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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고하는 축문(祝文)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정조-

천하한량 2007. 4. 8. 21:41

홍재전서(弘齋全書)   
 
 
 제문(祭文) 4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고하는 축문(祝文)
 

내가 즉위한 15년인 신해년(1791) 3월 3일에 국왕은 신 예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을 보내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용(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유(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영(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어(), 영풍군(永?君) 정렬공(貞烈公) 전(?), 판중추원사 이양(李穰),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병조판서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효전(鄭孝全), 영양위(寧陽尉) 증 의정부 영의정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판돈녕부사 증 영돈녕부사 정민공(貞愍公) 송현수(宋玹壽), 돈녕부 판관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도총부도총관 증 의정부좌찬성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별운검(別雲劒) 증 병조 판서 충강공(忠剛公) 박쟁(朴?), 형조판서 증 의정부좌찬성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승정원우승지 증 이조판서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형조참판 증 이조판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집현전직제학 증 이조판서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예조참판 증 이조판서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성균관사예 증 이조판서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도총부도총관 증 병조판서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박(河珀), 의정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 집현전부수찬 증 홍문관부제학 허조(許?),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순흥부사 증 이조판서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영월군호장 증 공조참판 엄흥도(嚴興道)의 신위(神位)에 제사를 드리게 하노라.

 

 

예로는 함께 제향되어야 하고 / 禮?與享
의로는 묘정(廟庭)에 배향되어야 하니 / 義取配庭
서른 명 남짓한 사람이 / 餘三十人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도다 / 炳?日星
갈사가 먼 것을 꺼려서 / 嫌遠葛祠
가까이 있는 모옥으로 나아가니 / 就近茅屋
서로 돌아보며 흠향함이 / 相將顧歆
매년 한식 때일세 / 每年寒食
임금과 신하를 일체로 제향하여 / 一體君臣
위에는 각이고 아래는 단이니 / 上閣下壇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 萬歲千秋
길이 옥란을 보호하소서 / 長護玉欄

 

계유년(1453, 단종1), 병자년(1456, 세조2), 정축년(1457, 세조3)에 죽음으로 섬긴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 등 236명의 종사(從祀)하는 신위와 함께 흠향하소서.

 

 

안평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세종의 셋째 아들로 자는 청지(淸之)이고, 자호는 낭간거사(琅?居士)이며, 세종께서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당호를 내려 주셨다. 학문을 좋아하고 시에 뛰어났으며, 무엇보다도 서화에 솜씨가 있었다. 계유정난 때 용(瑢)이 딴 뜻이 있어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김종서(金宗瑞) 등과 서로 왕래하였다는 이유로 강화도(江華雁)에 귀양 보내졌는데, 양사(兩司)가 용을 주범으로 논죄하여 법에 따라 다스릴 것을 청하여, 드디어 사사(賜死)되었다. 아들 의춘군(宜春君) 우직(友直)과 덕양정(德陽正) 우량(友諒)도 함께 연루되어 죽었다. 영종 정묘년(1747, 영조23)에 복관되고 기묘년(1759, 영조35)에 장소(章昭)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賓廳)이 유(瑜)가 지난 일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몰래 무사(武士)와 결탁하고 사당(私黨)들에게 많은 자금을 뿌리고 있으므로 그 죄를 다스려야 된다고 의논드려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는데, 또다시 유의 죄는 무거운데 벌은 가볍다고 아뢰니, 세조가 전교하기를, “유는 본래 죄가 없고, 다만 자신의 보신책을 쓰느라 경미한 과실이 있었을 뿐이므로, 지금 유배를 보내어 반성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얼마 안 되어 광주(廣州)로 배소를 옮겨 주고서 매번 친서로 안부를 묻고 하사물을 연이어 보냈다. 병자년(1456, 세조2) 성삼문(成三問) 등이 죽자, 순흥(順興)에 안치시켰는데, 정축년(1457, 세조3) 6월 상왕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寧越)로 안치되자, 유가 순흥에 있으면서 군사를 모집한 다음 죽령(竹嶺) 초점(草站)을 넘어 계립령(?立嶺)에서 상왕을 받들어 옮겨다 모시고 죽령 이남을 호령할 모의를 하고서,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에게 격문을 띄워 금정자(金頂子)와 산호영(珊瑚纓)을 뇌물로 주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의 감옥으로 이송 수감되었는데, 어느 날 알몸으로 도망쳐 부중(府中)이 깜짝 놀라서 그를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갑자기 나타나 웃으면서, “내가 참으로 도망쳤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옷을 여미고 승상(繩床)에 기대었다. 이에 진무사(鎭撫使)가 말하기를, “전패(殿牌)에 절을 올려야 하오.” 하고 전패를 모실 자리를 설치하고 서쪽을 향하게 하자, 유가 “우리 임금님은 영월에 계신다.” 하고는 북쪽으로 향하여 슬피 운 다음,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죽었다. 영종 무오년(1738, 영조14)에 복관(復官)되고 정사년(1737, 영조13)에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임술년(1742, 영조18)에 경상도 관찰사 심성희(沈聖希)가 순흥(順興)에 성인단(成仁壇)을 쌓고 제사 지냈다. 또 영천(永川) 송곡서원(松谷書院)과 청안(淸安) 죽계서원(竹溪書院)에도 배향되었다.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세종의 첫째 왕자(王子)이다. 어머니는 영빈(令嬪) 강씨(姜氏)이며, 자는 양지(良之)이다.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이 아뢰기를, “영이 최영손(崔永孫), 김옥겸(金玉謙) 등과 유(瑜)의 집에 모여 잔치를 벌이고 활쏘기를 하고 나서 이를 숨겼다.”고 하므로, 유는 고신(告身)을 회수하고 영은 청산(靑山)에 부처(付處)하였다가 이윽고 연안(延安)으로 옮겼는데, 상왕이 왕위를 내놓자 영이 늘 혼자 있으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병자년(1456, 세조2)에 금산(錦山)으로 안치되어 죽었다. 중종 때 복관되고 영종 갑인년(1734, 영조10)에 충경(忠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죽계서원(竹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시장(諡狀)을 상고하여 본바, 육신의 사건이 발각되고 나서 상이 성삼문 등을 법으로 다스려야 옳지 않은가 하고 묻는 말에 공이 대답하지 않았고, 정인지(鄭麟趾) 등이 또 상왕이 모의를 알고 있었다고 하니, 소를 올려 극력 따지므로, 익산(益山)에 금고되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록(實錄)에는, 을해년(1455, 세조1)에 부처(付處) 되고부터 풀려 돌아온 적이 없고, 육신의 옥사가 일어나자 영(瓔), 유(瑜), 어(), 천(?), 정종(鄭悰)이 유배된 고을에 파발을 띄워 타일러서 놀라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고 보면, 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거나 소를 올려 극력 따진다는 것은 절로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금산을 또 익산으로 잘못 기록한 것도 다 시장을 쓸 적에 제대로 상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이어(李), 영풍군(永?君) 정렬공(貞烈公) 이천(李?)

