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기 계월향(桂月香)에게 바치는 흠모송(欽慕頌)
1. 계월향에게 만해 한용운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梅花)가지에 새 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梅花)가지에 새 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는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자 그러면 속하는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2. 의열사(義烈社)의 향불 속에 피어나는 단심이여
의열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왜장을 죽이고 자결한 기생 계월향(?-1592)의 의열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매년 봄·가을에 평양 기생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왜장에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절이 더럽혀지자 자신을 더럽힌 왜장을 죽이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한편으로 나라를 구하는 싸움에 목숨을 바친 의기(義妓)로 남쪽에 논개가 있었다면 북쪽에는 계월향(桂月香)이
있었다.
나라가 외국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남자도 아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구국일념으로
일어난 여인들이 세계 역사상에는 더러 있다.
열일곱 살 꽃다운 소녀 잔다르크의 외침 “조국 프랑스를 구하라” 가 그랬었고, 중국 지배 150년
만에 일어난 베트남의 독립전쟁 당시 무지하고 훈련 받지 않은 농민을 이끌고 중국의 대군을
물리쳤던 그 중심에 트룽자매가 있었고, 또 을사조약 후 유화순은 의병장인 시아버지를 따라
남장을 하고 의병가를 지었으며 탄약을 제조하고 여자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무력투쟁에
앞장섰다. 병천의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과 함께 만세운동의 주역으로 3.1. 기미 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된 뒤 일제의 잔악한 고문으로 사지(四肢)가 찢겨 피살된 유관순(1902-1920) 또한 17살 앳된 소녀였으며,
2차 대전 당시 연습용 비행기를 타고 목숨을 걸고 야간을 이용하여 적진에 폭탄을 투하하여
독일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소련의 여성전투기 조종사들. 독일군은 이들을 밤의 마녀들
이라고 불렀다.
계월향은 평양 기생으로 본명은 월선(月仙)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 대왕은 압록강 변의 의주로
몽진을 가고 서울을 함락시킨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봉은 조선 침략 두 달 만인 6월 11일
평양성을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함락시켰다. 이때 평양 기생 계월향도 포로로 잡히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족이며 부장이었던 고니시(小西飛)의 진중에 있게 되었다. 고니시는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가까이 두려고 했으나 계월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고니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는 계월향은 죽을 것을 결심하였는데, 문득 혼자 죽어 무엇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애첩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하여 갖은 교태와 아양을 떨어 환심을 샀다.
선조 25년 1592년 6월 15일, 다급한 조선의 원병 요청에 따라 명군이 최초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조승훈(祖承訓)이 거느린 3,500명으로 7월 17일 밤, 큰 소리를 치던 조승훈의 명나라 군사는 적의 계략에 빠져
평양성에 입성하였다가 매복한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겨우 잔병을 수습하여 퇴각하였다.
8월 1일, 명의 군대를 격퇴하고도 추격하지 않는 왜군의 동태를 살핀 조선측은 2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싸움도 일진일퇴만 거듭하였을 뿐 평양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전선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때 평양의 순별 초관이었던 김응서는 날마다 평양 서문 쪽으로 와서 정찰을 했다.
김응서의 사랑을 받고 그를 사모하였던 계월향은 이를 알고 성 밖 김응서와 비밀리에 서로 내통
하였다.
한편 첫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 조정은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절강 등지의 화포부대를 동원하여 제대로 무장을 갖추고 임진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4만 8천명이 다시 들어왔다.
