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잡지자료 |
잡지명 | 삼천리 제7호 | |||
호수 | 제7호 | |||
발행년월일 | 1930-07-01 | |||
기사제목 | 嗚呼同志 | |||
필자 | 鄭鍾鳴, 張志暎, 李鍾麟, 禹鳳雲 | |||
기사형태 | 회고·수기 | |||
噫同志蔡 그리고 리先生...鄭鍾鳴 南崗李昇薰先生의 最後...張志暎 月南李商在先生의 遺言...李鍾麟 命半, 事半의 朴元熙女史...禹鳳雲 蔡 그리고 先生의 最后-차듸찬 세브란쓰 병실에서 별세 鄭鍾鳴 山河을 보고십다고 나는 午正소리를 드르면서 밧분 거름으로 창황히 南大門밧 세브란쓰 병원 제5호 병실을 차젓다. 거기에는 몃칠 전에 3년동안이란 긴 형을 치르고 西大門刑務所를 겨우 출옥한 동지 蔡 그리고 리先生이 괴로운 숨을 쉬어가면서 寢台에 고요히 드러눕고 잇섯다. 그것이 1930년 4월 19일이라. 3월 29일에 오래간만에 조선의 땅을 밟은 선생은 감옥으로부터 나오자 南山旅館에 數日을 滯留하고 잇다가 여러 동지의 勸告로 얼마전에 이곳 결핵병실에 입원한 터이다. 내가 드러가니 그 거대하든 체구에는 지름끼가 쪽 빠지고 몸이 瘦瘠한 우에다가 제3기의 폐병이라하야 호흡이 자못 곤란하여 보엿다. 그날 맥박은 130으로부터 140도까지 첫섯다고 身熱도 40도를 上下하엿스니 이미 여간히 重態인 것이 아니다. 蔡선생은 나를 물끄럼히 보더니 「동무! 이곳이 어듸요」 「병원임니다. 세부란쓰병원임니다」 「아니오. 내 생각에는 꼭 감옥 안 갓구려. 나를 박갓헤 좀 나가게 하여주오. 나는 저 땅이 밟어보고 십구려. 남대문이고 鍾路고 네 활개치고 훨훨 단녀보고 십구려」 「다 나으시면 단니시고 말고」 하면서도 겨우 땅을 밟어보겟다는 것이 선생의 소원인가함애 알 수 업는 哀傷에 慰問하느라고 말하는 내 소리조차 가라안는 것을 깨달엇다. 실로 선생은 땅을 밟지 못하엿다. 莫斯科를 떠나〈28〉 北京을 거칠 때까지는 자유의 새가 되어서 안고 십흔 가지에 안기도 하고 먹고 십흔 내물을 마시기도 하섯스련만 조선의 흙을 밟어보자 그는 이미 新義州로부터 마음과 몸이 서로 떠나는 몸이 되엇다. 억지로 녯날의 고향의 土石을 그래도 數10年만에 밟어 보앗다하면 저 鴨綠江鐵橋 우 몬지 바닥이엇슬가. 선생은 유리창밧게 初春의 잔디 우에 떠러저 타는 태양의 광선을 戀戀히- 정말 戀戀히 注視하고 잇다가 다시 「동무! 저것이구려. 저 무성한 풀과 나무를 보구려 땅에는 풀도 나고 나무도 잇고 내물도 흘너가는구려. 저 너른 벌로 너른 땅으로 단니고 십구려」 또 한참잇다가 「밧갓히 조와! 여기는 참말 못잇겟구려. 이 침대, 이 널창문, 사람업는 방안, 사람소리 드를 수 업는 이 병원, 여보동무, 이곳이 감욱이나 무에 다르오. 동무가 나를 생각하거든 조선집에 갓다가 눕혀 주구려. 나는 조선집에서- 여관이라도 조와- 그런 곳에서 깍둑이도 먹고 콩나물도 씹어보고 십구려. 땃듯한 온돌 아랫목에 허리를 대여보고도 십구려. 동무들과 아츰 나주 이약이나 하여보고 십구려. 산도 그립고 물도 그립지만은 동무도 음식도 우리 의복도 모다 그립구려」 그러고는 답답한드시 제 가슴을 두 주먹으로 토닥토닥친다. 