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별건곤] 제2호에 이상재가 '상투에 갓쓰고 米國에 公使갓든 이약이, 벙어리 外交,

천하한량 2007. 4. 5. 18:03
제목 :  처음으로 미국에 간 개화기 외교관 부인의 사진
이름 :  박상표
게시일 :  2005-03-04 10:12:01
조회 :  36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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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1889년 2월 23일자 [프랭크 레슬리즈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페이퍼]에 '워싱턴의 한국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진 (출처 : 중앙일보 1973년 10월 6일자 5면)

조선인 최초의 치과의사인 함석태 관련 자료를 찾으려고 옛 신문을 뒤지다가 우연히 찾은 기사입니다. 중앙일보에서 당시의 사회 명사들이 '남기고 싶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라는 연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과의사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박병태가 중앙일보에 1973년 9월 29일부터 두 달 가량 '골동품비화 40년'이라는 연재를 했습니다. 신문 연재물을 복사하다가 바로 옆 기사에 '처음으로 도미한 개화기 외교관 부인의 사진 공개'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아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로 밝혀졌는지는 아직 관련 자료를 찾아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1931년 5월 1일자로 발행된 [삼천리] 제15호에 이와 관련이 있는 기사가 있더군요.

사진의 주인공은 [삼천리] 기사에 나타나는 한국정부에서 특파한 美國公使館 윤치소의 부인(원문의 표현에 의하면 쎄컨드)「고-라」, 美國公使館 參事官 이채연(李彩淵)의 부인(역시 원문의 표현에 의하면「세컨드」), 李完用이 미국(원문 표현-米國)에 부임할 때 데리고 간 소실(小室)... 3명 중 한 명이 사진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영어 통역관 역할을 했던 이채연은 동문학(同文學) 등을 통한 근대 영어교육과도 관련이 있는 인물인데요... 이완용과 함께 독립협회 창립회원이기도 했습니다. 역시 이완용과 함께 조선은행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전우국 방판(電郵局幇辦)-참의교섭 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농상공부 협판(協辦)-한성부 관찰사(漢城府觀察使)-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습니다.

『 매천야록(梅泉野錄) 』에도 이채연의 이름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1895년(高宗 32년 乙未)에 농상부(農商部) 서리대신(署理大臣)으로 임명되었다거나 1896년(建陽 元年 丙申)에 이채연이 경인철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1898년(光武 2년 戊戌)에 量地衙門이 설치될 때는 부총재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1926년 12월 1일자로 발행된 [별건곤] 제2호에 이상재가 '상투에 갓쓰고 米國에 公使갓든 이약이, 벙어리 外交, 그레도 評判은 조왓다.'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도 이채연과 관련된 대목이 나옵니다.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서기관 이상재-이하영-이완용 3인을 수행하는 번역관이 이채연이었습니다.

이상재의 글에 "번역관이라 하는 이도 기시 외무아문에서 불과 1년공부에 지나지 못하야 간신이 쉬운말이나 할뿐이라. 미인과 국제교제를 할 때에는 미국인으로 조선에 와서 의사 노릇하든 某氏와 가티 통역을 하얏는데 그도 역시 조선어가 不充分하야 항상 교제 할 때면 미국 반벙어리와 조선 반벙어리가 서로 절장보단 하야 의사를 소통하게 되엿다. 그럼으로 잇다금 우수운 일도 만히 잇섯다"는 대목이 있어 통역관 이채연에 대한 이상재의 평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잡지 [삼천리]와 [별건곤]에 실린 기사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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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隆熙時代의 新女性總觀