며칠 후 계월향은 고니시에게 같이 연을 날리고 싶다고 청을 하여 서문으로 그를 유인하고 때마침 김응서가 그곳을 지나가게 하여 계월향은 갑자기 김응서를 가리키며 오라버니하고 부르고는
고니시를 향하여 이번 난으로 헤어진 오빠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면서 부디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간곡히 말하며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고니시는 애첩 계월향의 울면서 하는 말을
곧이 듣고 오라비 김응서를 성 안에 같이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렇게 김응서가 성안에서 생활하게 된 뒤 어느 날 성 안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는데 계월향은
고니시에게 계속 술을 먹여서 만취하게 하였다.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가 따라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마냥 벙긋벙긋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이킨 고니시는 그날 저녁
대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마침내 깊이 잠이 들었다. 계월향은 안팎의 동태를 살피어 문 밖으로
신호를 보내 방안으로 김응서를 불러 들였다. 그는 바람처럼 몰래 들어와 단숨에 고니시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곧 바로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벗어나 도망하던 중 말을 탈 수 없는 계월향은 그러다가 두 사람 다 잡혀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랑하는 김응서를 혼자 도망가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하였다.
3. 부모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였던 임진란의 명장
김응서(1564-1624년)는 조선조 14대왕 선조 때의 뛰어난 애국명장이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며
그는 1564년 11월 7일 평안도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김응서의 부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으로 복무하였고 모친도 무관가정의 출신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군사부문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벌써 7~9살 때부터 모래와 흙으로 성을
쌓고 나무 가지를 꺾어서는 군대를 만들어 공방전을 벌리게 하는 등 군사놀이를 즐겨 하였으며
13살 때에는 전쟁에 관한 역사서적을 읽다가 책을 덮고 군대를 지휘하고 적을 치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20살 때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그는 두 차례나 양반들의 행동을 규찰하는 임무를 받은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 문벌이 미천 하다는 이유로 두 번 다 면직되었다.
사헌부 감찰의 직책에서 해임된 김응서는 평안도지방에서 여진족 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한
벽동아이진만호로 임명되었다. 임지에 이른 그는 큰 아이성의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는 이곳의 자연 지리적 조건에 맞게 성을 쌓았으며 중요한 지점에는
벽돌을 구워 성벽을 더욱 높이 쌓아 그 방어력을 높였다.
그의 축성기술에 대한 깊은 지식과 창의적인 방어력 증강조치는 당시 조정에서 높이 평가되었으며 1590년에는 고산진 병마첨절제사로 등용되었다. 그는 거기에 가서도 북방으로부터의 여진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군사조치들을 적절히 취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성 순별 초관이었던 김응서는 불철주야 평양성 탈환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얼마 후 부친이 사망하였다는 부고를
받았으나 군영을 떠나지 않았다. 1594년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사실 김응서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유교도덕이 지배적이던 사회풍습에 따르면 용납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응당 싸움터를 벗어나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하지만 김응서는 군영을 떠나지 않았다.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고 임금이 압록강 변 의주로
피난을 떠난 마당에 이때 어찌 군영을 떠날 수 있으랴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양반관료들에게 시비거리가 되었지만 조정에서도 그의 소행을 군주에 대한
충의의 표시로 받아들였고 선조는 그에게 3년간의 수제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별장으로
임명하여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그는 용강, 강서, 상화, 증산 등 4개 지역 백성들로 편성된 부대를 거느리고 평양성 서부 20여
개소에 군사를 배치하여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려고 나오는 왜병들을 무찔러 왜병들을 평양성
안에 가두어 기갈과 추위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평양성에 갇힌 왜병들은 순안에 지휘부를 둔 채찰사 이원익이 지휘하는 주력부대에 의하여
북쪽길이 차단된데다가 김응서부대에 의하여 서부지역이 봉쇄되고 대동강방면에서는 수군장수
김억추의 수군에 의하여, 남부지역에서는 중화방면의 임중량 의병부대에 의하여 포위되어 퇴로와 보급로까지 잃고 완전히 고립무원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592년 8월 1일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조선 명나라 연합군 장병들은 왜군에 대한 일제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동안 방어사로 승진한 김응서는 1만명의 군대를 지휘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양성 탈환작전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적들은 밤이 아니면 감히 성밖에
나서지도 못하였다. 김응서는 평양성 주변에 군사들을 매복시킨 후 의병부대들과의 긴밀한
협동작전 아래 성밖으로 나오는 왜병들을 모조리 사살하고 한편 성안에 대한 정찰을 더욱
강화하게 하였다. 당시 왜군들은 조선 명나라 연합군의 포위가 날로 강화되자 토굴을 만들고
여러 곳에 방어시설들을 구축하고 있었다. 때문에 앞으로 평양성 탈환을 위해서는 치열한
시가전을 예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정찰요원들을 성안에 파견하여 성 안 백성들의 도움으로 왜군들의 정황을 탐지하게 하는
한편 군사에 밝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때때로 함구문, 보통문 부근에 와서 적정을
정찰하였다. 한편 그는 왜장을 죽여 적진내부를 와해시키고자 그 일을 자기가 직접 수행하기도
하였다. 애국명기 계월향의 도움으로 평양성안에 있던 고니시유키나가의 부장을 처단한 이야기는 오늘도 사람들 속에 전해지고 있다.