어는 세종의 넷째 왕자이고, 천은 여덟째 왕자인데,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이며, 천은 또 박팽년의 사위이다. 양빈이 늘 단종에게 젖을 먹였던바, 의정부가 빈의 신분으로서 궁중의 일을 마음대로 하였다 하여 바깥으로 내쫓았는데,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에서 양빈이 아들 어와 천 및 금성대군 이유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다고 의죄(議罪)하여, 양빈은 청풍(淸風)으로, 어는 금산(錦山)으로, 천은 예안(禮安)으로 유배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는 아산(牙山)으로, 천은 안성(安城)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며, 또다시 어는 양지(陽智)로, 천은 수원(水原)으로 옮겼다가, 병자년(1456, 세조2)에 어는 함양(咸陽)에, 천은 임실(任實)에 안치시켰는데, 금성대군이 패한 뒤 양빈 및 어와 천도 그 사건으로 죽었다. 중종 때 모두 복위되고 숙종 때 예장(禮葬)을 명하였으며, 영종 임술년(1742, 영조18)에 어에게는 정도(貞悼)라는 시호를, 천에게는 정렬(貞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내가 경술년(1790, 정조14)에 영풍군의 묘가 고양(高陽)에 있기는 하나 그 위치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그 근처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신해년에 한남군의 후손에게 명하여 양빈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동시에 특별히 민정(愍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양(李穰)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이다. 김종서(金宗瑞)가 죽자, 김종서가 이양ㆍ황보인(皇甫仁)ㆍ민신(閔伸)ㆍ조극관(趙克寬)ㆍ윤처공(尹處恭)ㆍ이명민(李命敏)ㆍ원구(元矩)ㆍ조번(趙藩) 등과 함께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安完慶)과 결탁하여 종묘사직을 위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황보인ㆍ조극관과 함께 같은 날에 죽고, 아들 승윤(承胤)과 조카 승로(承老) 등도 연좌되었다.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아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경혜공(景惠公) 이전(李專)의 아들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병자년(1456, 세조2) 옥사 때 박팽년(朴彭年) 등을 국문하면서 역당(逆黨)에 가담한 사람들을 묻자, 권자신ㆍ김문기(金文起), 박정(朴?), 송석동(宋石仝)이라고 대답하고, 또 권자신이 일찍이 팽년 등과 모의하고서 그의 어머니 화산부인 최씨(崔氏)에게 고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죽고 아버지 전도 관작을 추탈당하여 서인이 되었으며, 아들 구지(仇之) 역시 연좌되었다. 숙종 기묘년(1699, 숙종25)에 전과 자신은 함께 복관되고 영종 기축년(1769, 영조45)에 자신에게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내가 유사에게 명하여 그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모든 사람들을 제단을 설치하여 배향할 것을 의논하도록 한바, 성 충문(成忠文 성삼문(成三問)), 박 충정(朴忠正 박팽년(朴彭年)), 허 정간(許貞簡) 부자(정간은 허후(許?)의 시호. 아들은 허조(許?)임)는 모두 배향하였으나, 화산부인은 부인을 함께 배향하는 예법은 보지 못하여서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다.

