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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에게 올리는 소 -삼봉집 정도전(鄭道傳)-

천하한량 2007. 6. 1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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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에게 올리는 소 신미 4 [上恭讓王疏 辛未四月 ]

 

 

【안】 공양왕이 구언(求言)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덕을 닦음이 제일이고, 정치를 잘하는 요령은 바른말을 구하는 데 있다. 옛날에 송경공(宋景公)이 말 한 마디를 잘함으로써 형혹성(熒惑星) 3( 1사는 30)를 물러나게하였으니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감응(感應)하는 것이 이처럼 빠르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내가 조종(祖宗)의 영()에 힘입어, 신민(臣民)의 위에 있게 되어, 이른 아침 깊은 밤에 근심하고 힘써서 좀더 풍부하고 태평한 세상을 기필하려고 하지마는 지능(智能)이 미치지 못하고 학문이 밝지 못하여서 정치(政治)와 교화(敎化)에 있어 매양 방책이 없으니, 마치 큰 냇물을 건너는데 그 건너는 방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다가 요즈음 일관(日官)이 상언(上言)하기를, ‘천문(天文)이 경계를 보여서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을 범하고 화요성(火曜星)이 여귀성(輿鬼星)에 들어갔다.’ 고 하니, 변이(變異)가 매우 커서 조심되고 두려움이 더욱 심하다. 이는 나의 덕이 닦여지지 않아서 상제(上帝)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정령(政令)에 잘못이 있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지 못해서인가? 상벌[賞刑]의 방법이 정도에서 어긋나서인가? 사람을 임용(任用)함에 사정(私情)을 따라서인가? 아랫사람의 정이 위에 통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펴지지 못해서인가? 민폐(民弊)가 다 없어지지 않고 재용(財用)이 부당하게 소비되어서인가? 준수하고 특이한 재주로써 등용되지 않은 자 누구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내치지 못한 자 누구인가? 이와 같은 폐단을 어찌 나 한 사람이 두루 살필 수 있겠는가?

이에, 곧은 말 하는 길을 활짝 열어서 나의 총명을 가리는 폐풍을 없애겠다. 나무꾼[??]의 말도 채택할 만한 것이 있거늘, 하물며 경대부(卿大夫)ㆍ백집사(百執事)로서 천위(天位 하늘이 내려준 벼슬)를 같이 누리고 천록(天祿)을 같이 먹는 이들의 말이겠느냐? 이제 그대들과 함께 치화(治化)를 새롭게 하여 천심(天心)을 우러러 보답하고자 한다.

! 상벌(賞罰)이 밝고, 예악(禮樂)이 일어나며, 음양(陰陽)이 화하고 비바람이 철에 맞으며, 관리는 그 직무를 완수하고, 백성들은 그 생활을 즐겁게 하도록 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느냐? 이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말을 하더라도 다 말하지 않는다면 곧[]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그대들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모두 실봉(實封)으로 올려서 과인(寡人)의 과오와 시정(時政)의 득실, 그리고 민간의 이익과 폐해가 되는 것을 숨김없이 말하라. 그 말이 쓸 만하면 내가 즉시 상을 내릴 것이요 말이 적합하지 않더라도 죄는 주지 않을 것이다.

이 교서는 《고려사》에 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 정도전(鄭道傳), 삼가 교서에서, 상이 위로는 천문(天文)의 변이(變異)를 삼가시고, 아래로는 신서(臣庶)들의 바른말을 구하시며, 팔사(八事) 로써 자신을 책하시는 것을 읽었습니다.

