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 시대 조선시대, 세조·숙종 시기
■ 규모·양식 9,370평(7기)
■ 지하철역 1호선 노량진역(도보 8분)
사육신묘는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 2년(1456)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 즉 사육신의 무덤을 말하며, 현재 이곳은 사육신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質)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박팽년(朴彭年)·유응부·이개(李塏)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河緯地)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그 후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이 산기슭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死六臣碑)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그런데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이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2년 6월 병오(丙午)조에는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ㆍ박팽년을 비롯한 성승ㆍ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ㆍ성삼문ㆍ유응부ㆍ이개의 묘에,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假墓)도 함께 만들었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뒤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1. 成三問 (1418 ~ 1456)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본관 창녕, 호 매죽헌 막 태어날 때 ‘낳았느냐?’ 하고 세번 묻는 소리가 났다 하여 삼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세종29년 重試에 장원(신숙주 4등)하여 승지가 되고 왕을 가까이 모셨다. 세종께서 “이 아이가 장차 이 나라의 대통을 잇게 되면 경들이 잘 보필해 주시오.”한 고명지신이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쫓고 왕위에 오르니 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다.
세조의 친국 때,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했느냐”,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제 마음은 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찌 배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으리는 평소에 成王을 보필한 周公임 을 인용하셨는데 주공도 이런 짓을 했습니까? 제가 이 일을 꾸민 것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내가 왕위를 받을 당시에 이를 막지 않고 이제야 배반한단 말이냐”,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니 물러나서 죽는 길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죽는 것은 소용없으니,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자는 반역자다. 명색은 상왕을 다시 모신다면서 사실은 자기 잇속을 차리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저를 신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는 나으리의 녹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집을 몰수 해서 조사해 보십시오. 광에 고스란히 쌓여 있을 것입니다.ꡓ(뒷날 조사하니 하나도 먹지 않고 별실에 쌓아 두었다.)
불에 시뻘겋게 단 쇠로 다리를 뚫고 팔을 잘라도 얼굴빛도 변치 않고 조용히 말했다. “나으리 형벌이 너무 참혹합니다 그려.” 이 때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삼문이 쥐어짜 꾸짖었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대왕께서 세손을 간곡히 당부하지 않았더냐! 그렇건만 네가 이렇게 못된 줄을 몰랐다.” 숙주에게 고함을 치니 세조는 신숙주더러 자리를 피하게 했다.
이어 제학 강희안이 끌려 나왔다. 강희맹과 형제간으로 당대 명신이며 본관은 진주,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을 편수한 사이다. 그는 시문에 있어 당나라 유자후와 같고, 글씨는 원나라 조맹부와 같으며 그림은 송나라 곽희를 겸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국문을 받을 때 “나는 도무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고 부인 했다. 세조가 삼문에게 “사실이냐? 공모한 일이 없느냐?”하고 묻자 삼문은 “그는 모르는 일입니다. 나으리는 이 나라 어진 신하를 모두 죽이실 작정이오.”하여 강희안은 무사할 수 있었다.
형장에 끌려가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울리는 북소리는 인명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해는 기우는 구나 저승길에는 주막도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 묵을 건가.) 5,6 세 딸이 수레를 따라오며 우니, 우리 집 사내는 모두 죽을 것이지만 너는 딸이니 살 것이다. 라며 달랬다.
세조는 누구보다도 성삼문의 마지막 말이 궁금했다. 그래서 “근보가 죽을 때 뭐라 말하더냐.”물으니 “너희는 현명한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뵈오리라,고 아뢰었다. 어지간한 세조도 이 말을 듣고서 숙연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세동생 네아들이 함께 모두 죽음을 당했다. 마지막 아들이 죽을 때 눈물을 흘리자 세조가 어린 아들 죽을 때는 왜 우느냐고 하니, 큰 것들은 자기가 왜 죽는가는 알고 죽는데 어린 젖먹이 아들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으니 눈물을 흘렸노라고, 대답했다.
