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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서원(文獻書院)에 대한 기 -백사 이항복(李恒福)-

천하한량 2007. 6. 15. 00:42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대한 기

 

 

  옛날 무왕(武王)이 주()를 정벌할 적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왕업을 협찬하였는데, 백이(伯夷)는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고, 광무제(光武帝)가 천명을 받을 적에 경감(?)과 가복(賈復) 은 공훈을 세웠는데, 자릉(子陵) 은 창파(滄波)에서 낚시질만 하였다.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뜻만 지키거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거나 하여, 선비가 각각 뜻이 다른 것이니, 어찌 한 가지 관례로만 보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고죽(孤竹) 의 청풍(淸風)은 십란(十亂) 을 능가하기에 손색이 없고, 동강(桐江) 의 기절(奇節)은 운대(雲臺)의 공신(功臣)을 능가하여 광채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 은자(隱者)가 도리어 드러나고, 달자(達者)가 도리어 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은현(隱顯)과 궁달(窮達)은 몸에만 관계될 뿐, 이름에는 관계되지 않는 것인가? 혹은 그 모두가 하늘에 관계될 뿐이요 몸과 이름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하늘의 뜻은 마치 주() 나라 조정에 풍절(風節)을 수립한 이는 반드시 상() 나라의 유로(遺老)이고, 지존(至尊)을 오시(傲視)하여 두려움이 없는 이는 반드시 미천하던 때의 친구인지라, 그러므로 주() 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누워서 성상(星象)을 움직이어, 그 의리를 수립하고 그 고상한 뜻을 성취함으로써 비록 전조(前朝)에 절의(節義)를 바쳤다고는 하나, 실상은 또한 신국(新國)에 교훈을 내린 것이라고 한 듯하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들의 풍도를 들은 이로서 마치 유장(?) 이로(二老)의 의리나 당고(黨錮) 제현(諸賢) 의 절의와 같은 경우는 모두 소종래(所從來)가 있어, () 나라와 한() 나라의 빼칠 수 없는 공고한 기반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혹 은()하거나 현()하여 자취는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을 수립하여 후세에 전해서 똑같이 국가를 유익하게 한 것은 한가지인 것이다.

이런 경우야말로 의당 십륜(十倫) 의 서열에서 두번째에 위치하고, 오사(五祀) 에 짝하여 아름다움을 나란히 해야 할 터인데, 서학(西學) 에 자리하여 영화를 누리고 보답을 받는 데에 대하여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성조(聖祖)께서 천명에 응하여 도록(?)을 장악함으로써 요() 임금은 선위(禪位)하고 순() 임금은 전해받았는데, 그 때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 이공(李公)이 있었으니, 그가 천승(千乘)의 군주에게 길이 읍()하고 영원히 떠나 버린 것은 옛 친구가 왕의 배 위에 발을 얹은 것과 같은 고상함이요, 한 번 죽는 것을 마치 헌신짝 벗어 버리듯이 한 것은 상() 나라의 유로(遺老)가 굶어 죽은 것과 같은 의리인 것이다.

조선(朝鮮)은 열사(烈士)가 많다고 호칭하는바, 무릇 큰 위난(危難)이 있을 적에는 선비로서는 대부분 웅어(熊魚)를 취사(取舍)하는 분별을 알아서 매양 의리를 지키어 만사를 불고(不顧)했던 것이 바로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던가. 그렇다면 의당 그 덕을 수립하고 교훈을 내린 공으로 말할 때 고인(古人)에 견주어 누가 더 중()하고 경()하겠는가?

지금 보록(譜錄)을 상고하건대,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호) 문효공(文孝公)이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을 낳았고, 목은 문정공이 인재공(麟齋公 이종학(李種學)의 호)을 낳았으며, 또 오대(五代)에 이르러 음애공(陰崖公 이자(?)의 호)이 탄생하여, 대가 장덕(大家長德)이 보록에 끊이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한산(韓山)에는 군자가 많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로다.