몹시 정신이 흥분한 모양으로 얼골 근육이 곳곳히 서고 숨도 급하여진다. 그리고 그는 꿈 이약이를 한다. 꿈에 자긔는 여전히 감옥 안에 갓처 잇서서 안타가운 생각에 마음이 무한히 괴롭다가 놀나 깨어나 보니 여전히 창살문, 차듸찬 침대, 외로운 독방- 이것이 감옥인 줄만 알엇다고 한다. 나는 唯物論者-유물사관의 신도는 그러케 약한 마음을 먹어서 안되느니라고- 그것이 모다 氣壓關係라고 위로하엿다. 그러고 내가 겻헤 안저엇는 것이 그의 감상기분을 더욱 더치는 듯하여서 마즈막으로 「무엇을 잡스시고 십흔 것이 업슴니까?」 「무웨 시언한 것을 좀 주구려」 나는 「사이다」 한 병을 사다드렷다. 선생은 그것을 단 목음에 다 마시엇다. 실상은 감옥과 인연이 만흔 저 압박골 약수라도 떠다 드렷스면 오작이나 조흐랴 하엿스나 언제 그러할 겨을이 잇스랴. 그러고는 또 먼-하니 선생은 일광을 보고 뜰압헤 피는 철축꼿을 보고 게신다. 나는 다시 오기를 약속하면서 병실을 나오다가 廊下를 돌다가 그만 치마자락에 얼골을 파뭇고 한참 울엇다. 저절로 알 수 업시 작고 흘너 나리는 눈물을 억제 할 길이 업서서...- 나는 蔡 그리고 리선생과 知面이 업섯다. 그가 3년전 新義州에 잡히어 서대문 형무소에 오느라고 포승을 지닌 몸이 남대문 정차장에 나릴 때 먼발충에서 동지들과 가치 黙黙禮를 교환할 뿐이엇다. 그런 뒤 3년을 在監하는 동안에 나는 3,4次 면회를 가서 그를 위로하여 드린 일밧게 업다. 그러치만 부모와 처자를 西伯利亞에 둔 고단한 선생의 一身을 생각할 때에 나는 동지로써의 친애를 늣기엇다. 이 몸이 무슨 도음이 된다면 그의 신변에 수고함을 악기랴하는 생각으로 입원이후 여러번 가뵈엇스나 오늘가치 진정으로 나오는 가엽서라, 애처러워라하야 눈물을 흘린 때는 업섯다. 嗚呼斯人去矣 그날 저녁 일곱시에 병원으로부터는 東亞日報의 朴讚熙씨에게 급한 전화가 왓다. 나는 가슴을 두군거리며 禹鳳雲, 朴讚熙, 宋奉瑀, 朴昊辰의 네동무와 가치 병원으로 달려갓다. 엇지 아랏스랴. 이미 시력은 탁풀어지고 얼골에는 볼 수 업는 거믄 구름이 아슬아슬 돌고 잇섯다. 우리가 겻헤가 안저도 한참만에야〈29〉 누군지 아라보며 말은 거지반 번지지를 못한다. 그러고 방 안에는 그의 신음하는 소리가 쩡쩡 울니엇다. 聲樂上의 「알터」가치 각금각금 큰 목소리가 고요한 寂滅의 실내를 울닐 뿐으로 그의 생명은 점점 이 지상에서 떠나고 잇는 것을 깨다른 나는 눈자위에 눈물이 핑도는 것을 억제하고 참아 유언이란 말을 못하여 「무슨 하실 말슴이 업슴니까.」 하엿다. 그는 여러번 입을 열어 무삼 말을 할 듯 할 듯하다가 긔운 이 盡하는지 다시 잠잠하여 버린다. 우리들 여럿은 다시 한 번 소리를 묵거서 「무슨 하실 말슴이 업슴니까」 「시언한 물! 시언한 물!」 하고 찾기에 나는 또 다시 사이다를 한 병 사다가 대접하엿다. 그제야 「내가 할 말이 꼭 잇는데 잇고 말고 꼭 잇는데 여러 동무! 내일 저녁 이맘 때에 다시 한번와 주오」 그는 아직도 생명이 길어질 것만 밋엇다. 그는 압흐로 10년 20년을 살기는 긔약을 못한대도 한 두해 아니 하로 이틀은 더 살 것을 밋엇다. 