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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30. 19:53

서(序)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죽계(竹溪)는 근재(謹齋) 선생의 아들이요, 지금 밀직 첨서(密直簽書)로 이색(李穡)과 동년(同年)의 진사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선친 삼 형제가 과거로 말미암아 현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또 내 자식 삼 형제가 모두 요행히 말석의 과거에 편입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준 것이다. 내 족조(族祖) 문성공(文成公)의 손자 정당공(政堂公)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 어찌 하늘이 우리 안씨만을 후히 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가. 문성공은 충렬왕을 섬기어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였고, 근고에 없는 훌륭한 문장을 지니셨는데도 오히려 3대를 지나서 그 손자가 과거에 올랐으니 그 갚음을 받은 것이 더디었다 하겠다. 하지만 내 선친이 비록 덕을 쌓고 의(義)를 행했다고 하지만 내가 계승한 것이 없는데, 내 자식이 과거에 오른 것이 이와 같이 빠르니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착한 자를 복되게 하고 음란한 자에 화를 내리어 그 실상이 없고서 그 이름을 얻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내 조고의 덕행이 위로 천심(天心)을 감동시켜 자손에 혜택을 내린 것이니, 어찌 성시(聲詩)로 전파하여 후학의 권장이 되게 할 만하지 않은가.” 하였다. 그러나 오래 두고 내 글을 청하지 아니하였었다.
하루는 그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기 때문에 국가가 우리 모친에게 녹을 주고 또 택주(宅主)로 봉하여 영광을 입혔으니, 이러고도 시로 노래하지 아니하면 이는 태만한 일이며 또 자식의 도리는 오직 부모를 현양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선생의 문자를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광종(光宗)이 과거를 창설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파한 적이 없었으니, 부자나 형제가 내리 과거에 오른 자가 어찌 적겠는가. 나는 병이 들어서 넓게 상고를 못했으니, 그대는 옛 늙은이에게 물어보고 사가(史家)에게 구득해서 기록해 오라. 나는 장차 그대를 위하여 서를 하겠다.” 하였다.
그후 며칠이 못 되어서 안씨가 또 와서 말하기를, “나는 감히 멀리 옛일까지는 상고하지 못 하고, 우선 충렬왕으로부터 상당(上黨 청주〈淸州〉) 한 중찬공(韓中贊公) 이하 열여섯 집을 구였다. 비록 많은들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선생은 가르쳐주소서.” 하므로, 나는 이르기를, “재상 김근(金覲)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부일(富佾)ㆍ부식(富軾)ㆍ부의(富儀)가 바로 그 사람들이요, 평장(平章) 민공(閔公) 규(珪)의 아들 오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강균(康鈞)ㆍ적균(迪鈞)ㆍ광균(光鈞)ㆍ인균(仁鈞)ㆍ양균(良鈞)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평장(平章) 임유(任儒)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경숙(景肅)ㆍ경겸(景謙)ㆍ경순(景純)이 바로 그 사람들이요, 증복야(贈僕射) 이격(李?)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진(? 없어졌음)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검교정승(檢校政丞) 김태현(金台鉉)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는데, 광철(光轍)ㆍ광재(光載)ㆍ광뢰(光輅)가 바로 그 사람들이요 그 나머지는 다 상고할 수 없다. 그대가 알아낸 것은 청주 한씨에 사기(謝奇)ㆍ사겸(謝謙)ㆍ보(譜) 삼 형제와, 함양(咸陽) 박씨(朴氏)에 장(莊)ㆍ가(理)ㆍ계원(季元) 3형제와 진양 박씨에 인간(仁幹)ㆍ인지(仁祉)ㆍ인우(仁祐) 삼 형제와, 죽주(竹州) 박씨에 문화(文華)ㆍ효수(孝修)ㆍ송생(松生) 삼 형제와 화평(化平) 노씨(盧氏)에 승관(承?)ㆍ승조(承肇)ㆍ승신(承愼) 삼 형제로 지금 세상에서 모두 아는 바이다. 김해 김씨에 동양(東陽)ㆍ광윤(光潤)ㆍ광원(廣元) 삼 형제와, 밀양 박씨에 밀양(密陽)ㆍ대양(大陽)ㆍ삼양(三陽)ㆍ계양(季陽) 사 형제와 곡성(曲城) 염씨(廉氏)에 국보(國寶)ㆍ흥방(興邦)ㆍ정수(廷秀) 삼 형제와, 창녕 성씨(成氏)에 석린(石璘)ㆍ석용(石瑢)ㆍ석인(石?) 삼 형제와 흥안 배씨에 중보(中甫)ㆍ중성(中誠)ㆍ중유(中有)ㆍ중륜(中倫) 사 형제와, 전주 유씨(柳氏)에 극강(克綱)ㆍ극서(克恕)ㆍ극제(克齊) 삼 형제와, 단산(丹山) 우씨(禹氏)에 홍수(洪壽)ㆍ홍강(洪康)ㆍ홍득(洪得) 삼 형제와 또 동복 형제ㆍ월성 이씨ㆍ양천 허씨ㆍ회골(回?) 설씨(?氏)가 있다.” 하였다.
아, 이는 족히 국가가 아름다운 풍속을 배양하였다는 것을 엿볼수 있으며, 삼한(三韓) 인물의 번성한 것이 비록 다 과거에 있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과거가 번성함으로 말미암아 한 나라 정치의 기상이 더욱 뚜렷이 나타나서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이 우하(虞夏) 시대에 있었다고 하나 역사가 전하지 아니하여 상고할 수 없고, 주 나라가 은 태사(殷太師) 기자를 봉하게 되어서는 중국과 상통이 있었다는 것을 대개 알 수 있다. 또 비록 봉했지만 또 신하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도가 있는 우범(禹範)을 받은 것을 중히 여긴 때문이다. 태사의 사당이 평양부에 있어 국가에서 제사하기를 더욱 삼가고 있으니 태사가 우리 동인을 감화시킨 것이 매우 깊었다. 어찌 쌍기(雙冀)ㆍ왕융(王融)의 천박한 무리가 우리 문풍(文風)의 시작이 된 것에 비하랴. 비록 그러하나 쌍씨ㆍ왕씨가 후생을 유액(誘掖)한 바가 또한 지극하다 하겠다. 그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일시에 경동하여 어리석은 남녀들로 하여금 모두 과거란 아름다운 것으로 흠모하게 하여 그 자제들에게 기필코 얻도록 힘쓰게 한 것은 반드시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럼으로써 훈도되고 젖어 들어 집집마다 글을 읽어서 과거를 취득하되 삼 형제 오 형제가 함께 오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쌍씨ㆍ왕씨의 공이 크다 하겠다. 지금 장차 안씨를 가영(歌詠)하면서 쌍씨ㆍ왕씨에 미치는 것은 대개 음식할 때에 반드시 처음 만든 자를 제사하는 법에서다. 아, 사람이 뜻을 얻으면 그 본을 잊는다는 것은 또한 무슨 심리일까.
근재(謹齋) 선생의 이름은 축(軸)이요, 자는 당지(當之)요, 정당(政堂)공의 이름은 보(輔)요, 자는 원지(員之)요, 밀직(密直)공의 이름은 집(輯)이요, 자는(없어졌음), 첨서(簽書)공의 아들은 장자는 중온(仲溫)이니 군부 판서(軍簿判書)요, 다음은 경량(景良)이니 좌헌납(左獻納)이요, 다음은 경공(景恭)이니 전리 좌항이요, 막내는 경검(景儉)이니 과거 보는 공부를 익히고 있다고 한다. 창룡(蒼龍) 무오 4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