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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에게 올리는 글 -삼봉집 정도전(鄭道傳)-

천하한량 2007. 6. 1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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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에게 올리는 글 신미 [上都堂書 辛未 ]

 

 

재상(宰相)의 직책은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석개보(石介甫)가 말하기를, ‘재상은 위로는 음양(陰陽)을 조화하고 아래로는 여러 백성을 편안히 어루만지며 작상(爵賞)과 형벌(刑罰)이 경유하는 바이고, 정화(政化)와 교령(敎令)이 나오는 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도 재상의 직책은 이 네 가지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며, 그 중에도 작상과 형벌이 더 막중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른바 음양을 조화한다는 것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음양 스스로가 조화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을 주는데 그만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면 착한 일 하는 자가 권장될 것이며, 형을 내리는데 그만한 죄를 진 사람에게 내리면 악한 일 하는 자가 징계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형벌 중에서 찬역(簒逆)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 왕씨(王氏)를 저지하고 아들 창()을 세운 것이나, 신우(辛禑)를 맞아다가 왕씨를 단절시키려던 행위는 찬역 중에서도 심한 것이며, 난적(亂賊) 중에서도 괴수입니다. 그런데 구차히 천주(天誅 천의(天意)에 의하여 행하는 주벌(誅伐))를 면한 지가 이미 수년이요, 또 모양을 좋게 꾸미고 수행인을 성대하게 갖추어 중외(中外)를 출입하기에 조금도 기탄이 없을 뿐더러, 자제(子弟)ㆍ생질(甥姪) 등을 요직에 배치하여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지금 재상의 자리에 있어 상주고 벌내리는 실권을 쥔 자로서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당 그 죄상을 다 논하여 전하에게 아뢰고 국민과 함께 태묘(太廟)에 고한 다음, 그 죄상을 하나하나 들어서 처벌한 뒤라야 하늘에 계신 영혼이 위로될 것이요, 신민의 울분도 씻어질 것이니, 천지의 기강도 설 것이요, 재상의 책임도 메워질 것입니다.

만약에 재상이, ‘사람의 죄악은 내가 알 바 아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폐하고 귀양보내는 것은 임금의 소관사인데 재상이 무엇 때문에 관여할 것인가?’라고 한다면, 동호(董狐)가 어찌하여 조돈(趙盾)에게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죄(討罪)하지 않은 것으로써 악명(惡名)을 씌웠겠습니까?

춘추 시대에 진()나라 조천(趙穿)이 임금을 시해하자, 직사(直史) 동호가 역사에 쓰기를, ‘조돈이 임금을 시해했다.’고 하였습니다. 조돈이, ‘임금을 시해한 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자, 동호는 답하기를, ‘그대가 정경(正卿)으로서 망명(亡命)해서 국경을 넘지도 않았고 돌아와서 역적을 치지도 않았으니 임금을 시해한 것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평하기를, ‘동호는 훌륭한 사가(史家)이고, 조돈은 훌륭한 대부(大夫)이다. 법을 위해서 악명을 달게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저 조돈은 정경으로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역하였다는 악명을 사양하지 않았으니, 그런 뒤라야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가 엄중하여져서 난적의 도당들이 천지의 사이에서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남의 군부가 되어 《춘추(春秋)》의 의리를 알지 못하면 반드시 가장 악하다는 이름을 들을 것이요,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춘추》의 의리를 알지 못하면 반드시 찬역이나 시해의 죄에 빠질 것이다.’고 하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내가 비록 자격은 없지만 재상의 뒤를 따라 나라의 정사에 참여하였으니 저 어진 사가의 논의를 스스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만일, ‘죄인이라고 하는 이들에 유종(儒宗)도 있고 왕실과 연달아 혼인 관계가 있는 자도 있어서 그 법을 의논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면 더욱 불가합니다.

옛날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폐하고 동복 동생 창(?)을 영립(迎立)하려고 하여, 임연이 먼저 그 계책을 꾸며놓고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에게 고하였습니다. 장용은 어찌할 바를 몰라 오직 ‘예 예’하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 원종이 반정(反正)을 하자, 장용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계책을 누르지 못하고 그 반란을 금하지 못하였다 해서 그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색(李穡)이 유종(儒宗)은 되었으나 장용보다 무엇이 낫습니까? 먼저 사특한 꾀를 제창하여 왕씨를 저지하고 신창을 세운 것이, 저 장용이 임연의 계책에 ‘예 예’ 하였던 일보다 무엇이 낫습니까?