신은 이 교서를 재삼 읽고 감탄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의 견고(譴告)를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시고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그 과실을 들으려고 하셨으니, 옛날의 밝은 임금이라 할지라도 이에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잘 보필하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군부(君父)께 근심을 끼쳐 드려서 이런 교유(敎諭)까지 내리게 하였으니,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일찍이 이르기를, ‘임금은 머리[元首]이고 신하는 팔다리[股肱].’ 하였으니,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실은 한몸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창도(倡導)하면 신하는 화답하고, 신하가 말을 하면 임금은 들어주어서 더러는 왈가왈부(曰可曰否)도 합니다만, 이는 옳은 정치를 기필하자는 것뿐입니다. 그러하다면 하늘의 견고는 신 때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재이(災異)가 있으면 삼공(三公)이 사면을 꾀했으며, 대신도 자리를 피하여 덕 있는 이에게 양보(讓步) 어떤 본에는 양()으로 되어 있음. 를 했으니, 청컨대 신의 직위도 해면시켜서 재해를 그치게 하소서.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니, 옛날의 대신들은 물러가기를 청할 때에는 반드시 임금에게 진계(陳戒)하는 말이 있었는데, 더군다나 지금은 교서까지 받들고서 어찌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어리석음일지라도 만의 하나 채택하여 쓰시도록 올리지 않을 수 있으리까?

삼가 교서를 읽어 보니, ‘나의 덕이 닦아지지 않아 상제(上帝)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정령(政令)에 잘못이 있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지 않아서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란 얻는 것[]이니 마음에 얻어지는 것을 말하며, ()이란 바루는 것[]이니 자신을 바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덕이란 것은 품부(?) 초에 얻어지는 것도 있고, 수양을 쌓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대도(大度)가 너그러우시고 천성(天性)이 자애로우시니 품부 초에 얻어진 것은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평일에 글을 읽어 성현의 성법(成法)을 고찰하지 않으시고, 일을 처리하여 당세의 통무(通務)를 알지 못하시니, 어떻게 덕이 닦아지고 정령에 잘못이 없겠습니까?

한성제(漢成帝)는 조회에 임할 때에 침착하고 아늑하여 인군의 도량이 있었으나 한나라가 망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없었으며, 양무제(梁武帝)는 사형수를 대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먹지 않아 인자하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강남(江南)의 난리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한갓 천질(天質)의 아름다움만 있고 덕정(德政)의 닦음이 없어서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품부(?)의 아름다움을 자부하지 마시고 수양이 이르지 못한 점을 경계하소서. 그러면 덕이 닦여지고 정령이 시행될 것입니다.

또 교서(敎書)를 읽으니, ‘사람을 임용(任用)함에 있어 사정을 따라서인가? 상벌의 방법이 정도에서 어긋나 그런가?’하고 하셨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임용된 사람이 공정하게 선발되었느냐, 사정에서 나왔느냐는 전하께서 스스로 알고 계실 것이지, 신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제목(除目 관리를 임명하는 조서(詔書). 발령장)이 내려오면 외인(外入)들이 그것을 보고 지적하기를, ‘누구는 친구이고 누구는 외척(外戚)이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바깥 의논이 이러한 것으로 보아서 신은 사정에 따른 것이 섞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상()이란 공 있는 이를 권장하는 것이며, ()이란 죄 있는 이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천명(天命), ()을 천토(天討)라고 하니, 이는 하늘이 상을 주고 형을 주는 권리를 인군에게 주어 인군이 하늘을 대신하여 행할 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이나 형은 비록 인군에게서 나간다손 치더라도 인군이 마음대로 내고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상()을 받고 형()을 받은 사람들이 같은 사건인데도 다르게 처리된 자가 있으니, 김저(金佇)의 말이 한 가지인데,

【안】 이에 앞서 신우(辛禑)를 여흥(驪興)으로 귀양보냈다. 대호군(大護軍) 김저(金佇)는 최영(崔瑩)의 생질이었는데, 전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와 몰래 신우를 가서 보았다. 그러자 신우는 울면서 하는 말이, “역사(力士) 하나를 얻어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李成桂))을 해치우면 우리 일이 잘 될 것이오.” 하며 칼 하나를 내어 주었다. 그래서 김저는 곽충보(郭忠輔)를 시켜 거사하게 했으나 충보는 거짓 응낙하고서 우리 태조[我太祖 : 이태조]에게 고하였다. 그래서 김저를 가두고 국문하니, 김저는 “변안열(邊安烈)ㆍ이임(李琳)ㆍ왕안덕(王安德)ㆍ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우홍수(禹洪壽) 등과 공모하여 신우를 맞아오려는데 왕이 내응(內應)하기로 했다.”고 말하였다.

