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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원잡기-서거정(徐居正)-

천하한량 2007. 4. 8. 21:39

필원잡기 제1권
 

○ 일찍이 상고하건대, 당요(唐堯) 원년(元年) 갑진년 으로부터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원년 무신년까지가 총 3천 7백 85년이며, 단군(檀君)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년까지가 역시 3천 7백 85년이니, 우리나라 역년(歷年)의 수가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제요(帝堯)가 일어나자 단군이 일어났고, 주 무왕(周武王)이 나라를 세우자 기자가 봉해졌으며, 한(漢)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위만(衛滿)이 평양으로 왔고, 송 태조(宋太祖)가 장차 일어날 때에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한 것도 명 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시대이다.
○ 옛 기록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같은 날에 즉위하여 우(虞) 나라와 하(夏) 나라를 지나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神)이 되었는데, 향년(享年)이 1천 48세이다.” 하였다. 당시의 문적(文籍)이 전하지 않아서 그 참과 거짓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까지 그대로 전하여서 옛 기록을 적은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요의 시대에는 인류 문화가 밝게 선양(宣揚)되었는데, 하(夏)ㆍ상(商)에 이르러 세상이 점점 나빠져서 임금이 왕위(王位)에 있음이 장구한 자도 40~50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사람의 수명이 상수(上壽)는 백 년, 중수(中壽)는 60~70년, 하수(下壽)는 40~50년인데, 어찌 단군만이 1천 백 년에 가까운 수를 갖고 한 나라의 왕위에 있었으리오.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또 이르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우(禹)임금이 제후(諸侯)들을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으나, 그 말은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오래도록 왕위에 있었고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갔었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문적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국의 글에 어찌 한마디 말도 이를 기록한 것이 없었을까.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은 의심이 없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시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천지가 아득한 날에 / 聞說鴻荒日
단군이 박달 나무가에 내려왔다 하네 / 檀君降樹邊
몇 대를 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 世傳不知幾
지내온 햇수는 천 년이 넘네 / 歷年曾過千

하였으니, 이는 그 대를 전함과 역년(歷年)이 오래 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한 것이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이었으며, 뒤에 임금 준(準)에 이르러, 한고조(漢高祖) 병오년에 위만(衛滿)이 침입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하였는데, 기씨(箕氏)가 평양에서 도읍한 것이 8백 78년이다. 기준(箕準)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여 이를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한사군(漢四郡)과 이도독부(二都督府)의 시대를 지나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6년 무진년에 망하였으니, 이것이 또 1백 40여 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왕이 마한을 습격해서 점령한 것만을 기록하였고, 기씨의 세계(世系)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필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 《천운소통(天運紹統)》을 상고해 보니, 함허자(涵虛子)가 말하기를, “조선은 안동국(安東國) 동쪽에 있는데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를 삼아서 은(殷)은 뒤를 이어 중국의 번방(藩邦 속국)을 삼았는데, 주(周)가 망함으로부터 후한(後漢)까지 천여 년을 지나서 공손강(公孫康)에게 찬탈당하여 기자의 전통이 끊어졌다.” 하였다.
또, “기자가 중국의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갈 때에,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의(醫)ㆍ무(巫)ㆍ음양복서(陰陽卜筮) 등속과 온갖 공인(工人)과 기예(技藝)들이 모두 따라갔기 때문에, 반만(半萬)의 은인(殷人)들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공손강의 찬탈이란 것은 근거가 없고, 5천의 은나라 사람들이 요수를 건너갔다는 것은 어느 글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 함허자(涵虛子)가 또 말하기를, “기자가 조선에 이르니,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 통역으로 말을 알았고, 시서(詩書)를 가르쳐서 중국의 제도를 알게 하였다. 그 결과 부자와 군신의 도리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五常)의 예의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백공의 기예를 가르쳐서 의원ㆍ무당ㆍ음양복서의 술법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예의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로써 여덟 가지 법을 제정해서 백성을 교화하니, 한 해가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재물로써 속죄(贖罪)하고, 상해(傷害)한 자는 곡식으로 속죄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니, 3년이 못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신의(信儀)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독실히 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룩하였으니, 성인의 교화라 이를 만하다.
병기(兵器)로써 싸우지 말기를 가르치기를, “하루의 난리는 10년이 지나도 안정되지 못하여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져서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덕으로써 강포(强暴)함을 감복시키니, 이웃 나라에서 그 의(義)를 사모하고 서로 친하였으며 중국의 번방(藩邦)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역대(歷代)로 중국을 친히 하고 신임하여 봉작(封爵)을 받고 조공(朝貢)을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예의의 도(道)가 없어지지 않아서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 각대(各代)의 제도와 같기 때문에, 시서예악(詩書禮樂)의 나라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말하게 된 것은 기자가 창시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함허자의 논술이 《한서(漢書)》와 대략 같은데 우리 동국의 풍속에 세밀하였다. 역대의 여러 역사서와 국조의 《혼일지(渾一誌)》에 논술한 바는 그릇되고 근거가 없으니, 모두 잘못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 우리나라의 분야(分野)는 옛 사람은 연도(燕都 북경)에 비겼었는데, 기사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경의 분야에서 나오니, 일관(日官 천문을 보는 관리)이 아뢰기를, “이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세종께서 깊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연경과 분야가 같은데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정통황제(正統皇帝)가 북정(北庭)에서 함몰되었고, 우리 세종대왕이 승하(昇遐)하였으니 연경과 분야가 같다는 말이 일리가 있을 듯하다.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며, 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양(漢陽)인데, 그 중 명당(明堂) 터는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 터가 된다는 것은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서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고려에서 한양에 남경(南京)을 세우고 오얏나무[李]를 심었으며, 이성(李姓)을 가려서 부윤(府尹)을 삼고 왕도 해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그 지기를 눌렀었다.
내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한양 명당(漢陽明堂)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자리라고 한 것만 쓰여 있고 그 땅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두 궁궐의 정전(正殿)을 살펴보면 다 임좌병향이니, 억측하건대 고려에서 잡은 곳도 이 두 궁터에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술사(術士)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이가 있어 승문원(承文院)의 옛 터가 바로 명당자리라 하고, 혹자는 또 종묘 낙천정(宗廟樂天亭) 자리가 대지(大地)라고 한 것은 다 식견이 얕고 근거가 없는 말이다.
○ 도선은 백제(百濟) 사람이다. 일찍이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로서 냇가에 놀다가 아름답고 큰 오이[瓜]를 얻어서 먹었는데 갑자기 아이 밴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니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냇가에 버렸더니 바야흐로 추울 때인데, 갈매기 떼 수천 마리가 날아와서 위아래로 싸고 덮어서 십여 일이 되어도 죽지 않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출가하여 입산수도하였는데,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ㆍ지리ㆍ음양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또 당(唐)에 들어가서 승려인 일행(一行)의 술법을 배웠으니, 세상에 전하는 도참은 모두 도선이 지은 것이다.
근간에 당본(唐本)인 《성요(星曜)》 한 질(秩)을 얻었는데, 그 책에 고려국사부(高麗國師賦)라 한 것이 있으니, 의논이 정미(精微)하여 도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의논한 야율초재(耶律楚財)와는 시대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니, 이는 의심스러울 만하다. 어쩌면 고려국사라는 이가 도선의 술법을 비밀히 전하여 동방에는 전해 주지 아니하고 중국에 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영암현 도갑사(靈巖縣道岬寺)에 도선의 비(碑)가 있고 또 구림(鷗林 갈매기가 모였던 숲)이 있다.
○ 우리 동국의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학사 극일(姚學士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둘째가 되는데 모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기를, 최충헌(崔忠獻)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삼고, 탄연을 둘째로 삼고, 유신(柳紳)을 셋째로 삼았으니, 이는 권세가에게 아부한 것이요, 공정한 평론은 아니다.
원(元)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趙孟?)의 법을 세웠다. 선생(조맹부)의 수적(手跡)이 온 세상에 퍼져서 그 동국에 유전한 것을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이 되었는데, 묵적(墨跡)이 새 것 같다. 그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온 세상에 흩어진 것이 또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고, 조맹부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오히려 멀며, 우리 동국은 한쪽 구석에 있으나 조맹부의 필적을 오히려 많이 얻어 볼 수 있었다. 당(唐)으로부터 진(晉)까지의 시대는 서로 멀지 않은데도 당의 문황(文皇)은 천자의 큰 힘으로써,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구할 때에 소이(蕭異)를 보내어 많은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사년 간에 학사인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조공(趙公)의 필법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것을 감탄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날마다 당시의 명유(名儒) 6~7명과 더불어 조용히 논담(論談)하였으니, 조공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문유(文儒)로 이제현(李齊賢) 선생 같은 분도 그와 또한 많이 시종했다. 왕이 동으로 돌아올 때에 문적과 서화 만 첨(萬籤)을 싣고 왔으니, 조맹부의 수적이 동국에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동국에서 조공의 필법과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杏村) 이암(李?) 한 사람뿐이다.
○ 김생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인데, 글씨를 잘쓰기로 유명하였다. 송(宋) 나라 숭녕(崇寧) 때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瓘)이 송나라에 들어갔었더니,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족자에 글씨를 쓰는데,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우군의 진적(眞跡)을 얻어 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 같은 신묘한 필적이 있으리오.” 하였다. 관이 항변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었다.
근간에 조학사 자앙(趙學士子昻 조맹부)의 창림사비 발문(昌林寺碑跋文)을 보니 이르기를, “위의 글씨는 당 나라 때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신라국의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 사람의 유명한 각본(刻本)이라도 이보다 크게 낫지 못할 것이다. 옛 말에, ‘어느 땅엔들 나무가 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과연 옳다.” 하였으니, 조학사의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토벌하였다. 그 격문(檄文 편지)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내어 죽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한다.” 하니, 황소가 격서를 읽다가 이 대문에 이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평상에서 내려왔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그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으니, 당시의 기습(氣習)이 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동방의 문체가 옛 법식과 같지 못해서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의 글이 지금에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에서 당 나라에 바친, 비단에 수놓은 오언고시(五言古詩)와 고려 을지문덕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사구(五言四句)를 보니,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당시에 글이 능한 선비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 당 나라 학사 고운(顧雲)이 지은 최치원의 고향에 돌아감을 송별하는 시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舟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 / 文章感動中華國