맥박은 차고 피부의 열도 식어 오르고 눈도 뜨기 어려워하며 입에도 힌 거품이 돌고 목 안에서도 운명하는 때 보는 모양으로 가래가 가랑가랑하고 끌어 오르건만 아- 선생은 몃칠을 더 살 것을 밋고 또 맛나기를 기약한다. 너무 오래 잇스면 환자에게 조치 못하다는 의사의 분부로 우리들은 마지 못하여 다시 병실을 나왓다. 그때가 10점 30분. 슬프고 애처럽고 긔막힌 가슴을 안고 집에 마구 도라와 안지니 뒤다라 병원에서 사람이 달려왓다. 「蔡先生은 도라가섯다!」 무엇이라고. 이 슬푼 가슴을 형용할가. 그날밤 우리들은 동무는 시체를 가운데 두고 울엇다. 울고 울고 또 울엇다. 악가까지 숨쉬든 분이 잇든 방 안에 이제는 돌가치 차진 죽엄이 안저 잇슬 뿐 오직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가 울어주는 것뿐이 아니든가. 腦醬은 標本으로 그 뒤 그의 유해는 생전의 뜻을 바더 조선의 新興學徒에게 보람을 주자는 뜻으로 세브란쓰 병원의 해부에 부치고 그 골격과 뇌장을 영원히 그 병원에 보관키로 하엿다. 영결식은 봄비가 山川을 눅이는 4월 24일의 비오는 날에 天道敎기념관에서 거행되엇다. 이날 여러 단체의 吊歌와 輓狀이 압수된 것은 물론이엇다. 이리하야 蔡선생은 영원히 가섯는데 드른 즉 그의 遺孤는 西伯利亞에 잇다하나 여러 번 전보와 편지에조차 소식이 업스니 이줄이나 알고 게신가. 선생의 畧歷은 누차 소개되엇기 새삼스레 적지 안커니와 露西亞에 가서 청년시대에 希臘敎를 밋고 神學校를 단이엇다가 1917년부터 공산운동의 투사로 나섯다 한다. 붓을 떼려하니 하늘에 一片 구름이 떳다. 저것이 선생의 靈이신가! 嗚呼, 南崗先生의 最后 張志暎 남강 이승훈 선생도 마저 가시다! 우리를 위하야 부르지즈며 눈물을 뿌리든 그 선생이 가시다! 피를 말리며 뼈를 달려서 이 민족 이 사회를 깨우치며 앞을 열어 나가든 그 선생이 가시다! 오호라. 거칠어 가는 이 땅에는 그만한 일꾼도 진일 복이 업섯든가? 저 무심한 한울은 우리의 애끗는 정을 조금도 돌아 봄이 업시 우리의 선생을 다려갓는가. 선생이라도 참아 이 땅을 버리고는 발길이 돌처스지 안흐시련만 어찌 이가티 훌훌이 떨고 가시단 말가?〈30〉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67년전 평북 정주읍 한미한 가정에 태어나셔서 세상에 나시는 길로 사랑하여 줄 어머니를 여희어 남들이 다 먹는 젓맛까지도 모르고 자라든 몸이 열살되든 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니 쓸쓸하고 외로운 몸이 구르고 구르다가 정주 청정이라는 저시거리로 굴러서 어느 유긔전의 심부름꾼이 되엇는데 선생의 타고난 진실과 열성으로 남의 믿음을 얻게 되어 자긔 스스로 유긔 상점을 경영하게 되엇다. 그리하야 그뒤로 선생이 40세되기까지 수십년 동안은 상업에 전력하야 북으로 의주 남으로 평양까지 선생이 상업게에서 밧는 신용은 참으로 놉핫섯다. 그리하야 돈도 상당히 모혓섯다. 선생은 이로부터 정주 오산면 룡동이라는 조그마한 동리에 기아집을 덩그러케 새로 짓고 거긔에서 자손들이나 가르치면서 여년을 편안히 보내랴고 생각하엿섯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선생에게 그리한 행복을 주지 안헛다. 