행 병조판서 삼군도진무사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효전(鄭孝全)

오천부원군(烏川府院君) 정진(鄭鎭)의 아들인데, 태종의 넷째 딸 숙정옹주(淑貞翁主)에게 장가들어 일성위(日城尉)에 봉해졌다. 갑술년(1454, 단종2)에 의금부가 아뢰기를, “효전이 도진무(都鎭撫)로서 집이 시좌소(時座所)의 위내(衛內)에 있었는데도 정난(靖難 계유정난)을 하던 날 궁궐에 시위하러 나오지 않았고 이튿날에도 병을 핑계로 집에 있었습니다. 효전은 이미 죽었으니, 부관참시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자녀들을 연좌시키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의 족보를 상고하면, 효전이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경술(1490, 성종21)에 죽었는데, 원석(元碩)과 극창(克昌) 두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단종실록》에 의거하면, 효전의 죽음이 벌써 경태(景泰 명 나라 경제의 연호) 갑술년(1454, 단종2)에 있었는데, 아들 원석도 연좌되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태 갑술년에서 홍치 경술년까지는 37년의 차이가 나니, 족보의 오류가 너무 심하다 하겠다. 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는 효전의 두 아들은 원창(元昌)과 극창(克昌)으로, 원석은 없고 원창만 있다. 이것이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나 족보의 원석이 실록과 합치되니, 《선원계보기략》의 원창은 틀린 이름인 듯하여 이제 실록에 따라 원석으로 수사(收司)에 열록한다.

증 의정부 영의정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이며, 문종의 맏딸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었다. 단종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종(悰)에게 크게 의지하고 그의 집에 거둥하여 거처하기도 하였다.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賓廳)이 그가 몰래 양빈(楊嬪)을 섬기고 또 유(瑜)와 결탁하였다고 논죄(論罪)하여 영월로 귀양 보냈다. 공주가 병이 나서 상왕이 상에게 고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상왕께서 사자를 보내어 ‘영양위의 공주가 병이 났다’고 하시니, 이는 아마 종을 돌려보내라는 뜻인 듯하다. 내가 듣고 보니 황공하구나. 의금부는 놓아 보내라.” 하였다. 종은 병자년(1456, 세조2)에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가 신사년(1461, 세조7)에 승려들과 결탁한 혐의를 받고 끝내 죽고 말았다. 공주는 종을 따라 귀양을 가서 몸소 극도의 고생을 겪었지만 조금의 원망도 하지 않았는데, 종이 죽자 곧바로 불려 왔다. 아들 미수(眉壽)는 당시 7세의 나이로 공주를 따라 대내(大內)로 들어왔는데, 광묘(光廟 세조)께서 측은히 여기시어 “문종의 외손이 너 한 사람뿐이라는 말인가.” 하고 불러서 무릎에 앉히고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리시더니, 이어 미수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성종의 잠저에 모시라고 명하였다. 예종 원년에 하유하기를, “지난날 내가 광묘를 모셨을 적에 광묘께서 하교하시기를, ‘경혜공주의 아들은 난신의 아들로 논죄하면 안 된다’ 하기에, 내가 곧장 그 하교를 받아 썼다. 미수를 서용(敍用)하라.” 하여, 미수가 우찬성의 벼슬을 지냈다. 영종 기묘년(1759, 영조35) 종에게 영의정이 추증되고 헌민(獻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록(月汀漫錄)》을 상고해 보면, 종이 죽고 나서 공주가 순천(順天) 고을의 노비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세조실록》에 의거하면, 기묘년(1459, 세조5)에 광주(光州)에 안치된 정종과 그의 아내에게 의복을 내려 주었을 뿐, 그 뒤 순천으로 유배한 사실은 없다. 실록의 초본(抄本)에만 경진, 임오, 을유, 병술 4년이 빠져 있으니, 이는 아마 참고될 만한 사실이 없어서 생략한 것이겠고, 《월정만록》은 당연히 오류이다. 그러나 지금 신사년(1461, 세조7)에 소환한 것으로 적으면서 특별히 영양위(寧陽尉)의 묘지문을 증거로 삼았으니, 당시에 이미 영양위가 죽었다는 사실 역시 믿을 만하다. 또 《해평가전(海平家傳)》에는 공주가 유배지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대내로 데려다 친히 길렀는데, 예닐곱 살이 되어 궁정에서 장난을 치며 노는 것을 보고 세조가 누구의 아이냐고 묻자 정희왕후가 곧장 전각에서 내려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실록을 상고한 바, 종이 을해년(1455, 세조1)에 유배지로 갔다가 곧바로 풀려나서 병자년에 비로소 광주에 안치되었고, 처첩과 자녀들이 같이 따라가 살기를 자원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공주가 유배지로 따라간 시기는 당연히 병자년일 것이고 병자년에서 신사년까지는 겨우 5년 동안인데, 설령 병자년에 곧바로 아들을 두었다 하더라도 예닐곱 살이 되도록 자랐다면 공주가 소환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까지 대내에 머물러 있지도 못하거니와, 또 과연 유배지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올 리도 없으니, 이 말은 매우 믿을 수 없다. 예종이 일찍이 “종의 아들과 그의 아내를 들여 뵙도록 하니, 세조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눈물을 훔치며, 나로 하여금 전교를 써 내려서 연좌를 윤허하지 말도록 하셨다. 내가 지금 어찌 감히 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한 전교가 국사에 실려 있는데, 하신 말씀이 정녕하고, 영양위의 유사(遺事)에 미수(眉壽)가 공주를 따라 대내로 들어갔다고 한 기록이 실록과 합치되므로 지금 영양위의 유사를 따라 쓴다.