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준 글에,
무협 중봉의 나이(12세)에 베옷으로 중화에 들어갔다가 / 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
은화 열수의 나이(28세)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갔다 / 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
한 것이 있으니, 이는 12살에 당에 들어갔다가 28세에 동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동국에 돌아온 뒤의 이력과 행적은 상고할 바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그때 마침 세상이 어지러워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중들과 한가롭게 놀았다.” 하였다. 공이 쌓은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과 홍류동 봉하석(紅流洞鳳下石)에 그가 쓴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나, 그의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겠으며,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당(唐) 희종(僖宗) 12년 을사년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인데, 최치원이 당 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고, 10년이 지난 갑인년 진성왕(眞聖王) 8년에 시무(時務) 10여 조항을 올렸는데 왕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되는 해이다. 25년을 지나서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웠고, 또 10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최치원의 나이 그때 70이 되어 크게 노쇠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 거취(去就)를 상고할 바가 없으니, 의심할 만한 일이다.
○ 사대(事大)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름지기 정밀하고 간절하여야 한다. 고려 때에 요인(遼人)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경 삼으려 하니,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었는데, 이론과 실지가 명백 간절하였으므로 요제(遼帝)가 그 의논을 정지하였다.
명 태조(明太祖) 29년 하정(賀正)할 때에,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이 표문을 지었고,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이 전을 지었으며, 서성군(西城君)정총(鄭摠)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윤색하였는데, 황제가 보고 표문과 전문의 말이 모멸에 가깝다고 노여워하여 정총ㆍ김약항ㆍ권근 등을 불러 문책하였는데, 권근은 용서를 받아 돌아왔으나, 정총 등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의 지제고(知制誥) 최보순(崔甫淳)이 금 나라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오마(五馬)가 강을 건너 진제(晉帝)가 새 임금이 됨을 나타내었고, 육룡(六龍)이 등극하니 주역(周易)의 대인(大人)을 봄과 부합한다.” 하였는데, 그때 금나라 군주는 형제가 나라를 다투었었으므로, 이러한 사실에 저촉된 것을 미워하여 그 칙명에, “진(晉) 원제(元帝)의 일을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최보순은 이로 인하여 견책을 당하였으니, 최보순의 표사(表辭)가 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요의 노여움을 일으킨 것은, 일을 인용함이 적절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常)의 재능(才能)을 질투하여 살해하였다.” 하나, 지금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정지상이 묘청(妙淸)의 술책에 빠져서 그 우익(羽翼)이 다 제거되어 스스로 온전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므로,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바도 아니었다. 또 본전(本傳) 및 여러 책에 한 마디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을 상고해 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김과 정이 문자(文字) 사이에 감정이 쌓여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 김부식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우신관(祐神館)에 가보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을 놓았는데,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왕보(王?)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神)인데 공 등은 아는가?” 하고 말하기를, “옛날 황제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바다를 건너가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서 영생(永生)하는데, 이것이 그 여신상이다.”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시초에는 이런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東明王)의 출생에 유화(柳花)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 고려 말기에 인심이 다 우리 태조께 돌아왔으나,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조금 다른 형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왕(桓王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 환조로 추존됨)의 비문을 지은 것이 태조의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 때였는데, “주(周) 나라가 비롯 옛 나라이나, 천명이 새롭도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도통(都統) 최영(崔瑩)이 죽을 때에, “이광평(李廣平 이인임〈李仁任〉의 봉호)이 항상 말하기를 ‘판삼사(判三司 태조)가 마땅히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하더라.” 하였으니, 광평과 도통은 다 나라를 담당한 대신으로서 오히려 이런 말이 있었으니, 천명과 인심이 우리 태조에게 돌아간 것은 무진년(태조가 등극한 해)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우리 태종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문황제(文皇帝)가 연왕(燕王)으로 있었는데 태종이 찾아가 방문하자 문황제가 말을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와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환국함에 미쳐 우리 조정 사대부들이 태종께 묻기를, “천하가 크게 평정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때는 고황제(高皇帝 태조)가 정무를 사퇴하고 건문제(建文帝)가 태자로 있을 때이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와 용봉(龍鳳)의 자품이며 넓고 큰 도량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 천하가 안정될 것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연왕으로서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의 위에 오른 뒤에 우리 태종을 특별히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의 임금을 보니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더라.”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에 진공(進貢)하는 말을 태종이 친히 뽑아 고르는데 하열(下列)에 있는 말을 제 일등으로 하기를 명하니, 마부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말을 진상하자 문황이 보고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맨 먼저 올린 말이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신(聖神)의 보는 바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준마(駿馬)를 고르는 것과 인재를 분별하는 것은 내가 옛 사람에게 양보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합문(閤門)을 나가기 전에, 언제나 글을 반드시 백 번씩 읽으며, 《좌전(左傳)》과 《초사(楚詞)》는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하면서도 글 읽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지니, 태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다. 이때 오직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쓴 간찰문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천 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밝고 부지런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뛰어나셨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유익한 일이나 글씨 쓰고 글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 노쇠하여 정무는 보지 않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여러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다 왕의 재결을 거쳐서 이룩되었으며 하루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니, 가히 하늘의 운행과 같이 정성이 쉬지 않는다 하겠다.
○ 세종이 처음 아악(雅樂)을 제정함에 중추(中樞) 박연(朴?)이 도와서 이룩하였다. 박연은 앉으나 누우나 매양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음률(音律)의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룩하니, 세종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ㆍ간의대(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을 제작하였는데, 만든 것이 극히 정치(精緻)하였으며, 모두가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여러 공장(工匠)들이 있었으나 임금의 뜻을 맞추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다하여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이다.”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유의하였는데, 그 주석이 정밀하지 못하고 구두가 명백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해서 많은 책을 널리 채집하여 일에 따라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간주(間註)를 달아서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와 《원위(源委)》, 《석문(釋文)》, 《집람(集覽)》 등의 책을 의거해서 깎고 보태었으며, 미진한 곳은 다른 책을 상고하여 보충하였다. 혹 글이 이해하기 곤란한 곳은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해하고, 혹은 글 구(句) 밑에 구자(句字)를 써서 구두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글자의 해석과 번음(飜音)에 이르러서도 상세하게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모두가 왕의 재량으로 이룩한 것인데, 이를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이름 하였다. 《강목통감(綱目通鑑)》도 그렇게 하였으니,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다.
근래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강목통감집람(綱目通鑑集覽)》을 보니, 엉성하고 빠진 부분이 자못 많고, 또 주해를 글 구(句) 밑에 넣지 아니하고 매권(每卷)의 끝에 붙여서 열람하기에 불편하였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나라의 《훈의》를 제일로 쳐야 할 듯하다. 또 《훈의》가 이룩된 것은 정통(正統) 병진년 이었고, 《집람》이 이룩된 것은 근일의 일이니, 중국에서 《집람》을 편찬할 때에 우리나라의 《훈의》를 보았더라면 반드시 탄상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 태종이 일찍이 주자(鑄字)를 만들었는데, 모양이 썩 좋지는 못하였다. 경자년에 세종이 이천(李?)에게 명하여 중국의 좋은 글자 모양으로 고쳤는데, 이전 것에 비해서 더욱 정교하였으며 이를 경자자(庚子字)라 한다. 갑인년에 세종이 명하여 좋은 음양자(陰陽字)의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극히 정교하였으며 이를 갑인자(甲寅字)라 한다. 경자자는 작고 갑인자는 컸는데 인쇄한 서책이 매우 아름답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쓴 글자 모양과 강희안(姜希顔)의 쓴 글자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인쇄한 서책이 점차 예전만 못하여졌다. 지금에 동자(銅字)는 다 공장(工匠)들이 훔쳐갔기 때문에 목활자(木活字)를 겸하여 사용하므로 글자의 크고 작은 것과, 새 것과 헌 것이 같지 아니하며 글줄이 고르지 못하니, 옛날 인쇄한 책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다.