2. 朴彭年 (1417 ~ 1456)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본관이 順天, 집현전 학사, 단종이 양위하고 수강궁으로 물러가자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지려고 하니 삼문 등이 만류했다. “너는 어째서 배반했는냐? 너는 내 신하로 내 녹을 받아먹지 않았느냐?” “나으리 나는 나으리의 신하가 된 적이 없습니다. 충청관찰사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에 ‘臣’자가 모두 ‘巨’자로 씌어 있었다.
그의 재주를 아껴 “만일 네가 나를 섬기면 살려주겠다.”라고 회유 하자 그는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당신의 신하가 아니오.”라며 거절 했으며, 옥중에 있을 때 세조가 김질을 보내어 술을 가지고 가서 태종의 하여가로 넌지시 떠보니 그 대답은 굽힘 없는 지조를 위 시조와 같이 나타내었다. 아버지와 아우 넷, 아들 칠형제가 모두 처형되었으나.
박팽년은 직계 후손을 남겼다. 마침 둘째 아들 순의 부인 이씨가 임신 중이었는데 이씨는 사건 당시 종이 되었다가 풀려난 뒤 대구에 있는 친정에서 살았다 . 조정은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종으로 삼으라는 영이 내렸다. 같은 해 그 집 여종도 임신 중이었는데 이 종이 무던한 사람이었다. 둘이다 아들을 낳으면 바꾸어서 주인의 아들은 살리고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겠다고 나섰다. 이씨는 아들을 낳고 종을 딸을 낳아 바꾸니 다 같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육신 가운데 오직 박팽년만이 후사를 두어 종의 품에서 朴婢라는 이름으로 자라났다.
단종능의 배식단 서열 三相의 한분이신 우의정 정분은 관아의 종이 되었다가 마침내 약사발을 받고 죽임을 당했는데 그의 종이 정분의 어린 아들을 거두어 종의 신분으로 키웠다. 뒤에 정분이 복권되자 종으로 위장했던 후손이 나타났다. 정분은 진주 정씨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역적을 다스린 하나의 기본사례로 꼽혔으며 무수한 연루자를 양산했던 것이다.
3. 兪應孚 (? ~ 1456)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落落長松 다 기울어 지단 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본관 기계, 동지 중추원사(정2품).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가장 중요한 소임을 맡았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당해도 끝까지 불복하다가 죽었다. 단종복위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이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三主役이라 하였다. 문무에 뛰어나 당시 소위 절의파 학자로 알려졌고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에 뛰어 났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다.
청렴결백하여 재상으로 있을 때에도 가정의 누추함을 면치 못했고 때로는 양식이 떨어졌다고 하며 죽는 날 그의 부인이 “살아서는 평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큰 禍를 얻었다.”면서 통곡하니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 하였다. 그의 가산을 몰수해 보니 방안에 짚자리만 있었다고 한다.
연회장에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가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의 연회에 있을 때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하기로 했다. 그러나 운검은 그만 두라고 세조가 지시했다. 성삼문은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 유응부는 무인답게 “우물거리면 대사를 그르친다. 운검의 건은 실패했지만 세조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이 치면된다.” 하고 그대로 거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삼문은 극력 이를 말리며 “다음 기회를 기다립시다.”하고 계획을 미루었다.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하니 성삼문과 박팽년은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公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는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하였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세조가 친국 할 때 “너는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고 물으니 “잔칫날에 한 칼에 足下(세조)를 죽이고 옛 임금을 즉위 시키려 하였다.”고 대답했다. 세조가 대로하여 무사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기고 불젓가락으로 살을 지지게 하였으나 그는 얼굴빛 하나 변치 않고 식은 불젓가락을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세조를 나으리라고도 하지 않았다.
