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인. 세월 가고 사람 가고 사랑의 한은 꽃으로 피는가
1. 사면초가(四面楚歌)
장판교 넓은 들을 까마득히 메운 20만 조조군사를 무인지경으로 내다르며 주군의 아들을 품에 안고 활로를 뚫으며 달린 조자룡의 무용담을 접하면 남아대장부의 무용과 충절에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지만, 날카로운 보검 한 자루도 휘두르지도 않고, 천군만마를 휘몰아치지도 않고, 단지 두자 길이의 퉁소 한 자루로 일기당천·천하무적의 항우를 무릎 꿇게 만든 장자방의 지략을 읽을 때에는 또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秦) 나라를 쳐부수는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무수한 중원 통일전쟁을 뚫고 와서 마침내 두 사람이 중원 패권을 서로 다투는 결전의 막을 올리고 난 뒤 종내 초패왕 항우가 사면초가에 이르는 장면은 초와 한의 전투 기록중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으리라.
진(秦)나라를 무너뜨린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B.C. 203년 홍구[鴻溝:하남성(河南省)의 가로하(賈魯河)]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는데 합의하여 5년간에 걸친 패권(覇權) 다툼을 멈췄다. 힘과 기(氣)에만 의존하다가 범증(范增) 같은 유일한 모신(謀臣)까지 잃고 밀리기 시작한 항우의 휴전 제의를 유방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서주(徐州)]을 향해 철군(撤軍)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漢中:섬서성(陝西省)의 한강(漢江) 북안의 땅]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지략과 모사가 뛰어난 참모들인 장량(張良) 진평(陳平)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垓下:안휘성(安徽省) 내]에서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 항우의 군사는 겹겹이 포위되고 말았다. 더 이상 물러날 틈도 없이 한나라 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항우의 장졸들은 오랜 싸움으로 군량은 떨어지고 지칠대로 지쳐 밤 깊은 해하(垓下)의 초나라 진영(陣營) 군막은 죽음처럼 적막했다.
그리하여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서주(徐州)]을 향해 철군(撤軍)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漢中:섬서성(陝西省)의 한강(漢江) 북안의 땅]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지략과 모사가 뛰어난 참모들인 장량(張良) 진평(陳平)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垓下:안휘성(安徽省) 내]에서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 항우의 군사는 겹겹이 포위되고 말았다. 더 이상 물러날 틈도 없이 한나라 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항우의 장졸들은 오랜 싸움으로 군량은 떨어지고 지칠대로 지쳐 밤 깊은 해하(垓下)의 초나라 진영(陣營) 군막은 죽음처럼 적막했다.
그런 사정을 꿰뚫어 본 장자방은 초나라 군사들이 오랜 전쟁터에서의 생활로 심신이 지치고 약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향 생각이 나게 하여 싸울 생각을 버리도록 하기 위한 계략을 세웠다. 밤이 깊자 계명산에 올라가 초나라 군사들이 있는 진영을 향해 애절하고 곡진한 가락으로 통소를 불었다. 그의 계략은 적중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향 생각에 젖어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그 슬픈 가락을 듣자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 둘 한나라 군의 진영으로 넘어갔는데 심지어 항우의 숙부마저 유방의 군대에 투항하고 만다. 이렇게 하나라 진영으로 넘어간 초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니 삽시간에 해하 일대가 초나라 노래로 가득 찼다. 잠자다가 노래 소리를 듣게 된 항우는 한나라 군이 벌써 초나라를 다 점령한 것으로 알았다. 이것이 바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가 나오게 된 유래이다.
장량의 퉁소가 수 많은 항우의 군사로 하여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게 했듯이 이조 선조 광해군 시절의 풍류재사 임제가 어느 달 밝은 밤 평양 기생 일지매의 간장을 녹여 밤새도록 화창(話唱)하며 염정의 자리에 들게 한 것 또한 한 자루의 퉁소 소리였으니… 밤 깊어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밤하늘에 흐르는 퉁소의 가락은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마력(魔力)이 담긴 마(魔)의 음(音)이라도 되는지 모르겠다.
