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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

천하한량 2007. 4. 13. 15:08
[‘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1>돈 없고 갈 곳 없는 한국
“은퇴 준비요?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고 세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는데 무슨 은퇴 준비가 있겠어요?”

정종혁(가명·53·서울 동작구 사당동) 씨는 은행에서 22년간 근무하다 2004년 부지점장으로 퇴직했다.

외환위기 때 중간정산하고 남은 퇴직금 1억2000만 원과 시가 6억 원짜리 아파트 한 채, 퇴직 무렵 1500만 원을 주고 사 둔 농지 1000평이 자산의 전부였다.

씀씀이를 줄였지만 아파트담보 대출금(1억 원) 이자를 포함해 다섯 식구 한 달 생활비로 평균 300만 원을 쓰고 대학생인 두 딸과 고등학생인 아들 학비로 연간 1000여만 원이 나갔다. 퇴직금 1억2000만 원이 3년여 만에 3000만 원으로 줄었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애써 봤지만 ‘나이가 많고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예상하지 못한 조기 퇴직, 은퇴 이후에도 생활비와 자녀교육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 정 씨가 처한 상황은 은퇴를 했어도 은퇴한 것이 아닌, 그래서 ‘은퇴자 관리’는커녕 ‘은퇴 준비’조차 쉽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은퇴자 관리? 사실상 무방비 상태’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가 본보 취재팀의 의뢰로 은퇴자 5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은퇴자들의 자산 관리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수년 내 자산 고갈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우선 조사 대상자의 평균 은퇴 연령은 54.46세로 대체로 60∼65세에 현역에서 은퇴하는 선진국에 비해 5년 이상 빨랐다.

또 권고사직이나 명예퇴직, 해고 등 ‘비자발적 퇴직’이 21.9%로 정년퇴직으로 인한 은퇴(24.5%) 못지않게 많았다. 준비되지 않은 은퇴가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50대들의 비자발적 은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육체적으로 노인도 아니고 대부분 자식들이 결혼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낄 나이인 탓이다. 국민연금은 60세 이후에나 받을 수 있어 돈 나올 데가 딱히 없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최현자 교수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자신이 물러날 준비가 됐을 때 그만두는 ‘자발적 은퇴’가 많지만 국내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자산 11년 지나면 고갈 우려’

“제가 경제적 여건이 안 되니까 사람들 만나기가 가장 부담스러워요. 소주도 안주 몇 개 시키면 10만 원이 훌쩍 넘잖아요.”

개인사업을 하다 은퇴한 정모(62) 씨는 은퇴 이후 가장 힘든 게 친구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정 씨처럼 갑자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 가장 먼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돈 문제’다.

서울대의 은퇴자 조사 결과 은퇴 당시 금융자산이 전혀 없는 사람이 전체의 11.5%에 이르렀다.

퇴직금을 제외하고 은퇴 당시 보유한 금융자산은 평균 6548만 원이었고 조사 대상자의 48%는 5000만 원을 밑돌았다. 또 자가(自家)를 뺀 보유 부동산 시세는 은퇴 당시 평균 1억4267만 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은퇴자들은 현재 보유 자산으로 앞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을 고작 평균 11.72년이라고 추정해 퇴직자산의 고갈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보유 자산으로 11.72년밖에 생활하지 못한다면 그 이후부터 자식에게 손을 벌리는 것 외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다니던 회사가 연봉제를 실시해 은퇴할 때 퇴직금조차 없었다는 조모(55) 씨는 “저녁에 술 마시고 싶으면 혼자 캔맥주 사들고 PC방에 가서 새벽까지 앉아 있는다”고 말했다. 술집에선 안주를 시켜야 하지만 PC방은 한 시간에 1000원만 내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퇴직 자산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채 은퇴하면 은퇴 이후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조사에서도 은퇴 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월 200만∼250만 원이란 답변이 29.4%로 가장 많았지만 은퇴자들의 월수입은 평균 191만 원, 월 생활비는 평균 162만 원에 그쳤다. 월수입이 100만 원 이하인 은퇴자들도 27.2%나 됐다.

대부분 기대치에 턱없이 못 미치는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절반가량이 “재무상담 관심없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은퇴자들은 국가연금(국민연금) 기업연금(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체계적인 연금시스템에 힘입어 대체로 ‘노후생활’이 보장되는 편이다.

