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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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3일부터 11월7일까지 일기가 빠지고 없음)1) | |
11월8일[기축/12월5일] |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어 주고 어두워서 돌아왔다. 조금 있으니 도독이 만나고자 하므로 곧 나갔더니, "순천 왜교(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의 적들이 초열흘 사이에 철퇴한다는 기별이 육지에서 통지해 왔으니, 아주 빨리 진군하여 돌아가는 적들의 길을 끊어 막으라"고 했다. |
11월9일[경인/12월6일] | 도독과 함께 일제히 진군하여 백서량(여천군 남면)에 이르러 진을 쳤다. |
11월10일[신묘/12월7일] | 좌수명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쳤다. |
11월11일[임진/12월8일] | 유도(여천군 송도)에 이르러 진을 쳤다. |
11월13일[갑오/12월10일] | 왜선 10여 척이 노루섬(獐島)에 나타나므로, 곧 도독과 약속하고 수군을 거느리고 추격하니 왜적선이 물러가 움츠리고 종일 나오지 않는다. 도독과 더불어 돌아와 노루섬에서 진을 쳤다. |
11월14일[을미/12월11일] | 왜선 두 척이 강화할 목적으로 바다 중간쯤에 나왔다.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왜선을 마중하여 오게 했다. 오후 여덟 시쯤에 왜놈 장수가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두마리와 술 두통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한다. |
11월15일[병신/12월12일] | 이른 아침에 도독에게 가 보고, 잠깐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왜선 두척이 강화하는 일로 두 번 세 번 도독의 진중으로 드나들었다. |
11월16일[정유/12월13일] | 도독이 진문동(陳文同)으로 하여금 왜영으로 들여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왜선 세 척이 말과 창·칼 등을 가지고 도독에게 나아가 바쳤다. |
11월17일[무술/12월14일] |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만호 조효열 등이 왜놈의 중선(中船)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 갈 적에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쫓아가니, 왜적들은 언덕을 의지하고 뭍으로 올라가 도망갔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사람에게 빼앗기고서 빈 손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
11월18일[기해/12월15일] |
「행록」에서 |
11월19일[경자/12월16일] | 「행록」에서 밤 두 시쯤에 노량에 이르렀다. 적선 오백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4) 「실록」에서 직접 나서서 왜적을 쏘다가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5) 「행록」에서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6) 「실록」에서 이때 이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면서 옷으로 시체를 가린 뒤에 그대로 북을 울리며 나가 싸웠다. 군사들은 순신이 죽지 않을 줄로만 알고 기세를 올리며 더욱 공격하여 적을 마침내 대패 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쳐부쉈다"고 했다.7) |
(난중일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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