김태오 작사 나운영 작곡의 달밤이라는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2절에 실려 있다.
어디서 흐르는 단소소리 처량타 달 밝은 밤이요
솔바람이 선선한 이 밤에 달은 외로운 길 손 같이
또 어디로 가려는고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이 한밤을 동행하고 싶구나
퉁소 보다 좀 가늘고 길이가 짧다는 단소의 소리가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지만, 달 밝은 밤에 들려오는 처량한 단소 소리 들으며 외로운 길 손 같은 달을 맞아 밤새도록 동행하며 화창 하겠다는 시인의 노래에는 사실은 말 없는 달을 동무 삼아 외로움에 젖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하거나 향수에 젖어 밤을 헤매는 시인 자신의 고독한 모습이 노래 가락에 은은히 흐른다.
이미 천운이 다함을 알게 된 항우는 다음날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 의 애비(愛妃) 우미인(虞美人)이 문제였다. 강동을 떠나 6년 동안 위태로운 전쟁 속에서도 한번도 헤어진 적이 없는 우미인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택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항우는 그날 밤 주연을 베풀어 우미인과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면서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가 하고 이렇게 탄식하며 사랑하는 우미인을 염려하며 가슴을 치는 노래 한 수를 부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해하가(垓下歌)이다.
力拔山兮氣蓋世 (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지만
時不利兮騶不逝 (시불리혜추불서) 형세 불리하니 오추마조차 나아가질 않네
騶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내하) 오추마 같은 것이야 어찌해 본다지만
虞兮虞兮奈若何 (우혜우혜내약하) 우미인아, 우미인아, 그대를 어찌할 거나
時不利兮騶不逝 (시불리혜추불서) 형세 불리하니 오추마조차 나아가질 않네
騶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내하) 오추마 같은 것이야 어찌해 본다지만
虞兮虞兮奈若何 (우혜우혜내약하) 우미인아, 우미인아, 그대를 어찌할 거나
우희가(虞姬歌)
漢兵己略地(한병기략지) 한나라 병사들에게 이미 땅을 빼앗기고
四面楚歌聲(사면초가성) 사방에는 초나라의 노래소리만이 가득합니다.
大王義氣盡(대왕의기진) 대왕의 높은 기개가 이제 다하였으니
賤妾何聊生(천첩하료생) 천첩이 어찌 구차히 더 살아 가리오
우미인은 피를 토하듯이 탄식하는 항우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이렇게 노래했다.
초패왕 항우의 목숨에 자기의 목숨이 같이 달려 있어서 이제 대왕의 운세가 다하였는데 어찌 내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리오 하고 노래를 마친 뒤 자기도 남장을 하고 힘껏 항우의 뒤를 따라가겠으니 보검을 달라고 하여 항우가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 건네주고 떠나려 하자 우희는 그 순간 자신의 젖가슴에 칼을 꽂고 자진하고 말았다. 이별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한 여인의 무섭고 매몰찬 용단이었다. 어찌 여인을 약하다고만 하는가?
초패왕 항우의 목숨에 자기의 목숨이 같이 달려 있어서 이제 대왕의 운세가 다하였는데 어찌 내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리오 하고 노래를 마친 뒤 자기도 남장을 하고 힘껏 항우의 뒤를 따라가겠으니 보검을 달라고 하여 항우가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 건네주고 떠나려 하자 우희는 그 순간 자신의 젖가슴에 칼을 꽂고 자진하고 말았다. 이별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한 여인의 무섭고 매몰찬 용단이었다. 어찌 여인을 약하다고만 하는가?