목은의 묘()가 한산군(韓山郡) 서쪽 기린산(麒麟山) 아래에 있는데, 상서(尙書) 이성중(李誠中)이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있을 때에 그 묘 밑에 사당을 세우고 편액(扁額)을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그런데 임진년 난리통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현재 사대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후손들 가운데 각각 그 선덕(先德)을 잇고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한 이로서 즉 좌의정공(左議政公) 덕형(德馨)과 이부 우시랑공(吏部右侍郞公) 덕형(德泂())이 서로 이 폐해진 사당을 일으켜 중신(重新)시키기를 꾀하여 군의 서쪽에 있는 구택(舊宅)의 터에다 옮겨 세웠다. 그리고 이에 가정공은 서열이 높고 목은공은 덕이 높은 관계로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게 하여 각각 그 높은 것을 오로지 하였고, 인재공과 음애공은 또한 그 서업(緖業)을 계승한 관계로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배향하였는데, 부자(父子)와 후손이 서로 계승하면서 더욱 드러나 덕행과 문장이 이에 절로 가전지물(家傳之物)이 되어서 열매를 이루고 꽃을 피웠으니, 누가 그 집안과 높낮이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원이 이미 건립되자, 이 시랑(李侍郞)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범 무자(范武子)는 세록(世祿)을 썩지 않는 업적이라고 말했다가 목숙(穆叔)에게 기롱을 받았으나, 지금 이와 같은 유는 참으로 썩지 않는 것이라 하겠네. 내가 또한 자네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지금 자네 두 사람은 능히 조묘(祖廟)를 일신시켰으니, 존조 경종(尊祖敬宗)의 의리를 잘 알았다고 하겠네. 비록 그러하나 전대(前代)에 광영을 입혀서 조선(祖先)을 드러내는 일이 이것만으로 다 될 수 있겠는가. 후손으로서 도()에 뜻을 둔 사람이 죽어서 이 당()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를 명하여 조선을 욕되게 했다고 할 것이니, 나는 그것을 취하지 않노라.

하니, 시랑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감히 해내지는 못할지라도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마침내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 바이다.

 

 

[D-001]경감(?)과 가복(賈復) : 경감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를 따라서 여러 적들을 격파하고, 광무제가 즉위한 후에는 건위대장(建威大將)이 되고 호치후(?)에 봉해졌다. 가복은 역시 광무제를 따라서 여러 적들을 격파하여 도호장군(都護將軍)이 되고 교동후(膠東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十八, 卷十九》

[D-002]자릉(子陵) : 후한 광무제와 젊었을 때의 친구인 엄광(嚴光)의 자인데, 광무제가 등극(登極)한 뒤에는 엄광이 간의대부(諫議大夫)의 제수를 극력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면서 평생 동안 낚시질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D-003]고죽(孤竹) : 여기서는 은()나라 말기에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던 백이(伯夷)를 가리킨다.

[D-004]십란(十亂) : 주 무왕(周武王)을 보필하던 10인의 훌륭한 신하, 즉 주공 단(周公旦)ㆍ소공 석(召公奭)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宮适)ㆍ문모(文母)를 말하는데, 문모는 읍강(邑姜 무왕의 후비임)의 잘못이라고 한다. 《書經 泰誓中》

[D-005]동강(桐江) : 여기서는 후한 때 동강에서 낚시질하며 은거하였던 엄광(嚴光)을 가리킨다.

[D-006]()나라의 …… 않고 : ()나라가 멸망하고 주 무왕(周武王)이 천자가 되었을 때, 백이(伯夷)가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D-007]누워서 …… 움직이어 : 후한 광무제가 등극한 후에 젊었을 때의 학우(學友)인 엄광(嚴光)을 가까스로 찾아서 맞이해다가 관사(館舍)를 정하여 접대할 적에, 하루는 광무제가 친히 그 관사로 엄광을 만나러 갔는데, 엄광은 누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으므로, 광무제가 그의 뜻을 꺾지 못하여 그대로 돌아왔었다. 그 후에는 또 광무제가 엄광을 궁중(宮中)으로 불러들여서 수일 동안 옛 이야기를 나누었던바, 이 때 함께 누웠던 엄광이 광무제의 배[] 위에 발을 올려놓은 일이 있었다. 그 다음 날 태사(太史)가 객성(客星)이 어좌(御座)를 매우 급박하게 범했다고 아뢰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짐()의 친구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卷八十三》

