借古照今, 옛것에서 빌어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들은 그저 맥없이 옛 일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의 일을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
李達의 〈祭塚謠〉란 작품이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다. 흰둥이가 컹컹 짖으며 저만치 앞서 가자 누렁이도 뒤질세라 뒤쫓아 간다. 잠시 두 놈의 장난질에 시선이 집중되는 동안 카메라는 그 뒤에 즐비하게 늘어선 무덤으로 초점을 당긴다. 다시 무덤들이 원경으로 처리되면서 개 짖는 소리 사이로 두 사람이 나타난다. 해질 무렵의 陽光이 빗기는 가운데 술에 까부룩 취한 할아버지와 그 옆에서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는 손주의 모습이다. 슬픔을 느끼기에는 너무 목가적이고 평화스런 광경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아버지와 손주는 누구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러 갔던 것일까. 할아버지는 왜 저물도록 무덤가를 맴돌다가 급기야 술에 취하고 말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그림 속에는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소년의 아버지이다. 시인은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 있지만, 소년의 아버지야말로 바로 두 사람이 제사 지낸 무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2구에서 들밭 풀가에 즐비한 무덤이라 했으니 예전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들어선 무덤임을 알 수 있겠다. 산도 아닌 밭두둑 가에 울멍줄멍 돋아난 새 무덤들 가운데 소년의 아버지는 묻혀 있는 것이다. 아들의 무덤에 제사 지내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심정, 할아버지가 왜 저러시나 싶어 말똥말똥 올려다 보는 어린 손주의 천진한 눈빛.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슬픈 영상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임진왜란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 확신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이유에서다. 7년간 강토를 휩쓸고 간 전쟁의 참상을 시인은 목청 높여 성토하는 대신 한 폭 그림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이때 시는 폐허의 심성을 따뜻이 어루만져 주는 마법의 치유약이 된다. 필자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언제나 광주항쟁 당시 자료 사진 속에서 해맑은 눈으로 죽은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있던 소년의 표정이 떠오르곤 한다.
權禝의 〈宿大津院〉이란 작품이다. 파리한 말을 끌고 먼 길을 가던 나그네는 저물어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말이 여관이지 집도 거지반 부서져, 고개를 들어 보면 처마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침구도 없이 말안장을 끌어 안고 잠을 청하는 밤, 나그네는 아까부터 부엌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쏠려 그만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말았다. 경쟁이나 하듯 임진년 당시 피난길의 이야기로 밤을 새운 부엌의 사연은 젖은 솜방망이 같이 지친 시인의 잠을 달아나게 할만큼 뼈저린 체험이었던 것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오랜만에 친지들이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로 밤을 새우다가, 종장에는 6.25 사변 당시의 이야기로 화제를 삼곤 하던 일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李安訥의 〈四月十五日〉이다. 4월 15일은 임진왜란 당시 쳐들어 온 왜군을 맞아 싸우다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다. 屍山血海를 이루었던 당시의 전장에서 구사일생 살아 남은 사람들은 해마다 이날만 되면 끔찍했던 만행의 그날이 어제같이 되살아나 주먹을 부르쥔다. 전란 후 동래부사로 부임했던 그는 때 아닌 통곡의 아우성을 목도하고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비슷한 어구의 중첩 속에서 정서는 점차 고조되어 마침내 천지를 소슬케 하고 숲조차 떨게 하는 비분강개의 적개심을 자아낸다. 그나마 곡할 이라도 있는 집은 다행이라는 老吏의 넋두리는 당시 전장의 참혹상을 바로 눈 앞의 일처럼 그려 보이고 있다. 權擘은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피난 길에 오르는데, 고통스런 피난의 와중에서도 詩藁를 담은 상자만은 억척스레 등에 지고 내려 놓질 않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이렇듯 도망다니며 죽기에도 겨를하지 못하는데 그깟 시 상자는 어디에다 쓰려느냐고 타박해도 그는 결코 시 원고 뭉치가 든 상자만은 버리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같은 노령의 피난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28수에 달하는 작품을 마치 일기를 쓰듯이 남겨, 당시 피난 길의 고초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을 세밀하게 묘사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群盜가 횡행하는 속을 전전하다가 막히면 되돌아 오고, 피난길의 박절한 인심과 산에 올라 적을 피하던 일, 조복을 팔아 쌀을 산 일이며, 저마다 달리 말하는 뜬 소문에 일희일비하던 일, 평양성의 和戰 소식에 낙담하던 일, 피난민을 보고는 지레 겁을 먹는 시골 늙은이의 표정 등등, 이들 시는 임진왜란 당시 한양성을 빠져나간 피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럴 때 시는 당당히 역사 기록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다.
