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월남 이상재 선생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 갔던 이야기’, ‘별건곤’ 1926년 12월호

천하한량 2007. 4. 5. 18:01

외부대신 시절의 이하영.


범상치 않은 다섯 사나이는 그런 기이한 옷차림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할 기세였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차림새는 그들만 못하지만 다섯 사나이와 동행임이 분명한 승객이 이등석에 2명, 삼등석에 3명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이한 복장의 다섯 사나이와 동행한 미국인 의사 알렌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일등실 승객들에게 그들이 미국에 부임하는 초대 조선공사 일행이라고 소개했다. 다섯 사나이는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삼등서기관 이상재, 번역관 이채연, 그리고 이종찬의 조부인 이등서기관 이하영이었다.

서양인들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박정양 공사 일행은 목숨을 걸고 비장한 각오로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었다. 아니, 임금과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박정양이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된 것은 1887년 8월18일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체결로 조선과 미국은 외교관계를 맺었다. 1883년 5월 푸트(Foote)가 초대 주(駐)조선 미국공사로 한양에 부임한 이래 4년간 주조선 미국공사는 다섯 명이나 교체되었지만, 조선 정부는 주미 조선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보낼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이래로 조선의 종주권을 강력히 주장하는 청나라의 집요한 내정간섭과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고종이 미국과 유럽에 공사 파견을 시도할 때마다 청나라는 구구한 이유를 들어 반대했지만 본심은 하나였다.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라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것이었다. 저장성이나 산둥성이 미국으로 공사를 파견할 수 없듯, 속국인 조선 역시 미국으로 공사를 파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청나라 역시 구미 열강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처지여서 흑심을 품고 조선으로 오겠다는 구미의 공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조선이 구미로 보내는 공사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다. 고종이 박정양을 주미공사로 임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조선 청국공사 위안스카이가 조선 정부의 공사 파견을 반대한 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조선은 약소국이며 자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전권공사를 파견할 수 없다. 둘째, 조선은 경제적으로 빈약한 나라이기에 전권공사를 파견하더라도 재정난으로 중도에 철수할 것이다. 셋째, 조선과 미국은 교류가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전권공사를 파견해도 할 일이 없다.”

청나라는 이처럼 완강하게 공사 파견에 반대했지만 고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9월23일, 고종은 박정양을 친히 불러 유지(諭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를 내렸다.

대조선국 대군주는 종이품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특파하는 바이다. 짐은 충실하고 부지런하고 총명하여 늘 가까이 두고 신임하는 경에게 명하노니 미국 수도에 주차(駐箚)하여 국서를 진정하라. 아울러 상대국에 통상교섭 일을 잘 할 것이며 우의를 돈독히 할지어다. -대조선 개국 496년 팔월 초칠일.


청나라가 조선의 미국공사 파견을 방해한다는 소식은 열강들, 특히 당사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외교 분쟁으로 비화됐다. 조선과 미국, 청의 외교적 교섭은 박정양이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된 지 석 달이 지난 11월에야 타결됐다. 청나라는 소위 ‘영약삼단(約三端)’을 이행한다는 조건으로 박정양의 미국 파견을 허락했다. 영약삼단이란 ‘첫째, 조선공사가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알현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외무성과 백악관을 방문한다. 둘째, 공적 행사나 사적 연회에서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 다음에 입장하고 아랫자리에 앉아야 한다. 셋째, 중요한 사무는 먼저 청국공사와 협의한 후 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 관례를 무시한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박정양 일행에게는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영약삼단을 이행하지 말고 훗날 조선에 돌아와서는 나라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라는 말이었다.


선상의 기연

이하영은 1886년 스물아홉 나이에 외아문(外衙門)의 주사로 벼슬길에 올라 상서원 주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국록을 먹은 지 1년 만에 주미공사관 이등서기관이 되어 미국 땅을 밟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1884년 9월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난징(南京)호’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한 의사 알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하영은 한낱 미천한 장사꾼에 불과했다.