초패왕(楚覇王) 장(壯)한 뜻도 죽기도곤 이별셜의
옥장비가(玉帳悲歌)에 눈물은 지어시나
지금희 오강풍랑(烏江風浪)에 우단 말은 업세라
그날 밤, 오열(嗚咽)하는 장수들과 함께 불과 800여 기(騎)를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한 항우는 이튿날, 혼자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수백 명을 벤 뒤 강만 건너면 당초 군사를 일으켰던 땅, 자기의 고향 강동(江東)으로 갈 수 있는 오강(烏江:안휘성 내)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절세(絶世)의 영웅(英雄)이었던 항우는 800여 강동 자제(子弟)들을 다 잃고 불과(不過) 20여명만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부끄럽고 죄스러워 스스로 목을 쳐 자결하여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긴 채 파란 많은 생애(生涯)를 마쳤다. 그때가 B.C. 202년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항우(項羽)ㅣ자컨 천하 장사랴마는 우미인(虞美人) 이별 읍수행하(泣數行下)하고
당 명황(明皇)이 자컨 제세영주(濟世英主)ㅣ 랴마는 양귀비 이별에 우럿나니
하물며 녀나믄 장부(丈夫)ㅣ 야 닐러 무슴 하리오.
항우와 같은 천하 장사라도 우미인을 이별하고 울면서 수십리를 헤매었고,
당 명황 같은 뛰어난 임금도 양귀비와 헤어져서는 울었으니,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당 명황 같은 뛰어난 임금도 양귀비와 헤어져서는 울었으니,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2. 우미인초. 세월 가고 사람 가고 사랑의 한은 꽃으로 피는가
1) 넋이라도 있고 없고
그 후 우미인의 무덤 위에 예쁘고 가련한 븐홍색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우미인의 넋이 꽃으로 화한 것이라 하여 그 때부터 우미인초(虞美人草)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우미인초 앞에서 항우의 해하가를 부르면 꽃은 바람이 없어도 흐느끼듯 하늘하늘 몸을 떤다고 한다.
지금도 우미인초 앞에서 항우의 해하가를 부르면 꽃은 바람이 없어도 흐느끼듯 하늘하늘 몸을 떤다고 한다.
후대 송(宋) 나라의 시인 증자고(曾子固)의 부인 위씨가 우미인초(虞美人草)란 시를 지어 우미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홍문옥두분여설 鴻門玉斗紛如雪 홍문에 옥술잔 깨어져서 눈처럼 흩날리고
천만항병야류혈 千萬降兵夜流血 진나라 십만 항복한 군사의 피로 물들었네
함양궁전삼월홍 咸陽宮殿三月紅 진나라 함양궁은 석달을 붉게 타올랐고
패업기수연진멸 覇業己隨煙塵滅 항왕의 패업 공은 연기 먼지 되어 사라졌네
강강필사인의왕 剛强必死仁義王 모진자는 반드시 죽고 인의한 자가 왕이 되나니
음릉실도비천망 陰陵失道非天亡 음릉에서 항와이 길 잃은 건 하늘의 뜻 아니라
영웅본학만인적 英雄本學萬人敵 영웅은 본래 만인과 싸우는 법을 배운다는데
하용서서비홍장 何用屑屑悲紅粧 미인 하나 잃는다고 어찌 그리 슬퍼했던고
삼군산진성기도 三軍散盡旌旗倒 삼군이 흩어지며 깃발은 부러져 쓰러지고
옥장가인좌중노 玉帳佳人座中老 휘장 속의 미인은 앉은 채 늙었구나
향혼야축검광비 香魂夜逐劍光飛 향기로운 혼은 밤중에 칼빛 따라 날아가고
청혈화위원상초 靑血化爲原上草 흘린 푸른 피는 들판의 풀로 변했다네
방심적막기한지 芳心寂寞寄寒枝 꽃 같은 마음 적막하여 찬 가지에 깃들었으니
구곡문래사렴미 舊曲聞來似斂眉 옛노래(해하가) 들려오면 눈썹을 찡그리는 듯 하네
애원배회수불어 哀怨徘徊愁不語 슬픈 원망 품고 배회하며 시름겨워 말하지 않으니
흡사초청초가시 恰似初聽楚歌時 옛날 초나라 노래(해하가)를 듣던 때의 모습이라네
도도서수유금고 滔滔逝水流今古 도도히 흐르는 물 옛부터 변함없이 흐르건만
한초흥망양구토 漢楚興亡兩丘土 흥망의 두 영웅은 모두 언덕의 흙이 되었네
당년유사구성공 當年遺事久成空 그 시절의 일은 허망하게 된 지 오래인데
강개준전위수무 慷慨樽前爲誰舞 술통 앞에서 강개하며 누굴 위해 춤추는가
이 시 첫 구절 끝에 눈(雪)을 발견할 수 있다. 홍문옥두분지설 (鴻門玉斗粉知雪). 홍문의 옥두는 눈같이 부서지다. 홍문(鴻門)은 초와 한 두 나라의 군사가 처절히 대결한 옛 싸움터다.
