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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권근(權近) -삼봉집 정도전(鄭道傳)-

천하한량 2007. 6. 15. 00:53

삼봉집 서(三峯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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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근(權近)

 

 

문자가 천지의 사이에 있어, 사도(斯道)와 서로 운명을 함께하므로 도가 위에서 시행되면 문장이 예악(禮樂)과 정교(政敎)의 사이에 나타나고, 도가 아래에서 밝아지면 문장이 서적(書籍)과 필삭(筆削)에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모(典謀)ㆍ 서명(誓命) 의 문()에나 산정(刪定)ㆍ찬수(贊修)한 서()에나 도가 실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나라가 쇠약해짐에 따라 도마저 감추어 버리니, 백가(百家)가 한꺼번에 일어나 각기 자기의 학술로 세상을 울리게 되어 문()이 비로소 병들기 시작했다. ()나라 사마천(司馬遷)ㆍ양웅(揚雄)의 무리마저도 그 말이 오히려 순아(淳雅)하지 못했던 것이다.

급기야 불씨(佛氏)가 중국에 들어오자 사문(斯文)은 더욱 병들었으며, 위ㆍ진(魏晉) 이후로는 더욱 황폐하여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나라에 와서야 한유(韓愈)가 인의를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쳐 팔대(八代)의 쇠퇴를 일으켰고, ()나라가 흥기하여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글이 나온 뒤에야 도학이 다시 밝아져서 사람들이 모두 우리 도의 큰 점과 이단의 그른 점을 알게 되었으니, 후학에게 개시(開示)하고 만세에 밝혀 놓은 그 공은 진실로 거룩하다 하겠다.

우리 나라가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기자(箕子) 팔조(八條)의 가르침으로부터 풍속은 염치를 숭상하고, 문물의 아름다움과 인재의 작흥(作興)이 저 중국과 견줄 만하였다.

이로부터 대대로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과거(科擧) 제도를 만들어 선비를 뽑되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훈도(薰陶) 성취하여 수백 년을 내려왔다. 그래서 경()ㆍ사()ㆍ대부(大夫)의 사이에 학문하는 무리가 아주 성했던 것이다.

우리 집안 문정공(文正公 부())이 비로소 주자사서(朱子四書)로서 입백(立白),

 

【안】 입백(立白)은 당연히 건백(建白)으로 해야 되는데 고려 태조의 휘()를 피한 것이다.

간행하여 후학을 권장하자 그 사위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 이 문충공(李文忠公)이 스승으로 섬겨 친히 배워 의리의 학을 제창하여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었다.

그리고 가정(稼亭 이곡(李穀))ㆍ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제공이 따라서 흥기시켰으며, 담암(澹庵) 백공(白公 문보(文寶))이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데에 더욱 힘을 썼다.

우리 좌주(座主)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일찍 가훈을 받들어 벽옹(??)에 입학함으로써 정대정미(正大精微)한 학문을 이루었으며, 돌아오자 유림들이 다 존숭하였으니, 이를테면 포은(圃隱) 정공(鄭公 정몽주(鄭夢周))ㆍ도은(陶隱) 이공(李公 이숭인(李崇仁))ㆍ삼봉(三峰) 정공(鄭公 정도전(鄭道傳))ㆍ반양(潘陽) 박공(朴公 박상충(朴尙衷))ㆍ무송(茂松) 윤공(尹公 윤소종(尹紹宗)) 등이 모두다 승당(升堂)한 분들이었다.

삼봉은 포은ㆍ도은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강론하고 갈고 닦아 더욱 얻은 바 있었고, 항상 후진을 가르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아 왔다.

그 시서(詩書)를 강의함에 있어서는 능히 알기 쉬운 말로써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배우는 자가 한 번 들으면 바로 의()를 깨달았으며, 그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능히 그 글에 정통하여 먼저 그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서 마침내 그 그른 점을 지적하므로 듣는 자가 다 굴복하였다.

이 때문에 경서를 들고 종유하는 자가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따라 배워서 현관(顯官)의 자리에 오른 자도 어깨를 견주어 서게 되었고, 비록 무부(武夫)와 속사(俗士)라도 그 강설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부도(浮屠 불교)의 무리들까지도 따라서 향화(向化)한 자가 있었다.