호씨(胡氏)가 이르기를, ‘옛날 문강(文姜)이 노환공(魯桓公)을 시해하는 데 참여했고, 애강(哀姜)이 두 임금을 시해하는 데 관여되었는데, 성인이 의례대로 손()이라 써서, 가고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하여 깊이 끊어 버렸으니 이것은 은정(恩情)은 가볍고 의리는 중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환공을 시해한 사람은 제양공(齊襄公)이요, 두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경보(慶父 노장공의 아우)입니다. 그러니 문강과 애강은 죄가 없지 않을까 의심되었는데, 성인이 그 두 부인이 참여하여 들었다는 이유로써 깊이 끊고 토죄하기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 사군(嗣君)은 부인이 출산한 바이지만, 아들과 어머니의 사사 은혜로써는 임금과 신하의 큰 의리를 폐하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아래인 신자이겠습니까? 혹자는,

“이색(李穡)의 말이, ‘우()가 비록 신돈(辛旽)의 아들이지만, 현릉(玄陵 공민왕 恭愍王)이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여 강녕군(江寧君)을 봉하였고, 또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아 임금이 되었으니, 이미 그 신하가 되었다가 몰아낸다는 것은 크게 불가한 짓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도 또한 옳지 않느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 왕위(王位)는 태조(太祖)의 왕위이고, 사직(社稷)도 태조의 사직이니, 현릉이 진실로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연왕 쾌(燕王?)가 연나라를 정승 자지(子之)에게 주었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연나라를 칠 수 있습니까?’하니, 맹자(孟子)는 답하기를, ‘불가하다. 연왕 쾌가 연나라를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며, 자지도 연왕 쾌에게 연나라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인의 마음에 토지와 인민은 선군(先君)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시군(時君)이 사사로이 사람에게 줄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 주혜왕(周惠王)이 사랑으로써 세자(世子)를 바꾸려 하니, 제환공(齊桓公)이 제후를 거느리고 왕세자를 수지(首止)에서 회견하고는 그 자리를 바꾸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에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혜왕의 아들임에는 한가지였습니다. 또 천왕(天王)의 존귀함으로써도 사사로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라를 줄 수 없다 해서 낮은 제후로서 제후의 무리를 거느리고 천자의 명에 항거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의롭게 여기셨으나, 세자가 아버지의 명령에 항거했다거나, 제환공이 임금의 명령에 항거했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으니, 이것은 진실로 천하의 의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현릉이 어떻게 태조의 왕위와 태조의 백성을 사사로이 역적 신돈(辛旽)의 아들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또 천자가 고명(誥命)을 한 것도 한때의 권신(權臣)들이 우()를 현릉의 아들이라고 속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후 천자도 명령하기를, ‘고려의 왕위에, 후사(後嗣)가 끊어졌다. 비록 왕씨 성을 빌었다고는 하지만, 딴 성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켜오던 좋은 계책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또 이르기를, ‘과연 어질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있거든 임금과 신하의 위를 정하라.’고 했은즉, 전의 명령이 잘못된 것은 천자도 알고 다시 밝히신 것인데 어찌 감히 고명을 가지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그 ‘이미 신하가 되었는데 어찌 몰아내겠느냐?’는 말도, 말이 안 됩니다. 《강목(綱目)》에서, 앞에는 ‘심이기(審食其)로 제()의 태부(太傅)를 삼고 주발(周勃)ㆍ진평(陳平)으로 승상(丞相)을 삼았다.’고 했으며, 그 뒤에는 ‘한()나라 대신들이 아들 홍()을 죽이고 대왕(代王) ()을 맞아다가 황제의 위에 오르게 했다.’