극형(極刑 사형)에 처한 자가 있는가 하면 발탁해서 쓴 자도 있으며.

【안】 변안열은 죽이고 왕안덕은 판삼사사(判三司事)로 발탁하였다.

김 종연(金宗衍)이 감옥에서 탈출한 것이 한 가지인데,

【안】 김종연의 일은 부록(附錄) 사실(事實)에 보인다.

그 감옥을 지킨 관리를 한 사람은 베고 한 사람은 기용하였으며,

【안】 그때 종연(宗衍)이 도망쳤는데 체포하지 못하자, 감시를 엄하게 못하였다는 이유로 당직(當直)한 영사(令史)는 베고, 순무(巡撫) 이사영(李土穎)은 순군(巡軍)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석방하여 임용하였던 것이다.

도피(逃避)해 있으면서[] 어떤 본에는 재()자가 두 번 있음. 난리를 도모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같이 꾀하고 용접(容接) 어떤 본()에는 접()자가 은()으로 되어 있음. 한 사람들이 혹은 살고 혹은 죽었습니다.

【안】 산 사람은 우현보(禹玄寶) 등이며 죽은 사람은 윤유린(尹有麟)ㆍ최공철(崔公哲) 등이다.

어리석은 신으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형을 받고서 죽은 자가 죄가 있었다면 발탁되어 쓰인 자는 무슨 다행이며, 발탁되어 쓰인 자가 죄가 없어서라면 형을 받고 죽은 자는 무슨 죄이옵니까?

()ㆍ창()은 우리 왕씨(王氏)의 왕위를 빼앗았으니 실로 조종(祖宗)의 죄인입니다. 왕씨의 자손이나 그 신서(臣庶)라면 다 원수로 여겨야 할 바이므로, 그 친족이나 당여(黨與)는 형으로 베지 않는다면 사예(四裔 사방의 국경)로 내쳐야만 인신(人神)의 마음을 상쾌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무재인(武才人) 은 당고종(唐高宗)의 왕후로서 그 아들 중종(中宗)의 자리를 빼앗았는데도, 오왕(五王)이 거의(擧義) 하여 무씨(武氏)를 물리치고 다시 중종을 복위시켰습니다. 무씨(武氏)는 어머니이고 중종은 아들이니 친어머니가 아들의 자리를 빼앗았는데도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는 오히려 오왕이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무씨와 그의 종족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을 기롱하였습니다.

하물며 우()ㆍ창()은 왕씨와는 무씨(武氏)처럼 친족의 관계도 없고, 무씨의 죄가 있으니, 그의 친족과 당여(黨與)에 대해서는 무씨의 종족처럼 다스려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대간(臺諫)의 상언(上言)으로 그들을 밖으로 유배시켰으니,

【안】 공양왕 기사년(1389)에 간관이 이색(李穡) 등의 죄를 논하여 밖으로 유배시켰다.

비록 천주(天誅)를 밝게 보이지는 못했지만 조종(祖宗)과 신서(臣庶)의 설분이 조금은 되었다고 하겠사오나, 몇 달이 되지 않아 그들은 모두 소명을 받고 경성(京城)에 모여서 출입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간관의 말을 들어 몇 사람 방축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억지로 따르시어 망설이고 애석해하는 뜻이 있었으니, 이러하시는 것이 어떠한 뜻에서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모든 장수가 회군(回軍) 한 뒤에 왕씨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화() 구본에는 과()로 되어 있음. 를 뉘우치고 조종(祖宗)이 가만히 왕씨가 부흥할 기회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어늘, 그 의논을 저해하여 마침내 아들 창()을 세워서 왕씨를 부흥하지 못하게 한 자가 있으며 이색(李穡)을 가리킴. 신우(辛禑)를 맞아다가 길이 왕씨를 끊어버리려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는 난적(亂賊)의 무리로서 왕법(王法)에 용납되지 못할 바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목숨을 살리셨으면 먼 곳에 방치하는 것이 옳을 일인데, 이제 모두 집으로 소환하여 위안시키시어,

【안】 공양왕 경오년(1390)에 우현보(禹玄寶)ㆍ이색(李穡) 등을 사면하여 마음대로 살게 하였다.