반면 한국에서 연금 혜택을 보는 은퇴자는 많지 않다.

1988년 시행된 국민연금제의 혜택을 보고 있는 수급자는 올해 2월 말 현재 201만 명으로 60세 이상 인구의 24.5%에 그친다. 평균 가입 기간이 7년 8개월밖에 되지 않아 1인당 평균 수급액도 월 19만4000원에 불과하다.

지난해 도입된 퇴직연금제는 올해 2월 말 현재 퇴직연금제 전환 사업장이 1만7137개사로 5인 이상 사업장의 3.6%에 불과할 정도로 실적이 지지부진하다.

부족한 은퇴자금도 문제지만 은퇴 이후 효율적인 자산관리의 부재 등 은퇴자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대의 은퇴자 조사에서 “재무상담을 받아 봤느냐”는 질문에 은퇴자의 90.1%는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절반가량(43.5%)이 ‘관심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한국투자자교육재단 박병우 사무국장은 “은퇴자들이 현재 보유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 및 운용하기 위해선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투자자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생활비-자녀 뒷바라지로 여력이 없어” 79%


주부 성모(44·서울 서초구 서초동) 씨는 남편 수입의 절반가량을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아들의 사교육비로 쓴다.

성 씨는 “영어 수학 과학 예체능 등 꼭 필요한 것 위주로 시키는데도 이 정도 든다”며 “최선을 다해 아이들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축이나 노후준비는 꿈도 못 꾸고 있다”고 털어놨다.

‘교육비 부담’은 한국의 중장년층이 은퇴 준비를 하지 못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의 은퇴자(503명) 심층조사에서도 은퇴 준비를 하지 못한 이유로 ‘자녀교육비와 결혼자금 때문에 여력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36%를 차지했다. ‘생활비 부담’(42.6%)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이다.

교육비 중에서도 특히 사교육비 부담이 크다.

최근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07년판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한국의 사교육비 지출액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9%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공교육과 사교육을 합친 교육비 전체 지출액은 7.5%를 차지해 2위였다.

이에 반해 은퇴자 관리가 잘되는 나라로 꼽히는 네덜란드에서는 ‘사교육’이 없다. 대학은 지원만 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학교에 갈지, 대학에 진학할지만 본인이 선택하면 된다.

암스테르담에서 재즈 공부를 하고 있는 서현수 씨는 “네덜란드에는 학원이 없기 때문에 사교육비 부담도 없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8세가 되면 대부분 독립하는데, 이들의 집세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 국가에서 주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돈 쓸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인이 여유롭게 은퇴 준비를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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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2>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미국


‘선 시티’ 수공예 교실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은퇴자를 위한 도시 ‘선 시티’ 1호에 거주하는 은퇴자들이 레크리에이션 센터가 개설한 수공예 교실에서 바구니를 만들고 있다. 건설회사인 델 웹이 개발한 선 시티는 현재 미국 전역에 15곳이 있다. 피닉스=손효림 기자
“은퇴 준비 일찍 시작했죠. 취직하자마자 사회보장연금, 기업연금 등을 붓기 시작했으니까 직장 생활과 동시에 한 셈이죠.”

간호사로 일하다 1997년 은퇴한 미국인 제니 스미스(72·여·워싱턴) 씨는 30여 년간 부은 연금 덕분에 생활비 걱정 없이 살고 있다. 딸이 하나 있지만 용돈이나 생활비는 일절 받지 않는다.

미국은퇴자협회(AARP) 회원인 그는 이곳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여행이나 건강정보를 덤으로 얻고 있다.

미국의 은퇴자들은 사회보장연금, 기업연금, 개인연금 등 ‘트리플 연금시스템’의 체계적인 지원으로 비교적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은퇴자 관리에 AARP 등 민간단체가 정부 못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미국의 평균 은퇴 연령은 62세인데, 보통 은퇴 전까지 계속 연금을 붓는다.

누구나 취직하면 연간 급여의 7.65%를 한국의 국민연금에 해당하는 사회보장세(Social Security Tax)로 낸다. 기업도 같은 금액만큼을 부담하기 때문에 1인당 연간 급여의 15.30%가 나가는 셈이다. 자영업자는 수입의 15.30%를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사회보장세는 은퇴 후 사회보장연금으로 돌려받는다.