 

 

○ 세종은 문치(文治)에 힘씀이 만고에 뛰어나서 경자년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문사(文士)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으며, 뒤에 30명으로 증원하였다가, 또 20명으로 고쳐서 열 사람은 경연(經筵)의 일을 맡고, 열 사람은 서연(書筵)을 겸직하였다.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니, 문장 하는 선비가 성대히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었는데 새끼가 모두 흰 색이었다. 수년 사이에 요직에 있는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영상 정인지(鄭麟趾), 좌상 이사철(李思哲), 영상 정창손(鄭昌孫),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ㆍ안지(安止), 판서 김조(金?), 참판 김돈(金墩), 판중추부사 김균(金鈞)ㆍ김말(金末), 영상 신숙주(申叔舟), 좌상 권람(權擥), 참찬 박중손(朴仲孫), 영상 최항(崔恒), 판서 김담(金淡),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 의정 윤자운(尹子雲),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 참판 노숙동(盧叔仝), 판서 양성지(梁誠之)ㆍ성임(成任)ㆍ이극감(李克堪), 부윤 이명겸(李鳴謙), 판서 김예몽(金禮蒙), 영중추부사 노사신(盧思愼),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찬성 홍응(洪應), 참찬 이승소(李承召), 참판 이파(李坡), 판서 이병(李?), 부윤 조근(趙瑾)ㆍ강희안(姜希顔), 판서 강희맹(姜希孟), 부윤 최선복(崔善復), 참판 박첩(朴捷) 등이며, 불초하지만 나 또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 또 박중림(朴仲林)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 등과 같은 이는 한때 현달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에 버드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으므로 어떤 이가 유성원에게 농담하기를, “화(禍)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라.” 하였는데, 유성원이 실패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고 집현전도 얼마 후 없어지고 말았다.
○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서 수십 년 동안을 양성하여 인재가 많이 나왔으나, 오히려 아침에는 관청에 나가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나이가 젊고 재주와 덕행(德行)이 있는 몇 사람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청에서 그 비용을 공급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가 되게 하였다. 앞에는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 승지 권채(權採), 직전(直殿) 남수문(南秀文)이 있었고, 뒤에는 문충공 신숙주가 있었으며, 그 밖의 사람도 모두 명사(名士)들이었다. 문종조(文宗朝)에는 남양군(南陽君) 홍응(洪應)과 한산군(韓山君) 이파(李坡)가 있었고, 보잘것없는 나도 여기에 선발되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거룩한 일이었다.

 

 

○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희우정(喜雨亭)에 행차하여 동정귤(洞庭橘) 한 소반을 근신(近臣)에게 하사하고 손수 소반 위에 쓰기를

향기로운 향나무는 코에만 좋고 / ?檀便宜鼻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데 / 脂膏偏宜口
귀여울사 동정귤은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도다 / 香鼻又甘口