그리고 옥두(玉斗)는 말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마법(?)의 잔이다. 홍문(鴻門)에서 항우(項羽)의 부하 범증(范增)이 홍문연회에서 유방(劉邦)의 목을 치려다가 항우의 우유부단으로 실패했는데, 이튿날 유방이 항우에게 선물로 보낸 이 옥두를 화가 나서 칼을 내리쳐 깨어버렸는데 이 잔이 깨지는 순간의 모습을 시인은 분지설(粉知雪) 곧 눈같이 부서지다 로 풀어 썼다 . 시인의 영감(靈感)에 후딱 눈(雪)이 반사된 것이다.
그리고 옥두(玉斗)는 말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마법(?)의 잔이다. 홍문(鴻門)에서 항우(項羽)의 부하 범증(范增)이 홍문연회에서 유방(劉邦)의 목을 치려다가 항우의 우유부단으로 실패했는데, 이튿날 유방이 항우에게 선물로 보낸 이 옥두를 화가 나서 칼을 내리쳐 깨어버렸는데 이 잔이 깨지는 순간의 모습을 시인은 분지설(粉知雪) 곧 눈같이 부서지다 로 풀어 썼다 . 시인의 영감(靈感)에 후딱 눈(雪)이 반사된 것이다.
여기서 시작하여 항우가 항복한 진나라 병졸 십만 명을 하루 밤에 생매장시켜 죽인 일을 비롯하여 삼백 리에 걸친 진시황의 아방궁을 석 달에 걸쳐 불태운 일과 자기가 세웠던 초나라 의제를 죽이고 스스로 초패왕이 된 것과 마지막 싸움에 패하여 달아날 때 음릉 땅의 한 농부가 일부러 엉뚱한 길을 가르쳐 주어 수렁에 빠진 일들을 서사시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렴미(斂眉)란 누에 나방의 눈썹처럼 미인의 고운 눈썹을 뜻하는 아미(蛾眉)와 같은 뜻이 아닐까 한다. 아마 속 눈썹을 내리 뜨는 모양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옛 날에 우미인초 전설을 듣고 우미인곡을 지어 불렀더니 그 노래에 따라 가지와 꽃이 모두 움직여 다른 날 거문고를 들고 오음으로 만든 일곡을 연주하고 우미인초를 대하여 북을 치니 가지와 잎이 다시 모두 움직였다. 이리하여 이 노래를 우미인조라고 불렀는데 한이 맺혀 핀 꽃 이라서 그런가 비록 일개 식물 곧 화초 하나도 성품은 음을 안다 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승자도 패자도 한 움큼 흙이 되어 버리고 그들의 영웅담 또한 낡은 책장 속에만 남았 을 뿐이다. 그런데도 한 여인의 슬픈 죽음만이 그 한을 풀 길이 없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가냘픈 몸매로 그 날을 떨고 있다니, 사람은 가도 한은 오히려 그토록 남는 것이 아닌가?
괄지지(括地志)에 의하면 그녀의 묘지는 호주(濠州) 딩위안 현[定遠縣:지금의 안후이 성] 동쪽 30㎞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2) 딸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위한 꽃
1.학명 : Papaver rhoeas
2.영명 : Corn poppy
3.원산지 : 남부 유럽
4.과명 : 양귀비꽃과
2.영명 : Corn poppy
3.원산지 : 남부 유럽
4.과명 : 양귀비꽃과
5.꽃말 : 위안 , 약한 사랑
6. 특성 :
6. 특성 :
가느다란 털을 가진 잎과 꽃송이가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가을 뿌림 한해살이
화초이며 키는 60-90㎝, 내외이다. 꽃색은 흰색, 분홍, 빨강, 자주, 혼합 색 등이
있다.