기업연금 가입도 일반화돼 있다. 미국 근로자연금연구소(EBRI)에 따르면 2004년 말 현재 기업연금을 붓고 있는 직장인은 8400만 명으로 전체 민간업체 근로자의 75%에 이른다.

특히 연간 1만5000달러(약 1425만 원)까지 소득공제 혜택이 있는 401K에는 1620만여 명이 가입해 있다.

401K는 미국 근로자 퇴직소득보장법 401조 K항에 규정돼 있는 기업연금으로 펀드, 주식, 채권 등 다양한 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개별적으로 개인연금을 넣는 것도 보편화돼 있다.

대학 교직원 출신으로 1995년 은퇴한 잭 애슬리(75·피닉스) 씨는 “직장에 다니는 동안 사회보장연금, 기업연금, 개인연금을 꼬박꼬박 넣어 현재 월수입 중 연금 소득이 60%를 차지한다”며 “은퇴 전과 비슷하게 생활하면서 월 20%는 저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EBRI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미국인의 평균 수입원은 △사회보장연금 40.1% △기업연금과 개인연금 19.3% △자산소득 13.6% △근로소득 24.8%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연평균 연금소득은 남성의 경우 민간 부문 종사자가 1만3920달러(약 1322만 원), 공공 부문은 2만6682달러(약 2534만 원)였다.


○정부와 민간의 조화

“모든 사람이 품위 있게 나이 들어가는 사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목표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이 AARP의 역할입니다.”

워싱턴의 AARP 본부 로비에 들어서자 이런 내용의 큼지막한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1958년 설립된 AARP는 50세가 넘는 사람들이 가입하는 비정치기구로 현재 3800만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이는 미국의 50세 이상 인구 중 절반에 이르는 규모다.

AARP는 막강한 조직력을 배경으로 각종 정부 정책이 은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입안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나이를 기준으로 고용이나 해고를 하지 않는 ‘연령차별금지법’이 1967년 제정된 것도 AARP가 이뤄 낸 성과 중 하나다.

매튜 선태크 AARP 정책 연구원은 “재취업 안내, 세금 컨설팅, 법률 서비스, 주택마련 지원 등 은퇴자를 위한 각종 서비스를 실비 수준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건설업체인 델 웹의 창업자 델버트 유진 웹 씨가 세운 은퇴자를 위한 도시 ‘선 시티’도 은퇴자 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는 민간 부문의 활동상을 잘 보여 준다.

○은퇴자 대상 상품 판매 경쟁 치열

미국의 금융회사들은 기업연금은 물론 개인연금을 유치하기 위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JP모건 지미 뷸러 연금담당 연구원은 “미국의 은퇴자 대상 금융시장 규모는 지난해 말 현재 약 15조 달러로 추산된다”며 “최근에는 고위험 고수익 상품보다는 손실을 최소화하는 원금보장형 상품이 은퇴자들에게 인기”라고 말했다.

찰스 스와프 증권사는 미국 뉴욕 JFK공항에 ‘나의 401K(기업연금)는 더 나은 운용처를 찾고 있다’는 대형 광고판을 세우고 기업연금 고객 유치에 주력하고 있다.

다양한 연금제도가 잘 구축돼 있는 미국이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간의 역할이 크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정부의 역할이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AARP 간행잡지인 ‘AARP 불리틴’의 편집자 제임스 토트먼 씨는 “직장이 없거나 불법 체류자 등 사회보장연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미국 전체 인구의 50%에 이른다”며 “저소득층 은퇴자에 대한 지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경제부>

이강운 차장(팀장) kwoon90@donga.com

워싱턴·뉴욕·피닉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런던·옥스퍼드·암스테르담=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도쿄=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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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자 천국 ‘선 시티’

“집과 차 임차료 등을 모두 합쳐 한 달에 2000달러(약 190만 원)면 충분합니다. 여기에는 수영, 헬스 및 각종 레크리에이션 비용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있는 은퇴자 도시 ‘선 시티’ 1호에서 만난 젠 칼리(76) 씨는 이곳의 저렴한 물가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20년간 직업군인으로 복무한 뒤 개인사업 등을 하다가 은퇴한 그는 1992년 피닉스 선 시티로 이주했다.

2만6000여 가구, 4만여 명이 거주하는 선 시티 1호 주민의 평균 나이는 73.5세.