갑오년 일청전쟁이 뒤를 바더 갑진년 일아전쟁을 치르고 나서는(중략-원문) 이때에 선생을 먼저 마진 관서일경에서는 깁흔 잠에 잠기엇든 깃븐 눈을 주먹으로 비비 뜨면서 새 정신을 차리엇다. 곧곧에서 알어야 한다 배워야 된다하는 소리가 바야흐로 놉하지자 면면촌촌히 학교세우기에 압흘 다투엇다. 선생이 44살되든 해에 또한 장사길로 평양에 가섯다가 어떠한 긔회가 선생의 머리를 찌르게 되매 원악 천품이 놉흔 선생은 곳 누를 수 업는 감동이 일어낫다. 나의 할 일은 돈 모으는 것이거나 집안 식구 살리는 것이 아닌 줄을 깨달앗다.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깍고 그 길로 선생을 청하고 학교 세음에 쓸만한 긔구를 사가지고 용동으로 돌아 오셧다. 이로부터는 선생 반 평생의 가진 파란과 곡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청년 교양에 전력하야〈31〉 오산학교를 세워 청년을 교양하고 동회를 조직하야 농촌을 게발하기에 자긔의 정성과 아울러 재산을 다 바첫지마는 수 년을 지나서는 조선의 력사를 위하야 민중의 장래를 위하야 동서남북으로 달려 단이면서 심혈을 쏘다 부르짓고 활등하는 중간에 만주에서 무슨 게획을 하다가 제주로 귀양살이를 가게되고 무슨 음모를 하다가 여셧해 감옥살이를 하엿스며 몸의 자유를 어든지 멧날이 못되어 또 긔미년 무슨 선언으로 삼년간 철창신세를 지엇다. 이러한 신산한 생애를 격는 가운데 선생의 의긔는 조금도 꺽김이 업시 단련을 바드면 바들스록 더욱 뻣뻣하고 날카로워갓다. 집에 돌아온지 잇해 동안에도 선생의 안즌 자리는 따뜻해 볼 때가 업섯다. 불에 타고 터만 남은 오산학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야 늘날엔 조그마한 외딴마을에는 한울에 다흘 듯이 우뚝한 오산학교의 날개안에 60여 호의 문화촌이 빽빽이 들어셧다. 병원도 잇고 상점도 잇고 목욕탕도 잇고 리발소도 잇서 엄연하게 오산왕국을 건설하엿다. 이것이 모두가 오즉 선셩의 피방울과 살점의 뭉치이다. 오호라. 선생이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훌훌이 던저 버리고 떠나시다! 이로부터 선생의 몸은 영원히 편안하시리라. 그러나 이 땅을 버리고 가시는 선생이 혼령만은 반듯이 슬프시리라. 경오년 5월 여드레날 아츰 오산학교 조회시간에는 전례와 마찬가지로 선생이 강단에 올라스셧다. 학생들이 선생의 교훈을 잘 직히지 안는 것을 보신 선생은 마음이 퍽 아프고 슬펏다. 「너의들이 이와가티 이르는 말을 아니들어서는 아니되겟다. 너의가 고티기 전에는 내가 너의에게 다시 말을 아니하겟다」 이것이 선생이 오산학교 학생에게 마지막한 훈화다. 그 학생들의 고침을 미처 보시지 못하고 가시는 선생의 혼령도 섭섭하시려니와 선생의 마음에 만족하시도록 고침을 보여들이지 못하고 선생을 영결한 학생들의 슬품이야 그 유한이 뼈 속에 매첫스리라. 이날에는 다른 날과 다르게 학교를 구석구석이 한 번 돌아보시고 건넌 말에 죽 늘어잇는 교원의 사택까지 찬찬히 살펴보섯다. 