[D-008]유장(?) …… 의리 : ()나라를 높인 의리를 이른다. 유장은 주나라의 경사(卿士)인 유 문공(劉文公)과 주나라의 대부(大夫)로서 유 문공을 섬겼던 장홍(?)을 합칭한 말이다. 유 문공은 진()나라의 범씨(范氏)와 친하여 대대로 혼인(婚姻)을 하였고, 장홍은 유 문공을 섬기었으므로 주()나라에서 범씨와 가까이 지냈는데, ()나라의 조앙(?)이 주나라와 범씨가 친하게 지낸 것을 책망하자, 이를 두려워한 주나라 사람이 마침내 장홍을 죽였었다. 《左傳 哀公三年》

[D-009]당고(黨錮) 제현(諸賢) : 당고는 곧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금고(禁錮)를 당한 것을 이른다. 제현은 곧 후한(後漢)의 환제(桓帝)ㆍ영제(靈帝) 연간에 환관(宦官)들의 발호를 태학생(太學生)들을 거느리고 환관들을 공격했던 이응(李膺)ㆍ진번(陳蕃)ㆍ두무(竇武) 등 우국지사들을 가리키는데, 이 때에 이들은 환관들로부터 도리어 당인으로 지목되어 수많은 사람이 피살되었다.

[D-010]십륜(十倫) : 제사를 지내어 나타내는 열 가지의 윤리를 말한 것으로, 즉 첫째는 귀신(鬼神) 섬기는 도리를 나타내는 것, 둘째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나타내는 것, 셋째는 부자(父子)의 윤리를 나타내는 것, 넷재는 귀천(貴賤)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다섯재는 친소(親疎)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여섯째는 작상(爵賞)의 시행을 나타내는 것, 일곱째는 부부(夫婦)의 분별을 나타내는 것, 여덟째는 정사(政事)의 균평함을 나타내는 것, 아홉째는 장유(長幼)의 차서를 나타내는 것, 열째는 상하(上下)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 《禮記 祭統》

[D-011]오사(五祀) : 옛날에 성왕(聖王)이 다섯 가지 훌륭한 신령(神靈)에게 제사 지냈던 것을 이른다. 즉 생전에 선정 양법(善政良法)을 인민(人民)에게 베푼 사람을 제사 지내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 일에 힘쓴 사람을 제사 지내며, 노고로써 국가를 안정시킨 사람을 제사 지내고, 큰 재해(災害)를 예방하고 구출해 낸 사람을 제사 지내며, 큰 환난(患難)을 막아낸 사람을 제사 지낸다는 다섯 가지이다. 《禮記 祭法》

[D-012]서학(西學) : ()나라 시대의 소학(小學)을 이르는데, 《禮記》 제의(祭義)에 “서학에서 선현을 제사 지낸다[祀先賢於西學].” 하였다. 여기서는 바로 서원을 비유한 것이다.

[D-013]웅어(熊漁) : 웅은 진미로 유명한 웅장(熊掌)을 이른다. 맹자가 이르기를 “물고기는 내가 좋아하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좋아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에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사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바이고, 의리[]도 내가 좋아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에는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古子上》

[D-014]범 무자(范武子)는 …… 받았으나 : 목숙(穆叔)은 춘추 시대 노()나라 대부(大夫) 숙손표(叔孫豹)의 시호이다. 일찍이 진()나라 범 선자(范宣子)가 숙손표를 맞이하여 대화(對話)하는 가운데 자기 조상들의 세록(世祿)은 썩지 않는 귀중한 업적이라고 자랑했으나, 숙손표가 이를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범 무자는 바로 범 선자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左傳 襄公二十四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