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이개 ▒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의기(義氣)에 살고 충절(忠節)에 죽고

천하한량 2007. 4. 1. 22:00
 

박팽년(朴彭年), 의기(義氣)에 살고 충절(忠節)에 죽고

 

높은 의기여! 선비의 굽힘 없는 충절이여!

당시 세조를 죽이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가 실패하여 희생당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

들의 의기와 충절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에서 끝까지 의리와 충절을

지키고자 죽음을 불사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충신불사이군 (忠臣不事二君)

 

박팽년(1417 ~ 1456) 호 취금헌(醉琴軒). 태종 ~ 세조.

세종 때 집현전 학사였으며 벼슬은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사육신의 한 사람.

 

金生麗水(금생여수)ㅣ라 한들 물마다 金()이 남여
玉出崑崗(옥출곤강)이라 한들 뫼마다 玉()이 날쏜야
암으리 思郞(사랑)이 重()타 한들 님님마다 좃츨야.
병가(
)  714

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곤강(옥이 나는 산)에서 옥이난다 한들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 아무리 사랑이 중하다고 한들 임마다 따르랴.
임금을 섬기되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비유적 표현 기교로 노래했다.

수양 대군에 의해 쫓겨난 어린 단종에 대한 애끓는 충정을 담아 노래한 작품이다.

 

 

충신불사이군 (忠臣不事二君)의 한결 같은 단종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는 의절가로 그의 가마긔 눈비 맞아와 함께 널리 흠모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세종 24(1442) 25세의 팔팔한 청년으로 집현전 학사였던 신숙주, 박팽년이 한

살 연하의 성삼문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면서 서로의 뜻을 담은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 중

널리 알려진 것이 위의 박팽년의 시와 성삼문(成三問)의 높은 의기를 담고 있는 다음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조들을 보면 평소 이들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의 의기가

굳게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허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낙낙장송(落落長松) 되야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졔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성삼문                            병가()  63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은 당시 형조 참판 자리에 있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단념하였는데,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형조참판이 된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6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정(
)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하여 뒷날 관가(觀稼: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자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뒤 박팽년의 인물됨을 너무 아껴온 세조는 사람을 시켜 비밀스레 일렀다.
"내게 돌아와 첫 모의에 참여한 것만 숨긴다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그러나 박팽년은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임금이 된 세조에게도 '상감'이라 하지

않고 그냥 '나리'라고만 불렀다. 이를 듣고 있던 세조가 소리쳤다.

"너는 나에 대해 스스로를 이미 '()'이라 일컬었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러자 박팽년이 태연스레 말했다.


"나는 상왕(문종)에게만 신()이었을 뿐이오. 충청 감사로 내려가 한 해 동안 나리에게 여러번

장계(壯啓)를 올렸지만, 나 스스로를 신()이라 쓴 적은 없소."


정말로 그 때 올린 편지들을 가져다 확인해 보니 모두 '()'자 대신 '()'자로만 씌어 있었다. '()'자는 나리를 이르는 말이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정·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 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순()·분()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줄이 이시랴.

병가()  64

까마귀(변절하는 간신)가 한때의 눈비를 맞아 희게 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리고 야광명월의 구슬(충신)이 어둔 밤(역경)에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단종)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일편단심은 변할 줄을 모른다고 굳은 절개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마귀'와 대조적인 시어는 '야광명월' '일편단심'으로 연군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을 나타낸다. 시련 속에서도 작자가 깊이 다짐하고 있는 절의가 돋보이는 시조이다.

박팽년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에 뜻을 두고 힘을 썼지만, 같은 동지 김질의 배신으로 투옥되었다. 이에 배신자 김질이 박팽년을 살려 자기 사람으로 회유코자 하는 세조의 뜻을 받들어 김질이 직접 박팽년이 갇혀 있는 옥중으로 술을 들고 찾아가 술을 권하며 이방원의 하여가

(何如歌)로써 은근히 박팽년의 뜻을 타진함에 화답한 작품이라 한다.

 

삼대가 멸문(滅門)의 화를 입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경술과 문장·필법에 뛰어난 존재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서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단종이 폐위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하여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간다.

 

박팽년은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 박중림 앞에서 울면서 말했다.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이렇게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
임금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것 또한 불효이니라."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廟堂深處動哀絲     묘당심처동애사  묘당 깊은 곳에 애처로운 음악이 울리니

萬事如今摠不知     만사여금총불지  만사를 지금은 모두 모르겠네

柳綠東風吹細細     유록동풍취세세  바들은 푸르러 동풍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花明春日正遲遲     화명춘일정지지  꽃은 훤한데 봄날이 정히 더디고 더디네

先王事業抽金櫃     선왕사업추금궤  선왕의 큰 사업은 금궤에서 뽑아내고

城主鴻恩(+)玉扈성주홍은도옥호   성주의 큰 은혜로 옥잔을 기울이네

不樂何爲長不樂     불락하위장불락   즐기지 않으리 어이 길이 즐기지 않으리

答歌醉飽太平時     답가취포태평시   살컷 마시고 배부른 태평시대를 노래로 화답하네   

 

수양대군이 영의정으로 본격적인 권력의 자리에 오른 후 이를 축하하는 모임이 열리자 박팽년이 이 시를 짓고 나자 몹시 만족한 수양대군이 부중 현판에 달도록 하자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세조가 박팽년을 몹시 탐내어 조금만 숙이기만 해도 살려주고 팠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