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이순신, 내부의 적과 싸우다,직속상관의 모함으로 투옥돼야 했던 운명, 조선 사회의 부정부패와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길 택해

천하한량 2007. 3. 27. 20:14

[이순신1-2] 이순신, 내부의 적과 싸우다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이순신1-2]
 

직속상관의 모함으로 투옥돼야 했던 운명, 조선 사회의 부정부패

와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길 택해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금속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됐다. 적국인 전라도라고 하지만 검붉게 치솟아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런 상황을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감옥에 넣어 물을 먹이고,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달군 쇠를 대어 지지는 것은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본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왔는데 인상(人商·인신매매상)도 있다. 그들은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댄다. 아방나찰이라는 지옥귀신이 죄인을 벌주는 것이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다.”


왜 전라도는 처참한 지옥이 되었나


△ 이순신 장군의 영정.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사는 대가로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그는 민족을 구함으로써 그 모든 고난을 뛰어넘었다.

1597년 6월 일본 구주 안양사의 주지 게이넨은 우스키성의 영주 오오타 히슈우의 군의관으로 조선에 와 8개월 동안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일일기>(日日記)라는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본 조선인의 참상은 일본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를 보거나 경험했을 이 승려조차 ‘난생처음 보게 된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수군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이 한치도 밟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안전했던 전라도 지역이 이처럼 1597년 이후 처참한 지옥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순신을 모함한 원균 등 악독한 지배층과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선조의 독단 때문이다. 선조의 명령으로 이순신을 투옥시키고 대신 원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세운 뒤 조선 수군이 1597년 7월16일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 패전 뒤 채 20일도 안 돼 전라도는 게이넨의 일기에 묘사된 것과 같이 살육과 방화, 고문, 인신매매, 구타 등등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뿐인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무더기로 잘라 일본으로 가져간 일본군의 악랄한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조선 수군의 패배 한달 뒤부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 다이묘(大名·영주)들에게 “전공의 증명은 수급의 수로 하지 않고 베어서 가져온 코의 수로 계산한다”는 군령을 내린 것이 1597년 8월이다. 당시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 돌파하지 못한 곡창지대이자 전략 요충인 전라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로 전라도 백성의 코를 베어낸 뒤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0만에 이른다고 일본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전공에 눈이 먼 일본군은 조선군은 물론 남녀노소, 승려, 노비, 초동에 이르기까지 비전투원의 코까지 무더기로 베어냈던 것이다.

나아가 게이넨의 일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조선인 포로를 대대적으로 노예로 끌고 간 시기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 들른 이탈리아 노예상인 프란시스코 가르데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매우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와서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강항도 경험담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전라도 무안군에는 도적선 600~700척이 수 리에 걸쳐서 넘치고 있었으며, 그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이 될 정도다. 배마다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는 산과 바다를 흔들 정도였다.”    

이렇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제련공, 농부, 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명, 많게는 10만명을 헤아린다. 임진왜란 7년 가운데 ‘살육전쟁’ ‘노예전쟁’의 양상은 바로 이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이 수군 지휘관에서 물러난 시기- 에 결정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꿔 말해 이순신이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조선 민중의 피해는 결정적으로 줄어들었을 수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일본이 포기했거나 적어도 굉장히 주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노량대첩을 그린 현대화. 그는 이 마지막 전투에서 ‘단 한명의 왜적도 놓아주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놀래키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 일대에서 일본 수군을 연파해 일본의 조선 점령과 중국 진출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순신은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본군의 침략을 거의 유일하게 대비한 조선군 지휘관이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결국 일본의 야심적인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파탄시킨 민족의 구원자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처지로 내쫓겨 있었다. 일본은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함경도까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군에게 전라도를 돌아 황해를 북진하는 수군의 보급선이 연결된다면 조선 점령을 매듭짓고 중국까지 치고 들어간다는 수륙병진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전략은 바로 이순신의 분전으로 뿌리부터 파탄되고 있었다. 일본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전쟁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군의 연전연패 소식에 놀라 아예 ‘조선 수군과는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데서도 그대로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일본군에게 승리하지 못할 때 오직 승전에 승전을 거듭해 종2품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정2품 정헌대부에까지 올랐던 그를 당시 조선 왕조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뒤 ‘무등병’으로 내몰아놓고 있었다. 백의종군 첫날 순신은 죄인이라는 이유로 종의 집에서 자야 했다. 이게 그의 첫 백의종군도 아니다. 42살 때인 1585년 북방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로 전직된 그는 반드시 필요한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직속상관이 묵살하는 바람에 결국 여진족 침략병들을 아주 적은 병력으로 맞아 싸워야 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도 용전분투해 나름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는데도 오히려 문책을 두려워한 직속상관의 모함으로 투옥됐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순신은 그런 조국을 가지고 있었다.