1884년 9월 장로교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알렌은 1905년 5월까지 21년간 조선에 머물면서 의료, 선교,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하영은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인 1858년 경남 동래군 기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이 매우 구차해 동생 이준영과 함께 기장에서 동래장을 내왕하면서 찹쌀떡 행상을 다녔다. 끼니나마 때울 요량으로 통도사에 동자승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1876년, 그의 나이 열아홉 때 부산이 개항되자 혈혈단신 부산으로 이주해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집안이 한미하고 가난한 탓에 한문은 물론 한글조차 깨치지 못했지만, 점원으로 일하는 동안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깨닫고 밤낮으로 일본어와 일본 상인의 상술을 익혔다. 그렇게 8년을 열심히 살다보니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고, 장사 밑천도 어느 정도 마련됐다. 개항 초기다보니 아직 조선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1884년 스물일곱이 된 이하영은 고용살이를 청산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사업은 평소 알고 지내던 평양 출신 상인과 동업으로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며 무역을 하는 것이었다. 이하영은 제2의 임상옥을 꿈꾸며 동업자와 함께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그러나 믿었던 동업자는 낯선 도시 나가사키에서 동업 밑천을 몽땅 챙겨 도주해버렸다. 8년 동안 모은 전 재산을 장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날린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이하영은 하늘을 원망하며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가 올라탄 배는 상하이를 출발해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향하는 여객선 난징호였다.

난징호에는 이역 땅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조선으로 향하는 또 한 명의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의료선교사 알렌이었다.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알렌은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지원해 중국 선교사로 발령 받았다.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한 알렌은 난징과 상하이를 거점으로 의료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년 동안 넓디넓은 중국 땅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쫓아다녔지만 선교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반서양적, 반기독교적 편견으로 가득 찬 중국인들을 상대로 선교 사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국의 비위생적인 환경은 출산을 앞둔 아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중국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알렌에게 동료 의사인 핸더슨 박사가 조언했다.

“중국에서 겉돌 게 아니라 조선으로 가는 게 어때? 조선은 개신교 선교사가 아직 들어가지 않았어.”

조선이 개신교 선교의 불모지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알렌은 곧장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본부에 조선으로 선교지를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조선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찾고 있던 선교본부는 알렌의 신청을 신속히 승인했다. 1884년 9월, 알렌은 상하이에서 난징호에 올랐다. 근대 조선의 외교를 좌지우지한 두 ‘58년 말띠’ 동갑내기의 극적 만남에 대해 이하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갑신년(1884) 가을이다. 나는 이역 땅에서 비범한 사람을 만났다. 어떤 일이 있어 일본 나가사키에 갔다가 배편으로 귀국하는 길에 선상에서 알렌이라는 미국인 의사를 만났다. 서양의학을 선전하기 위해 동양에 파견되었다는 알렌은 초면인 나를 몹시 따뜻하게 대했다. 처음 청국 상하이에 와서 얼마를 지내다가 껄끄러운 인정 풍속에 쫓겨 역시 미지의 나라 조선을 찾아오는 알렌으로서는 조선 사람인 나를 따뜻하게 대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외국인이라면 모조리 호랑이나 표범같이 여기던 당시의 나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처음 만났으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친밀해진 우리는 인천 부두에 내렸다. 나는 알렌이 조선에서 최초로 사귄 지우(知友)이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과 알렌이 처음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어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1882년까지 조선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83년에 단 한 사람이 생겼는데, 바로 윤치호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다가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통역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윤치호조차 일본에서 겨우 넉 달 배운 영어로 통역노릇을 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윤치호는 영어 통역 초기에는 일본어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이중 통역했다.

1883년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일행은 워싱턴 방문길에 중국어-영어, 일본어-영어, 조선어-중국어, 조선어-일본어를 구사하는 4명의 통역을 데리고 갔다. 체스터 아더 미국 대통령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그것을 받아 조선어-중국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어본-영어 통역이 일본어로 옮기고 그것을 받아 조선어-일본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겨서 두 가지 이중통역을 종합하면 민영익 일행이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했다. 난징호 선상에서 이하영과 알렌은 아마도 일본어-영어 통역을 매개로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빈털터리가 된 이하영은 어차피 부산으로 돌아가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귀국길 선상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귄 김에 무작정 그를 따라나섰다. 1884년 9월20일, 난징호가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닿을 때만 해도 이하영이나 알렌이나 앞길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렌에게 맡겨진 첫 보직은 주조선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였고, 이하영에게 맡겨진 첫 보직은 무급 의사 알렌의 요리사였다.