하였는데, 자획이 용사(龍蛇)가 꿈툴 거리는 듯하고 광채가 빛났다. 내가 일찍이 그 글자를 임서(臨書)하여 간직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의 지보(至寶)이다.
○ 문종은 지혜가 밝고 정밀하였다. 집현전에서 일찍이 극성제문(棘城祭文 해주에 여귀(?鬼)가 심하여 제사한 글)을 지어서 올렸더니, 문종이 보고 주묵(朱墨)으로 고치고 몇 마디 말을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精)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으나, 정이 있는 것이면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과 불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나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으며,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마는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하여, 글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문장 하는 신하와 선비들이 미칠 바 아니었다.
○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매,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슬퍼하고 사모하니, 어떤 망녕된 자가 말하기를, “능히 신술(神術)을 부려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 하므로 영종이 그 신술을 시험하기를 명하였으니, 효험이 없자 그 자가 말하기를, “태종이 인종과 함께 한가롭게 백옥루(白玉樓) 난간에 다다라서 모란꽃을 감상하시느라 인간에 다시 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니, 영종이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서도 크게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세종의 초상(初喪) 때에 요망한 중이 와서 이런 술책을 아뢰므로 다른 시체에 시험하였으나 효험이 없었으니, 이치에 없는 거짓말이므로, 문종도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 세조(世祖)는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평시에 의논이 개연(慨然)히 당 태종(唐太宗)을 흠모하고 한 고조(漢高祖)를 하찮게 여겼는데,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양녕대군(讓寧大君) 제(?)와 더불어 고금의 제왕(帝王)을 의논하다가, 당 태종에게는 미칠 수 없다고 하니, 양녕이 대답하기를, “전하는 당 태종보다 크게 뛰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고쳐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므로, 양녕이 말하기를, “당 태종은 한 조그만 일로 장온고(張?古)를 죽였는데, 전하는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의 가법(家法)이 바른 것은 당 태종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세조가 빙긋 웃었다. 또 포주강(蒲州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는 일을 언급하자 양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균(千鈞)의 활[弩 쇠뇌]은 작은 쥐를 보고 발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는 유의하옵소서.” 하였으니, 양녕의 소견이 역시 기이하였다.
○ 세조가 일찍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유자(儒者)이니 예로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그대는 숨김 없이 말하라.”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상국사(相國寺)에 갔을 적에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우면서 마땅히 절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었더니, 중 찬녕(贊寧)이 대답하기를, ‘현재 부처에게는 절하고 과거의 부처에게는 절을 아니 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웃고 절을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음은 정도(正道)이고, 절을 하는 것은 권도(權道)라 생각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내가 또 아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중국 환관 황엄(黃儼)이 제주에서 동불(銅佛)을 가져 왔는데, 그가 태종께 먼저 부처에게 절을 하고 뒤에 예를 행하게 하니, 태종께서 절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황엄은 마음이 흉험(凶險)하여 트집하기를 좋아하니 권도를 좇아 부처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태종께서 이르기를,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을 할 것이나, 지금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어찌 절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엄이 굴복하고 드디어 예를 행하였으니, 거룩한 임금의 소견은 각기 같은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또 웃었다.
○ 세조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내가 일찍이 내전(內殿)에 들어가 보니, 감색(紺色) 무명에 범을 그린 갖옷을 입고 푸른 짚신을 신었으며, 갓끈은 순 무명으로 하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니, 비록 한 문제(漢文帝)가 옷을 빨아서 입었다는 일도 이와 같이 검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두 정승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삼가 힘을 다하여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세조가, “신 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신 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는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큰 술잔으로 벌주(罰酒) 한 잔을 주었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므로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다음에는 “신 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과 구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또“구 정승” 하고 불러도 구와 신이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먹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이 입술이 두터웠는데, 세조가 일찍이 희롱하기를, “어효첨은 순후(淳厚 순후〈唇厚〉와 음이 같다)하다.” 하였는데, 의정 윤사분(尹士芬)은 볼에 험이 있었기 때문에 문헌(文獻) 박원형(朴元亨)이 대답하기를, “윤사분은 시험(猜險 시험〈?險〉과 음이 같다)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세조는 음양지리의 글에도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게 보고 판단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 사주책)는 유학자가 궁리(窮理)하는 하나의 일인데 그대는 아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대강 보았습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그대가 가령서(假令書 사주책 풀이) 한 편을 지어보라.” 하므로, 내가 물러 나와서 여러 책을 모아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분류해 모으되, 범례(凡例)를 먼저하고 길흉신살(吉凶神殺)을 다음으로 하고 길흉론단(吉凶論斷)을 끝으로 하여 바쳤더니, 세조가 이르기를, “내가 녹명서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가령서를 지어서 궁중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쳐주는 수고가 없이 책을 펴보면 스스로 밝게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또 나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에는 녹명이 어떠한가.”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의 정월은 병인(丙寅)이요, 갑일과 기일의 생시(生時)는 갑자(甲子)이니, 육십갑자를 가지고 추산하면 그 수(數)가 7백 20이 되니, 7백 20년을 가지고 7백 20일과 시(時)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四柱)는 51만 8천 4백에서 다하고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인구가 성할 때에는 1천 5백~6백만에 이르니, 억조 중생이 어찌 51만 8천 4백에만 그치리이까. 지금 항간에서 사주는 꼭 같아도 화복(禍福)은 전연 같지 않은 자가 있으니,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오히려 한두 명이 있는데,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자가 어찌 천백 명뿐이겠습니까. 또 거리가 천 리가 되면 풍(風)이 같지 아니하고 백 리가 되면 속(俗)이 같지 않은데, 사주는 중국과 사해(四海) 민족이 다름이 없으며, 중국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ㆍ이서(吏胥)ㆍ서인(庶人)의 구분이 있어서 작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일일이 다 구별할 수 있으나, 사해 민족의 풍속은 혹 금수와 같아서 귀천의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51만 8천 4백 명의 녹명(祿命)에 매어서 그 같지 않음이 이같이 분분하겠습니까. 녹명의 글을 족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혹은 말하기를, ‘이순풍(李淳風)ㆍ이허중(李虛中)ㆍ소요부(邵堯夫)ㆍ서자평(徐子平) 등은 백발백중으로 맞았는데, 어찌 그 모두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밝은 거울이 여기 있어서 물건이 와서 비추면 좋고 나쁜 것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순풍ㆍ소요부의 무리는 마음이 본래 허령(虛靈)해서 밝기가 거울과 같기 때문에, 사물(事物)이 그 앞에 이르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저절로 나타나 속이지 못하니, 후세 술사들이 한갓 옛 사람의 글로써만 51만 8천 4백 명의 명수로써 천하 억조의 인명을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은 녹명서는 믿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하니, 세조가 웃고 이르기를, “자네 말이 옳다.” 하였다.
○ 예종(睿宗)이 처음 집정하여 대단한 각오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옥체(玉體)가 점점 위태하였다. 일찍이 손수 책 등에 쓰기를, 모두 예종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죽어서 이 시호(諡號)를 얻으면 만족하겠다.” 하였는데, 몇 달이 못 되어서 승하하니, 군신들이 시호를 예종으로 올려 과연 성상의 뜻에 부합하였다. 아! 슬프도다.
○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는 임술년 임자월 기미일 기사시에 났는데, 점(占)을 치는 이가 보고, “수명이 길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아버지 문청공(文淸公) 탄(坦)이 말하기를, “만약 덕을 쌓으면 조금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의 중에게 들었는데, 덕을 쌓는 조목이 세 가지가 있는바, 길 가운데로 다니지 말고, 흘러가는 물에 목욕하지 말고,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니, 너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국재가 종신토록 이 일에 명심하고 힘써서 잠시 동안이라도 어기지 않았는데 마침내 85세의 수(壽)를 누렸고, 지위가 일품에 이르렀으며, 한 가문(家門)에서 봉군(封君)한 이가 아홉 사람이나 되어, 복록(福祿)의 융성함이 고금에 거의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덕을 쌓은 효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익재(益齋) 선생이 지은 국재의 비문(碑文)을 보니, “무자(戊子)와 기미(己未)가 임사(壬巳)의 녹(祿)과 만나 서로 맞아 발복하였으니, 이는 천지조화의 묘함이다.” 하였으니, 점치는 이가 수명이 길지 못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은 평생에 지절(志節)이 있고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농담하기를, “자네는 세 가지 과실이 있는데 알겠는가.” 하였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말을 해 보라.” 하니, 말하기를, “남이 말하기를, ‘자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먹을 적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맨 나중에 자리를 파하니, 술 마시는 것을 너무 오래한다.’ 하더라.” 했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런 일이 있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적에 한 동이 술을 얻으면 친척과 친구들과 더불어 한 번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귀(富貴)하여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조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여색에 있어 담담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국산 물건을 무역(貿易)하는 데에 무심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낯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많은데, 혼인의 예식에 으레 중국의 물건을 사용하니, 나도 시속을 면할 수 없다. 하물며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함은 성인의 제도인데, 내가 무엇을 혐의하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앞에 한 말은 농담일세.”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일찍이 경사(京師 남경)에 갔었는데, 길에서 비를 만나 역리(驛吏)의 삿갓을 빌렸다가 돌려주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트집하고 그 값을 요구하므로, 공이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다. 뒤에 어떤 역리가 전삼(氈衫)을 잃은 것을 공에게 씌워서 그 값을 요구하니, 공이 또 주려고 하였는데, 사신(使臣) 발라(?羅)가 그 속임을 알고 우리를 국문하였다. 그제야 말하기를, “이분이 전에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이요,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여, 발라가 그에게 벌을 주었다.
○ 권문충공이 일찍이 충주에 귀양가 있었는데,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였을 적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밖에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곳)로 불려서 나갔었다. 하루는 태조가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은쟁반 하나를 주고 활을 쏘아 내기를 하게 하였다. 무신(武臣)들은 차례로 쏘았으나 모두 과녘을 명중시키지 못하였는데, 문충공은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으나, 이날에는 한 화살에 명중시켜 은쟁반을 차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활 쏘는 법으로써 그 덕(德)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새벽에 관아(官衙)에 나갔는데, 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신을 신었다. 공석에 앉자 서리(胥吏)가 이를 고하였는데, 공이 내려다보며 한 번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갈 적에 웃으며 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신이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볼 것이요,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볼 것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해가 있겠느냐.” 하였으니, 그가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불러 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나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고, 이색의 외모가 훤출하지 못하다고 황제가 이르기를, “이 늙은이는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색이 환국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황제는 속에 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의 말을 실언이라 하였다. 지금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치한 지 백여 년인데 여러 군주가 대(代)를 이어 나라를 지켜서 고황제가 남긴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고 변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규모와 제도가 한(漢)ㆍ당(唐)보다 크게 뛰어나니, 어찌 속이 없는 임금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색은 큰 유학자이니, 고황제의 큰 인물됨을 알지 못하였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것인가.
억측하건대, 고황제는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영웅들을 통어하며 변강(邊疆)을 개척하여 대업(大業)을 창조하는 데에 정신을 두었으니, 그가 이색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어린애가 곁에서 울고 웃는 것 같이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며, 이색을 뜻도 고황제가 천자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 세상일을 알 수 없는데 외국 사람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거만하고 업신여기는가 하여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 광무(漢光武)가 마원(馬援)을 대접하듯 고황제가 이색을 대접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이 없었을 것이다.
○ 문정공 조용(趙庸)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20여 년을 있었는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인재 양성에 공이 있었다. 대개 문장은 종이를 잡고 즉시 글을 썼는데 문장과 논리가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젊을 때에 한 서생(書生)이 원 나라의 책문(策問) 가려 뽑은 것을 구해 비장(?藏)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문정공이 보기를 청하였으나, 서생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가서 청하니 서생이 사흘 동안만 빌려주었는데, 문정공이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하고는 약속한 날짜에 돌려주었다. 하루는 문정공이 그 서생과 같이 글방에 있으면서 책문(策問) 서너 편을 외웠는데 한 자의 착오도 없으니, 서생이 이를 우연히 익힌 것이라 하고, 여려 책문을 닥치는 대로 뽑아서 외우게 하여도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서생이 말하기를, “공과 같은 분은 비록 장순(張巡)이라도 미칠 수 없다.” 하였다.
○ 문정공 맹사성(孟思誠)은 성품이 청백하고 소탈하며 단정하고 중후하여 의정부에 있으면서 대체(大體)를 지켰다. 공은 경자생(庚子生)인데 일찍이 장난으로 계묘계(癸卯契)에 들었었다. 어느 날 임금 앞에 있을 적에 임금이 공의 나이 몇인가를 물으므로 문정공이 경자생 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조정에서 물러나오자 계중(契中)에서 동갑이 아니라고 제명되어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이 천성으로 음률을 깨쳐서 항상 피리를 잡고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고 문을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공사(公事)를 아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고 겨울에는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일을 아뢰는 이가 가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아뢰러 오는 이들은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 문순공(文順公) 권홍(權弘)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었고, 더욱 전서(篆書)와 예서(?書)에 묘하였으며, 지위는 일품에 이르고 향년은 87세이다. 일찍이 남산 모퉁이에 집을 정하고 두개의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었는데, 복건(幅巾) 쓰고 여장(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을 끌며 한가롭게 거니는 모양은 깨끗하여 신선과 같았다. 그가 해서로 쓴 헌릉비(獻陵碑)와 전서로 쓴 성균관 비의 글씨는 매우 좋다. 일찍이 세종조(世宗朝)에 상서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자못 대체(大體)를 얻었다.
○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信)은 기국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문정공 맹사성과 대간(臺諫)에서 같이 일을 의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문정공은 낯빛이 흙빛이 되고 경황이 없이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정숙공은 낯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우리 임금이 간관을 죽인 이름을 얻을까 두렵 도다 / 恐君留殺諫臣名
하였다. 이 시를 종이와 붓이 없어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서 글자를 쓰고, 눈을 부릅뜨며 옥리(獄吏)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이 시를 상감께 아뢰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여귀(?鬼)가 되어 너희들을 씨가 없게 할 것이다.” 하였더니, 태종이 듣고 노여움을 풀고 석방하였다.
그 뒤에 공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해적을 만났는데, 해적이 칼을 빼어 들고 배 위로 뛰어들어서 행구(行具)를 약탈하니, 사람들은 손도 놀리지 못하였으나, 공은 걸상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찬찬히 지휘하니, 해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행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 문정공 유관(柳寬)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생애가 담박하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후생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와서 뵈려는 이가 있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요 성명은 묻지 않았다.
공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그때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개설하였으니, 그 절은 성 안에 있었다. 공이 역사를 편수하는 책임자가 되었는데, 일찍이 연모(軟帽)에 지팡이와 신을 갖추고 걸어서 다니며 수레와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 어떤 때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그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 일찍이 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 문경공(文敬公) 성석린(成石?)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양백안(楊伯顔)의 막하(幕下)가 되어 왜적을 방어하다가 군율(軍律)을 어기어 형(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졸고 있었는데 꿈결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공은 쑥대 관[蒿冠]을 쓸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쑥대 관은 쑥으로 머리를 싼다는 것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하였는데, 죽음을 면하고 제명(除名)되는 데 그쳤다. 그 뒤에 수상(首相)이 되어서 말하기를, “내 꿈에 호관(蒿冠)은 고관(高官)의 뜻이다.” 하였다.
소년 시절 4~5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辛旽)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록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신돈을 가리킴)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공의 나이가 60이었을 적에 그 어머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한 지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어서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금 뒤 어머니가 깨어나 말하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고 있던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기도하는 소립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어 궤장(?杖 안석과 지팡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의 정성이 이같이 지극하니, 이것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 하고는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문경공의 효성이 지극함을 감탄하였다.
○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은 본관이 진주다. 그 어머니가 꿈에 자라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어릴 때 이름이 왕팔(王八)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었고, 갑사(甲士)로 숙위(宿衛)에 보임되어 궁문에 숙직하였는데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상림원(上林苑 비원) 온실에서 가꾼 매화 몇 분(盆)을 궁문 곁에 옮겨 두려 할 적에,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 이 책임을 맡은 이가 크게 놀라 꾸짖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울타리 가에 마소[馬牛]를 매는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도 하는 것인데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오.” 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거칠고 사나움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기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무(武)에 능함으로써 발탁(拔擢)되어 크게 현달하였다. 일찍이 동북면(東北面)을 지킬 적에 야인(野人)이 3백 근이나 되는 강력한 활을 공에게 당겨보도록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술상을 놓고 즐겁게 마시면서 또 말하기를, “이 활은 매우 잘 만들었다.” 하고는,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과 같이 만들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서 그 활을 불에 구워 힘이 조금 풀어지게 한 뒤에, 여유만만하게 활을 가득히 당기니, 야인들이 탄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였다.
○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諸公)들은, “성상(聖上)에 속(屬)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諸公)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종[奴]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종[婢]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 정렬공 최윤덕(崔潤德)은 태어나자 곧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雲海)는 변방(邊方)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양육할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부탁하여 키우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고 굳센 활을 당겨서 단단한 물건을 쏘아 맞추었으며, 때로는 양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짐승을 많이 잡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가축을 먹이는데 큰 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나와서 여러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 공은 급히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발에 죽이고, 집에 와서 양수척에게 알리기를, “어떤 짐승이 무늬가 얼룩지고 그 크기가 엄청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쏘아 죽였습니다.” 하였다. 양수척이 가보니, 한 마리의 큰 범이었다. 이에 양수척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가군(家君 필자인 사가〈四佳〉의 아버지 곧 서미성〈徐彌性〉)께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양수척이 최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칭찬해 마지않으니, 가군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시험해 보겠다.” 하고, 같이 사냥하여 재주를 시험하니,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보는 이가 못내 칭찬하였으나, 가군께서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솜씨가 비록 빠르나 아직 무예(武藝)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하는 것은 곧 사냥꾼의 기술이요, 무예의 좋은 재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시고, 곧 활을 쏘고 적을 막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도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享年)이 90이었다. 국사(國事)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는 관대(寬大)하기에 힘쓰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울부짖고 장난을 하고 떠들어도 조금도 꾸짖어 금하지를 아니하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 뽑고 뺨을 쳐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일찍이 보좌관을 불러 일을 의논하면서 막 책에 글씨를 쓰려 하였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이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스러운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7년 동안을 귀양살이 하였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손에는 운서(韻書 자전〈字典〉) 한 질(秩)을 갖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볼 뿐이었다. 그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字書)의 음과 뜻,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에 대해서 백에 하나라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한가히 있을 적에는 항상 오사모(烏紗帽)에 뿔을 뺀 것을 쓰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시를 읊었는데, 시품(詩品)이 기이하고 궁벽하여 고시(古詩)에 가까웠으며, 필법(筆法)이 굳세어 서법에 부합하였다. 소년 때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서 손수 썼더니, 하호정(河浩亭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 하연을 가리킴)이 시를 짓고 하문학이 직접 쓰니, 역시 한 세상의 보배이다.” 하였다. 문효공이 경상도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정승 남지(南智)가 아사(亞使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공은 매우 중히 여겨 보좌관이라 하여 낮게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진주(晉州)에 가서, 문효공이 산천과 경물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니, 공의 본관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남공(南公)이 낯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산수는 비록 좋지마는, 품관(品官 안찰사를 가리킴)은 매우 못났다.” 하였으나, 문효공이 크게 웃으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뒤에 남공과 같이 정승에 올랐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효양공(孝襄公) 김효성(金孝誠)은 장양공(莊襄公) 남수(南秀)의 아들이다. 장양은 그 아내 길(吉)씨와 따로 살고 있었는데, 효양공의 나이 4ㆍ5세 때에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함께 앉는 것을 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 비둘기를 보니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동서(東西)에 따로 떨어져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고, 슬피 우니 종이 기이하게 여겨 길씨에게 아뢰니 이 말을 들은 길씨도 눈물을 흘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공의 나이가 57세에 어머니 길씨가 죽자 시묘 살이를 하고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니,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 대민공(戴敏公)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은 근대에 비길 데가 없으며, 시품(詩品)이 매우 고고(高古)하고 서화도 절묘하였으니, 그 시호(諡號)를 민(敏)으로 한 것은 적당한 칭호라 할 것이다. 시법(諡法)에,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민(敏)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원 나라 학사 조문민(趙文敏)의 민(敏)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이 공이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그를 가볍게 여김은 아주 잘못이다. 아들 부윤(府尹) 희안(希顔)의 자(字)는 경우(景愚)인데, 그림ㆍ시ㆍ글씨 세 가지에 절묘하여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시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고 그림은 유송로(劉松老)ㆍ곽희(郭熙)와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ㆍ조맹부를 겸하여 재주와 덕을 구비하였으니, 참으로 대인군자(大人君子)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판중추부사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수령이 되었을 적에, 여름에 농어가 많이 쌓여서 썩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그것을 썩혀서 땅에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조금이라도 먹게 하는 것이 낫겠는데, 이런 데서까지 청렴함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였다. 조공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그가 예조 정랑이 되었을 적에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였으며 양식과 땔나무를 이어가지 못하였는데, 동료(同僚) 중에 쌀 3말을 주는 이가 있어도 받지 아니하였고, 뒤에 공석(公席)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사람들이 그 자랑하는 것을 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남의 청탁을 일체 들어주지 않았으며, 뒤에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 나와서도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었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라 할 것이다.
○ 안숙공(安肅公) 권준(權?)은 총명(聰明)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관리의 체통을 잘 알았다. 일찍이 형조의 관리가 되어 옥사를 귀신같이 판결하였다. 어떤 두 강도가 한 가족 세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심증은 다소 있었으나 물증이 분명하지 못하여 전후(前後) 관리가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한 것이 거의 4ㆍ5년이었다. 하루는 안숙공이 두 도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강도짓을 한 증거가 분명한데 감히 불복하느냐. 내가 한 마디 할 터이니 너희들은 숨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처음 일을 의논할 때는 이러이러하게 했고, 중간에 일을 꾸미기는 이러이러하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경위가 이러이러한 것인데, 너희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니, 도둑이 서로 돌아보고 혀를 빼물며 말하기를, “이분이 일찍이 도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한 일을 이같이 자세히 아는가.” 하고, 마침내 자복하였다.
○ 갑오년 봄에, 문경공(文景公) 권제(權?), 판서 조극관(趙克寬), 참판 권극화(權克和), 참판 김돈(金墩) 등이 모두 문과에 실패하고 수원(水原) 연정(蓮亭)에 이르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실의에 빠져 번뇌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후일에 성공한다면 이슬비 자욱하고, 함박눈 펄펄 내리며, 밝은 달빛은 주렴으로 들어오고 연꽃 향기는 자리에 가득할 적에, 그대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 족히 오늘의 일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공들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비가 자욱하다면 눈이 펄펄 내리지 못할 것이고, 눈이 펄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며, 또 연꽃 향기를 어찌 눈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리오. 어찌 말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가.” 하였더니, 문경공은 응답이 없었다. 그해 가을 과거에 문경공은 장원이 되고, 제공들도 연달아 과거에 뽑혔다. 임자년에 문경공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자 제공들이 모여서 전별(餞別)하는데, 조(趙) 판서가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수원 눈 속의 연꽃을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문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들과 함께 보려고 하였네.” 하였다. 몇 달이 안 되어 조공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을 때, 문경공이 그 고을에 순행하니, 조공이 예를 행하고 자리에 나갔는데 때마침 연꽃이 한창 이었으므로 서로 보고 웃었다. 문경공이 시를 지었는데,