라고 썼습니다. 그 글에서 제()ㆍ대신(大臣)이라고 했으니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대신이 아들 홍을 죽였다고 하였으니 역적을 토죄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무재인(武才人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이름)이 황제라 칭호한 지가 오래였는데, 적인걸(狄仁傑)이 장간지(張柬之)를 추천하여 재상을 삼게 하니, 장간지가 무재인을 폐하고서 중종(中宗)을 맞아다가 세웠습니다. 그 천거해서 재상이 된 것은 신하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무재인을 폐한 것은 역시 역적이라는 데서 토죄한 것입니다. 그 후 백세를 두고 내려오면서 주발ㆍ진평이 유씨(劉氏 한 황실(漢皇室)을 가리킴)를 편안히 하고, 장간지가 당나라를 회복했다는, 그 공로는 칭송합니다마는 그들이 신하로써 옛 임금을 폐하였다고 나무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색과 우현보(禹玄寶)가 인의(仁義)는 부족할지라도 모두가 글을 읽어 옛일을 아는 선비이니 어찌 이런 말을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고, 사특한 말을 제창하여 민중의 귀를 흐리게 했음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선왕(先王)의 법은 말을 조작하여 민중을 현혹시킨 자는 목베어 죽였습니다. 하물며 사특한 말을 제창하여 난적(亂賊)을 이롭게 한 죄이겠습니까? 혹은 말하기를, ‘신우(辛禑)를 맞아 오려고 계획한 것이 바로 아들 창()이 재위한 때이고 보면, 비록 신우를 맞아들이지 않았더라도 왕씨가 어떻게 다시 흥했겠는가? 그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를 절사(絶嗣)하게 했다는 것은 그 죄를 가중시키려는 말이다.’ 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충신과 의사들이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서 이성(異姓)을 폐출하고 왕씨를 복위시키려고 의결하였는데, 위왕 신우[僞辛]의 무리가 먼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얻어 천자의 명령과 충신들의 논의가 있음을 알고도, 신창은 어리고 약하다면서 그 아비를 세워 사사로운 일을 구하려고 꾀하였으니, 이것이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를 절사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은 또 말하기를, ‘이색과 우현보는 그대보다 행세에 선배이며, 사문(斯文)의 옛 의()와 고구(故舊)의 정이 있는데 그대가 이처럼 힘써 공격하는 것은 너무 각박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소식(蘇軾)이 주문공(朱文公 주자의 서호)의 선배였지만, 문공은 소식이 감히 괴이한 의논을 하여 예악(禮樂)과 명교(名敎)를 무너뜨리자, 그를 깊이 꾸짖고 배격하기를 조금의 가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감히 옛사람을 공격하고 꾸짖는 것이 아니다. 옛 성탕(成湯), ‘나는 상제(上帝)를 두려워하는지라 감히 바루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나 역시 상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논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소식의 죄는 이론(異論)을 세우고 예법을 멸하는 데 그칠 뿐이었는데도 주자와 같이 인서(仁恕)하신 분이 공격하기를, 성탕이 하걸(夏桀)을 꾸짖던 말과 똑같이 하였습니다. 하물며 이성(異姓)의 당이 되어 왕씨를 저해하는 것은 조종(祖宗)의 죄인이며 명교의 괴적(魁賊)이거늘, 어찌 전배라는 연고 때문에 그를 용인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들의 말을 빌면, ‘무진년에 폐위하고 영립할 때에 사문(斯文)의 이의(異議)가 있었다.’고 하니, 그 이른바 이의란, 왕씨를 세울 것을 의논한 것입니다. 또 그는 민중에게 큰소리로, ‘여러 장수들이 왕씨 영립을 의논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를 저지시켰으니 우리 아버지의 공이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우와 창의 귀에 깊이 흘러들어갔으니, 만약 우ㆍ창이 뜻을 이루게 되었다면 사문(斯文)과 여러 장수들이 과연 그 머리를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스스로 처하는 각박함이 어떠하옵니까? 스스로 왕씨를 세움으로써 이의(異議)라 하고, 왕씨를 저해함으로써 자기의 공로를 삼으니, 지금에 거짓 신씨[僞辛]

【안】 구본(舊本)에는 신()자 아래에 우()자가 있는데 본전(本傳)을 좇아서 산정(刪正)한다.