원균 등과 선조가 합작해서 그에게 씌운 죄목은 네 가지다.


(1)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

(2)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

(3)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4)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한없이 방자한 죄


공인으로서 엄격한 도덕성과 청렴결백한 생활을 고집했던 순신은 당시 부정부패로 물든 조선 사회와 타협하지 않아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네 가지 죄목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은 순신이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 그 결과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따라서 지면의 한계를 무릅쓰고 그 하나하나의 진실을 파헤쳐 들어가본다.


선조, 이순신 사형가지 염두에 둬

첫째 죄목은 순신이 부하 장령들의 공적 보고를 믿고 그대로 위로 상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가 공적에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정2품 정헌대부에까지 오른 그다. 순신은 나중에 조명연합수군의 승리를 위해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모든 공적을 돌릴 테니 대신 지휘권을 달라’고 제안한 사람이다. 그는 부하의 공훈을 세워주어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 일본군의 조총. 이 조총은 당시 조선군이 쓰던 중국식 화승총에 비해 월등히 화력이 뛰어났다.

두 번째 죄목은 일본의 반간계(反奸計)에 놀아난 조정이 잘못된 명령을 내린 것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첩자 요시라를 경상우병사에게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 앞바다를 건너올 테니 조선 수군이 체포하라”고 충동질한 것을 순신은 의심해 실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반간계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이 기획한 것으로 조선 조정은 그대로 걸려든 것이다.

세 번째 죄목은 원균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1592년 최초 해전인 옥포 해전에 대한 논공행상은 당시 옥포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 부대의 지휘관인 원균이 구원부대의 지휘관인 순신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원균은 일본군의 침입이 있자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왜군에게 빼앗기면 활용당한다는 이유로) 단지 1척(나중에 그의 부하들이 5척을 더 가지고 합류)의 배를 가지고 합류했다. 이에 비해 순신의 함대는 판옥선 24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가지고 참전하고 있다. 게다가 원균은 일본군이 수백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할 당시 전혀 공격조차 시도하지 않은 바 있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는 것이 먹혀들어가고 있다. 

네 번째 죄목은 세자 광해군이 군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제2정부 격인 ‘분조’(分朝)를 전주에 설치하고 순신을 전주로 오라고 명령한 것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여수에 있는 수군의 최고 지휘관을 백면서생이나 다름없는 세자가 수백 킬로나 먼 내륙에까지 와서 보고하라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


△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채 압송되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다.

선조는 처음 순신을 파직하고 투옥시키며 아예 사형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순신이 어떤 자인지 모르겠어! 명나라의 관원들이 그들의 조정을 속이지 못하는 짓거리가 없는데, 그 못된 버릇을 우리나라 사람이 닮아가고 있어.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영을 불태웠다고 허위 보고를 했으니, 영의정!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제부터 이순신이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일본군 제2군 대장)의 머리를 베어들고 온다 한들 그 죄를 어찌 갚을 수 있겠는가?”

결국 순신은 우의정 정탁 등의 간절한 구명운동으로 석방된다. 민족의 구원자가 어리석은 암군의 명령 하나로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이다. 파직돼 죄인이 돼 백의종군길에 나선 아들을 보러 멀리 여수에서 아산으로 오던 순신의 노모는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하고 숨지기도 했다. 죄인의 누명을 쓴 채 어머니마저 잃은 순신은 ‘간과 쓸개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삶 속에서 탄식한다.