시로 쓴 역사, 詩史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願望과 哀歡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도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詩史라 한다. 孟棨가 《本事詩》에서 杜甫의 시를 논하면서, "두보가 안록산의 난리를 만나 幐蜀 지방을 떠돌며 시에다 이때 일을 모두 진술하였다. 본 바를 미루어 숨겨진 것까지 이르러 거의 남김 없이 서술하였으니 당시에 이를 일러 詩史라 하였다"고 언급한 것이 詩史란 말의 첫 용례이다. 艱難의 피난 시절 두보는 夔州 지방까지 떠돌며 많은 시를 남겼는데, 뒷 사람들은 그곳에 詩史堂을 세워 두보의 화상을 걸어 놓고 그의 시정신을 기리고 있다. 詩史란 말은 시로 쓴 역사란 뜻이니, 그 본래 의미는 시인이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해서 시를 썼다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본 임진왜란 당시의 시처럼 시인이 자신이 見聞한 당시의 일을 시로 기록해 둔 것이 뒷날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즉 시를 읽으면 그 시대가 눈 앞의 일처럼 낱낱히 펼쳐지니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를 알려면 굳이 역사책을 뒤질 것 없이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전란의 참상을 노래한 杜甫의 詩史로는 三吏 三別詩를 압권으로 꼽는다. 앞서 본 이안눌의 〈四月十五日〉도 사실은 이 작품의 분위기를 빌어왔다. 이 가운데 〈石壕吏〉 한 수를 감상해 보자.
천년 전의 일인데도 흡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 생생하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관리의 서슬 앞에 허둥지둥 늙은 할아범은 뒷담을 넘어 달아나고, 시간을 벌던 할멈은 눈치를 보며 대문을 연다. 이미 그녀는 아들 셋을 모두 전쟁터로 떠나 보낸 처지다. 그나마도 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官家의 푸른 서슬은 늙은 할아범까지 잡아가야만 직성이 풀릴 기세다. 아들 둘 죽은 것은 하나도 억울치 않다고 너스레를 떨던 할멈은 며느리와 손주를 지키기 위해 아예 자신이 수자리에 나갈 것을 자청하고 나선다. 늙은 몸이지만 병정들을 위해 새벽밥이라도 짓겠다는 것이다. 이윽고 말소리도 잦아들고 시인은 어디선가 목메어 우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침에 다시 피난길에 오르는 그를 늙은이 혼자 나와 마중을 한다. 설마 했는데 관리는 늙은 할멈마저도 그예 끌고 가고 말았던 것이다. 흔히 조선후기 三政의 문란을 말할 때 白骨徵布니 黃口簽丁을 말한다. 이러한 폐단이 낳은 비극을 노래하고 있는 茶山 丁若鏞의 〈哀絶陽〉을 감상해 보자.
다산이 강진 유배시에 직접 견문한 사실을 시로 쓴 것이다. 蘆田 사는 백성이 아들을 낳은 지 사흘만에 軍籍에 올라 里正이 소를 빼앗아 가자, 방에 뛰어 들어가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며 칼을 뽑아 자기의 男根을 스스로 잘라 버렸다. 그 아내가 男根을 가지고 관가에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아무리 하소연하려 해도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나마 이미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의 軍布도 꼬박꼬박 내고 있던 터였다. 白骨徵布란 무엇이던가. 이를테면 사람이 죽어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면, 동사무소 직원이 아예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죽은 사람 앞으로 세금 고지서를 날려 보낸다. 黃口簽丁이란 무엇이냐.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출생신고를 하고 나면 그 다음날로 징집통지서가 날아드는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더러 빨리 입대 하든지 軍布를 내라고 야단을 부린다. 정작 장정은 하나 뿐인데 돌아가신 아버지와 난 지 사흘 밖에 안된 핏덩이의 軍布 독촉 끝에 里正은 목숨보다 중한 소까지 끌고 가버렸다. 눈이 뒤집힌 가장은 칼을 뽑아 里正을 찌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자신의 陽根을 자르고 말았던 것이다.《牧民心書》는 이렇게 말한다. "심하게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짓고, 여자를 남자로 바꾸기도 하며, 또 그 보다 심한 것은 강아지 이름을 혹 軍案에 기록하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개이며, 절굿공이의 이름이 혹 官帖에 나오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절굿공이이다." 웃어야 할 일인가. 울어야 할 일인가. 어쨌건 三政의 문란을 말할 때, 당시 이를 증명하는 어떤 통계 수치보다도 우리는 이 〈哀絶陽〉 한 편을 통해 그 시대 백성의 절규를 실감으로 듣게 된다. 시는 이렇게 해서 역사가 된다.