그 죄가 무함인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 왕씨를 저해하고 가짜 창()을 세우려던 것은 여러 장수가 다 아는 일일 뿐더러, 직접 자복(自服)하여 명확한 증거가 있으며, 그 신우(辛禑)를 맞이하여 왕씨를 끊으려 한 것은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가 앞서 말하였고, 이임(李琳)ㆍ이귀생(李貴生)이 뒤에 초() 어떤 책에는 초()가 상()으로 되어 있음. 하여 승복한 증거가 확실합니다. 그래도 이것을 무함이라고 이른다면 천하에 토죄할 만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하는 바란, 공의(公議)에 알맞지 않으면 반드시 사정(私情)에 합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일을 공의에 알맞다고 한다면 우ㆍ창의 무리는 모두가 조종의 죄인일 것이며, 사정에 합하다고 한다면 우ㆍ창의 무리를 머물게 해서 뒷날에 걱정 끼치기를 마치 윤이(?)ㆍ이초(李初)가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이러던 것과 같을 것인데 무엇이 인정에 편하겠습니까?

혹시, ‘죄 있는 자를 놓아주면 그 은혜가 막대하므로 뒷날 반드시 그의 힘을 입을 것이요, 그러하면 인심도 저절로 편안해져서 화란(禍亂)도 저절로 그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형법(刑法)이란 어지러움을 금하는 것이며, 임금이 이를 믿고서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형법이 만일 한번 흔들리게 되면 어지러움을 금하는 기구가 먼저 무너져서 힘을 얻기 이전에 재화가 먼저 이르고, 마음이 편안하기 이전에 어지러움이 그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당중종(唐中宗)과 무삼사(武三思)의 일을 들어서 밝히려 하옵니다. 무씨(武氏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무리에서 가장 용사(用事)를 한 자가 삼사(三思)인데, 중종은 어머니의 친조카라 하여 벌주지 아니하고 대우가 심히 두터웠습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오왕(五王)이 무씨의 아들(중종을 이름)을 세워서 황제로 삼았기 때문에 삼사가 도마 위에 놓인 고기 형세를 면한 것이니, 오왕은 비단 중종에게만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삼사에게도 천지에 재조(再造)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사는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서, 스스로 그 죄악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까 의심하여, 밤낮으로 오왕을 참소하기를, ‘권세가 중하고 공로를 믿는다.’ 하여 중종의 마음을 의혹하게 했습니다. 중종은 삼사가 자기를 사랑한다 하여 친근히 하고, 오왕은 권세가 중하다고 하여 꺼려했으므로 오왕은 날로 소원해지고 삼사는 날로 친밀하게 되었는데, 끝내는 삼사에게 오왕은 죽고 중종은 시해(弑害)당했습니다. 설사 중종이 그릇된 시책을 했다 하더라도 공신(오왕)을 보전하지 못함에 불과할 뿐 자신이 삼사의 손에 시해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친족으로 따지면 어머니의 조카요, 은혜로 따지면 목숨을 살린 터인데, 그의 힘은 얻지 못하고 화만 입었으니, 참소하는 자의 마음이란 믿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참소하는 자의 계책은 그 처음에는 자기의 몸을 보전하려는 데에 불과하지만, 악한 짓을 그치지 않고 한다면 그 방법에 익숙하여 남의 몸을 망치고 남의 집과 나라를 멸하며,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패하고 마는 것이니, 삼사와 같은 자는 어찌 고금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하늘과 사람의 관계란 털끝만큼도 사이가 날 수 없어서, 길흉(吉凶)ㆍ재상(災祥)이 각각 유()로써 응하는 것입니다. 지금 안으로는 백관이 알맞은 직을 받고 서민들은 편안히 종업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중국[上國]이 화통(和通)되고 섬 오랑캐(일본을 가리킴)가 굴복하였으니, 어지러움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본디 참소하는 사람이 아래에 얽혀져 있으면 걱정하는 형상이 위에서 나타나는 것이오니,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에 침범한 것은 신은 삼사(三思)가 옆에 있어서가 아닐까 두렵고, 화요성(火曜星)이 여귀성(輿鬼星)에 들어감은, 신은 삼사의 화가 끝내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등은 비록 오왕(五王)같은 해를 당한다손치더라도 족히 근심될 것이 없사오나 왕씨의 이룩된 왕업을 생각하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혹 ‘이런 일이 결코 없는데 말하는 자가 망령되어서다.’고 하실지 모르나 저 중종의 마음엔들 어찌 굳힌 바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후인의 조소를 샀으니, 신은 후인이 현재를 비웃을 것이 지금에 옛날을 조소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천심(天心)은 인군을 사랑하기 때문에 먼저 재이(災異)를 내려 경고하니, 이는 두려워하여 반성하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등용하고 형벌을 내릴 때에, 그 친소나 귀천을 따지지 말고 하나같이 공ㆍ죄(功罪)의 유무로써 처리하여 각기 공평하고 서로 넘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하면 임용(任用)이 공정하고 상벌이 바르며, 인사(人事)가 잘되고 천도(天道)가 순할 것입니다.

