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신화(剪燈新話)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7)
지금 여항(閭巷)의 이서(吏胥)들이 오로지 익히는 것은《전등신화》한 책인데 이를 읽으면 이문(吏文)에 능숙하여지기 때문이다. 이느 도필리(刀筆吏 문서를 다루는 하급관리)의 숙습(熟習)으로 지기(志氣)가 이미 그 속에 얽매였으니 굳이 책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 책은 이미 사대부(士大夫)들이 좋게 여기지 않는 것인데, 아울러 어느 대에 누가 지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 고증한 바가 있으므로 간략히 연원을 설명하고 사람들의 밝은 경계로 삼는다.
청(淸) 나라의 우촌(雨村) 이조원(李調元) 촉(蜀)의 사천(四川) 면주(棉州) 사람인데 건륭(乾隆) 때에 각학사(閣學士)의 벼슬을 하였다. 의《타여신습(唾餘新拾)》을 상고하건대 "저술은 또한 마땅히 스스로 삼가야 하는 것이니, 이조(梨棗 판각하는 나무로 즉 책을 뜻함)만 화를 당할 뿐이 아니라 또한 평생의 품행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전당(錢塘) 구우(瞿祐)의 자(字)는 종길(宗吉)로《전등신화》를 저술하였는데, 괴괴(鬼怪)하고 음란한 일이 많이 실려 있으며, 같은 시대의 여릉(廬陵) 이창기(李昌淇)가 다시《속전등신화(續剪燈新話)》를 지었는데, 이 두 책이 서점에서 잘 팔린다.
내가 일찍이 가흥(嘉興)의 주 선생 정(周先生鼎)에게 들으니 '《신화》는 종길의 저서가 아니고 원(元) 나라 말엽에 부모(富某)라는 자가 있었는데 송(宋) 나라 때의 정승 정공(鄭公)의 후손으로서 항주(杭州)의 오산(吳山)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양염부(楊廉夫 염부는 양유정(楊維楨)의 자(字))도 항주에 있었는데 일찍이 그의 집에 갔다가, 마침 부생(富生)은 다른 일로 외출하였고 큰 눈이 내렸으므로, 10여 일 머물게 되자 장난삼아 이를 지어 주인에게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종길은 소년 시절에 부씨(富氏)의 양서(養?)가 되었기 때문에 일찍이 염부(廉夫)를 모셨다가 이 원고(原稿)를 얻었는데, 뒤에 드디어 숨기고 자기의 저술로 삼았으나, 오직 추향정기(秋香亭記) 1편만이 곧 그의 자필이다.' 하였는데, 이제《신화》의 글을 보매 염부의 글 솜씨를 닮지 않았으니, 주 선생의 말은 아마도 따로 근본(根本)한 적이 있는 것인가?
이창기(李昌祺)의 이름은 정(禎)인데 영락(永樂) 갑신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벼슬이 하남좌포정사(河南左布政使)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죽었다. 그는 사람됨이 청근(淸謹)하였고 시집(詩集)에《운벽만고(運?漫稿)》가 있다. 경태(景泰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연간에 도헌(都憲) 한옹(韓雍)이 강서(江西)를 순무(巡撫)할 적에 여릉(廬陵) 출신의 현인(賢人)을 학궁(學宮)에 배향(配享)하였는데, 창기만은 여화(餘話 《전등신화》를 속찬한 것을 가리킴)를 지었다는 것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저술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화》의 주(注)는 단지 '수호자(垂胡子) 주(註)'라고 썼기 때문에 그가 우리나라의 지추(知樞) 임기(林?)임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임기는 선조(宣祖) 때 사람으로 문장(文章)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방(豪放)하였는데《전등신화》의 주를 달았다.
상고하건대, 임기(林?)의 기(?)자가 필(苾)로 된 데도 있다. 초주청(草奏廳)에 백의(白衣)로 종사(從事)하였고, 호(號)를 수호자라 하였으며 《송계만록(松溪漫錄)》에 "많은 책을 널리 읽었고 글을 잘 지었으며 더욱 시에 능하였다." 하였다.
이공 휘지(李公徽之)가 일찍이 영남(嶺南) 사람에게 들었는데 "임기의 아버지 아무는 직학사(直學士) 이개(李塏)의 친구였다. 개(塏)가 육신(六臣)의 화(禍)를 당하여 딸 하나만이 있었는데, 기(?)의 아버지에게 부탁하였더니 받아 길러 첩으로 삼아 기를 낳았다. 문장에 능하여 자주 사신을 따라 명(明) 나라 서울에 갔었고 별주(別奏)를 지어 올려 1품계를 가자(加資) 받았으나 일찍 죽었다." 하였다.
임기 아버지가 육신인 직학사 이개와 친구였다면 단종조(端宗朝)에 살았었을 것이고, 그때에 딸을 낳았으므로 기(?)의 아버지에게 부탁하였을 것이니, 가령 기의 아버지가 그때 두어 살이었다 하더라도, 선조(宣祖) 초기에 이르러서는 나이가 이미 1백 세가 넘었을 것이다. 비록 50여 년 전에 기(?)를 낳았다 하더라도 기는 선조 중엽에 이미 60~70세가 넘었을 것이니 어찌 일찍 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영남 사람이 이공 휘지에게 전한 말은 오류인 듯하므로 아울러 언급한다. 《개령읍지(開寧邑志)》를 상고하건대 "임기는 군수 재광(霽光)의 아들로서 백의(白衣)로 초주청에 종사하면서 여섯 번 명 나라에 서울에 갔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증질(增秩)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일등(一等)의 공권(功券 공신의 공훈을 기록한 책)에 기록되었다. 어필(御筆)로 써서 내려 주기를 '임기(林?)의 자손은 대대로 천역(賤役)을 시키지 말라.' 하였는데, 잃어버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그의 아들 우춘(遇春)은 그 아내와 함께 왜적을 꾸짖으면서 순절(殉節)하였는데 선조조(宣祖朝)에 사실을 아뢰어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주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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