그리하야 저물게야 댁으로 돌아가셔서 곳 자면회(自勉會)라는 동회를 불리 모으시고 농사에 대하야 때를 일치 말 것과 공동경작에 대한 의논을 하섯는데 이 동회에서는 원래 동회 소유 전답을 장만하여 가지고 동회 組이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서 추수해 두엇다가 여름철에 농량이 어려울 때는 동만에게 난워주는 것이엇다. 이때 선생은 숨이 차지면서 목에서 담이 올라오기 시작하엿다. 그러나 동회를 마치시고 니어서 리씨문계(李氏門禊)를 모아서 문중 재산을 잘 정리하아 장래의 복울 누리도록 힘쓰라고 부탁하셧다. 이때애 선생은 담이 끌어 올라서 퍽 괴로웟스나 그래도 할 말은 다 하셧다. 11시나 되어서 취침하셧다. 그 부인은 늣도록 깨어 계시다기 막 첫잠 들려 할 때에 선생이 흔들어 깨우시면서 내가 급히 할 말이 잇스니 갓가히 사는 이들을 불러오라고 하시매 그 부인은 창황이 일어나서 맨 먼저 그 중 집이 갓잡고 또한 오산학교에 연고가 깁흔 朴基璿씨를 깨우고 그 다음에 또 멧 사람을 깨워서 그네들이 급히 달려오자 선생의 모양은 벌서 틀려젓다. 그러나 의식만은 명백하엿섯다. 먼저 눈을 떠서 朴基璿씨를 알아보신 선생은 「내 뼉다귀를 학교에 표본으르 두어주시오. 그리하야 우리 민족 교육에 쓰게 하야 주시오」 다시 손을 내어 저면서 「이밧게는 아모 말도 업소」 그만 의식을 일으셧다. 이것이 선생의 유언이니 때는 경오년 5월 9일 오전 2시 10분 가티 들은 이는 朴基璿, 朴健采 두분과 선생의 부인 張氏와 선생의 장칠 李子卿씨 모두 네 분이다. 오전 4시에 쇠약한 숨결까지 끈혓다. 오흐라. 선생은 아주 가시다! 그의 마음과 정성과 재물과 피과 살은 이미 청년교육과 민족지도에 다 밧치엿스매 남은 것은 오즉 한 등걸뼈 뿐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것만이라도 땅속에서 편안히 썩히기에는 참으로 미안하엿다. 그리하여 그것까지도 민족교육에 바치는 것이다. 선생의 뜻을 슬퍼하며 고마워하는 우리 힌옷 입은 무리들은 선생의 시체를 곱게 밧늘고 경성대학의 학부 해부학분실까지 모셔다 두엇다. 나도 따러서 해부실 문탁에 올라서서 눈물을 뿌리며 허리를 굽혀 마지막 례를 들엿다. 오늘에 전하는 말을 들으니 선생의 시체는 벌서 해부대 우에서 살은 다 떠나 갓다고 한다.〈32〉 李商在 先生의 臨終-遺言으로 남긴 最后의 付托- 李鍾麟 近代의 巨人 오호, 我月南선생이시어. 선생은 이제 과연 영원한 길을 떠나시는잇가. 이것이 과연이라면 선생은 엇지 참아 이 길을 떠나시는 잇가. 主하야 국가를 위하고 민중을 위하야 책임을 다 하얏서도 공적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엿서도 권리는 업든 선생은 도로허 이 길이 志願일 것임니다만은 谷風驟雨가 凄其四至하는 曠野에서 헤매이는 우리 후인을 위하야서는 참으로 不忍하신 길임니다.(중략-원문) 오호, 我月南선생이시여. 