邊塞의 風光
당나라 李華의 〈弔古戰場文〉의 서두이다. 모래 바람 부는 옛 戰場의 황량함이 뼈에 저밀듯 생생한 명문이다. 다시 싸움의 광경을 상상하는 한 대목을 보자.
한나라 이래로 중국은 늘 북방 흉노와의 전쟁에 시달려 왔다. 전쟁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이던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소모적인 싸움 속에 애꿎은 청춘들만 사막에 뼈를 묻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唐詩 중에는 멀리 변방의 풍정을 노래한 邊塞詩가 유난히 많다. 이들 시는 그 풍부한 함축에서 뿐 아니라 당대 변방의 고통과 삶의 괴로움을 실감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杜甫의 〈兵車行〉이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왜 두보의 시를 두고 역대로 詩史의 일컬음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약 없는 전장터로 끌려 나가는 병정들이 咸陽橋에서 가족들과 헤어지는 처절한 광경의 묘사로 서두를 열었다. 哭聲이 진동하고 자옥한 먼지와 출발을 알리는 고함 소리, 수레는 삐걱거리고 말도 힝힝거린다. 7구에서 떠나는 군인 하날 붙들고 물어보는 시인의 객적은 참견은 "징집이 너무 잦아요."라는 무뚝뚝한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 長江과 黃河가 발원하는 곳, 곤륜산맥이 앞을 턱 가로 막고 있는 모래 먼지 이는 몽고의 땅이다. 한번 가면 운이 좋아 2,30년만에 돌아올 수 있고, 그나마 흰 머리로 돌아와도 다시 다른 곳으로 끌려간다. 일손이 없고 보니 民生은 도탄에 빠지고, 전쟁 비용 때문에 세금은 더욱 가혹해지는 악순환 속에 靑海의 가없는 호수 가에는 거두는 손길 없는 해골만이 늘어간다. 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張籍의 〈出塞〉이다. 가을인데도 변방엔 벌써 첫눈이 내린다. 오랑캐와의 전투를 위해 장군은 한밤 중에 출정을 서두른다. 야습에 나선 길이다. 소리를 죽이려고 말은 풀어두고 깊은 밤이라 깃발도 챙기질 않았다. 싸늘한 달빛에 천막엔 서리가 내려 축축하고, 깜깜한 사막 길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다. 7.8구에서 느닷없이 군사들이 모두 흰머리임을 말하였고, 끝도 없는 이 전쟁에서 오랑캐를 멸하는 날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하여 자조의 심경을 드러내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이곳에 끌려온 병사들은 머리가 다 세도록 여태도 고향에 돌아가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 매서운 바람 먼지 날리는 모래밭에 해골을 누이고 말 것이다. 그때에도 또 오늘과 같은 야습은 되풀이 되리라. .
陳陶의 〈幐西行〉이란 작품이다. 幐西는 지금의 甘肅省에 위치한 곳이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 용사들의 용맹한 기상을 먼저 보인 뒤, 잇대어 無定河 강가를 뒹굴고 있는 해골들을 말함으로써 이 전쟁의 허망함을 보였다. 더욱이 강가에 뒹구는 해골의 아내들은 여태도 남편이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매일 밤 꿈 속에서 만나고 있다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비장한 격정에 젖어들게 한다. 邊塞詩에는 당시 전쟁터의 스산한 분위기와 끝없이 계속되는 정복 전쟁에 지친 고통의 목소리가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시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宮詞, 한숨으로 짠 역사
朱慶餘의 〈宮詞〉이다. 꽃이 피는데도 '寂寂'타 하여 이미 그녀가 君王의 총애를 잃은 지 오래되었음을 보였다. 난간에 서 있는 것이 여럿이니 총애를 잃은 궁녀는 혼자만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녀들은 여태 총애를 한번도 받아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일렁이는 마음은 꽃과 마주 하여 원망의 넋두리를 한 없이 풀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앵무새 앞인지라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묘하다. 글자마다 怨望이 서리어 있다.