“해가 캄캄하게 보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빨리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울돌목에서 불가능의 목을 치다

 
궤멸한 조선수군을 맨손으로 일으킨 이순신… 모
 

든 지식과 역량을 쏟은 명량해전 승리의 비결


△ 한산도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면서 원균에게 넘겨준 조선 수군의 전력은 대략 이렇다. ‘군함 300여척, 천자포 등 대포 300문,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근….’

그 수군이 1597년 7월15일 거제도 해역 칠천량에서 크게 패했다. 아니, 그냥 진 것이 아니라 ‘궤멸’됐다고 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고, 함대는 일본군의 수륙 합동작전 앞에 무참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총 300척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 함대 가운데 하룻밤 사이에 160여척이 일본군에게 격파돼 남해바다에 수장됐다. 일본군은 칠천량 승리 뒤 한산도 일대와 고성 일대 포구에 남겨진 조선 수군의 배도 찾아내 모조리 불태웠다. 순신이 온 정열을 쏟아부어 일본침략군의 유일한 대항세력으로 성장시킨 조선 수군…. 그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조선의 무적함대가 7년 동안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단 한번 처음 당한 이 참패로 사실상 궤멸한 것이다. 7월18일 패전의 소식을 들은 날 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무의 상태, 교서 한장만 들고…

“정유.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16일 수군이 밤 기습을 당해 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많은 사람이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다. 듣고 있으려니 통곡이 터져나오는 것을 이길 길이 없다.”

순신은 이때 복권된다. 수군 전멸에 경악한 선조가 경림부원군 김명원, 병조판서 이항복, 도원수 권율 등으로부터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시라’는 제안을 받고 동의한 것이다. 선조는 순신을 재임명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오! 국가가 의지해 보장받은 것은 오직 수군뿐이었건만 하늘이 아직도 화 내림을 후회하지 않는지 흉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3도의 대군을 한 싸움에 다 없애버렸도다. 이제부터 바다 가까운 성읍들을 누가 막아주랴? 한산도가 함락됐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랴? …오로지 경은 일찍이 발탁해 수사로 임영하던 날부터 이름이 드러났고, 다시 공업을 떨치어 임진년의 대첩 후에는 변방의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었건만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갈고 죄를 입은 채로 종군하게 한 것은 사람의 도모하는 바가 착하기만 하지 않은 데서 그리 된 일이라. 이같은 패전을 당한 이제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특별히 경을 복권하고 복상 중인데도 뽑아내 백의종군으로부터 충청·전라·경상 등 3도의 수군통제사를 겸직할 것을 제수하노라.”

순신이 이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의 정황은 어떠했을까?

조선 수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수군 궤멸에 따라 지상군도 곳곳에서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수령들은 ‘적이 다시 침략해온다’는 막연한 정보만 갖고 무리하게 청야령(淸野令·적군이 아군의 시설물, 식량, 군수물자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이것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소개시키는 명령)을 발동하곤 했다. 피난민은 저마다 산간으로 숨어들어가고 성읍과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와 달리 일본군은 칠천량의 대승으로 조선 수군이 완전히 전멸한 것으로 판단하고 지상전 중심의 호남 점령 전략을 추진했다. 일본군은 바다를 돌아 서해로 진출하는 대신 경상도 사천에 상륙해 서북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마저 점령했다.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안전했던 호남은 갑작스런 일본군의 진격과 학살, 약탈로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1597년 8월3일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 그에게는 군관 9명과 군사 6명뿐이었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는 교서 하나만 들고 거대한 파도처럼 밀어닥칠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거의 무와 다름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역경에서 순신이 선택한 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희망부터 복원한다


(2) 판단은 빨리, 행동은 총력전으로


(3) 내가 잘하는 싸움으로 판을 이끈다


(4) 죽으려 하면 산다


희망 복원, 빠른 판단, 총력 행동


△ 명량해전도1. 일본 군함이 밀집 형태로 해협을 통과하여 이순신 장군의 기함을 포위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조선 수군의 군함 12척이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다.