갑신정변, 그리고 권력과의 만남

미국공사관이 알렌에게 제공한 것은 가족과 함께 살 집이 전부였다. 알렌의 요리사로 일하는 동안 이하영은 알렌에게 영어를 배웠고 알렌은 이하영에게 조선어를 배웠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크게 쓰일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알렌이 조선에 들어온 지 석 달째 되던 1884년 12월4일 밤, 누군가 황급히 알렌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제 저녁 산책을 끝낸 후 10시30분에 집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자마자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외국인이 나를 불렀다. 거실로 나가보니 주조선 미국공사관 스커더 비서였다. 스커더는 죽어가는 사람의 응급치료를 위해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급히 와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우정국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저녁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불길이 번졌으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왕비의 조카이자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도가 민영익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자객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알렌의 일기’ 1884년 12월5일자)


알렌이 ‘개신교 선교사상 가장 획기적인 날’로 명명한 그날 밤, 우정국 개국 축하만찬 석상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알렌은, 온몸에 자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해냈다. 알렌이 민영익의 치료를 위해 며칠밤을 지새우던 동안 곁에서 같이 밤을 새운 조선인이 있었다. 바로 이하영이었다.

알렌이 민영익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갑신정변 때였다.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의 곤봉에 맞아서 사망설이 나돌 정도로 중상을 당했다. 한의(韓醫)들이 백방으로 치료를 해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양의(洋醫)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즉시 나를 찾아와서 의논했다. 나는 알렌을 민영익에게 안내했다. 민영익은 건강을 회복한 후 알렌과 친교를 맺게 되고 미국을 친근하게 여기게 되었다. 알렌의 자국 찬미가 민영익과 나에게 미국을 존경하게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죽어가던 민영익을 회생시킨 것을 계기로 알렌은 세도가 민씨 가문과 조선왕실의 신임을 얻어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됐다.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로 조선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일약 어의(御醫)로 승차(陞差)한 것이었다.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을 세워줄 것을 건의해 승낙을 받아냈다. ‘개신교 선교 사상 가장 획기적인 날’ 민영익이 개화당 자객의 칼에 맞지 않았다면 쉽게 받아내기 어려웠을 승낙이었다. 이듬해 4월, 조선왕실은 최초의 근대식 병원 광혜원(개원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하고 알렌을 의사로 초빙했다. 알렌은 조선에서 사귄 최초의 지우 이하영이 새로 설립된 제중원의 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알렌에게 영어를 배운 지 1년 만에 이하영은 더듬거리면서 몇 마디씩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영어통역관 윤치호는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1883년 조선 정부는 외국과 교역에 필요한 영어통역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교육기관을 설치했지만, 졸업생들의 영어실력은 영 신통치가 않았다. 덕분에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는 당시 조선 안에서 조선인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어였다.

알렌은 이하영을 자신의 통역으로 삼았다. 알렌의 더듬거리는 조선어와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로 두 ‘58년 말띠’가 한참 동안 씨름하면 대충 뜻은 전달됐다. 알렌은 진료를 위해 고종을 알현할 때도 이하영이 함께 가길 원했다. 그러나 벼슬이 없는 이하영은 관복을 입고 어전에 나갈 수 없었다. 사정을 들은 고종은 배운 것도 변변치 않고 집안도 한미한 이하영에게 외아문 주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더듬거리는 영어실력 하나로 출세의 탄탄대로에 들어선 것이다.


해프닝, 해프닝, 해프닝

박정양 공사 일행은 안내책임을 맡은 참찬관 알렌과 그의 하인 김노미까지 도합 11명이었다. 1887년 12월10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이래로 조선공사 일행에게 선상 생활과 미국 생활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고와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알렌은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었다.