성삼문을 보고 꾸짖기를, 옛부터 일러오기를 서생들과는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렇구나. 지난번 연회날 칼을 좀 시험하려고 했더니 너희들이 만전지계가 아니라는 바람에 오늘 이런 화를 당하게 됐다. 너희들은 사람이면서도 지혜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냐 말이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있으면 저 더벅머리 선비에게나 물으시오.
4. 李 塏 (1417 ~ 1456)
방 안희 헛는 쵸블 눌과 리별하엿관대
것흐로 눈물 디고 속 타는 줄 므르는다
우리도 千里에 님 리별하고 속 타는 듯 하여라.
제 야(除夜)
歲律令垂盡 端坐赴壑蛇 세율영수진 단좌부학사
呼兒數更漏 喚婦落燈花 호아수갱루 환부낙등화
永夜雲陰積 嚴風雪勢斜 영야운음적 엄풍설세사
淸談仍促酒 不必阿戎家 청담잉촉주 불필아융가
이 해도 이제는 마지막인가 세월에 쫓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네
아이를 불러 시간을 불러볼까 아내를 불러 등불을 마지막 껐네
기나긴 이밤은 왜 구름에 쌓였는가 바람결에 눈발이 날리고 있네
술잔으로 정담을 나눠 볼까 아우의 집에 갈 일이 또 없어졌네
본관 한산, 호가 백옥헌, 이색의 증손, 세종 29년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에 뽑힌 이름난 수재로 벼슬이 직제학, 본디 세조와는 친교가 있어 진상의 진술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며, 도대체 어떤 법도에 불로 지지는 형벌이 있느냐? 하였으나 혹심한 형벌을 받는 얼굴빛 하나 변함이 없었다. 세조는 이개에게 “自古及今 두고 보면 충신열사 자손있나, 王子比干 이름나도 이름은 전하였으되 자손이 끊어졌고 백이숙제 두고 봐도 수양산 깊은 곳에 채미하고 죽었으니 그 무엇이 쓸대 있나, 이윤같이 어진이도 何事非君 섬겼으며 너는 어이 고집만 하느냐,
단종이 내 足下인데 삼촌되고 못할 소냐, 사직을 두고 보면 불사이군 하랐으나 족하位를 삼촌이 하니 두임금이 어이되며, 한 자손 한 혈육에 분간이 별로 없다. 일월같은 너의 충성 나도 역시 아는 바라, 충신 이름 일반이니 부디 한번 항복하라.” 이개는 호령하여 하는 말이 자고로 두고 보면 삼촌으로 족하를 죽여 그 位를 빼는 임군 누구를 보았느냐, 이윤이 섬긴 임금 골육상쟁 임금이냐, 형의 뒤를 어이 끊고 네 욕심을 생각하면 금수와 같을 지라, 더러운 말 다시 말고 사속히 죽여 다오.
5. 河緯地 (1387 ~ 1456)
客散門扃(객산문경)하고 風微月落(풍미월락)할제
酒甕(주옹)을 다시 열고 詩句(시구)흣부리니
아마도 山人得意(산인득의)는 이뿐이가 하노라
謝人贈蓑衣(사인증사의)
男兒得失古猶今 頭上分明白日臨 남아득실고유금 상분명백일임
持贈蓑衣鷹有意 江湖烟雨好相尋 지증사의응유의 강호연우호상심
도통이를 보낸 준 것에 감사함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룰게 없고,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도통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몰겠는가,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는 그 참뜻을
본관 진주, 호 단계, 세종20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어 오례의주, 역대병요편찬에 참여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편집에 공로가 많은 신하에게 加資하게 되었다. 그 당시 집의로 중직에 승진했으나 이를 굳이 사퇴하면서 임금이 나이가 어려서 위태로운데 왕족이 작상하는 것은 조신을 농락하게 된다고 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가 세조가 예조 참판으로 부르니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별실이 쌓아만 두었다. 이 때 이미 70고령이었다. 반역이라는 죄명을 씌웠으면 목을 베면 그만이지 구구하게 물을 것이 무어요,하고 대답하여도 세조의 노여움이 좀 풀려 그만은 극형을 받지 않았다. 두 아들도 함께 죽었다.