政治敎育文化各方面의 俯瞰

琵琶洞主人

세월이 하도 빨너서 벌서 일한합병이 된지도 수물한해이다. 지금 종로네거리나 光化門通을 네활개 저으며 지나다니는 紅顔靑年들을 보아도 그네들은 합병전보다 합병후에 출생한 이가 만흔듯하니 이 엇지 세월의 총총함이 走馬燈갓다고 아니할가.
그때 西大門밧 무학재 아래에는 巴里凱旋門을 본밧어 靑天에 올니소슨 大理石 독립문이 잇섯고 그 門附近에 녯날 中原使節을 마저드리든 慕華舘을 업새고 독림관을 새로 지어 노앗는데 이터가 실로 「開化」의 뜨거운 熱望에 晝夜로 轉轉反側하든 近世, 朝鮮文化의 胎盤이엇스니 西北學會를 爲始하야 XX協會, 自疆協會의 靑年論客들이 거의 이곳에 陣치어 政府의 鎖國政策을 痛罵하고 時世에 暗한 封建諸侯格이든 閔氏一族의 守舊黨을 打倒하기에 急하엿든〈66〉 것이다.
이와가치 한참 當年에는 「開化」의 急先鋒꾼이요 自由主義者요 또 한 急進靑年들이든 20代 30代의 徐載弼, 李承晩, 尹致昊, 安昌浩, 崔麟, 李甲, 兪鎭泰, 申興雨, 李東輝 등 여러분이 只今엔 60客, 50客이 되어 머리에 서리가튼 白髮을 언고 잇스니 이 엇지 世事의 變遷이 놀납다 아니할가.
그때가 光武年間과 隆熙年間때엇스니 지금으로부터 손곱아 헤여보면 벌서 35, 6年이란 긴 세월이 그 사이를 가로빗겻다. 그럴밧게 업는 것이 合倂된 지가 21년 그우에 隆熙年間이 4년을 繼續하엿고 또 光武年間도 11년이나 繼續하엿스니까 이럭저럭 해수를 따저보면 30여년이 넉넉히 넘는다. 그런데 前記와 가치 日本과 美國에서 몰니어오는 自由民權과 開國政策에 뿌리를 둔 開化의 思潮가 怒濤와 가치 半島의 沿岸을 휩쓸고 돌 때 이 潮流에 올나타고 萬丈의 情熱과 經倫을 보이든 이는 尹致昊, 李承晩 등 여러분이나 그러나 한편 女性側에는 1千萬 閨中同性을 위하야 누가 책상을 치고 이러낫든가.
그때 신문으로는 徐載弼博士가 指導하는 XX신문이 잇섯고 金嘉鎭씨 등 主宰의 XX協會報와 또 尹孝定씨 등의 XX自疆會報 등이 잇서서 靑年論客의 條理整然한 警世의 快論이 뒤를 이어 작고 나와 黎明期의 朝鮮社會에 큰 불길을 던지고 잇섯지만 한편 女人側으로는 누가 果然 街頭에 나서서 幽閉且 隔離되어 잇든 그때 母妹를 위하야 萬丈의 氣焰을 吐하엇든가?
그때는 群衆이 모히는 곳에 반드시 演壇이 잇섯고 演壇이 잇슨 곳에 반드시 靑年論客의 爽英한 風貎가 보이엇건만 그 演壇우에는 纖纖玉手를 가진 細腰의 少姐는 업섯든가.
開化소리 들니는 곳에 靑年子弟가 보이엇고 靑年子弟보이는 곳에 學校가 섯고 學校가 선 곳에 學徒歌와 XX歌를 소리놉히 부르는 이 나라 快男兒가 잇섯건만 女性을 위하야서는 學校도 업고 女學生도 업섯든가?
「開化」라면 잇든 상투 썩썩 잘나버리고 保守的이든 삿갓을 동댕이치고 그대신 三角山가튼 帽子를 썻고 몸에는 洋服를 입엇고 발에는 구두를 신은 이 時代에 先駈하는 이 모든 靑年들의 몸에는 그 行裝이 一變하엿건만 한편 졸졸 끄으든 長衫을 버리고 4人轎를 차버리고서 머리깍고 구두신고 나서든 新女性은 그때에 잇섯든가 업섯든가?
업섯다면, 一世를 氣慨와 美貎와 智略과 端雅한 姿態로 울니든 明成后를 가진 半島女性으로서는 이 엇지 붓그러운 일이 아닐가? 이제 우리는 그 當時의 新女性을 차저보기로 나섬은 黎明期의 埋沒되어 잇든 그때 社會相을 正當하게 發堀하여 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應當 우리의 이 筆觸에는 숨기어 잇든 그때의 政治, 社會, 文化 各 方面이 活動하는 新女性的 일꾼들이 만히 나타나질 것을 빌고 또한 밋는다.