옛날 희랍에 케레스라는 곡식을 관장하는 대지의 여신이 있었다. 어느날 케레스의 딸 프로세르비나가 산에서 꽃을 따며 놀고 있다가 명계(冥界)의 신 즉 암흑의 제왕인 하이데스의 눈에 띄어 그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케레스는 행방불명이 된 딸을 찾아 며칠을 헤맸으나 도저히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만사가 원망스럽고 절망에 빠진 케레스는 땅에 있는 모든 것 즉 곡식이며 과일이며 인간이며 짐승들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상의 모든 나무와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버렸고 식량을 얻지 못한 인간들은 신들에게 곡식이 열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올림퍼스산에 신들이 모여 회의를 열어 어찌하여 곡식이 다 말라 죽게 되었는지를 조사해 본 결과 케레스의 슬픔 때문임을 알게 되어 마침내 암흑의 왕 하이데스의 왕궁에서 케레스의 딸 프로세르비나를 찾아 내게 되었다. 신들은 케레스 여신을 위로하고자 하이데스의 왕비가 되어 있는 프로세르비나를 반년 동안은 땅 위에서 어머니 케레스와 살게 하고 나머지 반년은 지하의 나라에서 하이데스와 살 수 있게 조처를 취했다.
곡식의 여신 케레스는 이로부터 모든 나무와 꽃들에게 다시금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러나 딸이 여신과 같이 있을 때에는 기쁨이 넘쳤지만 딸이 암흑의 나라에 가 있는 반년 동안은 너무나 적적해서 눈물을 흘리고 의기 소침해 있어서 신들은 케레스 여신을 위로하고자 한 송이의 꽃을 그녀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개양귀비 꽃이라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꽃 가운데에서 섬세하고 화사하기로는 양귀비를 따를 것이 없다고 제일로 친다.
그러나 양귀비의 이런 면을 고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섬약하여 보는 사람에게 가련한 느낌을 주는 꽃으로는 우미인초(虞美人草)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무슨 근심에 잠긴 듯한 인상을 주는데 부드러운 미풍에도 몸을 하늘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살갗이 투명한 소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양귀비조차도 오히려 억센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양귀비의 이런 면을 고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섬약하여 보는 사람에게 가련한 느낌을 주는 꽃으로는 우미인초(虞美人草)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무슨 근심에 잠긴 듯한 인상을 주는데 부드러운 미풍에도 몸을 하늘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살갗이 투명한 소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양귀비조차도 오히려 억센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같은 양귀비과에 속하여 개양귀비라고도 하지만, 우미인초에게 ‘개’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접두사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양귀비로 잘못 알고 있는데 심지어는 양귀비인 줄 잘못 알고 단속하는 경찰도 적지 않다. 꽃 모양이며 색깔이 양귀비와 아주 닮았지만 우미인초에서는 아편이 나오지 않는다.
양귀비는 대체로 사람 키에 가깝지만 우미인초는 그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다. 그밖에도 양귀비와는 달리 꽃대며 꽃받침엔 잔털이 많고 잎의 색깔도 양귀비가 회록색(灰錄色)인 데 비하면 우미인초는 그냥 초록이다. 일반 가정에서 관상용으로 심는 것은 대개 이 우미인초가 보통이다.
우미인초는 원래는 우리나라에서는 5월경에 피는 꽃이다.
양귀비는 대체로 사람 키에 가깝지만 우미인초는 그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다. 그밖에도 양귀비와는 달리 꽃대며 꽃받침엔 잔털이 많고 잎의 색깔도 양귀비가 회록색(灰錄色)인 데 비하면 우미인초는 그냥 초록이다. 일반 가정에서 관상용으로 심는 것은 대개 이 우미인초가 보통이다.
우미인초는 원래는 우리나라에서는 5월경에 피는 꽃이다.