를 영립하는 것으로 이의를 삼고 왕씨를 저해하는 것으로 중죄를 삼는 것은 옳지 않겠습니까?

혹은 또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전()을 올려 사면하였거늘, 전하에게 글을 올려 사람 죄주기를 논집하고 또 묘당(廟堂)에 고하자 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런 말이라면 아래의 일로 증거를 대겠습니다. 옛날 제()나라 진항(陳恒)이 그 임금을 시해하니, 공자는 목욕하고서 조회에 나아가 말하기를,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했으니, 토죄(討罪)하소서.’하고, 또 삼자(三子 맹손(孟孫) 숙손(叔孫)ㆍ계손(季孫))에게 고하기를,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토죄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을 시해한 일이 제나라에서 있었으니, 노나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하며, 공자는 그때 이미 치사(致仕)하였으니 노나라의 정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한데, 이미 임금에게 토죄하기를 청하였으니 삼자에게는 고할 필요가 없을 듯도 하나 또한 넓고 큰 겸용(謙容)의 마음을 지닌 성인으로서도 들어가서 임금에게 청하고 나와서 삼자에게 고한 것은, 반드시 그 죄인을 주토한 뒤라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시역한 역적이라면 사람마다 주토하여야 하니, 천하의 악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또 노나라에 있으면서 제나라의 역적을 차마 보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한나라에 있으면서 한나라의 역적을 차마 볼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대부의 후열에 있으면서도 이웃나라의 정사를 차마 보고 넘기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공신(功臣)의 반열에 있으면서 왕실(王室)의 역적을 보고 차마 넘기겠습니까?

《춘추(春秋)》에 ‘위인(衛人)이 주우(?)를 죽였다.’고 썼는데, 호씨(胡氏)는 그를 해석하기를, ‘위인(衛人)의 인()자는 무리[]라는 말로, 그 주우를 죽인 것은 석작(?)이 꾀를 내어서 우재추(右宰醜)를 시켜 죽인 것인데, 문장을 바꿔서 위인이라고 한 것은 사람마다 역적을 토죄할 마음이 있었다는 뜻이니, 또한 사람마다 토죄할 일이기 때문에 무리라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토죄해야 하는데, 재상으로서 토죄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옳겠습니까? 하물며 석작은 주우의 연고 때문에 그 아들 후()까지 죽였습니다. 그래서 군자는, ‘석작은 순수한 신하다. 큰 의리를 위하여 친족 관계를 끊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난적(亂賊)하는 자는 친소(親疎)ㆍ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두 토죄해야만 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진항(陳恒)과 주우(?)는 몸소 시역을 감행한 자이지만, 이색ㆍ우현보는 직접 시해하지는 않았는데 그들과 비교하여 같다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리고 또 그의 죄악은 무고(誣告)로 그릇 입고 있는지 알겠느냐?’고 합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호씨(胡氏)의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임금을 시해하고 딴 임금을 맞아오는 것은 오히려 종묘(宗廟)는 멸망하지 않는데, 그 종묘를 옮기고 국성(國姓)을 고치는 것은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고 보면, 어찌 시해하는 것보다 더 중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들이 이성(異姓)의 당여가 되어 왕씨의 종사(宗社)를 폐하려는 행위는 실상 호씨가 이른바 종묘를 옮기고 국성(國姓)을 멸망시키는 것이오니, 그 죄가 시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옵니다.