이곳에 입주하려면 가족 중 한 사람이 55세 이상이고, 나머지 가족도 모두 19세가 넘어야 한다. 주택은 1억5000만∼5억 원이면 살 수 있고, 도서관 체육관 등 각종 편의시설과 야간 방범활동은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된다.

‘선 시티 방문자 센터’와 도서관 등에서는 백발의 자원봉사자 할머니들이 방문자들을 반겼다. 도시 곳곳에서는 골프 카트를 타고 한가롭게 이동하는 노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수영장, 헬스클럽, 볼링장 등 체육시설은 물론 수공예 및 목공예 교실 등 각종 레크리에이션 시설에도 노인들로 가득했다.

선 시티 총책임자인 폴 헤르만 씨는 “선 시티는 교육세 등이 면제돼 인근 지역에 비해 세금이 연간 기준으로 61%나 싸다”며 “연회비 10달러만 내면 댄스, 헬스, 목공예 등 각종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고 골프 라운드도 3달러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매년 가구당 연회비 380달러(약 36만1000원)를 내는 것 외에는 별도 비용이 거의 없다”며 “선 시티 내에 자기 집이 있으면 부부가 생활하는 데 월 120만∼150만 원이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다만 선 시티에 처음 입주할 때 가구당 회비 300달러(약 28만5000원)를 내고, 주택을 구입할 경우 도시 운영비 2500달러(약 237만5000원)를 일시불로 지불해야 한다.

선 시티는 애리조나 외에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텍사스 등 미국 전역에 걸쳐 15곳이 만들어졌다. 현재도 추가로 건설되고 있지만 토지 매입비용이 상승해 새로 건립된 곳일수록 주택가격이나 연회비 등이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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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3>‘요람에서 무덤까지’ 유럽

“노후 생활 걱정 없어요”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렘브란트 풍차 공원. 전기엔지니어로 일하다 은퇴한 얀 스토커(69·왼쪽), 티니 스토커(68) 씨 부부가 한가로이 조정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사회보장제도 덕분에 은퇴생활에 큰 불편이 없어 좋다”며 웃었다. 암스테르담=김상수 기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서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오스도르프 시(市). 100여 가구가 사는 은퇴자 공동주택으로 들어가자 제니 스나이더 바이크(71·여) 씨가 ‘어서 오라’며 반갑게 손짓을 했다.

집 안에는 주방 화장실 침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문턱이 없었다. 노약자들이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시에서는 이런 공동주택을 여러 곳에 지어 거동이 불편한 은퇴자에게 공급한다. 월세는 568유로(약 68만 원)로 일반주택 월세의 절반 수준이다.

[연재]‘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
- <1> 돈 없고 갈 곳 없는 한국
- <2>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미국
- <3> ‘요람에서 무덤까지’ 유럽
- <4> 은퇴자가 대접받는 일본
- <5> 한국에 남겨진 과제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남편 프레트 항크 판 바이크(91) 씨와 함께 살고 있다.

“3, 4명의 의사가 공동주택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부를 수 있어요. 식당을 그만둔 뒤 매달 1224유로(약 146만 원)의 연금을 받는데 월세가 싸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이 없어요.”

유럽은 사회보장이 워낙 잘돼 있어 ‘은퇴자 천국’으로 불린다. 풍요로운 노후의 기초가 되는 연금제도는 19세기 유럽에서 탄생했다.

○은퇴자 경제적 파워 막강


네덜란드의 고령자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말 현재 네덜란드 인구의 22.9%에 이르는 55세 이상 고령자가 2025년에는 40%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의 경제적 파워는 막강하다. 네덜란드 전체 개인 자산의 65%, 민간 소비의 30%가 55세 이상 고령자들의 몫이다.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금융회사 ABN암로의 빔 발스타인 금융연구소장은 “최근 은퇴자들이 명품(名品) 소비에도 적극 나서는 등 이들의 소비 파워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이들의 여유자산을 유치하기 위한 금융회사들의 경쟁도 치열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ABN암로는 계좌에 5만∼100만 유로(약 6000만∼12억 원)를 예치한 고객을 타깃으로 자산관리사가 투자 성향에 맞는 자산 배분 등 자산 관리를 집중적으로 해 주고 있다.

서구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은퇴자의 경제적 파워는 탄탄한 연금제도가 기반이 됐다.