王室움지겨 淑明, 進明만든 黃메리女史의 活躍
30년 전이면 朝鮮8道 뒤둘처 보아도 學校라고는 培材學堂이 서울에 하나 잇섯고〈67〉 女子側으로는 西洋宣敎師들이 開設한 梨花學堂이 한 개가 잇슬 뿐이엇다. 그러나 學校라고 잇다 하여도 서울市民은 「學校로 子弟를 보내면 꼭 죽이는 줄」만 알든 때이니 9深閨房에 가치어 잇든 아가씨들이 엇지 通學하기를 바래랴. 엇절 수 업시 부모도 업시 떠도라 다니는 孤兒들을 아홉명을 야주개고 구리개고 배고개고 하는 곳곳에서 사탕주고 밥주고 속이어 달래와서 工夫를 시작케 함이 梨花學堂 創設初年의 光景이엇다.
그러나 한해 두해 지나가는 사이에 梨花學堂에는 서울서 한다 하는 집안의 따님들이나 며늘들이 通學하는 것을 볼 수 잇게까지 되엇스니 時世의 힘이란 참으로 놀납다고 하지 안을 수 업다. 이 梨花學堂이 朝鮮新女性의 胎盤이 된 것이 이리하야 시작한 것이니 영국 옥스포-드가 傳統的의 英國後繼政治家를 培養하드시福澤諭吉의 慶應義熟에서 日本開化의 役軍을 길너내드시 朝鮮女性運動의 先駈者는 이 梨花學堂에서 그 첫 발자곡을 떼어주엇다 할 것이다.
그때에 後世에 일홈을 永遠히 끼칠 新女性 한분이 낫섯스니 그는 卽 黃메리孃이라. 黃메리孃은 일즉 宣敎師를 따라 美國에 건너가 그나라 文化를 肺腑에 가득 드리마시고 도라온 뒤 半島女性도 언제까지든지 단꿈만 꿀대가 아니라하여 여러번 父老들을 모아노코 演說도 하고 남몰내 家家戶戶를 訪問하여 泰西의 形便도 일너주기에 奔走하엿스나 結局 1千萬의 女性을 깨우치는 道理는 敎育의 길밧게 업다 하야 가진 수단과 정성을 기우리어 有名한 皇室의 嚴妃를 움지기어 만흔 敎育資金을 끄으러내어서 淑明學校와, 進明學校를, 創設하엿든 것이니 孃는 實로 一敎育家라기보다도 훌용한 經世家요 政治家엿든 것이다. 이리하야 各 學校를 도라다니며 장차의 어머니될 수만흔 따님들을 교육하기에 밤낫 헤아리지 안코 잇다가 時世가 변하여 淑明女學校도 財團法人이 되고 進明 또한 그러케 되자 손을 끈고 지금은 市內阿峴里의 英國聖書公會, 聖經敎授로 잇다. 드른즉 요지음은 公會일로 忠淸道 淸州에 가게시다가 1년에 한번씩 잇는 年會에 參席코저 늣김만혼 녯 서울의 땅을 밟는다든가.
黃메리씨는 벌서 回甲을 年前에 지냇다든지, 이삼년 안으로 맛게 된다든지 하는 六旬갓가운 늙은이다. 젊엇슬 때 黃氏라는 분과 結婚하엿다가 다시 梁某氏와 結婚生活을 하엿다가 모다 幸福스럽게 끗을 맷지 못하야 지금은 독신으로 게시는데 그 까닭에 일홈은 「메리-」인줄 확실히 알지만은 「 黃메리」인지 「梁메리」인지 그의 녯벗 金美理士女史나 申興雨씨도 分明히 모르고 잇섯다.
그러치만 이 「메리-」女史가 新女性으로 30년전 社會에 나타날 때는 구두신고 파라솔든 淸楚한 모단껄의 行色을 聯想한다면 그는 큰 狼狽이니 그때만해도 구두신는 법이 업고 파라솔 드는 법이 업섯다. 申興雨氏 伯氏가 그때 當時에 깬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구두를 한걸네 어더다가 신고 종로에 나갓더니 구두를 처음 보는 長安市民은〈68〉 怪物이 왓다고 구름가치 모여드러 구두에 돌맹이질을 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하여 피하엿다고까지 하는 點으로 보아 그때 當時 開化女性이라 하더라도 구두 신엇슬 리가 업겟다. 外樣의 점으로 보면 新女性의 特色을 차저내기 자못 곤란한데 아마 장옷이나 벗고 다녓슬 정도가 아니엇슬는지.