선생의 英靈이 만일 우리들의 이 현상을 굽어 보신다면 일생 樂天家이신 선생도 이에는 비애치 아니치 못할 것이며 百戰老將軍이신 선생도 이에는 痛恨치 아니치 못할 것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갓 선생을 위하야 비애할고 오호, 我月南선생이시어. 선생은 暝目하소서. 오늘 선생을 보내는 우리들은 아무리 後生일지라도 선생을 郊則하야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오늘의 비애와 痛切이 他日의 歡呼聲될 줄 그 뉘가 모르오릿까. 그러면 선생이시여 이 길을 떠나소서. 오호 我月南선생이시여! 이것이 李商在선생이 도라가서서 영결식 마당에서 옷것을 적시면서 내가 부른 哀辭엿다. 어느 분이 세상을 떠나 조흔 분이 잇스랴만은 우리의 師表되시는 月南선생이 도라가심은 실노 너무나 슬푼 사실이엇다. 그의 생전의 崎嶇를 思하며 그의 사후의 赤貧을 思할 때 누가 暗淚를 흘니지 안엿스랴. 恨 만흔 세상을 남기어 두고 그가 고요히 눈을 감을 때 조선사람들은 擧皆가 長歎하고 그의 덕을 흠모하엿다. 거기에는 老少의 別이 업고 거기에는 知面不知面의 別이 업섯스니 선생은 과연 巨人이엿다할 것이다. 이제 그의 생전 활동의 자태나 遺訓에 대한 기록을 새삼스럽게 적어 무엇하리요. 오직 그의 도라 가실 때 광경을 적기로 하겟노라. 남긴 한마듸 말슴 不起의 重患이 드러 藥石의 속에 무치어 게시다는 놀라운 飛報를 접하고 나는 수차 齊洞의 先生宅을 방문하엿다. 그러다기 丁卯年 長遊하시든 바로 전날인 3월 28일 아춀°에 나는 선생의 병환이 쾌차하기를 千萬心祝하면서 그 宅 舍廊에 이르러 선생의 병실을 차즈니 그러케 烔烔하든 眼光에는 이미 죽엄의 구림자가 스처 지낫슴인가. 녯날의 生彩가 업고 수척하실대로 수척하신 그의 손에도 지름끼라고 한 점 흐르는 바 업섯다. 이미 78의 고령이시다. 춘추에 대하여 그리 애착이 계실 일이 업겟지만 형제와 사업을 생각하실 때 더 地上에 계시고 십흔 마음이 얼마나 만흐섯슬가. 선생의 눈빗과 얼골 모양이 「더 살고 십흐다. 더 살어 일을〈33〉 더 하고 십고나」하시는 듯하여 나는 참라 快効의 有無도 뭇지 못하고 방 안 한 구석에 우둑허니 안저 잇슬라니 선생은 한참 나를 처다보시다가 눈짓으로 갓가히 와 달라는 표정을 하신다. 나는 그의 겻흐로 무릅 거름을 하여 닥어 안즈니 그제는 팔을 들어 나의 손을 쥐신다. 지금도 이처지지 안는 것은 팔을 드시든 모양이라. 이미 病魔가 元氣와 피와 근육을 다 빼아슨 뒤임으로 普通人의 鴻毛의 輕이 선생에게는 九鼎의 重이시든 모양인 듯 가진 힘을 다하시어 겨우 붓잡으시더니 「나는 가오. 일을 만히 하오」 하고 겨우 한 마듸 하신다. 나는 그에 대답할 바를 몰나 쥬름살 잡힌 그 손을 맛잡고 잇슬라니 선생은 다시 무삼말슴인가 하시려다 목젓에서 끌는 가래가 시언히 내려가지 안는 모양으로 눈쌀을 집흐리며 그만 고민하시고 만다. 나는 창황히 벼개를 치바처 머리의 위치를〈34〉 돕다들이엇더니 조곰 평안하신 모양으로 昏昏히 잠이 드러 버리섯다. 도로혀 長居함이 病人에게 조치 못할 것을 깨다른 나는 무거운 발길을 門外에 돌려 노흐면서 내일 다시 오기를 自期하엿다. 엇지 알엇스리요. 그 이튼날 春雨가 霏霏한 속에서 선생은 그만 영영 가실 줄이야. 또 「나는 가오. 