비와 눈 흩날리는데 달빛은 밝고 / 雨雪??月政明
연꽃의 맑은 향기 정자에 가득하네 / 荷香荏苒滿亭淸
당시의 이런 말 신비로워라 / 當時此說神應秘
20년 전에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 二十年前事已成

하였다.
○ 문장공(文長公) 김균(金鈞), 문장공 김말(金末), 대사성(大司成) 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연구가 깊어서 동시에 성균관에 제수되어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인재양성에 공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는데, 김반은 먼저 죽었고, 남은 두 김공은 모두 80이 넘도록 살아 벼슬은 1품에 올랐으며, 시호(諡號)를 모두 문장(文長)이라 하였다. 시호를 짓는 법에,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함을 장(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시호를 받음이 마땅하다.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그때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더욱 정밀하여 제생(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가 물으니, 공이 문리(文理)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쉬지 아니하고 지칠 줄을 몰랐다. 지금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공의 제자이니, 국조 이래로 사범(師範)의 으뜸이다.
○ 문장공 김말(金末)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들으니, ‘천 사람의 눈[眼 지식을 이름]을 열어주는 이는 음덕의 보답을 받는다.’ 하였는데,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간 학관(學館)의 직책을 맡아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도 마침내 자식이 없으니, 이는 나의 학문이 거칠고 거짓되어 남에게 은덕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죽을 무렵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홀(笏)을 잡고 단정하게 앉았는데, 가족들이 통곡하니 공이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내가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부족함이 없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壽)가 높지 않음이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상리(常理)이니 바름을 얻고 죽으면 어찌 다행하지 않는가.” 하고, 곧 죽었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이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나서 글을 올려, 환관(宦官)들의 연각건(軟脚巾)을 쓰고 오사모(烏紗帽)를 씀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중국의 예(例)에 의해 일반 관을 쓰게 할 것을 극론하였다. 그 말에,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그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그 갓을 바꾸지 않은 것은 환관의 무리를 사대부들과 혼동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말은 매우 적절하였으나, 여러 환관들이 눈을 흘겼기 때문에 의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기건(奇虔)공이 일찍이 연안부(延安府)에 부임하였는데, 그 고을에는 붕어가 많이 나서 공사(公私)로 청탁이 많아 폐단이 백성에게도 미쳤다. 그 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사가 있었는데 붕어 먹기를 좋아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조롱하여 관사(館舍)의 벽에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 / 六年何事業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도다 / 喫盡一池魚