3. 역발산 기개세
1) 홍문회(鴻門會)의 한을 안고 죽은 범증(范增)
만약 항우가 홍문에서 범증(范增)의 말대로 유방을 제거했더라면 해하에서의 패배는 없었을 것이고, 우미인의 죽음 또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항우의 자만심과 우유부단이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70세 때 항우가 군사를 일으키자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항우를 잘 보필하여 제후에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아부(亞父)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홍문(鴻門)의 회(會)에서 항우에게 유방(劉邦)을 살해하고자 하는 음모를 권유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한(漢)에 내통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아 실권을 빼앗겼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개국할 때 그의 다섯째 아들 방원의 나이 스물 여섯살
혈기 방장한 청년으로 쉰여섯 노 재상 정몽주를 척살하였는데, 항우가 진시황의 폭정으로 혼란한 중원 패권을 목표로 거병했을 때가 약관을 이제 막 넘긴 스물 네 살의 젊은이였고 3년 만인 스물 일곱 살이 되자 이미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군웅 중 제일 앞서가고 있었다.
초나라가 일어설 무렵, 초기 지도자는 항우의 숙부인 항량(양)이었는데 범증은 원래 항량의 모사로 항량의 진영에 있었으나 항량이 죽고나서 자연히 남아있는 항우를 따르게 되어 크고 작은 전투에서 항우의 백전백승을 이끌어낸 유일한 모신(謀臣)이었고 그의 도움으로 항우는 천하 패권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우가 아부(亞父)로 존경을 하고 의지했던 칠십 노 모신(老謀臣) 범증은 홍문(鴻門)의 회(會)에서 항우에게 유방(劉邦)을 살해하고자 하는 음모를 권유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유방진영의 진평이라는 책사에게 이간질을 당하여 오히려 한(漢)에 내통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아 실권을 빼앗기고 하늘을 우르러 탄식하고 범증은 항우곁을 떠난다.
天下事大定矣(천하사대정의), 천하의 대세는 결정된 것과 같사오니
君王自爲之(군왕자위지). 전하 스스로 처리하소서
願賜骸骨歸卒伍(원사해골귀졸오). 신은 이제 해골을 빌어 초야에 묻힐까 하나이다.
항우의 모사였던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나려 하면서 제출한 소위 사직서의 문구이다. 군주에게 목숨을 바친 신하로서 그의 충성결의는 죽는 순간까지였기에 죽기 전에 군주의 곁을 떠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하사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범증은 고향으로 가는 도중 등창이 터져 분사하였다. 당시 범증의 나이 76세로 6개 성상을 비바람 찬 서리 몰아치고, 피비릿내 풍기는 싸움터를 칠십 노구를 이끌고 항우를 따라 신명을 바쳐 도왔건만 그는 고향에도 이르지 못하고 쓸쓸한 한등객창에서 사람과 때를 잘 못 만나 천하 평정이라는 평생의 포부를 눈 앞에 두고 이루지 못하게 되는 하늘의 심술에 솟구치는 울화를 한 소리 우욱하고 외치고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유방의 모신이자 장수인 장량, 진평, 한신 세 사람이 모여서도 겁먹었던 범증의 지략은 이제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던 것이다.
항우는 자신의 힘과 용맹만을 믿고 자기보다 15살이 많은 노회한 유방을 너무 우습게 보고 무시하였기에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유방을 제거하지 않았다가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된 것이다. 더욱 범증이라는 준재의 묘계와 충언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떠나가유방의 사람이 되었던 진평의 계략에 속아 범증을 떠나 보내고 말았고 이로 인하여 항우는 밤 깊은 계명산에서 부는 장량의 퉁소소리에 사면초가에 빠져 그의 30대의 창창한 젊은 꿈을 접고 죽음의 그늘로 걸어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2) 항우. 정녕 한번의 패배도 자신에게 용납할 수 없었던가?