왜병들은 부장 고니시가 살해되자 왜병들 사이에는 성안이라고 안전하지 못하다는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언제 누가 또 죽을는지 그들은 제 그림자를 보고도 놀랄 지경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식량과 소금의 부족, 혹심한 추위 속에 평양성의 왜군들은 1592년의 엄혹한 겨울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 4만 8천명이 도착하자 평양성 탈환을 위한 총공격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593년 1월 7일 김응서가 거느린 부대를 선봉군으로 하여 평양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응서는 부대를 거느리고 서쪽과 남쪽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에 의지하여 악착같이 저항하는 왜군들을 무찌를 수 없었던 그는 그들을 성밖으로 끌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적은 수효의 군대를 거느리고 고지에 올라 성벽의 적들을 맹렬히 공격
하다가 마침내 패퇴하는 듯이 군대를 뒤로 약간씩 후퇴시켰다. 적들은 조선군이 진짜 퇴각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고리문으로 나와 공격해왔다. 조선군은 계속 물러나면서 왜군들을 더 많이, 더 멀리 유인해 내었다.
왜군들이 성에서 멀리 나왔다는 것을 확인한 후 김응서는 말머리를 돌려 반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좌우 측에 매복시켰던 주력부대가 일제히 반격을 가하였다. 그제서야 속았다는
것을 안 왜군들이 성으로 도망쳐 돌아갔으나 성안의 적들이 성문을 미리 닫는 바람에 성벽 밑에서 몰살당하고 말았다. 첫날 전투에서 김응서부대가 거둔 전과는 조선과 명나라군사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이튿날 이른 새벽부터 평양성 탈환을 위한 전면공격이 개시되었다.
김응서와 이일이 거느린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 부대들은 함구문으로부터 진격하였다.
왜군들은 밤이 되자 저항하지 못하고 드디어 무수한 시체, 무기, 말들을 내버린 채 대동강의
얼음을 타고 황급히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하여 김응서는 첨지중추부사 겸 평안방어사로 등용되었다.
그 후 패주하는 적들을 계속 추격하여 경상도지역에까지 이르자 8월에는 그를 가선대부(종2품)의 품계로 올리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문벌이 미천하다고 하여 사헌부 감찰의 직위도 안 주던 김응서에게 종2품의 품계를 주고 또
경상우도의 병마절도사로 등용한 것은 그에 대한 장병들의 신망이 높았고 그가 용감하고 능숙한 지휘관이며 전술가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평안도의 한미한 무관출신으로서 30살에
이와 같은 높은 지위와 중책을 맡은 일은 조선조 500년을 통하여 찾아보기 힘들다.