6. 柳誠源 (? ~ 1456)
草堂에 일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어
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터니
門前에 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워라
본관 문화, 자는 태초, 시호는 절의, 세종 29년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에 들어가고 다시 집현전에 뽑혔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였을 때 이번 정난 공을 주공에 비유하여 송덕문을 지으라고 집현전 학사에게 명했다. 다른 학사들은 모두 피하고 달아났는데 불운하게도 홀로 있다 붙잡혀 협박을 받고서 이 글을 기초하였다. 집에 가서 통곡을 하고 상항 꺼림직 하게 생각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성균관 근무 중 소식을 듣고 부인과 영결의 술잔을 나누고, 사당에 가서 칼로 자진하였다. 시체는 갈기갈기 찢겼고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 死六臣 여자 유족은 노비로
1. 백옥헌(白鈺軒) 이개(李塏)
부인은 강맹경 집에, 며느리는 계양군 증(增)의 집에, 그의 매부인 집현전, 부제학, 발천(潑川), 허조(許조)의 어머니와 누이(소근소사(小斤召史)는 곽연성의 집에, 그의 종제(從弟)인 도진무 이유기의 부인과 세쌀(가구지(加仇之), 말비(末非), 막금(莫今))은 정창손 집에, 막내딸(소근소사(小斤召史)은 황효원 집에, 누이(효전(孝全))는 익현군 관(관)의 집에, 그의 이모부 공조참의 이휘(李徽)의 부인은 이계전의 집에 각각 종의 신세가 되어 갔다.
2.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유족
어머니는 이흥상 에게, 부인과 딸(효옥(孝玉))은 박종우에게, 그의 아우들 성삼고(成三顧)의 부인과 딸(2년생)은 정창손에게, 정랑 성삼성(成三省)의 부인은 홍달손에게, 부사 성삼빙(成三聘)의 부인은 권개에게, 적곡성승(赤谷成勝)의 소실은 신숙주(申叔舟)에게 종이 되어 갔다.
※ 변절자 신숙주가 왕비 송씨를 자기 종으로 내려달라고 간청했다는 말이 있다. 사실 여부를 덮어두고라도 아마 송씨를 종으로 들여 보호하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3.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유족
부인은 충주에 있는 우의정 정인지 집에, 그의 아우들 교리(敎理) 박인년(朴引年)의 부인은 태종(방원) 사위 권공(權恭) 집에, 수찬(修撰), 박기년(朴耆年) 부인은 익현군 관(官: 세종의 서자 좌익공신)의 집에 박사 박대년(朴大年)의 부인은 강성군 봉석주(계유정난 공신)집에, 그의 매부 봉여해(奉汝諧)의 어머니와 부인은 유숙(柳淑 - 고려말 충신) 집에 종으로 갔다. 박중림(朴仲林)의 조카이며 종림(終林)의 아들인 사제(斯梯)는 경북 경주 기장으로 귀양 갔 다.
4. 낭간(琅 ) 유성원(柳誠源) 유족
부인과 딸(백대(白代))은 한명회(韓明澮) 재산이 되고
5. 단계(段階) 하위지(河緯地) 유족
부인과 딸(목금(木今))은 권언(權언)의 재산이 되고
6. 벽량(碧梁) 유응부(兪應孚)
부인은 권반의 재산이 되고, 사위 별시위 이의영(李義永)의 부인은 양정 집에, 이의영 형인 이말생(李末生)의 부인과 딸은 유수 집에, 이시영의 동생 이지영(李智永) 어머니와 부인과 딸은(은비(銀非)) 홍순로(洪純老)의 재산이 되었다.