출항한 지 6일 동안 폭풍우가 계속되는 악천후였다. 공사 일행은 모두 배멀미로 고생했다. 그들은 일등석 티켓을 5장만 가지고 있었지만 다같이 일등석 객실에서 머물렀고 객실에서 식사도 같이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등석 티켓을 두 장 더 구입해야 했다. 싸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강진희와 더러운 사내(dirty man) 이상재는 하인에게 식사를 타오게 해서 박정양 공사와 함께 객실에서 식사했다. 번역관 이채연은 얼간이였고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나마 이하영과 이완용이 일행의 나쁜 인상을 상쇄시켜 주었다.
일행은 항상 선실을 어지럽혔고, 징 달린 신발로 심하게 바닥을 긁고 다녔다. 몸에서는 똥 냄새가 풍겼고 선실에서 줄담배를 피워댔다. 일행의 선실은 씻지 않은 몸 냄새, 똥 냄새, 오줌 냄새, 조선 음식 냄새, 담배 냄새 등이 어우러져 무시무시한 냄새가 났다. 승객들은 매우 친절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공사 일행이 사라져준다면 매우 감사해할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박정양 공사의 방을 찾아 인사를 했지만, 악취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알렌의 일기’ 1887년 12월26일자)



1888년 초 주미공사 일행이 묵었던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 일행은 팰리스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지진이 난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와이에 가까워오자 날씨가 몹시 무더워졌다. 공사 일행의 씻지 않은 몸과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냄새는 더욱 고약해졌다. 오셔닉호는 12월2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지만, 삼등실에 탑승한 중국인 승객이 천연두를 앓아 하선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19일 동안 배 안에 머물러야 했다. 오셔닉호는 화물칸에 실린 짐만 부린 채 다음날 새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출항했다.

12월28일 공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역시 천연두 승객 때문에 사흘간 배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천연두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하선을 허락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외교 사절을 무작정 배에 가둬둘 수도 없었던 항만당국은 1888년 1월1일 일등실 승객에 한해 하선을 허락했다. 보름 넘게 공사 일행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일등실 승객들은 뜻하지 않게 조선공사의 음덕을 입자 만세를 부르며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거리 곳곳에는 공사 일행을 환영하는 태극기가 게양됐다. 삼등서기관으로 공사를 수행한 월남 이상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상투잡이 공사 일행인 우리가 조선을 떠날 때에 공사관에 게양할 태극기를 미리 준비한 것은 물론 우리가 타고 가는 기선에도 객실에도 태극기를 꽂았다. 눈치 빠른 선주는 미리 태극기를 준비하여 식당이나 우리가 출입하는 문 입구에다 게양했다. 미국에 상륙할 때에도 부두, 정거장, 찻간, 호텔까지 태극기를 게양해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도처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볼 때 반갑기도 했거니와 미국인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했다. (이상재,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 갔던 이야기’, ‘별건곤’ 1926년 12월호)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흘을 머문 공사 일행은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4년 전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 일행이 갔던 길과 동일한 여정이었다. 공사 일행이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주미 조선공사 일행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할 일정을 협의했다. 국서 전달은 단순한 공사 부임인사가 아니었다. 조선이 미국과 대등한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의식이었다.

1888년 1월17일로 국서 봉정식 일정이 잡히자 주미 청국공사는 초조해졌다. 공사 파견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와 조선 정부가 합의한 ‘영약삼단’에 따르면, 박정양은 국서를 봉정하기 전에 청국공사를 알현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백악관에 가서 국서를 봉정해야 했다. 국서 봉정식이 하루하루 다가와도 조선공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참다못한 청국공사는 조선공사관에 참찬관을 보내 넌지시 영약삼단을 준수할 것을 종용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혹시 조선 정부가 영약삼단에 대해 일러주지 않던가요?”

박정양은 번역관 이채연 편으로 짤막한 글을 보냈다.

“미국으로 떠날 때 위안스카이 공사가 조정에 영약삼단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삼단을 준수하라는 훈령은 받지 못했소이다.”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는 지진이 났다고 놀라고,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는 앞가슴이 깊게 팬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을 기생으로 착각할 만큼 물정 어두운 박정양이었지만, 자신의 소임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박정양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고 임금 대신 목을 내놓기 위해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맞지 않는 미국에 찾아온 것이었다.