사람들은 자주 ’만일 그가…’ 하고 안타까움을 담은 질문을 떠 올린다. 역사를 가정으로 되돌려 보고 싶어선지도 모른다. 항우가 오강에서 물로 뛰어드는 오추마를 제어하지 못하고 또 스스로 자신의 목을 칼로 쳐서 자살한 사실이 어찌하여 그토록 오늘의 우리들에게 안타깝게 다가오는가? 역사를 냉정하게 읽어야 하는 우리들은 대부분 그 역사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을 읽다가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어느새 저절로 그 주인공이 살았던 삶의 부분들에서 억울함과 허망한 삶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만나 이미 기록된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내곤 비분강개하여 한탄하곤 한다.
한 때의 패배와 그에 따른 좌절과 굴욕을 참을 수 없었던 항우의 승승장구는 그로 하여금 사소한 수치를 못 견디게 했고, 또한 먼저 가 버린 사랑하는 사람 우미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그리움 또한 이토록 용맹스런 전쟁영웅의 가슴을 여리게 만들었던가? 만약에 항우가 자기가 건네준 검으로 가슴을 찔러 죽은 사랑하는 여인 우희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잠시 패배의 아픔을 안고 자결하는 대신 강 건너 고향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를 노렸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 여기에서 항우와 유방 그들 두 사람의 성공과 좌절의 그늘에 가려진 여러 가지 사연들을 잠깐 더듬어 보는 것도 매우 흥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두 사람은 출신에 귀천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는 강력한 군사력도
경제적인 기반도 별반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그들 나름의 강력한 인간적 매력으로 유협의 무리들을 주위에 모아 보이지 않는 세력을 형성하였을 따름이다.
항우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의 장군을 대대로 역임한 명문 귀족의 후손으로서 숙부 항량으로부터 병법과 검술을 배웠으며 천병만마를 호령하는 뛰어난 장수로 인정 받았다. 특히 8척 장신에다 겹으로 된 눈동자의 항우는 힘은 능히 산을 뽑을 만 하고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 하다는 소리를 듣는 천하장사였다.
하여튼 8척 장신으로 그가 오늘 날 살고 있다면 미국 MBA 구단주들이 서로 스카웃 할려고 야단 법썩을 부릴만큼 큰키다. 2 미터 40-50 센티의 세계 제일의 장다리인 셈이다.
의협심으로 온 몸이 가득한 호협은 그의 손 아래에 많은 유협의 무리를 장악하여 그들이 기꺼이 죽음 터에 나아가도록 리드하여야 한다. 항우의 숙부 항량은 망명처인 오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죽음의 결사대를 90 여명이나 부양하고 있었다.
항우는 원래 뛰어난 재주를 지녔기 때문에 부하들이 하는 일을 전적으로 백 프로 신임하지 못하였고 또 그들의 공적에 대해서도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호협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자존심도 상당했던 장수들의 입장에서는 항우의 처사가 참을 수 없었고 불만이었던 것이다. 항우는 8년 동안 70여 회의 싸움에서 죽 패배를 모르는 승리자로서만 살아 오다가 마지막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그만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그가 병기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가 두려워 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여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사무엘 상 31장 4-6절)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삶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사무엘상 31장 8-10절)
사실 해하의 패배는 항우에게 재기 불능의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었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우선 그의 나이 서른한 살로 한창 힘이 용솟음치는 나이였기에 단 한번의 패전
을 너무나 참담하게 받아들이고 재 도전의 용기와 의욕을 완전히 꺾여버린 몰락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몹시 안타깝고 답답한 것이다.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역발산 기개세 항우에게는 사면초가의 충격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그를 짓눌렀기에 강을 건너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변의 권고가 들리지 않았기에 자살하고만 그의 몸은 다시 다섯 동강이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엘리트 코스로 출세의 가도를 거침 없이 달려 왔던 대우건설의 남상수 사장이 자신의 평생을 걸고 쌓아온 명예를 무참하게 짓 밟아버리는, 못 배워 무식한 자신의 콤플렉스를 독기로 뿜어내는 못된 권력자의 행태 앞에 작년 한강수야에 풍덩 한 몸 던지는 심정이 어쩌면 항우의 자존심에 대한 상처와 무엇이 별반 달랐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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