네덜란드의 연금제는 15∼65세의 모든 시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국가연금(국민연금), 근로자의 95% 이상이 들어 있는 기업연금(퇴직연금), 고소득층이 가입하는 개인연금이 각각 50%, 40%, 10%의 ‘황금 비율’로 짜여 있다. 은퇴하면 은퇴 전 평균소득의 70%가량이 연금으로 나온다.

지난해 말 현재 연금자산 규모는 7520억 유로(약 902조 원)로 네덜란드 국내총생산(GDP·2005년 기준)의 162%에 이른다.

성인 자녀에 대한 뒷바라지 걱정이 없고, 세금 부담 때문에 재산 상속이 거의 없다는 점도 네덜란드 노인들이 풍족하게 지내는 요인이다.

암스테르담에서 거주하고 있는 교포 송창주(67) 씨는 “이곳 사람들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다 쓰고 죽는다”며 “국가에서 집세와 생활비를 지원하기 때문에 자녀들도 18세가 되면 대부분 독립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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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자산 투자 늘려 연금자산 확충

영국 은퇴자협회가 지난해 설립한 자선단체 ‘헤이데이(HEYDAY)’ 사무실로 들어가자 활짝 웃는 노인들의 사진이 시선을 끌었다.

헤이데이의 에일사 오길비 이사에게 “헤이데이가 무슨 뜻이냐”고 묻었더니, “당신 인생의 전성기(heyday)는 은퇴 이후에 온다’는 뜻이라고 했다.

헤이데이에선 4만6000여 명의 회원에게 재무 컨설팅 및 건강 정보를 알려 주고, 꾸준한 사회활동 및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 각종 조언도 한다.

영국은 1908년부터 70세 이상의 저소득층 노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노령연금제를 실시할 정도로 일찍부터 은퇴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영국의 근로자들은 은퇴 전엔 국가연금과 기업연금에 보험료를 납부하고, 은퇴 후 이를 돌려받으면 연금펀드에 투자하거나 연금의 75%를 의무적으로 개인연금에 예치해야 한다. 연금자산을 보험사나 자산운용사에 예치하고 죽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을 보장받는 셈이다.

종합금융그룹 HSBC 데이비드 클레어 이사는 “영국 은퇴자들의 자산 배분은 70%가 간접투자, 10% 부동산, 나머지 20%는 현금이나 채권으로 구성돼 있다”고 소개했다.

예금, 채권 등 전통적인 안전자산보다 주식을 포함한 간접투자 등 위험자산에 투자해 은퇴 후 퇴직자산을 불리고 있다는 얘기다.

물가가 비싼 영국에서는 연금 외에 역모기지(주택을 금융회사에 담보로 맡기고 생활비를 타다 쓰는 것)를 적극 활용해 은퇴자금을 조달하기도 한다.

○일자리 창출로 연금 재정난 해결

유럽의 은퇴자 관리에도 고민은 있다.

평균수명 연장으로 연금을 받아 가는 노인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연금 재정이 곧 바닥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한동안 유럽에선 ‘조기 은퇴’가 유행이었다. 은퇴 전 소득의 약 70%에 이르는 금액이 보장되다 보니 서둘러 은퇴하려는 근로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젊은 층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조기 은퇴를 부추긴 측면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숙련된 근로자들이 줄줄이 은퇴하면서 생산성이 눈에 띄게 떨어졌고, 연금 재정에도 타격이 왔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연금 재정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잇따라 연금 개혁안을 내놓고 있다. 개혁안의 골자는 ‘일을 더 오래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연금 보험료는 더 많이 걷고 연금 수령 기간은 줄어들어 연금 재정 개선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영국은 연금 수령 나이를 65세에서 단계적으로 68세까지 올리기로 했고, 네덜란드는 조기 퇴직 시에는 연금 세금우대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유럽은 연금 개혁과 함께 고령자 직업교육 지원 등 고용 촉진 방안을 마련해 더 많은 노인이 일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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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잘 대처하면 위기 아닌 기회”▼


“고령화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은퇴자 관리를 잘하면 경제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죠.”

영국 옥스퍼드 시에서 만난 조지 W 리슨(54·사진) 옥스퍼드대 고령화연구소 부소장은 고령화를 ‘새로운 도전과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 젊은이들이 떠안는 세금 부담이 몇 배 많아지고, 잠재성장률이 떨어져 국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데…. 의아했다.