증 영돈녕부사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행 판돈녕부사 정민공(貞愍公) 송현수(宋玹壽),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권완(權完)

송현수는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아버지이고, 권완은 정순왕후의 잉첩의 아버지이다. 현수는 언젠가 윤대(輪對)에서 광묘(光廟)가, “경은 마땅히 날마다 상왕께 문안을 드리고 성심껏 보좌하여야 되오.”라고 전교를 내린 적이 있는데, 정축년(1457, 세조3) 6월에 김정수(金正水)라는 남자가 현수와 완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여, 완은 능지처참되고 현수도 죽었다. 기묘년(1699, 숙종25)에 영돈녕부사 여량부원군의 벼슬이 추증되고, 내가 신해년(1791, 정조15)에 정민(貞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자(字)는 사겸(四謙) 또는 춘경(春卿)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14)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임신년(1452, 문종2)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과 같이 고명(顧命)을 받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나서 황보인도 아들 석(錫)ㆍ흠(欽)과 함께 죽었다. 영종 병인년(1746, 영조22)에 복관되고, 무인년(1758, 영조34)에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종성(鍾城) 행영사(行營祠)에 배향되었다.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자는 국정(國禎)이고, 호는 절재(節齋)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태종 을유년(1405, 태종5)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일찍이 함길도 도절제사로 나가서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지략이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대호(大虎)’로 지목하더니, 계유정난 때 맨 먼저 죽음을 당하였다. 아들 승벽(承璧) 등도 연좌되었다. 영종 병인년(1746, 영조22)에 복관되고, 무인년(1758, 영조34)에 충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내가 병오년(1786, 정조10)에 어떤 사람이 백악(白嶽)에서 김종서의 신주를 얻었는데 그 집에 명하여 조천(?遷)하지 말고 대대로 제사를 받들라고 하였다. 행영사(行營祠)에 배향되었다.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

자는 자유(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찬성 이오(以吾)의 아들이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계유정난 때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조상의 신주를 모시더니, 어느 날은 종자(從者)를 보고, “정갈한 밥을 한 상 차려라. 내가 제사를 지내련다.” 하여 제사를 지내고서는 신주를 불살랐는데, 그러고 나자 사자(使者)가 도착하여 죽었다. 아들 원(遠)은 거짓으로 미쳐서 스스로 호를 광노(狂奴)라 하고 이어 광로(光露)로 이름을 바꾸어 도망쳐 버렸다. 영종 병인년(1746, 영조22)에 복관되고 무인년(1758, 영조34)에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장흥(長興)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 말년에 병조 판서가 되었고, 계유년(1453, 단종1)에 현릉(顯陵)의 비석을 감독하던 중, 세조가 정난(靖難)을 감행하여 김종서를 베고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를 보내어 신을 죽이니, 아들 보창(甫昌) 등도 연좌되었다. 내가 신축년(1781, 정조5)에 복관을 명하고 이듬해인 임인년에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계유정난 때 이양(李穰), 황보인(皇甫仁)과 같은 날에 죽었는데, 아우 수량(遂良)과 종제(從弟) 번(藩)도 연좌되었다. 영종 정축년(1757, 영조33)에 복관되었다.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세종 병오년(1426, 세종8)에 생원이 되고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成三問)ㆍ권자신(權自愼) 등과 함께 죽었는데, 아들 현석(玄錫)도 연좌되었다. 숙종조에 복관을 명하였고, 내가 무술년(1778, 정조2)에 충의라는 시호를 내렸다.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행 도총부 도총관(行都摠府都摠管)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별운검(別雲劍) 충강공(忠剛公) 박정(朴?)