이 의연하고도 현명한 외교적 수완이 전적으로 박정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박정양은 공사로 임명된 후 병을 핑계 삼아 공사직을 사절할 만큼 겁 많고 소심한 인물이었다. 박정양의 유일무이한 미덕은 자기보다 똑똑한 참모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점이었다. 국서 봉정식을 둘러싸고 급박하게 돌아간 조선, 청국, 미국 사이의 외교전에서 이하영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백의사절 일행은 수륙만리 머나먼 길을 무사히 마치고 워싱턴에 당도했다. 부임 즉시 국서 봉정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정부는 예상 밖으로 냉정한 태도로 국서를 즉시 받지 않고 10여 일 후로 미루었다. 배짱 좋은 나는 외무차관 저택으로 방문해 직접 만나 담판을 벌여 진상을 알아냈다. 신임 조선공사의 국서 봉정을 연기하게 된 이유는 조선은 청국의 속령(식민지)인 줄 알았는데 새삼스럽게 공사가 왔다니 내막을 잘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처리했다간 국제분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조선의 입장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해 겨우 이해를 얻어냈다.
득의양양하게 일행이 기다리는 임시공관으로 돌아오니 박정양 공사는 의관을 갖추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 알고 보니 중국 공관으로부터 위문 사자(使者)가 왔다 갔다는 것이었다. 박정양 공사는 이런 황공한 일이 있느냐며 답례를 가겠다고 우겼다. 이에 일행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결과 박정양 공사가 섣불리 청국 공사관에 갔다가 만일 청국공사가 국서 봉정식에 동행하기를 직접 요구라도 하면 피할 도리가 없다는 이유에서 통역관 이채연을 대신 보내 사례하기로 결정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전권대신 민영익 일행이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공식접견하는 장면을 담은 ‘뉴스페이퍼’ 1883년 9월29일자 보도그림. 민영익 일행은 아더 대통령에게 큰절로 인사했지만, 4년 후 박정양 일행은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말단직원이 일약 대사로

1888년 1월17일,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 통역관 이채연 등은 상기된 표정으로 백악관을 향했다. 41개국 공사가 주재하는 미국측으로서는 의례적인 신임장 제정행사였을 뿐이지만, 조선으로서는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국서 봉정식이었다. 영약삼단을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국서를 봉정하고 난 후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공사 일행 전원의 목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잘못하다간 1886년 그랬던 것처럼 자칫 고종을 폐위시키려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험이 따른다고 언제까지나 속국으로 지낼 수만은 없었다.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사 일행은 이상재를 제외하고 차례로 매국노로 변절했지만, 국서 봉정식이 거행된 그날만큼은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선 투사들이었다. 백악관 정문을 통과해 봉정식이 거행될 방에 들어설 때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국무장관 베이아드와 국무차관 브라운을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을 한 국왕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던 공사 일행은 방금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보통사람이 입는 양복을 입고 행사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클리블랜드 대통령임을 알게 된 박정양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와 충성의 표시로 세 번 배례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대통령 수행원들이 박정양의 돌출행동을 제지하고 일으켜 세우자 박정양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서를 넣어온 상자의 열쇠를 찾지 못해 며칠 동안 준비한 취임사를 횡설수설 망쳐버렸다.

봉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알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렸고, 공사 일행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지 못해 어안이 벙벙했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안을 주지 않으려고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최대한 점잖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국서 봉정식은 이렇듯 코미디처럼 진행됐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정부에 박정양의 영약삼단 위반을 강력히 항의했고 관련자 전원의 처벌을 요구했다. 청나라 정부의 위협과 압력에 시달리던 조선 정부는 공사 일행을 차례로 소환했다. 급기야 1888년 11월에는 전권공사 박정양마저 소환했다. 박정양이 이완용, 이채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자 주미 조선공사관에는 서기관 이하영만 남게 됐다. 조선 정부는 관직에 오른 지 불과 2년밖에 안 된 이하영을 주미 서리공사로 임명했다. 외교부 말단직원으로 들어간 지 단 2년 만에 주미대사로 수직상승한 셈이었다.