하였다. 기공(奇公)이 이런 평을 면하려고 6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았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서는 제주의 복어(鰒魚)가 연안의 붕어와 같이 많았으나 3년을 역시 먹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고집은 탄복하였으나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 판서 김조(金?)는 일찍이 문학으로 유명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였는데 모두가 술이 취하였다. 세종께서, “오늘 제군(諸君)들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말하라.” 하니, 김조가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 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 임금의 자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해바라기꽃인데, 신하의 자리를 뜻함) 밑에서 진퇴부복(進退俯伏)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신등의 소원도 김조와 같습니다.” 하여, 임금이 웃었다.
○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담박 하며 소탈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나, 도둑을 잘 다스렸다. 일찍이 충주(忠州)ㆍ안동(安東)ㆍ경주(慶州) 세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도둑질한 죄를 범한 증거가 있으면, 조금 의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니, 도둑이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으나, 잘못 죽인 자도 많아서 공의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남에게 형벌을 베푸는 것은 참으로 두려울 만한 일이다.
○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은 몸집이 커서 음식을 남보다 유달리 많이 먹었는데, 항상 큰 그릇의 밥 한 그릇과 찐 닭 두 마리와 술 한 병을 먹었다.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불고기와 독주(毒酒)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먹지 아니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면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불고기를 먹어도 마침내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도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 여러 벗들과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에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 선생이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문안공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제공(諸公)들도 차례로 마셨는데,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것이 우리들로부터 고사(故事)가 되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 하였다. 뒤에 문안공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 술잔의 술맛이 산놀이 할 때의 가죽신 술잔보다 못하구려.” 하였다.
○ 정절공(貞節公) 정갑손(鄭甲孫)은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엄준하여, 자제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간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咸吉道) 감사가 되었을 적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방(榜 시험 발표)이 나왔기에 보니, 그 아들 오(烏)도 합격되었다. 공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성을 내어 시관(試官)을 꾸짓기를, “늙은 놈이 감히 내게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오(烏)는 학업이 아직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결국 시관을 내쫓았다.
정절공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탁한 것은 물리치고 맑은 것은 드날리게 하여 조정의 기강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는 잃지 않았다. 전례(前例)에 공청(公廳)에서 모일 적이면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함께 막차(幕次)를 연접시키고, 혹 술을 마실 적에는 장막을 걷고 이름을 권장음(捲帳飮)이라 서로 붙였다. 만약 금주령(禁酒令)이 있을 적에는 대관(臺官)들은 법을 철저히 지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간원(諫院)에서는 술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諫官)이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가지고 장난으로 장막 틈으로 대장(臺長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도 장난으로 소매로 뿌리쳤는데 술잔이 장막 틈으로 떨어져서, 대사헌인 정절공의 책상 앞에 굴러갔었다. 여러 대장(臺長)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리(臺吏)들도 서로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술잔을 치우지 못하여 이 술잔이 종일토록 대사헌의 앞에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일이 날까 두려워하였는데, 사무를 마칠 적에 정절공이 관리에게 말하기를, “저기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엇인가. 수정(水精) 구슬이 몇 알이나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아전들이 대답하기를, “백 개는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절공이 이르기를, “굴러 나온 틈으로 던져주라.”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해 오는 술잔의 모양이 거위 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가량 들어갈 만하였으니, 이는 금주령을 당하면 술잔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公)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 되고 말았구나.” 하였다.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는 천성이 호매 하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 사람을 평론하여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만약 공자의 문하에서 놀았으면, 순수한 안자(顔子)나 독실한 증자(曾子) 같은 분에게는 진실로 미칠 수 없으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같은 무리와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오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문성공이 접대관이 되어서 일을 주선하고 교제하여 빈사(?使)의 체모를 지켰으며, 또 같이 고금을 의논하고 시를 서로 주고받았으니, 예겸이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어느 날 밤에 같이 앉아서 시강(侍講)이 말하기를, “달이 어느 분야(分野)에 있는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습니다.” 하자, 시강이 탄복하였다. 작별할 적에 시강이 말하기를, “밤이 깊은데 어떻게 갈 것인가.” 하니, 공이 “이금오(李金吾)가 두렵소.” 하자, 예겸은, “왕옥여(王玉汝) 는 만나지 마시오.” 하고는,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대구(對句)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빈소(殯所)에서 남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壙中)에서 북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시 빈궁(殯宮)이니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재상은 마땅히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상소하는 것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비로소 성행하였다. 문열공이 집현전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려 하니, 동렬(同列)로서 벼슬이 문열공의 위에 있는 한두 사람이 매양 말리기를, “예로부터 정사를 논하기 좋아하는 이는 마침내 화를 받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시종들은 덕의(德義)를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을 밝히고 도울 뿐이요, 간쟁(諫諍)하는 일은 그 직책이 아니니 그대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말게.” 하였다. 문열공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름이 있으니, 국사를 논하다가 실패하는 영광이 침묵하다가 당하는 수치만 못하다.” 하고, 마침내 하관(下官)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려 극간(極諫)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상관이 끝내 여기에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니, 여론이 그 상관을 기롱하였다. 상소를 올릴 적마다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계전(季甸)의 상소가 또 왔구나.” 하고, 마침내 크게 쓸 뜻을 두어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뽑았다.
○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은 어려서 큰 뜻을 두었고 책을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여 재주와 명성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도 태연히 처하여 가슴속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맹교(孟郊)의 시에,