승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석용(石瑢)의 손자이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달생(達生)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랐는데,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때 승이 도총관으로서 도총부에 당직을 서고 있던 중, 종을 승정원에 보내어 성삼문(成三問)에게 자꾸 물어보니, 삼문이 대답은 하지 않고 일어나 뒷간으로 가서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만 크게 내쉬었다. 그 종이 돌아와서 승에게 이 말을 아뢰자, 승도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가서는 곧장 병가를 내고 방 안에 드러누워 집안 식구들도 만나 주지 않으며, 오직 삼문이 찾아올 때만 사람을 물리치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삼문 등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숙종 임신년(1692, 숙종18)에 복관되고, 아들 삼빙(三聘)ㆍ삼고(三顧)ㆍ삼성(三省)도 연좌되어 죽었다. 녹운서원(綠雲書院)의 별사(別祠)에 배향되었다.
정은 무과에 올랐는데, 병자년(1456, 세조2) 박팽년을 국문할 적에 무엇을 하려 하였는가 하는 심문에, 팽년이 답하기를, “성승ㆍ유응부ㆍ박정과 별운검(別雲劍)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하였습니다.” 하여, 그만 능지처참을 당하였으며, 정의 아들 숭문(崇文) 등도 연좌되었다. 내가 갑진년(1784, 정조8)에 승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하고 신해년(1791, 정조15)에 충숙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정에게는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충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증 의정부 좌찬성 행 형조 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호는 한석당(閒碩堂)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목사(牧使) 안생(安生)의 아들이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17)에 생원이 되어 세종 계묘년(1423, 세종5)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미년(1427, 세종9)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단종 계유년(1453, 단종1)에 상이 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불러 대사헌을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군인가를 묻자, 황보인 등이 대답하기를, “의당 생각이 깊고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박중림이 제격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고 드디어 대사헌을 삼았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아들 팽년(彭年)과 함께 죽었는데, 아들 수찬 기년(耆年), 교리 인년(引年), 박사 대년(大年), 정랑 영년(永年)도 연좌되어 죽었다. 처형되기 직전에 여러 아들들이 울며, “임금에게 충성을 하려다가 효도를 저버렸습니다.” 하니, 중림이 웃으며,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스럽지 않은 것이 불효이니라.” 하였다.
중림은 어릴 적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질병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리고 하늘에 빌었으며, 자라서는 경전(經典)에 정통하여 성삼문ㆍ하위지 등이 다 그의 문인이다. 세조가 언젠가 전교하기를,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서연관 최만리(崔萬里)ㆍ박중림이 옆에서 보필하면서 한 가지의 과실만 있어도 그때마다 간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그 두 신하는 제 직분을 다하였다 할 만하다.” 하였다. 영종 기미년(1739, 영조15)에 복관되고, 내가 갑진년(1784, 정조8)에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무신년(1788, 정조12)에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도총관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자는 근보(謹甫)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태어날 적에 공중에서 어떤 묻는 소리가 세 번 들렸기 때문에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이 되어 무오년(1438, 세종20)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 세종29)에는 중시에 장원을 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박팽년ㆍ신숙주와 함께 양조(兩朝 세종과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았다. 계유년(1453, 단종1)에 김종서 등을 주살(誅殺)하고 나서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에게 정난 공신(靖難功臣)의 호를 내리는데, 모든 공신들이 다 연회에 참석하였으나 삼문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때 단종이 갓 즉위하였는데, 삼문이 우사간으로서 아뢰기를, “예전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諸侯)들에게 조회를 받은 것은 천하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자는 저의였습니다. 주상께서 어리신 나이로 궁중에 깊이 거처하시어, 군신들이 접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매월 1일과 16일에 흰옷을 입고 근정문에 납시어 군신의 조참(朝參)을 받으심으로써 군신들로 하여금 우러러볼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다.
을해년(1455, 단종3) 선위(禪位)할 때 삼문이 승지로서 옥새를 전하게 되자 목 놓아 울었다. 이날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투신하려는 것을 삼문이 만류하였는데, 마침내 상왕의 복위를 함께 모의하게 되었다. 급기야 일이 발각되어 광묘(光廟 세조)가 전교하기를, “너희들이 나의 녹을 먹고 있으면서 나를 배반한다면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자, 삼문이 대답하기를, “실로 나리의 녹은 먹지 않았습니다. 상왕이 계시는데 나리께서 어떻게 우리들을 신하로 삼으려 하십니까.” 하였다. 가산을 몰수하고 보니 을해년 이후의 녹봉은 어느 한 방에 따로 저장하여 두고서 ‘모년 모월의 녹봉’이라고 써 놓았다. 처형되기 직전에 좌우를 돌아보며, “너희들은 훌륭하신 임금님 잘 보좌하여 태평 세대를 이루어라. 삼문은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님을 뵈오리라.” 하였다. 아들 맹첨(孟詹) 등도 함께 죽었다.
전에 문종이 오랫동안 동궁에 있으면서 달 밝은 밤 인적이 고요할 때마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집현전의 숙직소로 걸어와서 집현전 학사들과 문난(問難)을 하므로, 이때 삼문 등이 밤에도 감히 관디[冠帶]를 벗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밤이 이미 깊어서야 옷을 벗고 누우려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신발 소리가 터벅터벅 나면서 ‘근보(謹甫 성삼문)’ 하고 부르자 삼문이 놀라 일어나 절하고 맞아들였으니, 그 은우(恩遇)가 이와 같았다.