덴마크 네덜란드 영국 등을 오가며 30여 년간 고령화와 은퇴자 문제를 연구한 리슨 교수는 “고령화된다고 나라가 퇴보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버려라”고 했다.

“미국 유럽은 고령화가 빨리 진행됐지만 경제가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가용자산이 충분한 50대 이상 세대들이 은퇴 이후 활발한 소비를 하면서 국가 경제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리슨 교수는 ‘일자리 창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노인이 된 뒤에도 여전히 경제활동인구로 남아 있다면 세수(稅收)와 연금재정 확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00년 채용과 직업훈련에 연령 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지침을 제시하고 각 회원국의 시행을 권고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2004년 채용 시 연령 차별을 금지했다. 또 독일은 지난해 50세 넘어 취업할 때 근로자와 고용주에 각종 혜택을 주는 ‘이니셔티브 50플러스’ 계획을 발표하는 등 유럽 각국이 은퇴자 채용에 적극적이다.

리슨 교수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은 ‘나이 든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정부와 기업은 일하고 싶은 은퇴자들이 일할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경제부>

이강운 차장(팀장) kwoon90@donga.com

런던·옥스퍼드·암스테르담=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도쿄=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워싱턴·뉴욕·피닉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4>은퇴자가 대접받는 일본


‘인생 2막도 자신있게’ 일본 사회에서 은퇴자는 여전히 ‘세상의 중심’이다.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두 번째 삶’에서 새로운 인생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다. 이처럼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미 반세기 전에 도입된 연금제도 등으로 경제적으로도 가장 여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일본 오사카의 한 문화센터에서 여성 고령자들이 ‘뼈마디 이완운동’ 등 다양한 신체 활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AFP 자료 사진
10일 일본 도쿄(東京) 도 지오다(千代田) 구 오테(大手) 정에 있는 KKR호텔 10층 연회장은 60, 70대로 보이는 노인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1950년대 인기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청춘의 추억’ 밴드 공연을 보기 위해 1인당 8000엔(약 6만3000원)을 주고 이곳에 왔다.

호텔 측은 “비슷한 연령대의 뮤지션들이 출연해 관심이 높다”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은퇴자를 타깃으로 한 공연을 주로 기획한다”고 했다.

2년 전 한 중소업체에서 은퇴한 무라타 가즈오(村田和夫·60) 씨는 현재 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마케팅리서치팀에서 쌓은 25년의 실무경험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가 꿈꾸는 ‘제2의 인생’이다.

[연재]‘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
- <1> 돈 없고 갈 곳 없는 한국
- <2>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미국
- <3> ‘요람에서 무덤까지’ 유럽
- <4> 은퇴자가 대접받는 일본
- <5> 한국에 남겨진 과제

무라타 씨는 “월 24만 엔(약 190만 원)의 연금이 생활비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퇴직금과 주식에서 나오는 이자와 배당으로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은퇴자는 ‘주변인’이 아니다.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0.6%로 세계 첫 ‘초(超)고령사회’(65세 인구 비중이 20% 초과)로 진입한 일본에서 은퇴자는 여전히 사회의 ‘중심’이다.



○재취업 알선으로 은퇴자 관리하는 일본

도쿄 도 고쿠분지(國分寺) 시 미나미(南) 정에 사는 M(71) 씨. 그는 일본의 한 사립대 교수로 근무하다 지난해 3월 퇴직해 지금은 월 37만 엔(약 292만 원)의 연금을 받고 있다. 퇴직금으로 받은 4000만 엔(약 3억1600만 원)은 금융상품에 넣어 뒀다고 했다.

M 씨는 “40년 가까이 국민연금을 불입했고, 사학연금에도 가입해 남들보다 연금이 넉넉한 편”이라고 귀띔했다.

일본의 공적 연금제도는 20세 이상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기초연금과 우리의 국민연금 성격에 해당하는 후생연금으로 이뤄져 있다.

일본 총무성 조사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부부가 매달 받는 공적연금은 평균 약 21만8000엔(약 172만 원)이다.

