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
독서와 관련된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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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극애생(樂極哀生)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김 - 낙담상혼(落膽喪魂)
몹시 놀라 정신이 없음. - 낙락장송(落落長松)
가지가 아래로 축축 늘어진 키 큰 소나무 - 낙생어우(樂生於憂)
즐거움은 근심하는 가운데에서 생긴다는 말 - 낙양지귀(洛陽紙貴),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 인기있는 작품(책). 서진(西晉)의 문학가인 좌사(左思)가 쓴 <삼도부(三都賦)가 걸작이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앞을 다투어서 베꼈다. 그래서 서울,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는 것이라고도 한다.
- 낙이불음(樂而不淫)
즐기되 빠지지 아니함.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아니함 - 낙정하석(落穽下石)
남의 환란(患難)에 다시 위해(危害)를 준다는 말. - 낙화유수(落花流水)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남녀간의 그리운 심정을 말함 - 난공불락(難攻不落)
공격하기 어려워 좀처럼 함락되지 아니함 - 난상공론(爛商公論)
여러 사람들이 자세하게 잘 의논함. - 난상토론(欄商討論)
낱낱이 들어 잘 토의함. - 난상토의(爛商討議)
낱낱이 들어 잘 토의함 -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 또는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 - 난중지란(難中之亂)
어려운 가운데서도 어려움. 몹시 어려운 일. - 난형난제(難兄難第) 사물의 우열이 없다는 말로 곧 비슷하다는 뜻.
두 사람 다 같은 성질. 두 사람 사이의 재능이나 덕성이 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것. 현재 중국에서는 둘이 같을 정도로 성질이 나쁘거나 비슷한 곤란상황을 말할 때 사용한다. - 남가일몽(南柯一夢)
- 남가지몽(南柯之夢)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
- 남귤북지(南橘北枳) 강남의 귤을 강북으로 옮기면 탱자로 변한다.
환경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된다. - 남부여대(男負女戴)
가난한 사람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 사는것을 일컫는 말. - 남 상 (濫 觴) 사물의 시초
- 남선북마(南船北馬)
바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님 -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수레에 실을 만큼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 (두보의 '제백학사 모옥시'에서)
-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
남자의 말 한 마디는 천 금의 무게를 가진다. - 남전북답(南田北畓)
가지고 있는 전답이 여기 저기 많이 있다는 말. - 남존여비(男尊女卑)
남성을 존중하고 여성을 비천하게 여기는 생각 -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에 든 송곳과 같이 재주가 많은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이 알게 됨을 말함.
- 낭중취물(囊中取物)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것같이 매우 용이한 일 - 내우외환(內憂外患)
내부에서 일어나는 근심과 외부로부터 받는 근심. - 내유외강(內柔外剛)
사실은 마음이 약한데도, 외부에는 강하게 나타남 - 내조지현(內助之賢)
현숙한 아내의 내조를 뜻함.
■ 냐/너/녀/노/뇨 ■■■■■
- 노마십가(駑馬十駕)
말은 하루에 십리,조랑말도 열흘이면 또한 십리를 간다는 뜻. 노마는 조랑말, 십가는 열흘간 수레를 달고 달리는 것.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재능이 뒤어난 사람을 따라갈 수 있다는 비유. - 노마지지(老馬之智) 일에는 경험이 필요하다. 주위의 풍경이 변했기 때문에 길을 잃었을 때 여러번 그곳을 지났던 늙은 말의 덕분으로 살아났다는 고사에서.
- 동의어 : 노마지도(老馬知道) - 노류장화(路柳墻花)
아무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란 뜻으로, 창녀를 가리키는 말. - 노발대발(怒發大發)
몹시 크게 성을 냄 - 노생지몽(盧生之夢)
한때의 헛된 부귀 영화 - 老少同樂(노소동락)
늙은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같이 즐긴다.
- 노승발검(怒蠅拔劍)
파리를 보고 화를 내어 칼을 빼들고 쫓는다는 뜻. 사소한 일에 화를 잘냄. - 노심초사(勞心焦思)
몹시 마음을 졸이는 것 - 노어해시(魯魚亥豕)
글자를 잘못 옮김. 쓰는 사람이 실수하거나 글자가 틀림. 형태가 닮은 문자를 틀리게 쓰는 것을 말한다. 노(魯)와 어(魚),해(亥)와 시(豕)는 글씨의 모양이 비슷해서 틀리기 쉽다는 것에서 나온말이다. - 노 익 장(老 益 壯)
나이를 먹어도 더욱 원기가 있어야 한다. - 녹림(綠林), 녹림호객(綠林豪客) 푸른 숲이란 뜻으로, 도둑 떼의 소굴을 일컫는 말.