숙종 기미년(1679, 숙종5)에 노량(露梁)에서 열무(閱武)를 하고 나서 육신묘를 증축하도록 명하고 얼마 후에 ‘민절사(愍節祠)’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을축년(1685, 숙종11)에 강원도 관찰사 홍만종(洪萬鍾)이 장릉(莊陵) 옆에 사당을 세워 육신을 배향하였는데, 뒤에 ‘창절사(彰節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신미년(1691, 숙종17)에 다시 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전교하기를, “저 육신이야말로 어찌 천명과 인심을 거역할 수 없음을 몰랐으랴. 그러나 진심으로 섬기던 임금이었기에 죽어도 후회가 없었던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서는 덮어 두어야 하는 그 의리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가 포장하려는 것은 그의 절의 때문만이 아니라,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 하신 전교의 성의(聖意)가 여기에 담겨 있는 만큼, 이번의 일은 세조의 유의(遺意)를 이어받아 세조의 성덕(盛德)을 빛내자는 것이다.” 하였다.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창녕(昌寧) 물계서원(勿溪書院)과 의성(義城) 충렬사(忠烈祠), 노량(露梁) 민절사(愍節祠),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판서 중림(仲林)의 아들이며, 자는 인수(仁?)이다. 임자년(1432, 세종14)에 생원이 되고, 갑인년(1434, 세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묘년(1447, 세종29)에는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문종이 언젠가 몸이 편찮아서 밤에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들여 어린 세자를 부탁하고 이어 어탑 밑으로 내려와 앉아 친히 술을 따라 권하자, 팽년 및 성삼문ㆍ신숙주가 모두 술에 취하여 쓰러졌는데, 내관에게 명하여 문짝을 떼어 내고 교자에 태워 숙직청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여러 사람이 아침에 깨어 보니 색다른 향내가 방 안 가득히 풍기며 몸이 초금(貂衾)에 누워 있었으니, 바로 주상이 손수 덮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서로 쳐다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단종이 언젠가 칭찬하기를, “팽년은 학문을 정밀히 연구하여 경연에서 진강(進講)을 할 적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이 많으니 당상관이 될 수 있도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부제학으로 발탁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숭지(李崇之)가 비파를 진상하는 것을 팽년이 물리칠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말을 좋게 받아들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 등과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수감되었을 적에,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몰래 타이르기를, “네가 나를 섬기면 마땅히 너를 사면하리라.” 하니, 팽년이 웃으며 대답도 않고, 상을 부를 적이면 그때마다 ‘나리(進賜)’라고 하여, 상이 “그대가 일찍이 나에게 신하라고 하고서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자, 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나리의 신하라는 말이오. 저번에 관찰사로 있을 적의 장독(狀牘)에도 신(臣)이라 일컬은 적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장독을 비교하여 보니 모두 ‘거(巨)’ 자였다. 옥중에서 죽자 광묘가 일컫기를, “팽년 등은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 하였다. 아들 생원 헌(憲)ㆍ순(珣)ㆍ분(奮) 등도 함께 죽었다. 순의 아내 이씨(李氏)는 막 임신을 하였는데, 아들을 낳을 경우 연좌되게 되어 있었다. 여종 역시 임신을 하였는데, 여종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이라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 하였다. 출산을 하니 과연 아들이어서 여종이 맞바꿔 기르며,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는데, 성장한 뒤 자수하자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일산(壹珊)으로 이름을 고쳤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었으며,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을미년(1775, 영조51)에 정려(旌閭)되었으며, 회덕(懷德) 정절서원(靖節書院), 연산(連山) 충곡서원(忠谷書院), 녹운서원(綠雲書院), 낙빈서원(洛濱書院)과 노량 민절사, 영월 창절사,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白玉)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고려 시중(侍中) 이색(李穡)의 증손자이다. 세종 병진년(1436, 세종18)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 세종29)에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 등과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는데, 처형되기에 앞서, “우임금의 솥이 무게 있을 때에야 삶이 역시 의미가 크지만, 생명이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곳에서는 죽음이 오히려 영광이로다.[禹鼎重時生亦大 鴻毛輕處死猶榮]”라는 시를 남겼다. 아들 공회(公澮)도 연좌되었다. 광묘가 수양대군으로 사저에 있을 적에 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드나들며 비밀 모의를 하므로 개가 경계한 적도 있었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녹운서원, 낙빈서원과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자는 중장(仲章)이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로, 지군사(知郡事) 하담(河澹)의 아들이다. 세종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이 되고 무오년(1438, 세종20)에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일찍이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세조가 총재관(摠裁官)으로 있을 적에 여러 유신(儒臣)의 관질을 올려 줄 것을 청하여, 위지가 당시 집의로 있으면서 중직대부에 승급되었으나 혼자만 끝까지 극력 사양하였다. 그러고 나서 질병을 핑계로 조복(朝服)을 모두 팔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돌아갔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자, 위지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개혁을 한 초기에는 마땅히 널리 꾀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혹시라도 너무 느슨히 하여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혹시라도 너무 관대히 하여 기강을 해이하게 하지 마시며, 혹시라도 군주의 위세가 신하를 제약하여 언로가 막히게 하지 마소서. 