◈ 端宗 {1441(새종23)~1457(세조3)}
8세에 왕세손, 10세(1450)세자책봉, 12세에 왕위에 올라, 15세에 양위하고, 17세에 죽음을 당하였다. 세종, 문종은 신하들에게 보필을 명했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에게도 좌우협찬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지만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강탈당하자 단종의 복위운동을 김질(先안동김씨, 정창손 사위)의 밀고로 가담자는 참형되고 노산군으로 강봉 영월에 추방되었으며 그해 가을 금성대군이 경북 순흥에서 단종복위를 논의하다가 발각되어 노산군은 서인이 되고 그해 12월 24일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200백년이란 세월이 흘러 숙종 때 다시 왕으로 복위되고 능으로 만들어 졌으며, 사육신 등 명신들의 명예가 회복되기에는 세월이 더 흘러 영조 때 비로소 실현되었다.
1456년 6월 8일 조선 세조 2년, 死六臣이 처형을 당하다. 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은 상왕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사육신이란 말은 남효원의 <추강집>속의 육신전에 절의를 평가하여 기록한 까닭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이때 6인 이외에도 100여명 희생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만도 17명에 이르는데
세조2년 6월6일 갑진조(甲辰條)에 8도 관찰사(觀察使) ·절제사(節制使) ·처치사(處置使)에게 내린 선유문(宣諭文)에 「이개 ·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유성원 · 박중림(朴仲林) · 권자신(權自愼) · 김문기(金寧金氏) · 성승(成勝) · 유응부 · 박쟁(朴?) · 송석동(宋石同) · 최득지(崔得池) · 최치지(崔致池) · 윤영손(尹令孫)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등이 반역을 음모하였다.
영월 유폐 시절 단종은 왕비 송씨를 무척 그리워했다. 송씨는 용케 죽음을 면하고 남의 집 종으로 있다가 만년에 동대문 밖에 있는 정업원(현 靑龍寺)에서 비구니 차림을 하고 80까지 장수 하였으며, 종로구 숭인2동 242 일대에는 조선 초기에 형성된 채소시장은 여자만 드나들 수 있고 남자는 7세 이하 어린이들만 입장할 수 있는 금남(禁男)의 지역으로 흔히 ‘여인채소시장’이라고 불렸다. 이 지역의 초가 암자에서 세명의 시녀와 함께 살고 있던 단종비 송씨와 관련된 사연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단종이 유배를 간 뒤 궁핍하게 살던 송씨를 위해 주변 아낙네들이 장(場)을 세워 이곳을 방문하는 송씨의 시녀들에게 채소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것. 당시 조정에서는 단종 측근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금기시했던 터라 누가 공급하는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 남자들의 출입을 막아 놓고 일반 거래를 위장해 제공했다고 한다.
서울 낙산에는 동망봉(東望峰)이란 산봉우리가 있다. 동망봉은 조선조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쫓겨 강원 영월지역으로 귀양 가자 단종 왕비인 송씨가 날마다 이 봉우리에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송씨는 또 이 지역에 작은 초가를 짓고 단종과 이별한 18세부터 80세까지 거처했다고 한다. 송씨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는 이곳에 비를 세운 뒤 봉우리 바위에 동망봉 이름을 친필로 새겼다고 전해지며, 최근까지도 동민들이 추렴을 해서 소를 잡아 제사를 모신다고 들었다.