1597년 12월말부터 1월초까지 진행된 조선 명나라 연합군의 울산 도산성 포위공격전에서도 만일 김응서가 주장한 작전대로 시행하였더라면 왜군을 완전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울산 도산성은 고니시 유끼나가와 함께 왜군의 또 다른 조선 침공 최고 사령관 가또 기요마사의
관할이었다. 총 연장길이 1km 남짓한 이 성은 남쪽은 태화강에 임하여 배를 직접 성 아래에
댈 수도 있었다. 1597년 12월 22일 조선과 명나라연합군은 울산 도산성을 포위하였다.
왜군은 이날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비가 내리면 그것으로 입을 적시고 종이를 먹고, 말을 잡아
먹고 추위로 얼어 죽으면서도 저항하였다. 이때 가또는 성안의 처지가 너무 군급해지자 자살할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마침 일본에서 지원군이 오는 바람에 성안의 왜병들은 겨우 구원될 수
있었다.
이때 김응서는 궁한 적들이 발악하는 조건에서 한 모퉁이를 열어주고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빠져
나가는 적들을 들이치면 모두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적진와해
공작을 강화하고 도산성안의 왜병들을 모조리 투항시키고 적들이 분열되었을 때 적 장수들을
섬멸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제의는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하[垓下:안휘성(安徽省) 내]에서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 항우의 군사는 겹겹이 포위되어 더 이상 물러날 틈도 없이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서 오랜 싸움으로 군량은 떨어지고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 사정을 꿰뚫어 본 장자방은 초나라 군사들이 오랜 전쟁터에서의 생활로
심신이 지치고 약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향 생각이 나게 하여 싸울 생각을 버리도록 하기 위한 계략을 세웠다. 밤이 깊자 계명산에 올라가 초나라 군사들이 있는 진영을
향해 애절하고 곡진한 가락으로 통소를 불었다. 그의 계략은 적중했다.
발악하는 적들에게 길을 틔워주어 살길을 열어주어야 저항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병서에도 있는 것으로서 당시 적들의 발악이 극도로 심하였던 상태에서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진와해공작을 강화하여 왜군 내부를 분열시키고 그 다음에 적 장수들을 치자는 제안도 타당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향 생각에 젖어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그 슬픈 가락을 듣자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 둘 한나라 군의 진영으로 넘어갔는데 심지어 항우의 숙부
마저 유방의 군대에 투항하고 만다. 이렇게 한나라 진영으로 넘어간 초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니 삽시간에 해하 일대가 초나라 노래로 가득 찼다.
오랜 전쟁에 지치고 그나마도 임난 초기 일사천리로 서울 평양까지 밀고 올라가던 때의 그런
신명 나는 승전이 아니라 계속되는 패전으로 울산 도산성에 갇혀 옴쭉달싹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목이 맨 왜군으로선 김응서의 심리전과 도망칠 곳 한 곳을 뚫어줌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을 피해야 한다는 김응서의 유인작전을 펼쳤더라면 십중팔구 그대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마치 미끼를 덥썩 무는 바닷속 물고기처럼.
칼이나 창 한 자루 휘두르지 않고 항우의 용맹하였던 군사를 주질러 앉게 했던 장자방의 지략이 울산 도산성 왜군들에게 어찌 먹히지 않는다고만 본 것이었을까... 설사 창이나 칼 몇 자루를 휘두르는 수고를 무릅쓰게 될지라도 적은 희생으로 도망가기에 바쁜 왜군을 거의 전멸 시킬 수 있었는데도 조선과 명나라의 장수들은 수적우세만 믿고 성을 완전히 포위해놓고 왜군을 독안에
든 쥐라고 항우처럼 힘과 기를 믿고 막무가내로 누르려고 하여 무모하게 공격만 하려고 하였으므로 의외로 적들의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고 나중에는 일본지원군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게 한 것이다.
7년간의 임진왜란 도중에 무훈을 떨친 장수들을 논할 때 사람들은 흔히 해전에서는 이순신,
육상전에서는 곽재우와 권률, 김응서를 꼽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왜적의 재침위험을 경계하면서 경상, 전라, 충청도의 병사를 역임
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북방에서 여진족의 침략위험이 증대되자 그는 1614년에
함남도병마절도사로, 그다음해에는 함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였다.