삼가 교서를 읽건대, ‘민폐가 제거되지 않고 재용이 부당하게 소비되어서인가?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미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펴지지 못해서인가? 뛰어난 재주로써 등용되지 않은 자 누구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내치지 못한 자 누구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듣건대, ‘삼사(三司 고려 때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會計)를 맡아보던 관아) 회계(會計)에서 불신(佛神)에 관한 비용이 가장 많았다.’고 하니 재용을 망령되게 허비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의 해()는 예부터 분변하기가 어렵습니다. 불도(佛徒)들은 이르기를, ‘이는 좋은 일이고 착한 일이어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자는 나라가 부()할 수 있으며, 백성이 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임금된 자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그 재력(財力)을 다하여 부처에게 아첨하여 섬깁니다.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곧 대답하기를, ‘나의 부처 섬김에 대해 저가 그르다고 하니, 나는 착하고 저는 악하며, 나는 도()이고 저는 마귀이다. 내가 부처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백성을 오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고 합니다. 이 말을 가지고 그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사람의 말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도량(道場)이 궁궐보다 높았고 법석(法席 설법하는 회합의 자리)을 절[佛宇]에 상설했으며, 도전(道殿)의 기도가 무시로 있었고 무당(巫堂)의 제사가 번거롭고 어지러웠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고 실상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이며, 이것이 나라를 부()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고 실상은 나라가 메마르게 되는 것을 몰라서이며, 이것이 백성의 수명을 오래 살게 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백성이 궁곤해짐을 알지 못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말씀을 드리는 자가 있더라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올바른 말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신이 말한 ‘착한 일이다. 복이 된다. 수명이 연장된다.’는 등의 말이 먼저 머리에 들어가 있어서입니다.

옛날 양무제(梁武帝)는 만승(萬乘) 천자의 몸을 굽혀서 세 번이나 몸을 바쳐 절집의 종[]이 되었으며, 강남(江南)의 재력을 탕진시켜서 불탑(佛塔)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 마음에 어찌 이롭지 않다고 여기고서 구차하게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마는, 한 필부(匹夫 후경(侯景)을 가리킴)가 난()을 일으키매 몸이 욕을 당하고 자손을 보전하지 못하여 국가가 따라서 망하였으니, 불씨(佛氏)의 이른바, ‘선()을 닦아 복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다른 세대(世代)의 일이라 하겠습니다만, 공민왕[玄陵]께서도 불교를 숭상하여 친히 중들에게 제자(弟子)의 예를 행하셔서 궁중의 백고좌(百高座) 와 연복사(演福寺)의 문수회(文殊會) 등이 없는 해가 없었으며, 운암(雲菴)의 단청[金碧]은 산골을 비추고 영전(影殿)의 기둥은 하늘에 솟구쳐서 재력이 역갈(力竭) 역갈(力竭)이 구본에는 갈력(竭力)으로 되어 있음. 되고 원망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아랑곳없이 부처를 섬겼으니 가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 끝내는 복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밝은 전감(前鑑)이 아니겠습니까?