또 옛날에는 대신(大臣)도 남이 자기의 죄를 고하는 일이 있으면, 죄수(罪囚)의 복장을 하고서 그 죄를 청하였습니다. ()의 곽광(?)은 무제(武帝)의 고명 대신(顧命大臣 후사를 부탁 받은 대신)으로서 소제(昭帝 무제의 아들)를 옹립(擁立)하였으니 그 공덕이 지극히 컸습니다마는, 남이 상서하여 자신의 죄를 고하는 일이 있자. 그는 금중(禁中)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런 일로 본다면, 진실로 자기의 죄를 고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하게 죄를 청하여, 몸소 유사(有司)를 대하고서 자기의 죄를 밝게 따진 다음에라야 그 마음이 편안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저들처럼 처자를 시켜 글을 올리고 병들었다고 핑계하여 밖으로 의원에게 간다 해서 분명히 변명하지 않으려 하였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자기에게 죄가 있어, 반드시 말이 막히어 따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난적(亂賊)을 주토하던 법에, 비록 그 죄상은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오히려 그 뜻을 찾아 토죄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자취가 이미 드러나기를 이같이 한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옛날 당고종(唐高宗)이 무재인(武才人)을 책봉하여 황후(皇后)로 삼으려 할 즈음, 저수량(?遂良)ㆍ허경종(許敬宗)이 다같이 재상의 직에 있었는데, 저수량은 그 처사가 옳지 못함을 힘써 간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고, 허경종은 고종의 뜻에 순응하여 말하기를, ‘이 일은 폐하(陛下)의 집안 일이오니 재상의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고종은 경종의 말을 채택해서 마침내 무재인을 황후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경종은 끝내 부귀를 누렸습니다. 오왕(五王)은 동심협력하여 반정(反正)을 하였습니다만 다같이 죽음을 당하여, 저수량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자면, 허경종은 계책에 성공을 하였고 저수량과 오왕은 계책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허경종이 한때의 부귀를 누린 것은 빠르기가, 회오리바람이 귓바퀴를 지나는 것과 같아서 그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으나, 저수량ㆍ오왕의 영성(英聲)과 의열(義烈)은 사책에 찬란하게 빛나서, 우주가 있는 한은 함께 존재할 것입니다.

내가 비록 비천하고 졸렬하지만 언제나 허경종을 부끄럽게 여기고 저수량을 사모하옵니다. ()에 이르기를, ‘처음에 같이 계책을 하였으면 끝내 그와 더불어 함께 죽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어리석고 졸렬한 이 몸을 버리지 아니하셔서 반정의 모의에 참여시키셨는데, 간당(奸黨)의 화를 두려워하여 어찌 감히 침묵을 지켜 구차하게 화를 면하려 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춘추》의 난적을 주토하는 법으로 규범을 삼으시고 공자와 석작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소서. 그렇게 하면 종묘와 사직이 퍽 다행하겠습니다.

 

 

[C-001]신미 : 고려 공양왕(恭讓王) 3(1391).

[D-001]동호(董狐)가 …… 악명을 씌움 : 동호는 진()의 사관(史官), 조돈(趙盾)은 진의 대부(大夫). 진영공(晋靈公)이 임금 노릇을 잘못하여 조돈이 간하니, 영공은 그를 죽이려 하자 도망을 쳤는데, 국경을 넘지 못해서,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했다. 그래서 돌아왔는데, 동호가 사책에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고 썼다. 그 이유는 ‘조돈이 정경(正卿)으로 도망쳐 국경을 넘지도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돈은 그를 부인하다가 결국 시인했다. 《左傳 宣公 2年》

[D-002]문강(文姜)이 노환공(魯桓公)을 시해하는 데 참여했고 : 문강은 춘추시대 노환공(魯桓公)의 부인이며, 제희공(齊僖公)의 딸. 환공이 문강과 함께 제나라에 갔는데, 문강이 그 오빠인 양공(襄公)과 간통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환공이 성을 내자 문강이 양공에게 고하여 환공이 피살당했다. 《左傳 桓公 18年》

[D-003]애강(哀姜)이 두 임금을 시해하는 데 관여되었는데 : 애강은 노장공(魯莊公)의 부인이며, 제환공(齊桓公)의 딸. 성품이 교만하고 음탕하여 시숙 경보(慶父)와 간통했다. 장공이 죽고 자반(子般)이 즉위하니, 그는 경보와 모의하여 자반을 죽이고 민공(閔公)을 세웠으며, 그 후 또 애강은 경보와 모의하여 민공을 죽였다. 그러자 제환공(齊桓公)이 희공(僖公)을 세우고는 애강을 불러다가 독살시켰다. 《左傳 閔公 2年 僖公 元年》

[D-004]()이라 써서 : 문강(文姜)이 노환공(魯桓公)을 시해하는 모의에 참여했고, 애강(哀姜)이 자반(子般)ㆍ민공(閔公)의 시해에 가담하는 등 갖은 나쁜 짓을 다했으나, 《춘추》에는 그들의 출분(出奔)한 것을 출분이라고 쓰지 않고서 ‘손()’ 즉 양위(讓位)하고 갔다는 뜻으로 썼다. 이것은 공자의 국내의 일은 은휘해야 한다는 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 문구는 바로 《좌전》 장공(莊公) 2년에 “부인[文姜]이 손위하고 제에 갔다[夫人孫于齊]., 《좌전》 민공(閔公) 2년에, “부인 강씨[哀姜]가 손위하고 주(?)에 갔다[夫人姜氏孫于?].”에서 볼 수 있다.