다시금 이상견빙(履霜堅氷)의 경계와 포상(苞桑)의 경계를 생각하시어 공실(公室)을 보다 더 공고히 하고 내치(內治)를 보다 더 엄격히 하며, 권문(權門)의 농간을 보다 더 철저히 막고 붕당의 흐름을 보다 더 확실히 끊으시어 항간이나 초야에서 몰래 불순한 논의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은 강호(江湖)에서 질병을 안고서 멀리 대궐을 바라보며, 밤낮으로 오열하고 눈물 흘리며 천지와 귀신에게 부르짖고 말없이 빌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오늘날 보필을 맡은 사람들이 보필의 도리를 다하여 성체(聖體)가 날로 더 강녕하시어 하루빨리 모든 정무를 친히 살피심으로써 해동 백만억 적자(赤子)들의 우러름과 기대에 부응하시고, 안으로 궁내에서부터 밖으로 사경(四境)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평하여 조금의 동요도 없으며, 태조ㆍ태종ㆍ세종ㆍ문종께서 물려주신 왕통이 영원히 반석 위에 올려놓아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전하께서도 마땅히 귀와 눈을 활짝 여시고 정직한 의논을 잘 받아들이시어 지사(志士)의 기량을 크게 넓혀 주고 미맹(未萌)의 사욕을 엄격히 막아 버리시며, 일심을 밝히시어 간교한 행위를 살피고 일심을 바로잡으시어 삿된 생각을 막으소서. 강경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여 어려운 운세를 잘 이겨 내어 문종 황고(文宗皇考)의 희망에 뒷받침하셔야 하지, ‘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고 한갓 겸양만 내세우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광묘가 상에게 아뢰어 좌사간으로 불러들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을해년(1455, 세조1)에는 예조 참의를 제배하였으나 받은 녹봉을 먹지 않고 모두 다른 곳간에 쌓아 두었다. 병자년(1456, 세조2)에 거사가 발각되자 광묘가 그의 재주를 아껴서 비밀리에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만 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자, 위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남들이 반역으로 지목한 이상 그 죄는 응당 죽어야 하오. 무엇 하러 물어보는 거요.” 하였는데, 성삼문과 함께 같은 날에 죽었다. 형 학유(學諭) 기지(紀地)와 생원 소지(紹地), 아들 호(琥)와 박(珀)도 함께 죽었다.
이에 앞서 위지가 무슨 사안을 말하다가 세조의 비위를 거슬렀는데, 광묘가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가 이윽고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정직하기로 이름이 나 있어서 내가 나의 과실을 들어 보려는 것이었으니 놓아주라.” 하고는 이어 타이르기를, “오늘의 일로 해서 나의 과실을 말하지 않지는 말라.” 하였다. 천순황제(天順皇帝)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지가 감개하여 말하기를, “천자의 몽진(蒙塵)은 천하가 다 같이 분개할 일이다. 우리들이 비록 해외의 배신(陪臣)이기는 하지만 어찌 근심을 같이 나누지 않고 태연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늘 외랑(外廊)에 거처하며 침실에 들지 않았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을유년(1705, 숙종31)에 위지의 조카 원(源)의 자손으로 위지의 후계를 세우도록 명하였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면서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내가 정유년(1777, 정조1)에 정려(旌閭)하였다. 선산(善山) 월암서원(月巖書院), 녹운서원, 낙빈서원, 그리고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상고하건대, 위지가 외랑에 거처하며 침실에 들지 않은 사실은 《무인기문(戊寅記聞)》에 보이는데, 그의 충의의 근성은 평소에 온축된 것으로써 하도 우뚝하여 공경을 자아낼 만하기에 여기에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무인기문》은 기준(奇遵)이 지은 것이고, 홍인우(洪仁佑)의 《치재일기(恥齋日記)》에는 이것이 박팽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홍인우는 기대항(奇大恒)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대항은 곧 준의 아들인데, 부자간에 들은 말이 서로 다를 수는 없을 것이고 보면 인우의 기록이 오류인 듯하다.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자는 태초(太初)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세종 갑자년(1444, 세종26)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 세종29)에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김종서 등이 주살되고 나서 성원이 집현전에 숙직하면서 교지를 기초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숙부께서는 주공(周公)과 같은 훌륭한 재주를 지닌 데다 주공과 같은 큰 공로까지 겸하였고, 과궁(寡躬 단종 자신을 가리킴)은 성왕(成王)과 같이 어린 나이에다 또 성왕과 같이 어려운 때를 만났다. 과궁은 성왕이 주공에게 지우던 책무로 숙부에게 책무를 지우고자 하니 숙부 역시 주공이 성왕을 보필하던 도리로 과궁을 보필하여 주오.” 병자년(1456, 세조2)에 사예로서 성균관에 당직을 서고 있던 중 제생이 성삼문의 사건을 알려 주자, 곧장 말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내를 시켜 술을 따르게 하여 마시고 조복을 갈아입은 다음 가묘(家廟)로 들어갔는데, 오래되어도 나오지 않아서 아내가 사당으로 가 보니 벌써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한 뒤였다. 아들 귀련(貴連)과 송련(松連)도 함께 연루되어 죽었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녹운서원과 낙빈서원,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증 병조 판서 행 도총부 도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자는 선장(善長)이고, 본관은 천녕(川寧)이며,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승(成勝)ㆍ박정(朴?)과 별운검이 되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응부는 성격이 강직하고 과격하여 처음에 모사를 결정하고 나서 곧장 여러 사람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권남(權擥)과 한명회(韓明澮)를 죽이는 데는 이 주먹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어디에다 대검을 쓰겠는가.” 하였다. 아들 사수(思守)도 연좌되었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면서 충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녹운서원과 낙빈서원,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증(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하박(河珀)