()나라 말기에 신()이 유신(有莘)의 땅에 내리니, 태사(太史) ()가 이르기를, ‘장차 흥할 국가는 사람에게 맡기고, 장차 망할 국가는 신에게 맡긴다.’고 하였다더니, 주나라가 과연 망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하더라도 부처를 섬기는 것이나 신을 섬기는 것은 이익이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사(有司)에게 거듭 명하여 사전(祀典)에 기재된 것을 제외하고는 중외(中外)의 모든 음란하고 더러운 일들을 일체 금단하소서. 그리하면 재용이 절약되고 망령되게 허비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사람이 혹 죄를 범할지라도 불문에 붙이기도 하고 방면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한 자로 신원되지 못한 자는 없는 듯하오나, 사면이란 본시가 간인(姦人)에게는 다행한 일이지만 선인(善人)에게는 적()이 되는 것이고 보면, 자주 사면을 하는 것이 바로 원통하고 억울한 것의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대간(臺諫)이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글로 올려 논집(論執)하다가 모두 추방을 당하였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신원되지 못하고 뛰어난 재주가 뽑혀지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이란 그 자취가 숨겨지고 언어가 은밀하여서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허물이 있을 때에 밝게 다투고, 남이 죄가 있을 때에는 면대(面對)하여 꺾으며, 세정과 뜻이 맞지 않고 우뚝이 홀로 서서, 다른 사람의 의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바른 선비이고, 그의 종적을 감추어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말하지 않았다가 홀로 임금을 대할 적에 고자질하는 자가 간사한 사람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밖으로 사대부(士大夫), 안으로는 소신(小臣)ㆍ환시(宦寺)를 시험삼아서, 신의 말로써 참고하여 보신다면 그 간사한 속셈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모두 자기는 사랑할 줄 알며, 그 처자의 생계를 위하는 그런 마음이야 누가 없겠습니까? 옛날 한성제(漢成帝) 때에 일식(日食)의 변이 있었는데, 언관(言官)들이 모두 외척(外戚)이 용사(用事)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자, 성제는 의문이 나서 장우(張禹)에게 물었습니다. 장우는 자신이 늙고 자손들이 미약하니, 사실대로 말하면 외척에게 혹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그 까닭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왕망(王莽)에게 한() 황실(皇室)이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곡영(谷永)의 무리들은 성제에게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곧장 공격하면서도 왕씨(王氏)의 용사(用事) 에 대해서는 두려워 피하고 말하지 않다가 한실(漢室)이 마침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 처자들을 위하여 계책을 하느라고 한실에는 겨를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안】《고려사》 본전(本傳)에는 ‘숙무시심(孰無是心)’ 아래에 ‘석한성제(昔漢成帝)’ 이하의 48자가 있는데 본집(本集)에는 빠져 있으므로 지금 첨입하였다.

신이 비록 광망(狂妄)하오나 풍병(風病)은 들지 않았는데 어찌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홀로 뭇 원망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으니, 이 말이 나가면 화가 이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숨기지 않으시고 물으시니, 신이 감히 바른말로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곧 신이 화를 얻어 자신이 구원되지 못하더라도 간절하게 말씀드리고 숨기지 않는 까닭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여기에 두시어 채택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신이 몸을 잊고 공사에 힘쓴다는 뜻을 살펴주신다면 천만 번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C-001]신미 : 고려 공양왕(恭讓王) 3(1391).

[D-001]송경공(宋景公)이 …… 3()를 물러났다 : 형혹성은 화성(火星)의 별명으로서 이 별이 나타나면 큰 병란 등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춘추시대 송()의 분야에 형혹성이 나타나 임금 경공(景公)이 이를 근심하자, 사성 자위(司星子韋)가 그 재앙을 정승이나 백성, 또는 연세(年歲)에 옮길 수 있다고 했다. 경공은, ‘정승은 나의 팔다리고, 백성은 내가 의지하는 바이며, 연세는 흉년이 들면 백성이 곤궁해지니 옮길 수 없다.’ 고 했다. 그리하자 자위는 경공이 ‘임금다운 말 세 마디를 했으니 하늘이 반드시 감동할 것이다.’ 고 하였는데, 과연 형혹성이 1()를 옮겨갔다 한다. 《十八史略 宋紀》

[D-002]팔사(八事) : 공양왕의 구언 교서(求言敎書)에 제시한 여덟 가지 일.