元玺의 〈行宮〉이란 작품이다. 궁녀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세었는데 宮花는 올봄도 붉게 피었다. 행궁의 번화함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듯이 그녀의 아름다움도 스러진 지 오래다. 적막한 것은 꽃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이다. 그녀는 무료하게 앉아서 희미한 기억 속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흰머리의 궁녀가 '있다'고 하여, 행궁의 번화함은 이제 어디에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齊梁 시기 이래로 궁녀의 생활과 정감을 제재로 한 宮詞가 많이 창작되었다. 주된 내용은 君王에게서 失寵한 후궁들의 원망과 하소연이다. 이래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宮女들의 怨恨을 노래한 작품들이 계속 창작되었다. 당나라 때 王建은 무려 1백수에 달하는 〈宮詞〉를 지었는데, 그의 작품은 古事에 가탁하지 않고 일반에게 신비시 되던 皇宮의 일을 세세히 관찰하고 당시 후궁들의 실생활을 사실대로 적어 당시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그의 〈宮詞〉 연작은 당시 樞密使 王守澄에게서 직접 들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는 王建과는 한 집안 사람으로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뒤에 王建이 자신의 잘못을 풍자하자 王守澄은 노하여 "아우가 지은 〈宮詞〉는 궁궐 깊은 곳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이를 알았더란 말인가? 임금께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王建은 이틀 뒤 사죄하는 시를 올렸는데, 그 시의 끝 구절에 "同姓이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外人이 九重의 일 어찌 알았으리오. 不是姓同親說向, 九重爭得外人知"라 하였으므로, 王守澄은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 이 일을 덮어두고 말았다. 어쨌든 王建의 〈宮詞〉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뒷날 당대 궁중의 풍속사를 연구하는데는 희귀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許筠도 1610년(광해 2)에 벼슬에서 물러나 수표교에 있던 종의 집에서 요양하던 중, 종의 이모로 그 집에 얹혀 살던 76세의 은퇴한 宮人을 만나 그녀에게서 궁중의 일을 이야기 듣고 마침내 王建의 일을 본떠 〈宮詞〉 100수를 남겼다. 그녀는 宣祖大王과 懿仁王后의 성덕과 宮內의 節目 및 여러 고사들을 자세하게 이야기 해 주었고, 許筠은 이를 시로 남겨 마침내 一代의 詩史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세 수를 감상해 보자.
歲暮에 疫鬼를 몰아내는 儺禮 광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鶴舞에 抛毬樂을 얹어 춤추고 노래하면, 뒤이어 五方處容이 색색의 옷을 입고 나와 處容舞를 춘다. 다시 긴 춤사위가 한바탕 흐드러지게 휘몰아친 후 五色處容이 동서남북 중앙으로 갈라 자리를 잡으면 음악이 점차 빨라지면서 "山河千里國에"로 시작되는 鳳凰吟 가락이 울려 퍼지고 女妓는 낭랑한 청으로 노래를 부른다. 대개 儺禮의 의식절차나 儀軌및 呈才에 대해서는 이미 《樂學軌範》에 상세하다. 위 시와 軌範을 견주어 보면 조금의 차이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儺禮의 민속을 노래한 한 수이다. 붉은 가면에다 소 형상을 그려 붙이고 징과 북을 두들기며, 귀신을 쫓는데 영험이 있다는 복숭아 나무가지와 갈대 이삭으로 뜨락을 쓸어 집에서 疫神을 몰아내는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는 대문간에 天王과 仙女의 얼굴을 그려 붙여 놓고 疫鬼가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당시 궁궐과 여항에까지 미친 성대한 儺禮의 광경을 노래한 것인데, 오늘날에 보면 민속학 방면의 자료적 가치도 적지 않다.
당시 인사고과의 제도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해마다 6월 15일과 12월 15일이 되면 각 지방의 관찰사는 산하 수령의 근무성적을 평정 고과하여 중앙에 보고한다. 이때 가장 좋은 성적이 '最'이고 가장 낮은 성적이 '殿'이 된다. 이 殿最는 京官에게도 시행하였다. 각처에서 평정한 殿最紙는 밀봉되어 승정원을 거쳐 임금에게 주달되었다. 이 시를 보면 아마도 지방에서 고과한 서류가 올라오면 이를 개봉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 임금에게 올리고, 임금은 그 많은 서류를 일일이 볼 수 없었으므로 글자를 아는 궁녀가 御床에 나아가 이를 읽어 재가를 여쭈었던 듯 하다. 허균이 이 시를 지을 당시에야 미처 생각지 못하였겠지만, 그 시대의 충실한 기록은 이렇듯 뒷날 그 시대를 들여다 보는 한 통로가 된다. 시가 世敎에 보탬이 된다 함은 그 내용의 鑑戒를 두고 이르는 말일테지만, 이렇듯 시는 한 시대를 증언하는 비망록이 되기도 한다.