일본에도 기업연금이 있지만 일본의 직장인들은 퇴직금을 선호한다. 대기업에서 40년 정도 근무하면 약 3500만 엔(약 2억8000만 원)의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은퇴자들이 비교적 활력 있는 노년을 보내는 데는 진작부터 고령자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해 온 일본 정부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고(高)연령자 고용안정법’은 1994년 60세 정년을 의무화했고, 2004년 개정 땐 정년을 65세까지 연장하거나 60세 퇴직 후 재입사 등의 방식으로 고용을 연장하도록 의무화했다.

올 3월 자동차부품업체인 산덴에서 은퇴한 뒤 미디어회사 재취업에 성공한 하타 조지(秦穰治·60) 씨는 “65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60세에 은퇴하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고 했다.

○일본 사회의 중심으로 부상한 은퇴자들

일본은행이 전국 2278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가계별 금융자산’에 따르면 2005년 말 현재 60대와 70대의 평균 금융자산은 각각 2265만 엔, 2127만 엔으로 전체 가계 금융자산 총액의 약 48%를 차지했다. 부채를 제외한 순금융자산만 보면 약 70%가 60대 이상 고령층의 몫이다.

특히 올해부터는 1947∼1949년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난 이른바 ‘단카이(團塊) 세대’가 은퇴자 대열에 본격 합류한다.

단카이 세대는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이들의 퇴직금만 최대 100조 엔(약 79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사회의 가장 강력한 부를 형성한 은퇴자들은 자연스럽게 기업들의 마케팅 타깃이 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은퇴자 모시기’에 적극적이다.

최근 후쿠시마(福島) 현, 고치(高知) 현 등 지자체들은 은퇴자들의 귀향에 대비해 ‘고향유치센터’를 개설하고 비어 있는 농가를 전원주택으로 개조하는 등 귀농(歸農)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다이와종합연구소 스즈키 히토시(鈴木準·40) 수석연구원은 “단카이 세대는 대부분 운전면허증이 있고, 휴대전화, 컴퓨터에 익숙한 세대”라며 “이들이 소비 주체로 부상하면서 경제에도 활력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저성장의 일본, 고령화의 그늘도 커진다

고령층의 소비 파워가 확대되는 한편 버블경제 붕괴 이후 금융자산 수익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한 데 따라 노후생활에 대한 불안도 커지고 있다.

N증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다 은퇴한 나이토 도시오(內藤俊雄·69) 씨는 “정기예금 이자가 크게 줄면서 퇴직금을 조금씩 헐어 생활하고 있다”며 “평균수명은 길어지는데, 퇴직금으로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40∼79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연금만으로 생활하기 어렵다’는 응답이 소득 수준에 따라 ‘52%(월 24만 엔 이상)∼81%(월 15만 엔 미만)’로 나왔다.

이어 후생노동성은 직장인들의 월평균 수입 대비 연금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소득대체율)이 2006년 기준 약 60%에서 2038년에는 43.9%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자들의 불안은 자산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안정 지향적인 일본인들마저 위험자산인 주식과 펀드 투자비중이 2001년 3월 6%대에서 지난해 3월엔 12%대로 두 배로 늘었다.

미쓰이스미토모생명 와타나베 나오키(渡部直樹) 영업부 차장은 “생활자금이 부족한 은퇴자가 늘면서 주식형펀드에 목돈을 맡기고 매월 생활자금을 받는 ‘분배형’ 펀드 비중이 1997년 5.3%에서 지난해 59.5%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日서 인기있는 은퇴자 금융상품▼

“7900만원 맡기면 매년 520만원 혜택”

분배형 종신연금 봇물



한 중년 남성이 달력을 한 장 뜯으면서 넘긴다.

뒤에서 지켜보던 딸이 ‘오늘이 아빠 정년퇴직하는 날이네. 뭐라고 말을 걸지?’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돌아선 아빠의 얼굴은 밝기만 하다. 이 모습을 확인한 딸은 “아, 오늘은 아빠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날이기도 하지”라며 환히 웃는다.

이어 “퇴직금을 어떻게 운용하시겠습니까?”라는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최근 일본의 TV에 자주 등장하는 한 금융회사의 광고 한 토막이다. 이 광고처럼 일본 금융회사의 광고 모델은 대부분 은빛 머리가 반짝이는 고령자다.

최근 일본 금융업계는 연금이나 금융자산 이자만으로는 생활비 조달이 빠듯해지면서 이를 보충할 수 있는 금융상품을 앞 다퉈 내놓고 있다.

