책으로 되었는데, 무릇 약간의 편()과 수()로 되었다. 그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므로 여러 차례 펴보니, 칠언시(七言詩)는 청신(淸新)하고 유량(瀏亮 맑고 밝은 모습)하며, 오언시(五言詩)는 침착(沈着)하고 간고(簡古)해서 그 생각을 정하고 말을 만드는 것은 그때 사람들에게 훨씬 뛰어났으며, ()에 있어서는 더욱 학문이 넓고 의론이 밝아서 구차스럽게 짓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종지의 시와 문은 대개가 본국(本國)의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일을 두고 지은 것이니, 내가 더 기대하는 것은 종지가 중국에 와서 조정의 군신(君臣)들 사이의 거룩한 모임을 보고 강산(江山)과 해우(海宇)의 넓은 것을 알며, 의관문물(衣冠文物)의 제도도 보고, 성곽(城郭)과 갑병(甲兵)의 크고 풍부한 것을 보며 제례(制禮)ㆍ작악(作樂)의 큰 규모를 보게 되면, 종지의 아량과 학문과 지식이 지금의 기국(器局)보다 훨씬 커져서 위로는 황제의 무궁한 성택(聖澤)을 노래해 찬양하고, 아래로는 나라의 수재들을 가르쳐서 옛날 것을 상고하고 지금 것을 토론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여 중국의 문화를 따라서 오랑캐 풍속을 깨끗이 고치게 되면, 우리 종지의 문장은 마땅히 사책[竹帛]에 전하며, 백세(百世)가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게 되는 데에 있다. 어찌 다만 시() 1(), () 1()이 한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겠는가? 종지는 더욱 힘쓸지어다.

예장(豫章) 주탁(周倬)은 기록함.

 

 

정삼봉 금릉기행 시문 발 을축 (鄭三峯金陵紀行詩文跋 乙丑 )

삼봉 정종지가 금릉(金陵 중국 남경(南京))에 조회 갔을 때 쓴 기행 시문 1()에 석명사(錫命使) 장보(張溥)와 주탁(周倬) 두 사람의 시가 첫 장과 끝장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이 늙은이에게 보여 주므로 소리를 내서 읽어 보니 성천자(聖天子)의 인문(仁文)하고 의무(義武)한 것과, 소방(小邦)에서 정성껏 조공(朝貢)하고 예절대로 조회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 내서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같이 환하고, 그 수창(酬唱)과 제영(題詠)이 모두 고고(高古)하고 간결(簡潔)하여, 들어앉아서 감상이나 하는 이 늙은이의 좁은 안목을 위로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삼봉은 이윤(伊尹)의 뜻을 품어 뜻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으니, 문장은 곧 그의 작은 재주여서 이것으로는 삼봉을 논할 수 없다.

아침 해가 바다에 붉게 솟아 / 曉日出海赤

곧바로 외로운 섬에 비췄네 / 直照孤島中

당신의 일편단심은 / 夫子一片心

바로 이해와 같구료 / 正與此日同

이 시는 비록 전횡(田橫) 을 논한 것이나, 결국 자신의 말을 자신이 한 것이다. 늙은 이 사람은 이렇게 보았으니, 종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색(李穡)은 발함.

 

 

[D-001]병진 : 고려 우왕(禑王) 2(1376).

[D-002]연성(連城)의 구슬 : 《사기(史記)》 인상여전(藺相如傳), 조왕(趙王)이 화씨벽(和氏璧)을 얻으니 진소왕(秦昭王)은 사람을 보내어 15()과 그 구슬을 바꾸자고 하였음.

[D-003]황왕 세도(皇王世道) : 요순(堯舜)의 이상적 정치를 황도(皇道) 정치라 하고, 삼대(三代)의 정치를 왕도(王道) 정치라 함.

[D-004]상우(尙友) : 위로 옛날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뜻. 《맹자(孟子)》 만장장구(萬章章句) ()에 ‘이것으로 그 세대를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우다[是以論其世也是尙友也].’ 하였음.

[D-005]계해 : 고려 우왕(禑王) 9(1383).

[D-006]유 양이 …… 달구경하겠네 : 유공루는 중국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누대. ()의 유양(庾亮)이 강주 자사(江州刺使)로 갔을 때, 달 밝은 밤에 올라가 놀았으므로 다락의 이름이 되었음.

[D-007]을축 : 고려 우왕(禑王) 11 (1385).

[D-008]전횡(田橫) :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아우. 전영이 죽은 뒤에 횡이 영의 아들 광()을 세우고 횡은 정승이 되었다. 광이 한신(韓信)에게 포로가 되자, 횡은 왕이 되어서 부하 5백 명을 거느리고 해도중(海島中)에 있다가 한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 오던 중 낙양(洛陽) 30리 밖에서 항복할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섬에 있던 5백 명도 모두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