- 녹비왈자(鹿皮曰字)
(속담)녹비에 가로왈자
부드러운 사슴의 가죽이 날일자도 되었다가 가로왈자도 된다. 즉, 이리 저리 잘 늘어난다.
1. 남의 말을 좇아 주견없이 행동함을 가리키는 말.
2. 일이 이리도 저리도 되는 형편을 이르는 말.
녹양방초(綠楊芳草)
푸른 버들과 꽃다운 풀. - 녹음방초(綠陰芳草)
우거진 나무 그늘과 싱그러운 풀. 여름철의 자연을 가리켜 이르는 말.
- 녹의홍상(綠衣紅裳)
연두 저고리와 다홍치마란 뜻. 젊은 아가씨의 고운 옷. - 논공행상(論功行賞)
공로에 따라서 상을 줌. 공(功)이 있고 없음이나 크고 작음을 비교 검토해서 이것에 따라서 상을 주는 것. - 녹초청강상(綠草淸江上)
푸른 풀,맑은 강가. 논점일탈(論點逸脫)
논설의 요점을 벗어남.
- 농가성진(弄假成眞)
장난삼아 하다가 참말이 됨.- 농단(壟斷), 농단(籠斷)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 곧 ① 재물을 독차지함. ② 이익을 독점함.
- 농와지경(弄瓦之慶)
딸을 낳은 경사.-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말. 농업을 장려하는 말- 농장지경(弄璋之慶)
아들을 낳은 경사.- 농지우선(農地優先)
농지가 가장 먼저다. 농지가 가장 중요하다.
- 뇌동부화(雷同附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찬동함.부화뇌동(附和雷同).
■ 누/뉴 ■■■■■
- 누란지세(累卵之勢)
포개어 놓은 달걀과 같이 위험하다는 뜻. 누란지위(累卵之危).- 누란지위(累卵之危) 무척 위태로운 모양. 계란을 쌓으면 무너지기가 쉽다는 것에서 대단히 위태로운 모양을 말한다.
- 눌언민행(訥言敏行)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려우므로 군자는 말을 먼저 내세우지 말고 행동이 민첩하게 행해지는 것을 원한다는 숙어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말보다 실천을 중요시한다. 군자는 비록 입은 무거워서 쓸모없을지라도 실행은 신속하고 올바르게 하고 싶다고 바라는 뜻.
■ 느/니 ■■■■■
- 능견난사(能見難思)
보통의 이치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를 일이라는 뜻.- 능사필의(能事畢矣)
만사휴의(萬事休矣) 와 유사한 말. -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일에 능한 사람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뜻.
- 능지처참(陵遲處斬)
머리.몸.손.발을 자르는 극형- 농가성진(弄假成眞)
낙양지귀(洛陽紙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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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지귀(洛陽紙貴) 洛 : 물 이름 락 陽 : 볕 양 紙 : 종이 지 貴 : 귀할 귀. [원말]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 [동의어] 낙양지가고(洛陽紙價高). [출전]《晉書》〈文 傳〉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하는 뜻. 곧 저서가 호평을 받아 베스트 셀러가 됨을 이르는 말. 진(晉:265∼316)나라 시대,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臨淄) 출신의 시인에 좌사(左思)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추남에다 말까지 더듬었지만 일단 붓을 잡으면 장려한 시를 썼다. 그는 임치에서 집필 1년 만에《제도부(齊都賦)》를 탈고하고 도읍 낙양[洛陽:하남성(河南省) 내]으로 이사한 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도읍 성도(成都), 오(吳)나라의 도읍 건업(建業:南京), 위(魏)나라의 도읍 업( )의 풍물을 읊은《삼도부(三都賦)》를 10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張華)라는 유명한 시인이《삼도부》를 읽어 보고 격찬했다. "이것은 반(班) 장(張)의 유(流)이다." 후한(後漢) 때《양도부(兩都賦)》를 지은 반고[班固:《한서(漢書)》저술],《이경부(二京賦)》를 쓴 장형(張衡)과 같은 대시인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삼도부》는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귀족 환관 문인 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洛陽紙價貴]'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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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형난제(難兄難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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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형난제(難兄難弟) 難 : 어려울 난 兄 : 맞 형 弟 : 아우 제 [동의어]伯仲之間(백중지간) [유사어]春蘭秋菊(춘란추국), 莫上莫下(막상막하), 雙璧(쌍벽) [출전]<世說新語(세설신어)>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분간하기 어럽다는 뜻으로, 두 사물이 서로 엇비슷하여 분간하기려움. 양산군자로 유명한 후한 말의 진식(진식-104∼187)은 태구의 현령이라는 적은 녹봉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의 아들 진기와 진심과 아울러 <세 군자>라고 불려져, 그 덕망과 소문이 상당히 높았다. 어느 때 손님이 진식의 집에서 머문 일이 있었다. 진식은 진기와 진심 형제에게 밥을 지으라고 명령하고서, 그 손님과 토론에 열중하고 있었다. 형제는 밥을 짓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와 손님의 토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거기에 열중하여 찌는 바구니 밑에 채롱을 까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쌀이 모두 솥안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밥은 다 되었느냐 ?" 라고 말하는 바람에 당황하여 보니 죽이 되어 있었다. 형제가 무릎을 꿇고 그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가 "그래서 너희들은 우리들이 얘기하고 있던 것을 조금이라도 외우고 있느냐 ?" 하고 묻자, "네, 대체는 알고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그 요점을 잡아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진식은 빙그레 웃으면서, "확실하구나. 그러면 죽이라도 좋으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 고 했다. 이이야기는 [세설신어]의 숙혜편에 수록되어 있고, 방정 편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진식이 친구와 함께 떠나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정오에 떠나자고 약속했는데, 시간이 되어도 친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진식이 먼저 출발했다. 그 뒤에서 친구가 찾아와서, 문밖에서 놀고 있는 진기에게 아버지의 일을 물었다. 진기가 "아버지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지 다가, 오시지 않아서 먼저 떠나셨습니다." 라고 말하자, 친구는 화가 나서, "사람과 약속을 해놓고서 혼자서 먼저 떠나버린다는 것은 어쩐 일인가 ?" 