그리고 예악(禮樂)ㆍ제도(制度)ㆍ음양(陰陽)ㆍ병력(兵歷)에 이르기까지 정밀히 해득하지 않은 것이 없어, 팔진(八陣) 을 조()로 삼아 36()의 보()를 만들고, 태을(太乙 진()의 이름)을 요약하여 72()의 도()를 짓되, 간략하면서도 곡진하여 세상의 명장과 술사들이 모두 좋게 여겼다. 그러나 이는 다 선생에게는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았다.

선생은 절의가 심히 높고 학술이 가장 정하여, 일찍이 바른 말로 세상의 비위를 거슬려 남방으로 유배된 지 10년이 되었으나 그 뜻을 변하지 않았으며, 공리(功利)의 도당과 이단의 무리가 떼지어 업신여기고 무리를 지어 비방했지만 그 지킴이 더욱 굳건하였으니, 선생이야말로 도를 믿음이 독실하여 현혹되지 않는 분이라 이르겠다.

선생의 저술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약간 편이 있어 의리의 정함이 일목요연하여 능히 전현(前賢)이 발명(發明) 못한 바를 다 발명하였으며,

《잡제(雜題)》 약간 권은 신심(身心)ㆍ성명(性命)의 덕을 근본하고 부자ㆍ군신의 윤기(倫紀)에 밝아, 크게는 천지와 일월, 작게는 조수(鳥獸)와 초목까지도 이치가 이르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이 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왕국(王國) 사명(辭命 외교 문서)의 문은 전아하여 체제를 얻었으며, 고율(古律)을 지음에는 위ㆍ진(魏晉)을 승습하고 성당(盛唐)을 따랐으나 이취(理趣)는 아송(雅頌)에서 나와,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지고 온화하면서도 담담하여 진실로 옛사람에게 손색이 없었다. 또 악부소서(樂府小序)에 있어서도 번란(繁亂)과 음벽(淫僻)을 산삭(刪削)하고 오직 성정의 바름에서 감발된 것만을 기록했다.

아아, 선생의 문은 다 명교(名敎)에 보탬이 있으며 공언(空言) 따위에 비할 바 아니니 이는 그 도와 아울러 후세에 유전하여 썩지 않을 것이 의심할 바 없다.

비록 소국에 나서 그 문장이 중국 성세(盛世)의 전모(典謀)에 씌어지지 못했으나,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조회하는 동안 요해(遼海)에 배를 띄우고 제ㆍ노(齊魯)를 지나면서 지은 그 시와 문이 다 중국 문사가 가상히 여기는 바 되었다.

이는 능히 문장으로써 한 지방을 울리어 동점(東漸)의 정화(政化)를 찬송 선양한 것인 동시에, 동쪽 사람으로 하여금 만세에 노래하여 성대(聖代) 치도(治道)의 융성과 더불어 영원토록 전해질 것도 역시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은 비록 재주 없는 몸이지만 다행히 종유(從遊)의 반열에 참여하여 여론(餘論)을 들은 바 있고, 또 다행히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아 서()를 명하였기 때문에 감히 책머리에 쓰는 바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성균대사성 진현관 제학 지제교(成均大司成進賢館提學知製敎) 권근(權近)은 서함.

 

[D-001]전모(典謨) : 《서경(書經)》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 2전과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의 모()를 말한다.

[D-002]서명(誓命) : 《서경》의 문체명. 서는 군대나 신하를 경계하는 문이며, 명은 임금이 신하에게 명령하는 문이다.

[D-003]팔대의 쇠퇴 : 팔대는 동한(東漢)ㆍ위()ㆍ진()ㆍ송()ㆍ제()ㆍ양()ㆍ진()ㆍ수()를 이름.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문은 팔대의 쇠퇴기에 일어났다[文起八代之衰].”란 말이 보인다.

[D-004]좌주(座主) : 과거에 합격할 때의 시관을 좌주라 칭하고, 자신은 문생(門生)이라 했다.

[D-005]벽옹(??) : 고대 학궁(學宮)의 명칭. 태학(太學)을 가리킨다.

[D-006]팔진(八陣) : 전장의 진()을 말함. 《잡병서(雜兵書)》에 1방진(方陣), 2원진(圓陣), 3빈진(牝陣), 4모진(牡陣), 5충진(衝陣), 6윤진(輪陣), 7부저진(浮沮陣), 8안행진(?行陣)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