그후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요양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우리 나라에도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1618년 조정에서는 김응서를 숭정대부의 품계로 올리고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로 임명하여 그에 대처하게 하였다.
1619년 명나라를 도와 신흥 여진족(후금)을 진압하기 위한 심하전역에 김응서는 조선군 부원수로 참전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1624년 4월 18일 그곳에서 61살을 일기로 최후를 마쳤다.
김응서는 미천한 문벌에서 몸을 일으켜 임진왜란의 전투를 통하여 그의 장군으로서 진가를 발휘하고 나라 사랑의 충절을 지키느라 부모의 장례를 치루지도 못하였던 그의 애국심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1613년에 박응서라는 자가 반란죄로 처단되자 이름을 김경서로
고쳤다. 그자의 이름이 자기 이름자와 같다고 해서 고쳤다고 전해온다.
4. 금지된 한(恨), 장한가
음반 생산이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오르게 되는 192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음반에 수록된 내용을
기록한 가사지가 함께 인쇄되어 나와 지금까지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음반번호는
분명히 같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가사지가 전하고 있어 보는 이들이
어리둥절해지는 경우가 있다.
오케레코드 음반번호 1509의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지를 보면, 민요 사발가와 유행소곡
오케레코드 음반번호 1509의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지를 보면, 민요 사발가와 유행소곡
장한가(長恨歌) 가사가 실려 있는 것이 있고, 이와 달리 '장한가' 대신 민요 신개성난봉가 가사를 싣고 있는 것도 있다. 이렇게 음반번호가 같으면서 담고 있는 내용이 다르다면, 같은 음반이
내용 일부가 바뀌어 다시 발매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이 생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바로 월간잡지 삼천리 1936년 4월호에 실려 있는 금지된 레코드 일람표를 통해
그에 대한 답은 바로 월간잡지 삼천리 1936년 4월호에 실려 있는 금지된 레코드 일람표를 통해
알 수 있으니, 일람표에서는 1933년 8월 3일에 치안방해를 이유로 장한가가 금지되었다는
내용이 발견된다. 결국, 음반이 발매금지를 당하게 되자 나중에 문제가 된 부분을 빼고 재발매를 하는 바람에 전후 발매에서 각각 제작한 서로 다른 두 가지 가사지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장한가는 오케의 제1회 작품으로서 1933년 2월 신보로 발매되었는데, 나온지 반년 만에 금지를
당하는 수난을 겪은 셈이다.
유명한 중국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와 같은 제목이라, 가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순히 사랑의 한을 다루고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한’ 이란 말이 한편으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도 하다.
유명한 중국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와 같은 제목이라, 가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순히 사랑의 한을 다루고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한’ 이란 말이 한편으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도 하다.