女醫學博士 朴愛施德氏와 金美理士女史의 모던,껄時代
「黃메리-」氏와 억개를 나란히 하여 光武時代에 빗나든 모던,껄을 찻자면 지금 花洞골목의 槿花女學校를 經營하고 잇는 校長 金美理士女史를 손곱지 안을 수 업다. 그는 금년이 쉰셋으로 늙으나 늙은 靑春이지만 한때는 閨中處女로 世界雄飛의 큰 뜻을 품고 「나는 洋國갈테야!」
하고 응석부리면서 美國으로 떠나든 때가 바로 芳紀 23歲의 아릿다운 處女時代엇다. 그때 氏의 洋行熱을 크게 들쑤신 분으로는 亦是 美國工夫하고 도라운 朴愛施德이란 분이엇다. 朴愛施德孃은 엇저면 글세 美國가서 醫科大學를 마치고 醫師가 되어 本國에 나왓섯다. 火輪船타고 2,3朔 걸녀야 당도하는 코큰 백성들이 사는 美國에 가서 醫業을 닥고 醫學博士가 되어 오다니 朝鮮社會에 李浣의 李大將이 다시 난 것만치나 驚異아니될 수 업섯다.
慧星가치 突現한 女醫師 朴愛施德氏에 刺戟되어 떠낫든 金美理士孃도 그 當時는 내로라 하는 新女性 中 한분이시고 또 그때 新女性으로는 지금 귀국하여 학교일 보는 黃愛施德氏, 己未運動때 일홈을 날니든 「金마리아」(中略-원문) 그러고 「朝鮮料理製法」이란 著書로 崔昌善의 新文舘時代부터 錚錚하게 그 일훔을 날니든 方信榮女史 그외에도 누구누구 여러분이나 大槪는 作故하고 지금 生存하야 잇는 분은 만치도 못할 뿐더러 잇다 하여도 30년이면 山川도 변하는 데에 녯날 그때로 잇지안어 或은 露領으로도 가버리고 或은 上海 北京에 가 잇단말도 들니고 더러는 布哇와 美國에 아조 終生할 目的으로 가서 지내는 분이 만타고도 한다.
엇재든 光武隆熙時代의 新女性이라하면 敎育方面과 醫學方面에 대개는 활약하엇던 듯 하다.