[D-005]연왕 쾌(燕王?)가 연나라를 정승 자지(子之)에게 주었는데 : 연왕 쾌는 전국시대 연역왕(燕易王)의 아들인데, 소진(蘇秦)의 아우 소대(蘇代)의 계략에 빠져, 자지(子之)를 정승으로 삼고 그에게 정사를 이양한 다음, 자신은 도리어 신하가 되었었다. 《史記 燕世家》

[D-006]주혜왕(周惠王)이 사랑으로써 …… 했습니다 : () 17대 왕인 혜왕(惠王)이 서자(庶子) ()를 총애하여 태자 정(太子鄭)을 폐하고 그를 세우려 하니, 제환공(齊桓公)이 존왕(尊王)이란 명의 아래 수지(首止)에서 제후를 회합하고 그 일을 막아내어 태자가 안전하였다. 이가 후일 주양왕(周襄王)이다.

[D-007]()나라 대신들이 …… 오르게 했다 : 여기서 한나라 대신은 주발(周勃)ㆍ진평(陳平) 등을 말하며, 아들 홍()은 한혜제(漢惠帝)의 아들 소제(少帝)를 말하며, 대왕 항(代王恒)은 한문제(漢文帝)를 가리킨다. 한혜제가 죽자, 여후(呂后 : 혜제의 어머니)가 그의 두 유자(幼子)인 공()ㆍ홍()을 세워 모두 소제(少帝)라 부르고 섭정을 하였으므로 모든 이권이 그의 친가인 여씨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여후가 죽자, 진평ㆍ주발 등이 여씨와 소제를 죽이고 대왕 항을 맞아다가 즉위하게 한 것이다. 《史記 呂后 本紀》

[D-008]《춘추(春秋)》에 ‘위인(衛人)이 …… 죽인 것인데 : 석작은 춘추시대 위()의 대부로 위장공(衛莊公)을 섬겼다. 그때 공자(公子) 주우(?)가 무기를 좋아하고 행실이 좋지 못했다. 석작이 그를 장공에게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후()가 또 주우와 가까이 놀므로 말렸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그래서 석작은 꾀를 써서 주우와 후를 진()에 가게 하였다. 그러자 위인(衛人)이 우재추(右宰醜)를 시켜 주우를 복(?)에서 죽였으며, 석작은 누양견(?羊肩)을 시켜 아들 후를 진에서 죽였다. 《左傳 隱公 3年》

[D-009]이성(異姓)의 당여가 …… 멸망시키는 것 : 여기서 이성 운운한 것은,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이 신씨(辛氏)이므로 고려의 국성인 왕씨(王氏)가 결국은 멸망된다는 뜻.

[D-010]폐하의 집안일 : 이 말은 본디 이세적(李世勣)이 당고종의 물음에 답한 말이며, 허경종의 말이 아닌데 여기서 그렇게 인용한 것은 아마 착각인 듯함. 《資治通鑑唐高宗 永徽 5

[D-011]오왕(五王)은 …… 죽음을 당함 : 당중종(唐中宗)은 반정 후 오왕을 그리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측천무후가 자기를 태자로 삼았으므로 어차피 차지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중종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가 무삼사(武三思)의 아들 숭훈(崇訓)에게 출가했는데, 그 연유로 무삼사가 궁중에 출입하게 되어, 중종의 비인 위후(韋后)와 불륜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짧은 기간 내에 장간지(張柬之) 등의 수중에 있는 정치 실권을 빼앗고, 그 후에는 이들 모두를 죽였다. 《資治通鑑 唐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