한국에선 목돈마련용 금융상품이 대부분이라면, 일본에선 목돈을 받아 일정기간 혹은 죽을 때까지 이자와 원금을 쪼개 나눠 주는 상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본 3대 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이 2002년 8월 미국 메트라이프생명과 합작해 세운 미쓰이스미토모생명은 은퇴자를 타깃으로 목돈을 맡기면 최저 10년 이상부터 죽을 때까지 연금을 주는 종신연금 관련 상품만 팔고 있다.

예를 들어 60세에 1000만 엔(약 7900만 원)을 맡기면 죽을 때까지 최저 연 65만 엔(약 52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이 연금상품은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면서도 원금을 보장해 인기가 높다.

증권사에서는 주로 목돈을 받아 주식 채권 등에 투자한 뒤 매월 이자와 원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분배형 투자신탁’을 판매하고 있다.

노무라증권이 2005년 5월 내놓은 퇴직자 대상 분배형 펀드 ‘라이프스토리’의 수신액은 올해 1월 말 현재 약 1조5000억 엔(약 11조8500억 원)에 이른다.

스미토모신탁은행은 2005년 7월 은행권에서는 처음으로 3개월에 한 번씩 이자를 지급하는 정기예금을 내놓았다.

▽특별취재팀<경제부>▽

이강운 차장(팀장) kwoon90@donga.com

도쿄=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런던·옥스퍼드·암스테르담=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워싱턴·뉴욕·피닉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은퇴후 11년…‘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렘브란트 풍차 공원. 이 나라 출신 화가 렘브란트의 동상과 풍차가 어우러져 네덜란드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온 얀 스토커(69) 씨는 전기 엔지니어로 일하다 10년 전 은퇴해 지금은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저는 각각 월 2000유로(약 240만 원) 정도 연금을 받아요. 둘이 합쳐 4000유로죠. 연금의 3분의 1은 국가에서, 나머지는 기업연금을 통해 받습니다. 1주일에 3, 4번 골프치고 여행도 자주 갑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은퇴자 도시’ 선시티. 이곳에서는 부부가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만 부담하면 골프 수영 운동 영화 등을 모두 즐길 수 있다.

65세에 은퇴한 뒤 선시티로 이주했다는 플로이드 하이든(77) 씨는 “1년에 6개월씩 이곳과 미시간 집을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선시티 생활비가 미시간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고 귀띔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는 은퇴 이후에도 비교적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내는 노년층이 많다.

전문가들은 연금 사회복지 시스템 등의 제도와 함께 미국과 유럽 사회에 뿌리내린 ‘은퇴자 관리(Retirement Management)’가 안락한 노후생활에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은퇴자 관리는 ‘현역 시절에 열심히 모은 퇴직자산으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말한다. 자산을 불리기보다 퇴직자산의 고갈을 최대한 늦추면서 잘 쓰고 지내는 게 은퇴자 관리의 핵심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은 2026년에는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체계적인 연금시스템과 은퇴자 관리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 자금의 주요 기반이 되는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정부와 정치권의 의견 차가 커 갈수록 재정 부담이 커질 것이 확실시되는 국민연금제도 개편이 진통을 겪고 있다.

본보는 은퇴자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현실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 선진국들의 은퇴자 관리 시스템을 현장 취재하고 국내 실태도 점검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번 시리즈에 맞춰 본보 취재팀은 한국의 은퇴자 관리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에 은퇴자 503명의 일대일 면접조사를 의뢰했다. 50∼71세의 은퇴자를 대상으로 은퇴 전후의 생활을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 결과 은퇴자의 66.8%(336명)는 ‘은퇴 전에 은퇴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또 전체 조사 대상자의 73.6%(370명)는 ‘현재 보유 자산과 연금으로 은퇴 생활을 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또 현재 보유 자산(금융자산 평균 6634만 원, 부동산자산 평균 1억8037만 원)으로 앞으로 평균 11.72년을 생활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응답자의 평균연령이 59세인 점을 감안하면 약 71세에 노후자금이 고갈된다는 뜻이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손성동 실장은 “선진국들은 철저한 연금제도와 은퇴자 관리로 노후대비가 철저하다”며 “이에 반해 한국은 조기 퇴직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으면서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채 은퇴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 동아닷컴 재테크세미나 안내 “이것만 알면 나도 은퇴설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