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잡지자료 |
잡지명 | 삼천리 제2호 | |||
호수 | 제2호 | |||
발행년월일 | 1929-09-01 | |||
기사제목 | 宗敎 李商在氏와 孫秉熙氏, 榮光의 朝鮮先驅者들!! | |||
필자 | 尹致昊 | |||
기사형태 | 논설 | |||
인류가 다른 동물보다 나흔 것은 文化의 歷史를 가진 때문이라 하겟다. 이 文化라는 것은 저절로 이러나 된 것이 아니요 인류가 奮鬪努力하는 가운데서 조곰식 堆積하야 되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막연하게 인류라 할지라도 그 중에 몬저 깬 少數의 사람들이 잇서서 그가 重壘難關을 뚤코 또 百折不屈한 정신으로 敢然히 勇往前進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어느 民族이나 어느 社會民衆에게 「勝利의 生活」이 잇섯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생활을 전개하기 위하야 心血을 다한 無名의 先驅者들이 만하엿든 것을 우리는 이저서는 아니 된다. 그리하야 文化잇는 곳에 先驅者의 足跡이 반드시 깔니어 잇섯스니 朝鮮을 말할지라도 이만침된 데에도 政治上으로 金玉均씨 등이 압잡이꾼으로 잇섯든 것을 爲先 이저서는 아니 된다. 金玉均씨라니 連想되는 것은 저 郵政局 事變이라. 그때 나도 米國公使 「후트」씨의 엽헤 안저서 政變을 치르고 낫스니 그것이 바로 1884년 12월인데 지금 생각하면 李甲秀씨 洋星病院이 잇는 磚洞 그 큰집에 불을 질는 것이라. 그러나 事-意와 어그런진 바 잇서 千載의 恨을 품고 徐光範, 朴泳孝, 洪英植씨 등과 가치 金玉均씨도 亡命, 投獄, 暗殺 등으로 끗을 막엇지만은 엇잿든 그만한 自覺運動이 잇섯기 때문에 朝鮮의 거름도 비로소 의식적으로 옴기어 노케 된 것이라 할 것이다. 엇지 政治뿐이랴. 가튼 의미로 宗敎方面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잇스니 政治에 金玉均씨 등을 가진드시 宗敎界에 잇서서도 또한 基督敎의 李商在씨와 天道敎의 孫秉熙씨 등이 存在하엿든 것을 이저서는 안된다. (佛敎 其他宗敎에 대하여는 薄識한 탓으로 近代文化와 큰 交涉을 가진 先驅者들를 잘 모르지만은 물론 前記 두분 외에도 가령 基督敎를 말할지라도 申興雨, 金昶濟씨 등 여러 분이 잇섯스나 모다 第2時代 次期時代에 나타낫든 인물이라 보는 것이 올켓슴으로 여기에는 두 분만 소개하기로 하는 바이다. 月南 李商在氏 月南 李商在씨는 庚戌 즉 哲宗 卽位 元年 10월 26일에 忠淸道 韓山郡 北部面 種芝洞에서 출생한 뒤 政治에 뜻을 두어 郵政局司事와 朴定陽씨를 따라 駐美公使舘 書記生과 學務局長 事務兼管과〈14〉 議政府總務局長과 獨立協會副會長 등을 歷任하고 잇다가 實狀 宗敎界로 投身한 것은 壬寅年에 獨立協會事件으로 警衛院에 가치어 잇든 3년 동안이엇스니 당시에 亦同囚이든 李承晩씨의 소개로 貞洞敎會에서 200여 種의 耶蘇敎冊을 差入바더다가 晝夜耿讀함으로부터 열렬한 信徒가 된 것이엇다. 그 뒤로는 辛亥년 62세 時에 그 때 基督靑年會의 宗敎部長에 就任한 것을 비롯하야 庚申 71세 時에는 朝鮮基督敎 靑年聯合會 委員長을 歷任하엿고 癸亥의 74세 때에는 北京에서 開催하는 萬國靑年會代表로 老軀를 드러 참석하엿스며 其后 卒遊하든 丁卯 78세에 이르기까지 실로 약 30년간을 꾸준히 基督敎를 위하야 獻身하엿스니 그동안에 혹은 講台에 혹은 街頭에 서서 寢食을 잇고 熱心 布敎에 專力하든 功績은 세상이 이미 잘 알 일이라. 실로 黎明期의 朝鮮에 잇서서 宗敎方面을 통하야 朝鮮人의 幸福增進에 위대한 貢獻을 한 第 一人者로 선생을 곱을 것이니 오늘날 長老敎徒만 25만을 헤이는 盛運에 이른 것이 선생의 애씀이 그 가운데 만타 할 것이다. 마즈막으로 선생의 宗敎觀을 엿볼 수 잇는 生前의 所論 1節을 抄記하건대 「世人이 요구하는 방향이 不同하니 혹은 權位 혹은 勢力 혹은 金錢 혹은 名譽 등이다. 그것이 貴치 아니함은 아니로되 그것이 具備하고도 만일 樞要되는 一件이 無한 즉 權威도 勢力도 金錢도 名譽도 다 水泡에 歸할 것이다. 其一件이란 何인고 즉 和平이니 一邦國이나 一家庭이나 一社會나 和平이 업고는 그 결과가 파멸하고 말 뿐이니 馬太 12장 25절에 잇는 말슴을 記憶할 일이라 云云』 義菴 孫秉熙氏 基督敎側에 잇서서 李商在씨의 貢獻과 足跡이 위대하엿든 모양으로 또 天道敎에 잇서서는 義菴 孫秉熙씨의 先驅者的 업적이 만하엿든 것이다. 孫秉熙씨는 辛酉 4월 初 8일에 忠淸北道 淸州郡 大周里에서 出生하야 22세 時에 天道敎에 入敎한 뒤 34세 申午年에 崔時亨, 全奉準씨와 더부러 公州에서 政治的 宗敎的의 XX횃불을 들어 奮鬪하다가 乙未年에 勢不利로 一時 中國에 亡命하엿스며 그 뒤 35세 時에 歸國하야 義菴의 道號를 밧고 39세에 崔時亨씨로부터 道統을 밧은 뒤부터 多數한 敎徒를 指導하며 일생을 보내엇다. 氏도 오히려 政治的 活動方面을 기록하는 것이 本意일넌지 모르나 나는 다만 宗敎側으로 보아 氏의 天道敎에 대한 功績이 非常하엿든 것을 말할 뿐이며 (以下 전부 삭제-원문)〈15〉 〈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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