일을 잘 하오」 하시든 말슴이 이 세상에 남긴 최후의 유언일 줄을 엇지 뜻하엿스랴. 드른 즉 선생이 임종에는 그의 子孫 數氏외에 사회의 인사로는 한 분도 업셋다하며 또 너무 갑작히 생명을 끈으신 터이라 子興孫에게도 유언다운 유언을 한마듸 못하섯다니 의미심장하게 나에게 기친 그 한 말슴이 다시 그 聲唳을 接할 길이 업는 최후의 一言이시엇든 것이다. 哀絶의 葬儀 선생의 葬儀는 社會葬으로 되어 사상단체, 종교단체, 청년단체, 신문잡지사 등 100여단체 數十萬人士의 哀悼 裡에 4월 7일 京城驛을 출발하야 韓山의 산하에 그 유체를 고요히 모시다. 그때의 광경은 세인의 뇌리에 아직 뚜렷할 것임으로 略하거니과 최후로 선생이 지어 부르시든 高宗輓詞를 적고서 이 붓을 거두기로 하자. 高宗輓詞 慟哭又慟哭 胡忍見此時 山河依舊態 草木亦含悲 雲鄕仙馭遠 不盡於戱思 簿海方盪潏 乾坤忽傾欹 愛戴徐四紀 膏澤洽淪肌 彼蒼曷有極 滄桑萬事移 窮山與遐 髫白血淚滋 龍輴邊禮古 鮒卜奉訓遺 金谷渺渺靑 門日遲遲仍 將千古恨 敢進一篇詞 女流運動家 朴元熙君-最后의 病席을 追憶하며- 禹鳳雲 三十二를 一期로 1927년 12월 4일! 섯달초생의 주먹갓흔 함박눈이 회색하늘 속으로 푸실푸실 떠러지는 이 날은 우리들에게 잇서서 무한히 슬프고 애처러운 날이엇다. 그는 우리의 운동을 위하여 가진 뼈와 피를 다 바처오든 동지 朴元熙 여사가 이 세상을 떠낫슴이다. 그는 夫君 金思國씨를 1년전에 사별한 뛰 비록 異性愛의 세계에서는 孤寂을 늣기엇다 할지라도 그래도 운동에 굿은 대한 신념과 동지의 사랑 속에서 굿굿한 그의 행진의 거름을 멈추어 본 적이 업서서 우리들의 마음까지 든든하게 하여 주드니 우연한 일로 동짓달 보름께 든 겨울감긔가 더치어서 年來의 쇠약에다가 아조 病勢가 두터웁게 되엿든 중 그날 끗끗내 동무와 사업과 것지도 못하는 어린 딸 하나를 세상에 남기어 두고 영원히 영원히 눈을 감고 말엇다. 그가 운명하든 날 나와 黃信德군과 姜아근니아군과 그이 딸과 친척은 藥甁과 신음소리에 둘너싼 그의 최후의 병석을 지키고 그가 蘇復하기만 苦待하고 *** ** 죽을가 그러케 落望할 줄〈35〉 모르고 그러케 무슨 일에나 한 번 붓잡으면 열렬하고 退却할 줄 모르든 그가 설마 감긔쯤으로 죽을가. 비록 헤가 꼬부라저 말을 번지지 못하고 목에 가래가 가랑가랑 끌고 미음 한 숫갈 마시지 못한다 할지라도 설마 운명이야 할가. 이미 生彩를 일흔 회색 두 눈이 맥업시 天井을 바라보고 거미줄가치 약하여진 팔목을 들어 최후로 무엇을 안어보고 십다 하드시 두리번 두리번 한다 할지라도 설마 죽음을 압헤 두고 현세를 애착하여 그리하는 것이랴. 그는 죽지 안으리라. 죽어서 못쓰는 사람이 설마 죽을가. 나히도 청춘이오. 기개도 구만리 푸른 하늘의 수리개갓튼 그가 모든 사람의 저 바림을 버리고 설마 죽으랴. 이러케 우리들은 밋고 빌고 혼자 괴로워하엿다. 「여보! 정신채려오」 하면 그는 창문을 보고 눈을 우리 얼골에 돌니어 물끄럼히 보다가 입을 조곰 움지긴다. 필연 우리를 도로 위로하려고 우스려한 것이리라. 黃과 姜은 벌서 못참겟다는드시 머리를 숙이고 잇다. 아마 내려오는 눈물을 病人에게 보이지 말려고 하는 애처러운 로력이리라. 나는 고요히 그 딸 思恩으를 붓잡어다가 그의 겻헤 노앗다. 