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편의 시작품을 이루었다고 하면 그에는 나의 소망,
또는 몇 권의 책에서 얻은 조금씩의 영양이 작용한 셈이다.
나는 생래로 순수한 한국적인 가정(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습이
어디보다도 완고했기 때문이다)에서 자라났기 때문에처음에 한학적인 학습,
특히 시에 있어서는시전(詩傳)과 당시(唐詩)로부터시작했다.
그 다음에 서구의 시에 접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다시 되돌아와 우리의 시가인 향가나
고려가사나 시조 등을 섭렵하였다.
이러한 나의 경험은 나의 작품 가운데에 일종의 정신의
혼합물을 담아온 셈이다.
한편에는 동양적인, 한국적인 어느 것, 또 한편에는 서구적인 것,
그리고 대별하여 두 개의 정신적 패턴은 서로 상이한 얼굴을 하고
상극하고 힐항(詰抗)하여 하나의 오뇌하는
야누스의 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정신의 이 창해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려 하나 좀처럼
나르시스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처용 시 가운데서 나는 이 같은 자기의 상모(相貌)를 나타낸 셈이다.
그러나 내가 못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시가에서 전형적인
고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오해되기 쉬운 말이다.
우리 시에는 운율의 고전적인 제약성도 규격도 없다.
시조가 하나의 정형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너무 단시형이기 때문에
적용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일은 우리 시작에 새로운 영역을 남겨놓고 있는 것만 같이
생각된다.
-나의 시 정신과 방법’, 신석초, <바라춤>, 융성출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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