문 밖을 나가면 곧 막힘이 있으니 / 出門卽有?
그 누가 천지를 넓다고 했던가 / 誰謂天地寬

한 것을 외우며, “맹교가 낙방하여 슬퍼하고 곤궁한 것은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어서였는데, 지금 자네가 그렇지 않은가.” 하였더니, 익평공은 웃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함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는데, 뒤에 익평공이 35세에 선비로서 장원에 뽑히고, 46세에 정승에 올라 한때 원훈(元勳)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대개 과거에 실패하면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 선비의 상정(常情)인데, 공의 큰 도량이 이와 같으니, 맹교의 불우(不遇)함은 어찌 국량(局量)이 작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뇌물이나 청탁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 전에는 이조 판서가 되면 관리를 제수할 적에 으레 친히 선발하는 명부를 잡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고, 참판 이하는 팔짱만 끼고 옆에서 볼 뿐이었는데, 공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체로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데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취하였고, 비록 작고 낮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고, 사사 은혜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올릴 것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참의(參議)가 되어 하루는 정방(政房)에 있다가 마침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공이 거친 목소리로, “참의는 내가 인물 등용을 마음대로 행한다 하여 참견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후일에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하였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한 문사(文士)를 추천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으려 하니, 반박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익살이 심하니 불가하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러면 한 무제(漢武帝)는 어찌 동방삭(東方朔) 을 취하여 썼겠는가.” 하고, 마침내 대관으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군 교관(外郡敎官)으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이 현감(縣監)으로 추천하려 하니, 반대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실정에 어두워서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래도록 굽혀둘 것인가.” 하고, 마침내 현감으로 천거하였는데, 그는 과연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이 사람을 쓰고 버릴 적에 한결같이 공정하게 함이 이와 같았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은 성품이 겸손하고 단정하고 간결하여 겉치레를 아니 하며, 평생토록 남과 말할 적에는 먼저 양보함을 보이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별다른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았다. 글을 짓는 데에도 옛 사람의 규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크게 펼쳐놓으니, 웅장하고 풍부함이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물결이 뛰고 넘치고 솟구치고 구비 치듯 형세가 그치지 않았으며, 더욱 변려문(騈驪文)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에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表文)과 전문(?文)이 다 그 손에서 나왔었다. 중국 사람이 매양 우리나라 표문(表文)이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빠른 말이나 급한 표정을 하지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어음(語音)이 바르지 못하고, 구두(句讀)가 분명치 못하며, 비록 선유(先儒)인 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 등의 구결(口訣 한문의 토)이 있으나 아직도 오류가 많은데 진부한 세속의 선비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음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숙한 신하와 경험 있는 유학자에게 명하여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 주어 고금(古今)의 책을 고증(考證)하여 구결을 정하였고, 또 글하는 선비를 모아서 같고 다름을 강론(講論)하게하고 상감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문정공(최항)이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매양 질문을 받으면 정밀하게 분석하여 민첩하게 응대하니, 상감이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성(寧城 최항이 뒤에 영성부원군이 됨)이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은 사체(事體)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익숙하였다. 중국 사신 진감(陳鑑)ㆍ고윤(高閏)ㆍ장녕(張寧)ㆍ진가유(陳嘉猶) 등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공이 매번 빈관(?官 접대관)이 되어 주선하고 교제하기를 모두 마땅하게 하였다. 사신 장녕이 일찍이 문헌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으면 마땅히 진(晉)나라 숙향(叔向)이나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밑에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윤자운(尹子雲)이 함길도(咸吉道)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적에,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과 길주 목사(吉州牧使) 설정신(薛丁新)을 죽이고는 그 고을을 점거하고 반역을 일으켜서 여러 고을에 심복을 보내어 수령들을 거의 다 죽이니 흉한 무리들이 간 곳마다 서로 합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공은 밤낮으로 빨리 달려 함흥(咸興)에 이르니, 그날 밤에 역적들이 또 난을 일으켜서 감사 신면(申?)을 죽이고는 병력을 이동하여 공의 처소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칼을 뽑아 들고 뜰에 담같이 둘러섰으나, 공은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웃으며 말하기를 태연하게 하니 도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갔다. 도적의 무리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고 간사함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이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지만 태연하게 대처하고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니, 도적들 중에 혹 뉘우쳐서 공을 위하여 주선하고 돕는 자가 있어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의 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함공이 노하여 아전에게 명하여 급히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고르게 …… 주겠다.”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 지중추(知中樞) 홍일동(洪逸童)은 인격이 우뚝하게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天眞)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였다 사부(詞賦)에 능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신없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비장(悲壯)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상시에 혼자 오래된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어도 악보(樂譜)는 없었다. 말하기를, “나의 거문고는 천고(千古)에 전하지 않는 도연명(陶淵明)의 지취(志趣)를 얻었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오직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뜻을 알았는데, 나의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알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천지간의 기이한 남자라 할 것이다. 일찍이 상감 앞에서, 부처의 일을 논박하자 세조(世祖)가 거짓으로 성내기를, “이놈을 죽여서 부처에게 사례하겠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칼을 가져오라 하여도 홍일동은 태연하게 변론했으며, 좌우가 거짓으로 칼로 정수리를 두 번이나 문질렀지만 돌아보지 아니하고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세조가 장하게 여겨, “네가 술을 먹겠느냐.” 하니, 일동이 대답하기를, “번쾌(樊?)는 한(漢) 나라 무사(武士)이며, 항왕(項王 항우)은 다른 나라의 군주였는데도 항왕이 주는 한 동이 술과 돼지다리 하나를 사양치 않았는데, 하물며 성상께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은 항아리에 술을 가득히 담아 내려주었는데 그는 힘차게 마셨다. 상감이 이르기를,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홍일동이 대답하기를, “죽는 것이 마땅하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면 사는 것인데,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상감이 기뻐하여 초구(貂?) 한 벌을 주어서 위로하였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 국 아홉 주발을 먹었는데,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이가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조(世祖)가 듣고 홍일동을 불러 묻기를, “참으로 이와 같이 먹었느냐.” 하니, 홍일동이 그렇다고 사과하자, 상감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평상시 출입할 적에는 다만 미숫가루와 전술[醇酒]을 먹을 뿐이요, 밥을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暴飮)을 하고 곧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이라 의심하였다. 뜻이 있어도 시행치 못하였고 벼슬이 그 능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당(唐) 나라 말기에 정곡(鄭谷)이 시를 잘 지어 세상에서 유명하였는데 그때 사람이 그 관직에 따라 정도관(鄭都官)이라 하였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만년(晩年)에 도관(都官)이 되었다. 어느 날 구양영숙(毆陽永叔)의 집에 모였는데, 유원보(劉元父)가 농담하기를, “매성유의 벼슬이 반드시 여기에 그칠 것이다. 예전에는 정도관(鄭都官)이 있었고 지금은 매도관(梅都官)이 있다.” 하였다. 자리에 있는 손님들이 다 놀라고 매성유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얼마 아니 되어 매성유가 병들어 죽었다. 내가 젊어서 윤서(尹恕)와 같이 유학하였는데, 윤서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과거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만 되면, 반드시 벼슬을 그만 두겠다. 남자가 명정(銘旌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기) 위에 정언(正言) 두 글자를 쓰면 만족하다. 제군(諸君)들은 의심치 말라.” 하였는데, 윤서와 내가 갑자년 과거에 올라서 경오년과 신미년 사이에 비로소 정언에 임명되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벼슬을 그만 둘만하다.” 하니, 윤서가 웃으며, “두고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병들어 죽었다. 유원보가 매성유에게 농담한 것과 윤서가 스스로 기약한 말이 과연 그대로 부합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 문충공(文忠公) 권양촌(權陽村)이 일찍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는데,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의 말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도(天人心性合一圖)〉를 만들었는데, 이는 내용이 광대하여 모든 이치를 포함하였으며, 정묘하고 심오하여 옛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확충하여 후학(後學)에게 무궁한 이치를 열어주었다. ‘군자는 마음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치를 거스르므로 흉(凶)하다.’ 한 말은, 그 대강만 들어서 배우는 사람에게 보인 것인데 그 뜻이 깊다. 그 조카인 권채(權採) 선생이 또 이 《입학도설》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와 《대학장구》 및 《혹문(或問)》의 해설에 의거하여, 천리가 유행발육(流行發育)하는 형상과, 학자(學者)가 기질을 변화하여 성인이 되는 방법을 서술하였는데, 그 덕으로 나아가는 선후의 조목은, 공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 등의 말을 인용하였고, 그 공부하는 방법의 깊고 얕은 의미는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논설로써 단정하였으며, 그 천인심성(天人心性)의 논설은 양촌(陽村)의 뜻을 발명하여 작성도(作聖圖)를 지었다.
근세에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성불도(成佛圖)가 있고, 종정도(從政圖)가 있는데, 모두 투자(?子 주사위)를 사용한다. 권채(權採) 선생이 작성도를 만들었는데, 그 종목이 열세 가지가 있으니, 도상론(圖象論)ㆍ성리론(性理論)ㆍ음양론(陰陽論)ㆍ조화론(造化論)ㆍ기질론(氣質論)ㆍ성경론(誠敬論)ㆍ자질론(資質論)ㆍ공부천심론(功夫淺深論)ㆍ용공작철론(用工作輟論)ㆍ현지론(賢智論)ㆍ우불초론(愚不肖論)ㆍ진덕선후론(進德先後論)ㆍ총론(總論) 등인데, 13논(論) 중에 또 다소의 절목(節目)이 있으며, 역시 주사위를 사용한다. 주사위 6면(面)에 성(誠)ㆍ경(敬)ㆍ사(肆)ㆍ위(僞) 4자를 썼는데, 성ㆍ경은 두 번씩 썼으며, 그 글자는 다 수(數)로 나누어서, 주사위를 던지면 그 수로써 나아가는 순서를 삼는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학문하기는 싫어하고 놀음하기를 좋아하니, 성불도(成佛圖)와 종정도(從政圖)와 같은 것은 역시 장기와 바둑의 한 종류이다. 한갓 시일만 허비하고 마음 쓸 바는 없는데, 선생이 이 도(圖)를 만든 것은 당초에 놀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이가 그것을 즐겨 하여 그 지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는 주사위 쓰는 것을 장기나 바둑에 가깝다 하여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 무릇 주사위를 쓰는 것은 뜻이 주사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ㆍ경ㆍ사ㆍ위의 등분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ㆍ경ㆍ사ㆍ위는 곧 학자의 마음 쓰는 경지이다. 주사위로 인하여, 처음 배우는 이에게 도(道)를 지시함이 더욱 친절한 것이다. 이 도(圖)로써 성인의 도(道)를 구하면 비록 어리석고 어린이들이라도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으며,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아서,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도(圖)가 세상에 행하여지지 못하고 선생이 죽었으니, 지금 아는 이는 대개 드물다. 선생의 문장은 중부(仲父) 양촌의 풍모가 있다.
○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은 일찍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번거로운 것을 깎고 간략한 것을 취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 권선징악이 될 만한 것을 더 넣어서 책을 만들어 이름을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이라 하고,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하기를 청하니,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의 뜻은, ‘경서(經書)는 바야흐로 진강하는 중이요, 고려의 일은 전해들은 것이므로 거울삼아 경계하기에 가장 간절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삭제하기도 하고 요약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으니, 보기에 유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평하는 이는 이르기를, “경서는 도(道)를 실은 것이니 전부 성인의 말씀이다. 진덕수의 편찬이 모두 구차한 것이 아닌데, 지금 다 깎아버리면 의리에 온당치 못하니, 옛 《대학연의》에 《고려사》를 보태 넣으면 근사할 것이다.” 하였다.
○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유산(鄭惟産)이 과거에 이름을 봉하고 선비를 뽑는 법을 세웠다. 응시하는 여러 선비들이 시권(試券 시험지) 머리에 성명ㆍ본관ㆍ부ㆍ조ㆍ증조ㆍ외조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고 시험 보기 며칠 전에 시원(試院)에 올리도록 하였다. 과장(科場)을 개시하는 하루 전날 오후에, 주문관(主文官 시관〈試官〉)이 글의 제목 몇 개를 적어 가지고 궁궐 문에 나아가 봉하여 올리면, 임금이 친히 뜯어보고 각각 글제 위에 낙점(落點)하고는 봉하여 도장을 찍어서 내어주면, 주문관이 받아서 시원(試院)에 가지고 간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봉함을 뜯고 글제를 내면 당직한 승선(承宣)이 금인(金印 어보〈御寶〉)을 받들어 시원에 가서 주문관과 같이 앉아서 거자(擧子 과거 보는 사람)의 권봉(券封)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는다. 임금이 또 내시(內侍) 두 사람을 보내어 술과 과일을 주고 주문관 또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다.
하루가 지난 다음 당직한 승지가 시원에 이르러 권봉을 뜯고 급제자를 발표한다. 제2장(第二場)도 이와 같다. 제3장(第三場)에서는 이경(二更)에 이르러서 글제를 내고 다른 것은 같다. 이틀 사이를 두고 주문관이 각각 합격된 시권(試券)의 표면에다가 등급의 차례를 적은 황지(黃紙)를 붙이고 함에 봉하여 궁궐로 올린다. 임금이 편전(便殿)에 앉고 승선(承宣) 두 사람이 그 함을 받들어 임금 앞에서 봉함을 뜯고 문신(文臣)과 승선이 그 과거의 등급을 읽되, 상하의 등급은 모두 주문의 의망에 의하여 방(榜)을 붙인다. 그 에도 대개 이와 같이 해 왔었다.
국조(國朝)에 이르러 과거의 법이 점점 갖추어졌는데, 시권에 이름을 봉하는 것은 고려와 같고 나머지는 모두 같지 않다. 그 수권관(收卷官)ㆍ봉미관(封?官)ㆍ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역서(易書) 등의 일은 다 원(元)의 제도를 따랐고, 양쪽에 시장(試場)을 설치함은 세종조(世宗朝)에서 시작되었는데, 혹은 강경(講經)으로, 혹은 제술(製述)로 하여 때에 따라 달랐다.
○ 예전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문무과(文武科)의 방(榜)을 내는 날에는 홍패(紅牌)를 하사하고 어사화(御史花)와 어사주(御史酒)를 내렸으며 문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盖]을 주었으니, 당시에 큰 영광으로 여겼다. 세조(世祖) 때에 문과는 일산을 주고 무과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어린아이와 어리석은 아낙네들도 모두 문과와 무과의 구별을 알게 되니,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곧 파하고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다.
○ 구례(舊例)에는, 벼슬이 정3품에 이르면 문과 시험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6품에 이르면 생원(生員) 진사과(進士科)에 나가지 않았는데, 당상관으로서 문과에 응시한 것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에서 시작되었고, 종친(宗親)의 극품(極品 정일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영순군(永順君)에서 시작되었으며, 부마(駙馬) 극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세조 때에 시작되었으나 이내 없어졌다.
○ 근일에 과장(科場)에서 부의 제목을 내었는데, 해동청(海東靑 매〈鷹〉)이라 한 것이 있었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주(註)에 보면 옛 사람의 시구(詩句) 중에