라고 말하자, 진기가 말했다. "당신은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자고 약속하신 것이죠 ? 그런데도 정오에 오시지 않은 것은 신의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까 ? 또 아들을 보고 아버지의 욕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 친구는 그가 닦아세우는 바람에 몹시 부끄럽게 생각하여, 수레에서 내려 사과하려고 했지만 진기는 그를 상대도 하지 앉고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며, 이 진기의 아들인 진군 역시 주재로, 뒤에 위문제 조비에게 벼슬하여 사공과 재상이 되어, 구품 관인법을 입법한 일도 널리 알려져 잇다. 이것은 진군이 어릴 때의 이야기다. 한번은 숙부인 진심의 아들인 진충과 서로 자기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논하여 우열을 다투었는데 도무지 결말이 나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결정을 구하였다. 그러자 진식은 말했다. "원래 형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동생이라고 하기도 어렵구나." 난형난제란 형제가 다같이 우열을 결정하기 어려운 뜻에서 변하여, 두 가지 사물이 그 우열을 결정할 수 없을 때의 뜻으로 사용된다. |
남가일몽(南柯一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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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일몽(南柯一夢) 南 : 남녘 남 柯 : 가지 가 一 : 한 일 夢 : 꿈 몽. [동의어] 남가지몽(南柯之夢). 남가몽(南柯夢). 괴몽(槐夢). [유사어] 한단지몽(한鄲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출전]《南柯記》. 《異聞集》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곧, ① 덧없는 한때의 꿈. ②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당(唐)나라 9대의 황제인 덕종(德宗:780∼804년) 때 광릉(廣陵) 땅에 순우분(淳于 )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 대인(大人)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駙馬)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태수를 제수(除授)받고 부임했다.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檀羅國軍)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遷都)해야 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南柯)'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대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주] 제수(除授) : 천거(薦擧)의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시킴. |
남귤북지 (南橘北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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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귤북지 (南橘北枳) 강남의 귤을 강북으로 옮기면 탱자로 변한다. 환경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된다.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이 입을 열었다. "제(齊)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예,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臣)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예, 제(齊)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초왕(楚王)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 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제(齊)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楚)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 압니다." 그 기지(機智)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 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
남상(濫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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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濫觴) 濫 : 넘칠 람 觴 : 술잔 상. [유사어] 효시(嚆矢). 권여(權與). [출전] 《荀自》〈子道篇〉.《孔子家語》〈三恕篇〉 겨우 술잔[觴]에 넘칠[濫]정도로 적은 물이란 뜻으로, 사물의 시초나 근원을 이르는 말. 공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長江)은 사천(四川)땅 깊숙이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매사는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주] 양자강 : 티베트 고원의 북동부에서 발원하여 동중국해로 흘러 들어감. 장강(長江)이라고도 불림. 길이 5800Km. 민산 : 사천(四川) 청해(靑海) 두 성(省)의 경계에 위치한 산. |
老少同樂(노소동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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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少同樂(노소동락) 말그대로 해석하면 되지요. 늙은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같이 즐긴다. 아랫글은 월남 이상재 선생님에 대한 글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인데 참고가 되겠군요. '영원한 청년'이라는 값진 별명을 얻을 만큼 젊게 사시다가 우리의 늙은 청소년으로 이 겨레의 가슴에 남아 숨쉬고 잇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님을 마음 속에 되살려 봅니다. 선생께서는 59세에 YMCA의 종교부 총무라는 직임을 맡으시며 청년, 청소년으로 나이를 한 40년 거꾸로 잡수시고 새 출발을 하셨습니다.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의 황혼기, 그 때로는 노퇴기에 들어선 나이를 다 잊으시고 늘 청년, 청소년들, 소년들과 어울려서 노소동락(老少同樂)을 힘쓰셨습니다. 하루는 한 청년과 장기를 두시며 재미있게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침 월남 선생을 찾아왔던 한 노인친구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 사람들하고 너무 허물없이 굴면 버릇이 없어지지 않겠나?" 그때나 지금이나 점잖은(젊지 않은) 마음가짐과 몸가짐과 말씨로 젊은 어린이(靑少年)들을 상종합니다. 그래서 대화나 세대간의 단절이 생깁니다. 월남선생님의 꾸밈없는 대답이 만고의 진리와 청소년 지도자상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니 여보게,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그럼 청년들더러, 노인이 되라고 하겠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청년노릇을 하는 걸세!" 