◈ 정조15년 2월21일 마련된 단종능의 배식단 서열
1. 육종영(六宗英) - 6인의 종친
안평대군(安平大君) = 용<瑢>
금성 대군(錦城大君) = 유(瑜)
한남군 <어>
영풍군 <천>
화의군 <영>
판중추원사 이 양(李 穰)
2. 사의척(四懿戚) - 4인의 외척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예조판서 권자신(權自愼, 단종 외삼촌)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돈령부 판관 권완(權完)
3. 삼상(三相)
황보 인(皇甫 仁)-영의정
김종서(金宗瑞)-좌의정
정분-우의정
4. 삼중신(三重臣)
민 신(이조판서)
조극관(이조판서)
김문기(공조판서, 金寧金氏)
5. 양운검(兩雲劒)
성 승(중추원동지사)
박쟁( 별운검(行別雲劒)
6.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박팽년(朴彭年) -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이 개(李 塏) -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하위지(河緯地) -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유성원(柳誠源) -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유응부(兪應孚) - 도총부 부총관 충목공(忠穆公)
◈ 영월 彰節詞 : 10位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6位와 생육신 가운데 김시습, 남효온 2위, 박심문(밀양, 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6忠臣이 참형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울분 끝에 음독자결), 엄흥도 충신 2위를 합쳐 10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단종이 승하한 이후, 영월의 士林은 노산군의 묘 앞에 육신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에 의해 사당을 지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숙종 11년(1698)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군의 묘는 장릉이란 능호를 받았다. 따라서 그 격식에 맞게 능을 새로 단장하면서 영월 유림의 오랜 숙원인 육신사를 장릉 아래쪽에 세운 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숙종 31년(1705), 장릉 안에 있던 육신사를 장릉 밖으로 옮기면서 창절사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창절이란 모든 불의에 항거하며 대의를 따른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절개를 표창한다는 뜻에서 숙종이 사액했다
단종이 서거하자 세조의 명에 의해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는 삼족을 멸한다고 엄명했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엄흥도는 죽음을 무릎 쓰고 아들 삼형제와 함께 밤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지금의 장릉에 암장했다.
이후 엄흥도 위패는 영조 24년(1758)에 창절사에 봉안되었고, 정조 15년(1791)에는 장릉 충신단에 배향치제(配享致祭)되었다. 그후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사(정2품)로 증직 받았고, 고종 14년 (1877)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 노량진 사육신묘
참형된 시체가 형장에 뒹구는 것을 승려 김시습이 성승, 성삼문, 박팽년, 이 개, 유응부 다섯 분의 시신을 한분씩 업어다 현재의 위치에 암장했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는 찾을 수 없어 네 분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으며, 하위지, 유성원 및 김문기는 가묘이다.
◈ 死六臣忠義歌
六臣哀傷歌라고도 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잡혀 죽은 사육신들이 그들의 충성을 읊은 시조이다. 靑丘永言과 歌曲源流에 河緯地의 시조를 제외한 成三問ㆍ朴彭年ㆍ李 塏ㆍ柳誠源ㆍ兪應孚 등 다섯 사람의 시조가 한 편씩 수록되어 있다.
◈ 남효온의 六臣傳
生六臣. 영의정 南 在의 5대손이며‚ 조부는 사헌부 감찰 남 준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김시습·안응세 등과 함께 수학하며 형제와 같은 친분을 유지했는데‚ 맑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스승인 김종직이 그를 아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秋江’이라 했다고 한다.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당시 忌諱(기휘)에 속하였던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단종을 위해 死節한 6인의 전기를 기록한 六臣傳을 저술하였다. 이 때 그의 문인들은 장차 큰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이를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앨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가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1478년(성종 9)에는 훈구파의 전횡을 비난하고‚ 문종의 妃 현덕왕후의 昭陵(소릉) 복위를 청한 내용의 상소문이 문제가 되어‚ 임사홍, 정창손 등으로부터 소학의 도리를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강응정, 이심원 등과 당파를 지어 정사를 논한다’는 공격을 받았다.
연산군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昭陵(소릉) 복위를 청한 상소로 인하여 부관참시 당하고‚ 외아들 남충세도 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고‚ 고양·의령·장흥 등에 사당이 건립되어 그의 절개를 기리게 되었으며‚ 1782년(정조 6)에는 吏曹判書에 추증
※ 참고문헌
- 고시조 감상과 해설 유한문화사 조두연
- 한양가 향민사 박창서
- 국어대사전 삼성문화사 이숭녕, 남광우 외
- 한국인의 성보 삼성문화사 한국성씨총람편찬위원회
- Never, Daum, Empas, Yahoo
- 단종애사 중앙서관 이광수
- 先考 가르침
-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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