논개가 그리워라 남강물만 푸르러
촉석루 옛 다락에 옷깃 잡던 바람이
지금에 어느 하늘 흐르고 있느냐
계월향 그리워라 모란봉만 높구나
능라도 버들로도 그대 매기 어려워
갸륵한 일편단심 볼 길이 없어라
황진이 그리워라 박연폭포 물소리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
어데가 그대 문장 짝 진다 말인가
촉석루 옛 다락에 옷깃 잡던 바람이
지금에 어느 하늘 흐르고 있느냐
계월향 그리워라 모란봉만 높구나
능라도 버들로도 그대 매기 어려워
갸륵한 일편단심 볼 길이 없어라
황진이 그리워라 박연폭포 물소리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
어데가 그대 문장 짝 진다 말인가
일단 눈에 띄는 것은 각 절마다 보이는 기생들의 이름인데,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보면 담겨
있는 의미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 장수를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순국한 논개, 1절에서는 그 논개가 그립다고 노래한다. 2절에서는 더욱 나아가, 역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의 목을 베게 하고 스스로 자결한 계월향, 그녀의 일편단심을 갸륵하다고 노래한다. 이름난 기생들이 하고 많은 가운데 하필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의기로 꼽히는
두 사람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작사자 신불출은 분명 의도적으로 이러한 가사를 쓴 것으로 보인다. 노들강변의 경우에서도
작사자 신불출은 분명 의도적으로 이러한 가사를 쓴 것으로 보인다. 노들강변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록 전문적인 작사가는 아니었지만, 신불출이 지은 노랫말에서는 은근한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3절에서는 황진이 얘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 두 번째 구절에 갑자기 한시 한 대목을 인용하며 1, 2절과는 다소 동떨어진 형식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작자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내용은 앞 두 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장한가는 오케 초창기부터 맹활약한 문호월이 작곡하고, 배우겸 가수였던 윤백단이 취입을 했다. 그런데, 당시 이미 발매 반 년만에 금지를 당했고, 현재 복각도 되어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곡조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누가 보아도 일제 침략에 비판적이라는 것을 한눈에
장한가는 오케 초창기부터 맹활약한 문호월이 작곡하고, 배우겸 가수였던 윤백단이 취입을 했다. 그런데, 당시 이미 발매 반 년만에 금지를 당했고, 현재 복각도 되어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곡조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누가 보아도 일제 침략에 비판적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식민지 조선의 유행가로서는 대단히 희귀한 예이므로, 적극적으로 재 발굴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출처 : 유행가 시대 (21) 다음블로그 연어알
5. 사랑의 불 만해 한용운
산천초목(山川草木)에 붙는 불은 수인씨(燧人氏)가 내셨습니다
청춘의 음악에 무도(舞蹈)하는 나의 가슴을 태우는 불은 가는 님이 내셨습니다
촉석루를 안고 돌며 푸른 물결의 그윽한 품에 논개(論介)의 청춘을 자매우는 남강(南江)의 흐르는
청춘의 음악에 무도(舞蹈)하는 나의 가슴을 태우는 불은 가는 님이 내셨습니다
촉석루를 안고 돌며 푸른 물결의 그윽한 품에 논개(論介)의 청춘을 자매우는 남강(南江)의 흐르는
물아
모란봉의 키스를 받고 계월향(桂月香)의 무정(無情)을 저주하면서 능라도(綾羅島)를 감돌아
모란봉의 키스를 받고 계월향(桂月香)의 무정(無情)을 저주하면서 능라도(綾羅島)를 감돌아
흐르는 실연자(失戀者)인 대동강아
그대들의 권위로도 애태우는 불은 끄지 못할 줄을 번연히 알지마는 입버릇으로 불러 보았다
만일 그대네가 쓰리고 아픈 슬픔으로 졸이다가 폭발되는 가슴 가운데의 불을 끌 수가 있다면
그대들의 권위로도 애태우는 불은 끄지 못할 줄을 번연히 알지마는 입버릇으로 불러 보았다
만일 그대네가 쓰리고 아픈 슬픔으로 졸이다가 폭발되는 가슴 가운데의 불을 끌 수가 있다면
그대들의 님 기루운 사랑을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에 이따금 이따금 목이 메어 소리를 이루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그대네의 가슴 속에서 애태우는 불꽅이 거꾸로 타들어가는 것을 나는 본다
오오 님의 정열의 눈물과 나의 감격의 눈물이 마주 닿아서 합류(合流)가 되는 때에 그 눈물의
남들이 볼 수 없는 그대네의 가슴 속에서 애태우는 불꽅이 거꾸로 타들어가는 것을 나는 본다
오오 님의 정열의 눈물과 나의 감격의 눈물이 마주 닿아서 합류(合流)가 되는 때에 그 눈물의
첫방울로 나의 가슴의 불을 끄고 그 다음 방울을 그대네의 가슴에 뿌려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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