이하영은 서기관으로 미국에 부임하기 전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바 있었다. 부산, 인천, 원산 세 부두를 담보로 200만달러를 차관해 그 돈으로 미국 병사 20만명을 빌려오라는 것이었다. 고종은 20만 미국 병사로 조선 땅에서 청국 세력을 몰아냄은 물론 중원까지 밀고 올라가 천하를 손에 쥐려는 황당하고도 원대한 꿈을 품었다.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캶陽江)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단독 국서 봉정에 성공한 이후 이하영은 고종의 밀명을 완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워싱턴 공사관에 혼자 남아 서리공사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첫 결실을 보았다. 뉴욕은행은 200만달러의 차관을 통보했다. 차관의 절반인 100만달러를 인출해 책상 위에 쌓아놓고 보니 외교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20만 미국 병사를 끌고 인천부두에 상륙할 날도 머지 않은 듯했다.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왔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성공을 굳게 믿은 나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비탄과 함께 커다란 걱정이 일어났다. 원병을 빌릴 것을 구실로 얻은 차관 중 이미 소비한 16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것이다. 백 가지 계책을 세워보아도 도무지 대책이 없어 파리 쫓으면서 낮잠만 자고 있노라니 하루는 외무대신(국무장관)이 관저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안색이 붉어졌다. 이를 어찌하리오. 가나마나 차관반환을 독촉하러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지라 떨리는 다리로 초청한 장소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저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 두취(대표이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황공히 앉아 외상의 입만 쳐다보며 최후의 처분을 기다렸다.
외상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리만치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하고 회유 같기도 한 어조로 자국의 정책인 먼로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끝에, 귀국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라면서 결론으로는 차관 중 이미 소비된 금액은 미국 정부에서 대신 갚을 터이니 남은 금액은 즉시 상환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전액을 잃을까 우려하여 남은 돈이나마 돌려 받으려는 약은꾀를 미워할 짬도 없이,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고 즉석에서 승낙했다. 나는 미국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경할지언정 믿고 따를 나라는 못 되는 줄 깨닫게 되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은 끝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서라도 나라로부터 받은 수모를 갚고자 했던 고종의 꿈을 이뤄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밤낮으로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어 미국 사교계에서 향락과 사치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2년 남짓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영어도 유창해지고 춤 솜씨도 늘었다. 초대받은 연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귀부인과 어울려 춤추기를 즐겼다. 상투를 튼 채 조선 버선에 구두를 신은 이하영이 댄스홀에 나타날 때면 금발 미녀들이 그를 에워싸고 갈채를 보냈다. 밤을 새워 술 마시고 금발 미녀들과 껴안고 춤추고 나면 근심과 우울은 모두 사라졌다.


조정의 급전

이하영은 부산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 한 차례 결혼한 적이 있다. 1880년에는 큰아들 이규삼까지 얻었다. 이규삼은 1921년 아편을 흡입하다 체포되어 자작이자 중추원 고문인 아버지 망신을 톡톡히 시켰다. 당시는 이혼이 공식적으로 성립되던 시대는 아니었지만, 미국 공사관에 부임할 때 이하영은 첫 부인과 사실상 이혼한 상태였다. 서리공사 이하영이 워싱턴 사교계에서 인기를 한몸에 끌다보니 그에게 구애하고 청혼하는 금발미녀도 나타났다



이하영은 미국 어느 유명한 부호 따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 그 색시로부터 약혼을 간청받았다. 이하영도 갓 서른을 넘긴 청춘이었던 만큼 끌리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국법은 외국인과 결혼을 엄금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하루는 그 색시의 모친이 이하영에게 청하기를 자기 맏사위가 이태리 현직 육군 장관인데, 그를 시켜 사정을 이태리 황제께 아뢰어 조선 국왕의 칙허(勅許)를 얻도록 주선할 터이니 내 딸과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고 졸랐다. 능란한 화술을 자랑하는 이하영도 한참동안 대답이 궁색해 어쩔 줄 몰랐다. (문일평, ‘한미 50년사’, 1945)



‘동아일보’ 1922년 9월21일 1면에 실린 대륙고무주식회사 출범 광고. 명실공히 ‘귀족 마케팅’의 효시라 할 만하다.
그렇듯 서리공사 이하영의 인생 황금기는 이어졌다. 그 옛날 춥고 배고프던 찹쌀떡 장수시절도 잊었고, 알렌의 식사를 차리며 눈칫밥을 먹던 시절도 잊었고, 외아문에서 상관 비위나 맞추던 시절도 모두 잊었다. 1889년 6월 이하영이 자신이 누구인지, 이역만리 워싱턴에 왜 나와 있는지를 거의 잊었을 때쯤, 급거 귀국하라는 조선 조정의 급전이 날아들었다. 아무리 미국생활이 행복하다 해도 그가 살아가야 할 무대는 조선이었다.