外交官의 夫人으로 尹氏夫人과 令孃들

그러나 時代사람이 일컷는 「모던,껄」은 이러한 方面보다도 當時 外國에 派遣되어 잇는 公使, 領事 등 外交官의 夫人과 따님들에게 잇섯슬 것이다. 첫재머리에 떠오르는 이는 한국정부에서 툭파한 美國公使舘의 윤치소? ( 尹致昊氏의 4寸이신가) 는 마누라(실상은 쎄컨드)에 「고-라」라 하는-아미는 반달갓고 손길은 白玉갓고 가는 허리 喃喃한 말소리-그야말로 古典的 東洋的 美人으로 울니든 아름다운 이를 다리고 美國에 건너가서 北亞美利加 社交界에 女王가치 孔雀가치 尊敬과 欽慕를 바더서 「尹고-라」 「尹고-라」하면 그분을〈69〉 그 當時 한국정부의 要路大官치고 소문을 듯지 못한 이 업섯슬 듯. 그러케 才色이 兼備하다 그 뒤 윤치소?씨가 歸國하야 政府의 어느 局長으로 잇슬 때도 그 夫人은 漢城의 社交界를 歐羅巴式 沈練된 麗質로 떨첫섯다.
그러고 또 한분 잇다. 2,3年前까지도 西大門1丁目의 白堊洋舘을 가지고 잇든 「만포-드」商會의 리상필氏의 嚴親 李彩淵氏가 美國公使舘 參事官으로 赴任할 때에도 역시 正室 마누라님은 참아 움지기지 못하고 「세컨드」를 움직기어 美國가섯다가 歸國한 뒤까지 漢城判尹으로 지낼 때도 外國使臣들의 夫人이나 令孃을 接待하는 役을 마튼 분은 이분들이엇다.
죽은 李完用이도 米國에 赴任할 때에 小室을 다리고 갓다든가.
그때의 모단껄로는 또 河상긔氏 마누라로 梨花學堂舍監으로 게시든 「하나나사」氏도 일홈을 울니엇다.
아마 時世가 변함이 업시 그냥 내러왓더면 지금쯤은 歐美風으로 洗練된 外交官夫人도 만히 輩出하엇스련만-(下略-원문)

모던껄은 英語를 하엿고 차림차림은 別異狀업섯다
그때 英語를 아는 女性은 상당히 만하엇섯다. 前記와 가치 그 夫君을 따라 美國 等地에 여러해 滯在한 이들이 만햇든 것과 또 한가지는〈70〉 敎育과 布敎를 目標로 하는 外國宣敎師의 來往이 頻繁하여젓스니까 自然히 接觸할 機會가 만하여 그러함인 듯.(中略-원문)
그때의 新女性들로 外國男性과 「쓰위트홈」을 꾸미고 잇엇다는 이를 나는 寡聞하여 아직 듯지 못하엿다.
30여년전 光武隆熙時代의 新女性, 그것은 바야흐로 한마듧의 끔을 푸는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우리는 다시 仔細히 풀 날이 잇슬 줄 밋고 爲先 붓을 여기에 멉춘다.〈71〉

출처 : [삼천리] 제15호, 1931년 5월 1일 발행, pp 6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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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桑一變 四十年
우리 朝鮮과 외국간에 사절이 래왕하기는 이미 역사가 오랏섯다. 그러나 과거에는 국제간 교제가
다만 동양 몇 나라에 지나지 못 하얏슴으로 사절이 한끗 간대야 中國 안이면 日本이엿고 또 지금처럼 공사나 영사의 제도가 잇서서 상설로 엇던 나라에 가서 駐在치 안이하고 다만 일시 일시로 국제간에 무슨 중요한 교섭할 일이 잇스면 피차에 특별히 래왕할 뿐 이엿다. 그러나 소위 白人의 국가와 국제간 사절이 派送하게되고 근대식의 공사영사가 백인의 국가에 가서 상시로 駐在하게 되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사오십년 내외의 사이다.
내가 주미공사 관원의 일인으로 米國에 가기도 거금 40년전-절개국 496년 丁亥 9월이엿다. 그때는 근세 조선의 대변란이라 할만한 壬午軍亂을 지내고 최초로 韓美通商條約을 締結한지 근 5년 만이요. 또 金玉均씨의 甲申革命운동이 잇슨 후 3년 이엿다.
당시 朝鮮은 자래 쇄국주의를 버리고 새로 문호를 개방하는 동시에 주자개국 493년 乙酉에 소위 日淸天津條約이 성립한후 朝鮮의 내치외교는 朝鮮이 자주한다는 獨立思想이 조선에 팽창하야 일반 문물제도를 혁신하고 따라서 국제간에 사절도 파송하게 되엿는데 그때에 주미 전권공사는 처음으로 朴定陽씨가 피명되엇섯다.