그는 겨우 팔을 드러 어린 아해의 얼골을 한 번 싹싹 만지고 또 다시 만지려고 서둘다가 그만 긔운이 업는지 손을 노코 눈을 감아버린다. 「여보! 정신채려오. 어서」 「....」 「동무, 동무! 사은이 여기 잇소」 「....」 「여보, 여보....」 그는 한참만에야 죽은 말눈가튼 아모 생기업는 그 회색 눈을 떠서 딸을 보다가 친척을 보다가 黃을 보다가 姜을 보다가 마즈막에 나의 얼골을 한참 보다가 「일들 잘 하오!」 오직 한마듸 말을 남기어 노코는 무슨 소리인가 어대 먼 세계에서 조고마한 뼈마듸가 걱거지는 듯한 소리가 갓닥하고 들니자 보니 그의 사지는 설맥하기 시작하고 입에서는 거품이 돌기 시작하엿다. 「그러면 그러면....」 하고 우리들이 놀라부르짓고 광란하는 것을 남기어 노코 그는 그것이 이 세상 마즈막 순간이 되어 영원한 곳으로 가고 말엇다. 시체를 안고 우는 친척 몽무 어린 딸의 모양을 보는 듯 마는 듯- 仝志들의 徹夜 죽은 訃音을 듯고 朴衡秉, 李丙儀, 任鳳淳, 宋乃浩, 李恒發, 任允宰 기타 여러 사람이 달려왓다. 달려와서는 너무도 애처러운 최후에 모다 얼골을 숙일 뿐이엇다. 우리들은 그날 밤 시체겻헤서 철야하엿다. 추억하고는 울고 울고는 추억하면서 崎嶇한 일생 속에서 몬저 간 동무를 조상하엿다. 그 중에도 나는 서른다섯을 먹기까지 남을 위하여 그러케 울어 본 적이 업섯다. 생각건대 내가 년전에 海參威로부터 나와서 北間島에 온 즉 그 곳에 朴元熙 女史가 잇섯다. 그는 서울 청년회의 쟁쟁한 투사로 또 무산자동맹회원으로 足跡이 국내국외에 멀니 미치어 매우 꾸준한 활약을 보이고 잇든 때이다. 날더러 서울청년회의 입회를 권유하면서 조선의 운동사정을 소상히 이약이하여 주엇다. 그때 나는 사회주의 학설에 대하여 좀더 연구하고 십흔 생각을 하고 그가 속하여 잇는 단체에는 가입하지 안엇스나 그와는 훨신 갓가운 벗이 되엇다. 그 뒤에 나는 서울에 올나와서 北風會에 들엇다. 파벌을 따진다면 그와 나는 딴 派에 속하나 모든 운동을 위하는 데서는 一致하여 그는 나를 밋고 나는 그를 여간 밋은 것이 아니다. 그럴지음에 그의 夫君 金思國씨는 병으로 卒하엿다. 그 뒤부터 朴元熙 동무에게는 슬품이 만헛다. 원래 눈물이 만혼 그는 갓금 우는 것을 보엿다. 가치 펄펄 뛰며 일을 위하여 다니든 사랑의 동무이자 가튼 동지이든 金思國씨를 일흔 뒤에 그의 심정을 우리만은 잘 이해하여 그를 위로하고 그를 웃기고 그를 갓금 다리고 놀너 나가기도 하여 한 순간이라도 그 슬푼 기억을 꺼버리도록 하기에 애를 썻다. 그런대 그때 朴동무를 괴롭게 한 것이 따로 한가지 잇스니 그의 딸 되는 思恩이란 두세살 밧게 안니되는 어린 아해가 언제 알치 안는 때가 업섯든 것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늘 安國洞으로 鍾路로 그애를 업고 藥病을 들고 다니게 되엿다. 이것이 그의 건강을 더욱 지치게 하여 早死케 한 一因도 되리라.(第頁74에)〈36〉 〈2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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