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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유고 서(若齋遺稿序) -삼봉집 정도전(鄭道傳)-

천하한량 2007. 6. 15. 01:01

약재유고 서(若齋遺稿序) 갑자년 이후 작임. 

 

 

도전(道傳)이 하루는 망우(亡友) 약재(若齋 김구용(金九容) 자는 경지(敬之))의 유고(遺稿) 몇 권을 얻어서 눈물을 지으며 읽고는 이내 붓에 먹을 묻혀서 그 책 머리에 쓰기를, ‘동국 시인 김경지(金敬之)의 소작이다.’하였다.

그 글씨가 끝나기도 전에 손님이 힐책하기를,

 

“김 선생의 학술과 행의(行義)가 어찌 시인에 그칠 뿐이겠는가? 선생은 명문[世族] 집 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였고, 학문에 뜻을 둔 뒤에는 포은(圃隱) 정공(鄭公 정몽주(鄭夢周))ㆍ도은(陶隱) 이공(李公 이숭인(李崇仁))ㆍ정언(正言) 이순경(李順卿) 등과 우의가 더욱 돈독하여 아침 저녁으로 강론하고 연마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 의리(義理)의 학이 이 두세 분으로 하여서 제창된 것이다.

국가에서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옛 제도를 경장(更張)하고 생원(生員)의 수를 더하여, 재상인 한산(韓山) 이공(李公 이색(李穡))을 사석(師席)의 맹주(盟主)로 하고 명유(名儒)들을 뽑아서 학관(學官)을 삼았는데, 선생이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직강(直講)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을 가지고 수업하는 자들이 앞에 열을 지었으며, 비록 휴가[休沐]중일지라도 질문하는 자들이 집에 잇달아 와서 많이 배우고 갔으니, 선생의 학술의 올바름이 어떠한가?

그리고 갑인(공민왕 23 1374)과 을묘(우왕 1 1375) 연간에 국가에 일이 많았는데 당시의 정승이 용사(用事)하므로, 선생이 글을 올려 그 잘잘못을 힘써 말하다가 답은 얻지 못하고 죽주(竹州 광주(廣州)의 속현임)로 정배(定配)되었으며, 준례에 의하여 외가인 여흥(驪興) 고을로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여강어부(驪江漁夫)’라 자호(自號)하고 그 거실에는 육우당(六友堂)

【안】 육우는 강()ㆍ산()ㆍ풍()ㆍ화()ㆍ설()ㆍ월()을 말한다.

이라고 편액한 다음, 강산(江山)과 사시(四時)의 풍경을 즐긴 것이 무릇 7년이었다.

국가가 그 풍의(風義)를 고상히 여겨 불러들여 간관(諫官)을 제배하였다가 얼마 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을 제수하였는데 언책(言責)과 관수(官守)가 둘 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또 선생은 사신[專對]이 될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에게 예를 드리게 하였는데, 때마침 명()은 조정의 명으로써 사교를 허하지 아니하고, 선생을 운남(雲南)에다 유치하게 하여, 길을 떠나 사천(四川)의 노주(濾州)에 이르러서 병으로 여사(旅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 신우 갑자년(1384)에 의주 천호(義州千戶) 조계룡(曹桂龍)이 요동에 가니, 도지휘(都指揮) 매의(梅義) 등이 속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 일에 늘 마음을 써서 도와주는데 너희 나라에서는 어찌 치사(致謝)를 않느냐.’는 말을 전해 듣고 신우가 구용(九容)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았다. 구용이 글을 받들고 요동에 가니, 매의와 총병 반경(潘敬) 등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는 사교가 없는 것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하고 포박을 지어 경사(京師)로 갔다. 그러자 황제가 대리위(大理衛)로 유배시켰는데 노주(濾州) 영녕현(永寧縣)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선생이 처음 길을 떠날 때부터 병들어 죽을 때까지 험난한 만리 길을 가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조금도 걱정하거나 애달파하는 기색이 전연 없었으며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내가 집에서 아녀자(兒女子) 손에서 죽었으면 누가 알 것인가? 지금 만리 밖에서 왕사(王事)를 수행하다 죽게 되어서 중국 사람까지 나의 성명을 알게 되었으니 죽을 곳을 얻었다 할 만하다.’ 하고는 집안 일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선생의 행의 높음이 어떠한가?

하였다.

도전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지마는 김경지의 학술과 행의는 사책[史牒]에 갖추어 실려 있고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으니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모두 알지 않겠는가?

그런데 시도(詩道)는 말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 오래이다. ()ㆍ송()이 폐기된 뒤로 시인의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이 성하였고, 소명태자(昭明太子) 의 《문선(文選)》이 행해지자 그 폐단이 섬약(纖弱)에 치우쳤는데 당()나라에 이르러 성률(聲律) 성률은 구본에는 율성(律聲)으로 되어 있음. 이 시작되면서 시체(詩體)가 크게 변하였으니 이태백(李太白)ㆍ두자미(杜子美)가 가장 탁월하다는 자이다.

()나라가 흥하여 진유(眞儒)가 쏟아져나와 경학과 도덕이 삼대(三代 하()ㆍ는()ㆍ주())를 따라갈 만하였다. ()에 있어서는 당률(唐律)을 계승해 받았으니, 근체시(近體詩) 라 하여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인데, 세상에서 시를 쓰는 자들이 혹은 그 소리만 얻고 그 맛은 잃기도 하며, 혹은 그 뜻은 있으나 그 문사(文詞)가 없으니, 과연 성정(性情)에서 나와 물()로써 흥()하고 유()로써 비()하여, 시인의 지취에서 어긋나지 않은 것은 거의 드물다고 하겠다. 중국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변두리 먼 곳이야 말할 나위나 있겠는가?

김경지의 외할아버지 급암(及菴) 민공(閔公 사평(思平))이 사학(詞學)을 잘하는데 더욱 당률(唐律)에 능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ㆍ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 같은 분들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김경지가 아침 저녁으로 곁에서 모셨으니 눈에 젖고 귀에 익어, 느끼고 열리어서 자득된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다.

도전이 일찍이 김경지가 시 짓는 것을 보았는데, 그 생각하는 것이 막연하여 사색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데 써놓은 것을 보면 넘쳐서 자득(自得)한 듯하였다. 그 시를 쓰는 데는 구름이 흐르고 새가 나는 듯하였으나, 그 시가 이뤄지면 청신하고도 아름다워서 자못 그의 인품과 유사하였으니, 김경지는 시도(詩道)에 있어서 가위 완성되었다 할 만하다.

고 하니, 손님이 옳다고 하여 마침 이를 써서 서문으로 삼는다.

 

 

[C-001]갑자년 : 고려 우왕(禑王) 10(1384).

[D-001]소명태자(昭明太子) :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장자로 이름은 통(). 그의 저서로 《문선(文選)》이 유명하다.

[D-002]성률(聲律) : 문자(文字)의 사성(四聲)의 규율(規律)을 말한다. 한시(漢詩)의 율()ㆍ부() 등을 이르는 말.

[D-003]근체시(近體詩) : 한시의 율시(律詩)ㆍ절구(絶句) 등을 가리킴. 그 자 수, () 수가 한정되어 있으며 평측(平仄)이 또한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고시(古詩)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운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