상투 튼 공사일행
이전에 우리 朝鮮에서 中國이나 日本에 사절이 가랴면 일행이 수백여인에 달하고 그 의장행렬이
몃십리에 延하야 威儀가 과연 놀〈7〉나윗고 비용도 다대 하얏스나 우리가 미국에 갈때에는 불과 일팔인이엿는데 공사외에 서기관으로는 나와 李夏榮씨와 故 李完用 후 3인이요. 번역관은 지금 李相弼군의 부군 李采淵씨요 기외는 하인청 직등속이엿다. 지금은 우리도 머리를 다깍고 아모리 頑固생원님이라도 외국관광단에 한번 뽑피면 依例 머리를 깍고 스투른 양복이나마 입어야 될줄 알지마는 그때의 우리 일행은 상투가 그대로 잇섯고 의복도 純然한 朝鮮官服을 입엇섯다. 맛치 과거에 우리 조선사절이 외국에 갈때와 복색이 조금도 다름이 업섯다. 지금와서 녯일을 생각하니 실로 滄桑一變의 감이 업지안타.

到處에 흔날리는 太極旗
이, 상투잡이, 공사의 일행인 우리가 떠날때에 공사관에 揭揚할 朝鮮國旗를 미리 예비한 것은 물론이어니와 우리가 타고가는 기선중에도 좌상에 국기를 꼬잣섯는데 눈치빠른 선주는 벌서 우리 국기를 준비햐야 식당이나 우리 출입하는 문구에다 게양하고 또 米國에 상륙할 시에도 부두, 정차장, 차내, 호탤까지 우리 국기를 게양하야 환영의 의를 표하엿섯다. 도처에 朝鮮國旗를 볼때에 반갑기도 하려니와 米國人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하엿섯다.

沿路의 米人들은 中國人으로 짐작
그때에도 중국사람은 30여만이나 미국에 가서 잇슴으로 동양사람이 가면 처음보는 미국사람들을 의례로 중국사람으로 알엇다. 기중에도 우리 일행은 다 머리를 깍지안코 또 의복이 중국복과 비슷한 까닭에 沿路의 미국사람들은 우리를 중국사람으로만 알고 떼를지여 쫏차다니면서 『촤이나-촤이나』하엿다.

公使보고 女子대접
기중에도 우수운 것은 미국인중의 시골사람들은 감히 공사일행인 우리를 가르처서 동양 엇던 나리의 여자라고 하는 것이엿다.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안이라 미국의 여자는 실내에서도 帽子를 흔이 쓰고잇고 또 의복도 사치스러운 비단옷을 입으며 수염도 간혹잇는 여자가 잇는데 우리 일행은 실내에서 갓을 쓰고잇고 또 입은 의복이 대개 조흔 비단이오. 「동다리」의 관복이 울읏붉읏하야 여자의 의복가티 뵈이고 또 일행중에 수염만흔 사람이 별로 업스며 혹 잇다 하야도 미국여자의 수염만도 못한 까닭이엿다. 그리하야 우리를 대할에도 禮貌범절를 똑 자국의 부인을 대하는 것과 가티하는 일이 만핫섯다. 지금에 그 생각을 하야도 참으로 요절할 일이 만핫섯다.

宴會席의 三大特色
당시 미국에 주재하는 외국의 공사는 모다 41개국이나 되는데 엇던 연회장에 모딀때 보면 대개는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깍것스나 중국사람은 例의 도야지 꽁지가튼 머리에다 마래기를 쓰고 장유의 주의를 입엇스며 土耳其 사람들은 上尖한 모자를 썻는 고로 조선공사가 지너어 이 삼국인의 복색은 엇던 연회나 집회석에 異彩요 특색이엿는데 그중에도 머리 우에 상투를 가진 것으로나 복색이 찬란하고 색스러운 것으로나 진중의 진이엿다.