1889년 이하영은 이완용에게 주미 서리공사 자리를 물려준 뒤 1년 6개월의 짧지만 ‘성공적인’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후 이하영은 웅천 현감, 흥덕 현감을 거쳐 5년 만에 정3품 외아문 참의(외교부 차관보)로 승차했다. 한성부 관찰사(서울시장)와 일본 주재 공사를 거쳐 1904년 마흔일곱의 나이에 외부대신(외교부 장관)에 올랐다.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외국인과 사교능력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기에, 이하영은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그 시절에도 미천한 신분의 한계를 뚫고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조선이 양반이 지배하는 나라라 해도 공맹(孔孟)의 법도만 갖고 서구 열강을 상대로 외교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우용택의 외부대신 구타 사건

관운이 트이면서 재산도 엄청나게 불었다. 서대문 합동에 있는 그의 99칸짜리 저택은 큰 한옥 외에 양옥이 따로 있었고 사랑채와 행랑채가 딸려 있었다. 행랑채엔 수십 가구의 하인이 살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하영 자신이 남의 집 행랑채에 사는 일개 요리사였으니 격세지감이었다. 대지 1500평에 달하는 집안엔 조그마한 인공 동산까지 만들어놓았다. 국록만 받아 가지고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부였지만, 어디서 생겼는지 이하영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이하영은 외부대신으로 부임한 이후 당면한 외교적 현안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하던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의 어로권을 넘겼고, 일본 헌병대에 한성의 치안권을 넘기더니, 급기야 내륙 하천의 항해권마저 일본에 넘겨줬다. 도로 사정이 열악한 시절 원거리 상품운송에는 주로 내륙 하천이 이용됐다. 내륙 하천 항해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은 국가의 기간도로망을 송두리째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905년 8월21일, 아침부터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외부대신 이하영은 찜통더위 속에 관복을 걸치며 입궐 준비를 서둘렀다. 이하영이 입궐 준비를 끝냈을 때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초라한 행색의 경상도 선비가 찾아왔다. 선비는 ‘경상도 의성 땅에 사는 우용택’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곤 대뜸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쳤다.

“네가 동래 천무(賤巫)로 대신까지 되었으면 나라에 갚음이 있어야지 나라를 팔다 못해 하천까지 팔아먹느냐. 장차 또 무엇을 팔 테냐? 저 역적을 죽여라.”

호통이 끝나기 무섭게 우용택은 이하영의 옆구리를 차고 뺨을 후려갈겼다. 이하영은 황급히 하인들을 불러 겨우 봉변에서 벗어났다. ‘외부대신 이하영 구타 사건’ 덕분에 우용택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동안 고초를 겪었지만, 친일매국노를 따끔하게 혼내준 강개지사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친미파로 정계에 입문한 이하영은 철두철미한 친일파는 아니었다. 외부대신 시절 일본에 이권을 넘기는 데 앞장섰지만, 법부대신으로 옮겨가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을 때는 처음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보다 한발 늦게 찬성으로 의사를 번복해 천만다행으로 ‘을사오적’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하영이 처음부터 을사늑약에 찬동했다면 역사는 그의 이름을 ‘을사육적’에 올렸을 것이다. 이하영은 늦게나마 을사늑약을 찬성한 까닭에 강제합방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얻었다.

강제합방 이후 이하영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얻었다 하나 실권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하영은 고무와 가죽을 섞어 만든 일본식 고무신을 개량해 전체를 고무로 만든 조선식 고무신을 개발했다. 조그맣게 시작한 고무신 사업은 날로 번창해 1922년 예순다섯 나이에 자본금 50만원(현재 가치 500억원)의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첫 사업에 실패한 지 40여년 만에 시도하는 두 번째 사업에서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것이었다.