[D-003]강남(江南)의 난리 : 양무제(梁武帝) 재위 48년 중 그 전기는 남조(南朝)의 성세였으나 만년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정치가 부패했다. 그래서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막으러 보낸 무제의 조카 정덕(正德)이 후경과 내통했다. 그래서 무제는 근심과 분함을 못이겨 병이 되어 굶어 죽고 말았다. 《資治通鑑 梁紀》

[D-004]무재인(武才人) :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이름. 재인(才人)은 여관(女官)의 명칭으로 한ㆍ위(漢魏) 이후 삼부인(三夫人) 이외에 재인이 있었음. 측천무후는 미모가 뛰어나 14세 되던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1(637)에 재인으로 입궁하였고, 그 후 고종(高宗)의 사랑을 받아 황후 왕씨를 몰아내고 황후가 되었음. 후에 아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황제 위를 빼앗았다. 《資治通鑑 唐紀》

[D-005]오왕 거의(五王擧義) : 당중종(唐中宗) 때 장간지(張柬之)ㆍ최현위(崔玄暐)ㆍ경휘(敬暉)ㆍ환언범(桓彦範)ㆍ원서기(袁恕己) 등이 측천무후가 병이 들어 수개월을 조정에 나오지 못하자 이들이 거의하여 중종을 복위시켰다. 《資治通鑑 唐紀》

[D-006]회군(回軍) : 위화도(威化島) 회군을 이름. 고려 우왕(禑王) 14(1388) 5월에 명()을 치려고 압록강 중류의 위화도에 출정하였을 때 홍수ㆍ질역(疾疫)의 이유로 왕명과 최영(崔瑩)의 진군 명령을 거역하고 우군 도총사(右軍都總師) 이성계(李成桂)가 조민수(曹敏修)와 함께 군사를 돌려 평양ㆍ개경(開京)으로 역전(逆轉) 진군한 일. 회군한 후 최영은 유배되고 왕을 강화(江華)로 내쫓고 우왕의 아들 창()을 즉위시켰다.

[D-007]윤이(尹彛)ㆍ이초(李初)가 …… 움직임 : 공양왕 초에 파평군(坡坪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가 명()의 힘을 빌어서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고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에게, “이성계가 공양왕을 세웠으나 종실(宗室)이 아니라 그의 인친(姻親)이며, 또 명을 치려고 하여, 이에 반대한 이색(李穡)ㆍ우현보(禹玄寶) 등이 화를 당했습니다.”라고 무고한 일. 이 사실이 당시 명에 갔던 순안군 방(順安君昉),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조반(?) 등에게 알려져, 공양왕 2(1390)에 크게 옥사(獄事)가 벌어졌다. 그래서 이색ㆍ우현보 등 수십 명이 순군옥(巡軍獄)ㆍ청주옥(淸州獄)에 갇히는 이른바 이초(彛初)의 옥()이 일어났다.

[D-008]백고좌(百高座) : 국난(國難)이 있을 때 베풀어, 고승(高僧) 1백 인이 백불상(百佛像)을 모시고 〈인왕 반야 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密經)〉을 강독함. 이는 국토 내의 수호신을 위로해주는 법회(法會), 이를 행하면 만민이 안락하고 국토가 안온하다 하였다.

[D-009]문수회(文殊會) : 문수보살을 찬양하는 법회. 문수보살은 석존(釋尊)이 입적한 후에 인도에 나와서 반야 대승(般若大乘)을 선양한 실제의 보살 이름.

[D-010]왕씨(王氏)의 용사(用事) : 한성제(漢成帝) 19세에 즉위하여 친정(親政)의 능력이 없자, 외구(外舅)인 왕봉(王鳳)이 보정(輔政)했다. 왕봉이 죽고도 왕음(王音)ㆍ왕상(王商)ㆍ왕근(王根) 등이 차례로 권력을 쥐었으며, 왕근이 죽은 뒤에는 그 조카 왕망(王莽)이 끝내는 황제의 위까지 찬탈했다. 《資治通鑑 漢成帝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