아름다운 글귀는 천하의 이백보다 묘하고 / 麗句妙於天下白
높은 재주는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 高才駿似海東靑

한 것이 있는데, 어떤 과거에 온 선비가 잘못 해석하기를, “아름다운 글귀가 천하에 묘한 이는 오직 백고(白高) 한 사람이니, 그 재주의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하였다. 이에 온 과장이 덩달아 따라서 백고(白高)를 부(賦)의 제목으로 삼아 심지어 시를 짓기를

해동청의 보라매여 / 繫海東之爲靑
백고의 높은 재주와 같도다 / 同白高之駿才

하였는데, 시관도 이것을 모르고 선발하여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으니, 이 말을 듣는 이는 심히 목을 움츠리고 웃었다.
○ 국조 이래로 과장(科場)의 문체가 평온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 이후로 한두 사람의 문사(文士)가 괴이하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니, 4, 5 ,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西崑 오대〈五代〉 및 송초〈宋初〉의 시풍)의 문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국학(國學 성균관)과 과장에서는 구양공(歐陽公)이 유기(劉幾)를 내친 고사(故事)를 들어서, 그 중에 심한 자를 내치니, 문체가 조금씩 예전과 같아지나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였다. 근래 전시 책문(殿試策文)의 기두(起頭)에 한 유생은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니 큰 대장장이의 정밀함이 있고 / 披沙揀金有太冶之精
채찍을 잡고 말에 임하니 백락(말을 잘 아는 사람)의 밝음이 있도다 / 執策臨馬有伯樂之明

하였고, 한 유생은

하늘은 자시에 열리고 / 天開於子
땅은 축시에 열리고 / 地闢於丑
사람은 인시에 열린다 / 人生於寅

하였으니, 그것은 부화(浮華)하여 절실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 구례(舊例)에는 여러 과거의 회시(會試)에는 매번 삼장(三場 초장ㆍ중장ㆍ종장의 세 시험)을 보는 날에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고, 또 별도로 궁내에서 술과 과일을 내려서 여러 시관(試官)들이 즐겁게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제생(諸生)들에게도 묽은 죽과 청주(淸酒) 수십 동이를 주어 목마름을 풀어주었는데, 식례(式例)가 나오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근래에 시원(試院)에서 한 참시관(參試官)이 희롱으로 한 구(句)를 지었는데

좌주(시관)는 약주 한 잔도 안 먹었는데 / 座主下飮香?一盞
어찌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가 / 何烘其頭
제생들은 먹물 몇 되를 달게 마시니 / 諸生甘吸墨水數升
모두 그 입술이 검어졌도다 / 皆黔其吻

하였다. 나도 한 구를 남겼는데

차주발은 오늘로부터 비로소 커지고 / 茶椀始從今日大
술잔은 지난해에 가득하였음을 기억한다 / 酒杯仍憶去年深

하였더니,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갑오년 초시(初試)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 복시(覆試)에서도 장원하였으니, 국조 이후로 한 사람뿐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은 신유년에 생원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삼한(三韓) 이후로 듣지 못한 일이다. 사성(司成) 남계영(南季英)은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두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역시 그 다음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문경공(文景公) 권제(權?)와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이고, 형과 동생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정언(正言) 유자빈(柳自濱)과 교리(校理) 유자한(柳自漢)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에 오른 이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성렬공(成烈公) 황수신(黃守身)과 영의정 심온(沈溫)과 좌의정 심회(沈澮)이다.
○ 조선조에 장원으로서 정승에 오른 이는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부원군 권람(權擥)ㆍ영성(寧城)부원군 최항(崔恒)ㆍ남양(南陽)부원군 홍응(洪應)이며, 고려에 장원하고 조선조에 정승이 된 이는 유량(柳亮)과 맹사성(孟思誠)이다.
○ 갑인년 별시(別試)에 영성부원군 최항은 장원이 되었고, 창녕(昌寧)부원군 조석문(曺錫文)은 방안(榜眼 2등)이 되었고, 연성부원군 박원형(朴元亨)은 탐화(探花 3등)가 되었으며, 능성(綾城)부원군 구치관(具致寬)은 병과(兵科 3등)가 되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네 사람이 잇달아 정승으로 올랐으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 갑오년(1414) 가을 친시(親試 임금이 직접 과장에 나와서 보이는 과거) 때에 독권관(讀券官) 하륜(河崙) 등이 과거 본 세 사람의 시권(試券)을 뽑아서 올리니, 태종(太宗)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장원을 뽑던 옛 일을 따를 것이다.” 하고, 손가는 대로 뽑아보니, 곧 문경공(文景公) 권도(權蹈)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도(蹈)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더니, 지금 그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적이 위안이 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번 과거는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등은 자기 문생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하륜 등이 끝내 좌주(座主)의 예(禮)를 받지 않았다. 경오년 전시(殿試) 때에 독권관이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을 제4등으로 추천하였다. 방이 나오자 문종(文宗)께서 이르기를, “권람은 몇 째가 되었는고.” 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넷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시권을 읽어보게 하시고는 네 번 째에 이르러 “이 글이 진실로 장원이라.” 하고, 친히 제1등으로 뽑았다. 도(蹈)는 뒤에 이름을 제(?)로 바꾸었는데, 제(?)의 부자가 장원이 된 것은 모두 임금이 내린 것이다.


[주D-001]이금오(李金吾) : 당 나라 두보가 이금오(李金吾)와 함께 술을 먹으며 지은 시에, “취하여 돌아갈 때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겠느냐.” 하니, 금오가, “두렵다.” 했다. 금오는 지금의 검찰청장의 직이므로 이렇게 희롱한 것이다.
[주D-002]왕옥여(王玉汝) : 왕옥여(王玉汝)는 아마도 한옥여(韓玉汝)의 잘못인 듯하다. 송나라 한진(韓縝)의 자가 옥여인데 법을 엄하게 다스리므로 당시 사람들이, “차라리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한옥여를 만나지 말라.” 한 말이 있다.
[주D-003]동방삭(東方朔) : 한(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조정에 미관으로 있으면서 재담과 농담을 잘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괴이한 행동을 하기로 유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