위지의 아들이다. 수감될 적에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의금부 도사를 돌아보며, “잠깐만 짬을 주어라. 어머니와 작별하고 오련다.” 하여 도사가 허락하여 주었는데, 박이 문 안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여쭈기를, “아버지께서 이미 죽음을 당하셨으니 아들이 혼자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만, 곧 시집을 가게 될 누님이 염려됩니다. 비록 관비(官婢)로 들어가더라도 부인의 의리란 오직 한 사람을 좇아 생을 마쳐야 합니다.” 하고는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와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위지는 아들다운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내가 신해년(1791, 정조15)에 특별히 사헌부 지평을 추증하였다.

 

 

의정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 증 홍문관 부제학 행 집현전 부수찬 허조(許?)

후는 본관은 하양(河陽)이며, 좌의정 허조(許稠)의 아들이다. 세종 병오년(1426, 세종8)에 문과에 급제하고, 병진년(1436, 세종18)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문종이 승하할 적에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고명(顧命)을 받들었다. 계유정난 때 정난 공신을 녹훈하면서 광묘가 영의정이 되어 뭇 신하들이 들어가서 축하하는데, 후도 불러들여서 참여시켰다. 술잔을 돌리고 풍악을 울리니 재상 정인지(鄭麟趾)와 한확(韓確) 등이 손뼉을 치며 마냥 웃어 대는데도, 후만은 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는 살아남은 것만도 족하다. 어찌 차마 고기를 먹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렸다. 거제도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는데, 육신들이 죽게 되자 세조가 전교하기를, “허후가 살아 있었더라면 칠신(七臣)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영종 정묘년(1747, 영조23)에 복관되고 병자년(1756, 영조32)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들 조는 그의 아내가 이개(李塏)의 누이동생이다. 세종 정묘년(1447, 세종29)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이개 등과 모의를 하다가 목을 찔러 자살하였는데, 아들 연령(延齡)과 구령(九齡)도 함께 연좌되어 죽었다. 내가 경술년(1790, 정조14)에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하였다.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계우의 아버지는 대제학 문헌공(文獻公) 연(堧)인데, 허후의 아버지 영의정 문경공(文敬公) 조(稠)와 함께 세종을 보좌하였다. 조는 예(禮)를 제정하고 연은 악(樂)을 제작하여 그 공로가 백중지간이었다. 계유정난 초에 후와 계우도 죽었는데, 후는 벼슬이 참찬이었으므로 시호가 있으나, 계우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선발되었다고는 하여도, 벼슬을 상고할 길이 없었다. 내가 신해년(1791, 정조15)에 특별히 아경(亞卿)을 추증하여 함께 정단(正壇)에 배향하되, 서열은 후의 다음으로 하였다. 세조가 연은 삼조(三朝)의 원로라 하여 연좌시키지 말 것을 명하였으나 연이 안치되기를 자원하였다.

증 이조 판서 행 순흥 부사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부사직(副司直) 현실(玄實)의 아들이다. 세종 기유년(1429, 세종1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금성대군이 순흥에 귀양 가 있을 적에 보흠이 순흥 부사로 있었는데, 서로 만날 적마다 눈물을 흘리고 몰래 영남 지방 인사들과 결탁하여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보흠이 격문을 기초하는 것을 관노(官奴)가 벽 뒤에서 엿듣고서 금성대군의 시녀를 통하여 그 격문을 훔쳐 내어 상변(上變)하려는데, 어떤 사람이 빼앗아 앞질러 고변하여, 보흠은 곤장을 맞고 박천(博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죽었다. 보흠이 어릴 적에 유방선(柳方善)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문장에 능하였다. 일찍이 집현전 박사에 선발되어, 성삼문 등 여러 사람들과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서호십경시(西湖十景詩)를 화창하였고, 또 길재(吉再)의 묘문(墓文)도 지은 것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영종 무오년(1738, 영조14)에 복관되면서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기미년(1739, 영조15)에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송곡서원(松谷書院)과 성인단(成仁壇)에 배향되었다.

증 공조 참판 영월군 호장(寧越郡戶長) 엄흥도(嚴興道)

영월군 사람으로서 본군의 호장이 되었다.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정축년(1457, 세조3) 10월 갑인일에 단종이 영월에서 승하하자, 흥도가 혼자서 임곡(臨哭)하고는 이튿날 을묘일에,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하여 놓았던 옻칠한 관(棺)을 가져다 본군 북쪽 5리 밖 동을지(冬乙旨)로 모시고 가서 서둘러 매장하였다. 가족들이 화가 두려워서 다투어 만류하자, 흥도가, “좋은 일을 할 따름이다.” 하고 매장을 하고 나서는 도망쳐 버렸다. 현종 기유년(1669, 현종10)에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고,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에 공조 좌랑에 추증되었으며, 영종 병오년(1726, 영조2)에 옛 마을에 정려(旌閭)하였다. 또 계해년(1743, 영조19)에 공조 참의를 더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무인년(1758, 영조34)에 공조 참판을 더 추증하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였다. 내가 을사년(1785, 정조9)에 지방관에게 명하여 그의 분묘를 증축하고, 무신년(1788, 정조12)에 또 제문을 지어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주D-001]정순왕후의 잉첩의 아버지이다 : 권완의 딸이 정순왕후의 시녀로서 후에 숙의(淑儀)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이상견빙(履霜堅氷) : 서리를 밟고 나면 곧 얼음이 꽁꽁 언다는 뜻으로, 사태가 점차 위기의 상황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다는 경계의 말이다. 《周易 坤卦》
[주D-003]포상(苞桑) : 뽕나무 밑둥치에다 꼭 붙잡아 매라는 뜻으로, 처음부터 기반을 굳건히 다져 놓으라는 경계의 말이다. 《周易 否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