史詩, 역사로 쓴 시
胡曾의 〈長城〉이란 작품이다. 아폴로 호가 달에 처음 착륙했을 때 감격한 우주비행사의 일성은 "만리장성이 보입니다."였다. 장성을 쌓은 벽돌을 모두 해체하여 적도를 따라 벽을 쌓으면 허리 높이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하니, 과연 그 규모에 기가 질릴 뿐이다. 역사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通鑑》의 한 대목이다. 錄圖書에서 '亡秦者胡也'라 예언한 것은 사실은 오랑캐 '胡'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秦始皇의 둘째 아들 '胡亥'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始皇은 만세토록 秦나라의 왕업을 잇겠다고 '防胡'를 위해 온 백성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궁궐 안에서 재앙의 싹이 터나오는 것은 알지 못하고 그깟 만리장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秦始皇의 어리석음을 위 시는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또 杜牧은 〈阿房宮賦〉를 지어 아방궁의 극에 달한 호사의 광경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노래하였다.
참으로 장한 붓이다. 호사스런 아방궁에는 6국에서 끌려온 아름다운 여인들이 이제나 저제나 진시황의 사랑을 한번 받아 볼까 하여 오늘도 새벽부터 화장 거울 앞에 섰다. 일제히 펼쳐 든 거울빛이 공중에서 보면 마치 별빛 처럼 곳곳에서 반짝인다. 어디선가 쿵쿵거리며 수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녀들은 혹시 '오늘은' 하는 마음에 가슴이 콩콩거린다. 그러나 수레소리는 점차 멀어져 가고, '오늘도' 하는 탄식에 날이 저문다. 그런 세월이 36년이라 했으니 그녀들의 꽃다움은 이제 어디가 찾을 것이랴. 杜牧은 다시 붓을 잇는다.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이다. 누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시인들은 지나간 시대의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추어 보곤 한다. 예전 문집을 보면 으례 몇 수 쯤의 詠史詩가 실려 있다. 湖堂에서 공부하면서 月課의 주제를 역사상 인물로 정해 시짓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명나라 사람 程敏政이 엮어 펴낸 《櫓史絶句》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사대부의 애호를 받았다. 이 가운데 한 수를 더 읽어 보자. 李商隱의 〈賈生〉이란 작품이다.
賈誼는 漢文帝 때의 신하였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대신의 미움을 사 長沙王의 太傅로 좌천되었다. 뒷날 文帝가 賈誼를 다시 불렀다. 이때 왕은 축복을 받느라고 宣室에 앉아 있었는데, 인하여 鬼神의 일에 느낌이 있었으므로 賈誼에게 鬼神에 대해 물었다. 가의가 鬼神을 설명하는 동안 한밤중이 되었다. 文帝는 가의의 말에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게 앉아 있던 방석을 당겨 앞으로 바짝 다가 앉았다. 시인은 文帝가 어진이를 구하여 蒼生 구제의 일을 묻지 아니하고, 고작 일신의 복을 비는 귀신의 일을 물은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지어 이때 일을 풍자한 것이다. 史詩, 즉 詠史詩는 역사적 사실을 테마로 해서 쓴 시이다. 借古照今, 옛것에서 빌어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들은 그저 맥없이 옛 일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의 일을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몇 수 가려 읽어본 詩史와 史詩들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치열한 역사의식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정신도 시인이 먼저 흥분해 버리면 구호가 되고 만다.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힐수록 역사와 현실은 더욱 돌올하게 독자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이다. 80년대 그 숱한 민중시의 홍수는 시인의 흥분은 시를 대자보로 격하시킬 뿐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시의 정서는 이념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松江 鄭澈의 시에 〈山寺夜吟〉이란 작품이 있다.
가을날 산사의 지붕 위로 사태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길래 중에게 비 오나 보랬더니, 어렵쇼! 요 사미승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다. "시내 남쪽 나무에 달이 걸려 있는데요." 비는 무슨 비냐는 말씀이다. 동문서답 하는 속에 言外로 전해지는 흥취가 진진한 작품이다. 80년대 후반, 필자는 이 작품의 감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험문제를 낸 일이 있었다. 한 답안지에 일렀으되, "부르조아적 근성에 철저히 물든 鄭澈의 봉건 착취 계급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창 밖의 일이 궁금하면 자기가 나가서 문을 열어 보면 될 일인데, 그 쉬운 일조차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 프로레탈리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사미승을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담긴 이 답안을 필자는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이런 의식 아래서 시는 더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뒷 사람은 옛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오늘,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그것이 곧 옛날인 것이다. 詩史가 시인이 당대를 충실히 기록한 것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 된 것이라면, 史詩는 오늘의 시인이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아무리 이제부터가 옛날이라고 해도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해서 지나간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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