엉뚱한 中國公使
대륙성인 중국인은 누구나 교제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은 세계에 정평이 잇는 것이 지마는 기시 조선과는 자래 정치적 관계가 복잡한 까닭에 국제적 교섭에 더욱 곤란한 일이 만핫섯다. 즉 중국은 항상 조선의 내치외교는 조선이 자주 한다는 말을 세계에 공언하면서 내심으로는 의연히 자국의 속邦으로 생각하고 또 자존자대의 사상이 만튼 까닭에 조선이 외국과 직접교제하는 것을 조치안케 생각하야 최초 조선에서 외국에 공사를 파견할 시에도 여러 가지의 방해를 하야 곤란이 다대하얏고 또 공사가 미국에 간 뒤에도 중국공사는 조선사신에게 요구하기를 외국공사와 교제 할 때에는 자기와 먼저 의논한 후 교제를 하고 또 미국 외무성을 방문하는 데도 자기의 안내로 하라고 하얏다.
그러나 박공사는 그의 무리함을 단연히 거절하고 당당히 단독으로 교제를 함으로 중국공사는 항상 조선공사에 대하야 불평 불만의 기색을 가지고 잇섯다.

中國公使의 大狼狽
그러자 그 때에 미국에 재유하는 중국인 한 사람이 엇던〈9〉 미국인의 집에서 雇傭을 하다가 그 주인의 가족 칠팔인을 일시에 학살하고 재산을 강탈 도주한 사건이 돌발하매 전 미국의 여론이 일시에 이러나서 재미 30만 중국인의 방수운동을 개시하고 따라서 중미국제문제까지 되엿섯다. 其時의 어느날 이엿다. 박공사는 미국 외무성을 방문 하엿섯는데 응접실에는 중국공사가 벌서와서 名剌를 통하고 미국 외무성 대신을 면회하랴고 고대하고 있는 중이엿다. 박공사도 역시 名剌를 통하고 면회를 청한즉 먼저온 중국공사는 불너드리지 안코 추후 온 박공사를 불너드려서 장시간의 담화를 하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고대하든 중국공사는 두 번재 名剌를 드리고 면회를 청한즉 미국 측에서는 지금 조선공사와 면회중인즉 후일 다시 방문하라고 문전수객을 하고 마닛가 중국공사는 그 모욕을 당하얏스나 엇지하지 못하고 다만 불평만만 하야 공귀할 뿐이엿다. 이것은 전혀 미국에서 중국인 배척문제로 하야 미국의 감정이 좃치못한 까닭에 중국공사를 모욕하고 또 조선과 새로 국제적 관심을 사고자 함이엿다.

奇怪한 米新聞의 惡宣傳

이와가티 중미인간의 감정이 좃치못한 까닭에 미국의 엇던 대 신문은 중국인의 악선전을 하기 위하야 근거업는 허위의 기사를 만히냇섯다. 그중에 예를드러 말하면 「조선공사와 중국공사와 자전차 경주를 하는데 중국공사는 불과 몇회에 낙상을 하얏느니 또 중국공사는 路에서 미국여자의 손을 먼저 잡엇느니 하는 등의 말이엇다. 그러나 그것은 전연 그짓말이다. 박공사는 원래 지대체하고 점잔은 양반일 뿐안이라 중국공사와 자전차를 가티 만저본 일도 업고 기시 중국공사의 張蔭煥 이라 하는 이도 역시 당당한 신진의 인물로 교제와 수완이 상당하야 결코 외국인에게 견모할 짓은 안이 하엿섯든 것은 물론이다.

반벙어리의 交際
지금은 미국의 유학생도 만코 따러서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만치마는 그때만하야도 영어가 퍽은 귀햇섯다. 번역관이라 하는 이도 기시 외무아문에서 불과 1년공부에 지나지 못하야 간신이 쉬운말이나 할뿐이라. 미인과 국제교제를 할 때에는 미국인으로 조선에 와서 의사 노릇하든 某氏와 가티 통역을 하얏는데 그도 역시 조선어가 不充分하야 항상 교제 할 때면 미국 반벙어리와 조선 반벙어리가 서로 절장보단 하야 의사를 소통하게 되엿다. 그럼으로 잇다금 우수운 일도 만히 잇섯다.〈10〉

출처 : [별건곤] 제2호, 1926년 12월 1일, pp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