선생님께서는 청년, 청소년들의 운동경기 행사에도 늘 함께 섞이셔서 같이 행동하셨습니다. 단거리 달리기에 젊은 사람들과 한 줄에 서서 뛰시는 모습을 주위에서 보는 어른들은 번번히 꼴찌를 하시면서도 점잖게 구경만 하시지 않는 월남선생을 측은히 여겼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 노인이 좀 노망을 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추측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젊으니, 어린이들에게 뒤지는 경주에도 자신을 그 대열에 참여케 하여 청년, 청소년이 되셨습니다. 청소년헌장이 새로 개정되어 선포되었지만 이 개정된 헌장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선언문으로 읽히다가 또 해가 가면 다시 고쳐져야 하지 않도록 하려면 부모가 자녀들의 입지에 돌아서서 그들의 입장에서 대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께서는 정말 그 나이 또래의 친구처럼 참 벗이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사회가 의식의 일대 개혁을 시도하여 청소년들의 해맑은 혼백과 정기를 앞세워주고 어른들이 뒤에서 밀어 주는 역할을 해야 겠습니다. 정부는 청소년을 문제의 대상으로 보는 의식을 뒤엎고 사회의 소중한 자원으로 선용하는 정책을 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 기저에 "내가 청소년이 되어야지!", 그래서 그들의 권리를 돌려주고 의무와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조용히 뒤에서, 옆에서 밀어 주는 친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어버이'라고 말씀하신 분은 삶과 사회와 국가의 참 이치를 꿰뚫어 보신 스승이셨습니다. |
녹림(綠林), 녹림호객(綠林豪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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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림(綠林) 綠 : 초록빛 록 林 : 수풀 림. [동의어] 녹림호객(綠林豪客) [유사어] 백랑(白浪). 백파(白波). 야객(夜客). [출전]《漢書》〈王莽傳〉.《後漢書》〈劉 傳〉 푸른 숲이란 뜻으로, 도둑 떼의 소굴을 일컫는 말. 전한(前漢:B.C. 202∼A.D. 8) 말, 왕실의 외척인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은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신(新:8∼24)이라 일컬었다. 왕망은 농지, 노예, 경제 제도 등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복잡한 제도에 걸려 농지를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났다. 또한 화폐가 8년 동안에 네 차례나 바뀌는 등 경제정책 역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왕망은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로부터도 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북 변경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湖北省當陽縣) 내의 녹림산에 근거지를 둔 8000여의 한 무리는 스스로를 '녹림지병(綠林之兵)'이라 일컫고 지주의 창고와 관고(官庫)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그 후 이 녹림지병은 5 만을 헤아리는 대세력으로 부상했는데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 유수(劉秀)는 그들을 십분 이용하여 왕망의 신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
농단(壟斷), 농단(籠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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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단(壟斷) 壟 : 언덕 롱 斷 : 끊을 단. [원말] 농단(籠斷) [출전]《孟子》〈公孫추篇(공손추편)〉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 곧 ① 재물을 독차지함. ② 이익을 독점함. 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제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 "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壟斷]'할 생각은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농단'은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전하여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서 장사함으로써 '이익을 독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卑劣)한 수법을 증오(憎惡)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 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
누란지위(累卵之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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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지위(累卵之危) 累 : 여러 포갤 루 卵 : 알 란 之 : 갈 지(…의) 危 : 위태할 위. 포개 놓은 알처럼 몹시 위태로운 형세 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제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언(讒言)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平)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 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累卵之危]'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 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 후 범저(장록)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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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能 : 능할 능 書 : 글 서 不 : 아니 불 擇 : 가릴 택. 筆:붓 필. [출전]《唐書》〈歐陽詢傳〉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 저수량( 遂良)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은 ①《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②주현종(周顯宗)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2)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書)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