대륙고무신의 ‘귀족 마케팅’

이하영은 주식회사를 조직하면서 박영효 이윤용 등 다수의 귀족을 주주로 참여시키고, 자신의 차남인 이규원, 이근택 자작의 장남인 이창훈 등을 이사진에 포함시켰다. 경영진의 구성부터가 ‘귀족스러운’ 회사였던 만큼 주력상품인 ‘대륙고무신’ 역시 처음부터 공격적인 ‘귀족 마케팅’에 나섰다.

순(純)고무 경제화의 원조, 대륙고무
본인이 경영한 대륙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순종)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감함을 금치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또 나인들, 일반 고객들이 각별히 애용하셔서 날로 달로 발전하여 이번에 주식회사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고무 업계의 원조로서 더욱더 매진하여 조선은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진출하겠사오니, 더욱 애용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다른 회사가 조악(粗惡)한 제품을 본사의 제품이라고 사칭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본사상표 ‘大陸’에 주의하시옵소서.
1922년 9월 대륙고무주식회사
사장 이하영
(‘동아일보’ 1922년 9월21일자 광고)



대륙고무의 귀족 마케팅은 적중했다. ‘만월표고무신’ ‘별표고무신’ ‘거북표고무신’ 등 수십 개의 브랜드가 난립한 고무신 업계에서 ‘대륙고무신’은 최고의 명품브랜드로 시장을 석권했다. 최고의 인지도를 자랑하다 보니 시장에는 다량의 ‘짝퉁’이 유통됐고, 이 때문에 지방에서는 판매의 어려움을 겪을 지경이었다.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에서는 평양 서선(西鮮)고무공장을 걸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상표위반죄로 고소했다. 서선고무공장에서 작년 6월부터 대륙고무회사의 상표와 언뜻 보아 알지 못할 만치 비슷한 상표를 만들어 사용한 까닭이다. 이와마(岩間) 대륙고무회사 전무취체역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웬일인지 서조선 지방의 주문이 자꾸 줄어감으로 더욱 선전을 하고자 출장원을 많이 보냈는데, 그 출장원들이 가짜 상품을 발견하여 상표를 변경하라고 여러 번 일렀으나 종시 듣지 아니함으로 할 수 없이 고소한 것이올시다.” (‘시대일보’ 1926년 6월6일자)
대륙고무는 성장을 거듭해 광복 이후까지 최고의 고무신 브랜드로 사랑받았다. 찹쌀떡 장수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이하영은 일본인 상점 점원, 미국인 집 요리사를 거쳐 조선 최고의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1929년 고무신공장 사장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천한 시절 결혼한 첫 부인에게 얻은 큰아들 이규삼이 아편중독자가 되어 경찰서 출입이 잦았다든지 토지의 소유권을 놓고 친조카와 송사를 벌이는 등 불미스러운 일도 없지 않았지만, 이하영은 대체로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젊은 시절 남들보다 한발 앞서 익힌 일본어와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돌고 도는 역사

이하영의 손자 이종찬은 임관 이듬해인 1950년 6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6·25전쟁을 맞았다. 석 달 후 준장으로 진급했고, 1951년 6월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이기붕은 이종찬의 모친을 찾아가 한 나라의 육군참모총장을 총각으로 늙어가게 할 수 없다고 간곡히 설득했다. 이종찬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진해에서 표자영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1952년 5월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종찬에게 전방부대 1개 사단을 임시수도 부산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파병을 거부했다. 파병 거부를 계기로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목숨을 걸고 실천한 ‘참군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지만, 최고통수권자 이승만에게는 엄청난 수모를 당했다. 이승만은 그해 여름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클라크 장군을 각계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 할아버지가 구한말 외부대신을 지낸 사람인데 그 사람이 바로 ‘한일합방’ 때 도장을 찍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오.”

이하영이 한일강제합방 때 도장을 찍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지만,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승만으로서는 그렇게 욕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전쟁 중인 군대를 동원하려 한 대통령이 그것을 막고자 한 참모총장에게 외국인 앞에서 그런 능욕을 줄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독립운동가가 독재자로, 친일파의 후손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종찬은 같은 해 7월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유학 형식으로 미국으로 쫓겨났다.

이종찬은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했지만, 1960년 예편 후 이탈리아 주재 대사와 두 차례 유정회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돌고 도는 것이 역사이다.

(끝)

-전봉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