 첫째,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뒤 경상도 운곡에서 하동, 구례, 곡성, 보성으로 이동하면서 백성들과 지방 수령들에게 희망을 전파한다. 백성들의 호응과 지원이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던 백성들에게 자신이 복권됐으므로 믿고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한다. 백성들은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환호하며 다투어 술을 갖다 바칠 정도로 호응한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호남 진격으로 목숨을 걱정하던 수령들에게도 행정력을 복원해 전쟁에 다시 임할 것을 독려한다. 그 결과 군사들의 모병이 가능하게 된다. 피난민은   줄고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총력전 체제가 급속도로 자리잡게 된다.

둘째, 순신은 급박한 상황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정확하게 판단한 뒤 곧바로 실천해나갔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8월3일부터 명량대첩이 벌어지게 될 9월16일까지 가진 시간적 여유는 고작 한달 열흘. 그사이 그는 총력을 다해 아직까지 안전한 군량창고를 최대로 확보하고 남은 군함을 찾아내 함대를 재편성한다. 이와 함께 수군 장수들을 확보하고, 군사들도 계속 충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군기확립을 위해 휘하 장수 이몽구가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치는 등 근본을 철저하게 다졌다.

셋째,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싸움터, 바다를 끝까지 지켜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지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전략 개념이 불명확한 조정에서는 한때 남은 군함이 12척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약한 수군력으로 더 이상 해전을 수행할 수 없으면 육지로 올라와 육전을 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내린다. 그러나 그는 절대 해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12척의 군함으로 적을 막아내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였다. 순신은 나아가 이 바다의 전장을 치밀하게 연구해 명량해협에서 적을 저지·격파하는 전술을 세운다. 

넷째, 병력과 군함 수, 그리고 화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선 수군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승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직 죽을 각오로 싸울 때라야만 기적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결사의 각오를 현실화하면서 기적은 일어난다. 세계사에 기록된 해전,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로 활용된 대포격인 총통. 이 총통을 배에 장착해 대장군전, 단석, 화포, 조란탄 등을 발사했다.

 명량해전(울돌목 싸움)은 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이다.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된 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수군을 동원해 일본 수군 대함대에 맞서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군함 13척과 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으나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일본 군함의 수는 <이충무공전서> ‘행록’에는 333척, <징비록>에는 200여척, <명량대첩비>에는 500여척, <난중일기>에는 133척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군함 수의 차이는 울돌목 포구가 좁아서 싸움에 직접 참가한 일본 군함과 후방의 넓은 바다에서 전투 결과를 지켜보던 일본 군함이 분리돼 있었던 데서 생겨났다.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던 순간 

9월16일 이른 아침,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함선이 명량해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은 시작됐다. 일본 함선이 통과하려는 해협은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길이 2km 정도의 수로다. 평균폭이 500m지만, 배가 다닐 수 있는 가장 좁은 곳은 150m에 지나지 않는다.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최저수심은 1.9m이며, 조류의 속도가 11.5노트로 매우 빠르다. 예부터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일본 수군은 명량의 순류를 타고 거침없이 전진해왔다. 일본군 함대는 해협을 따라 좁고 길게, 거의 2km에 걸쳐 행렬을 이룬 채 다가왔다. 순신은 군함 13척을 일렬 횡대로 쭉 늘어세워서 적과 맞섰다. 그러나 순신의 독려에도 조선 수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명량의 급류를 역류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에 격군들이 노를 힘껏 저어도 조금씩 뒤로 밀린 것이다. 

순신의 기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순신의 기함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순신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 연결된 채 바닷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일본 배 밑바닥이 뾰족한 것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앞장선 선두함이 걸렸다. 그 뒤를 빠른 조류를 타고 달려오던 다른 배들이 들이받기 시작했다. 연달은 추돌 현상으로 일본 배들은 급속도로 진형이 무너져갔다. 혼란에 빠진 일본 군함을 향해 일제 공격이 벌어졌다. 조선 군함에서 탄두에 철갑을 두른 초대형 화살인 대장군전이 발사됐다. 머리통만 한 단석들도 발사됐다. 화포와 조란탄도 발사됐다. 순신의 기함이 분전하면서 조선 수군의 다른 함선들도 총공격에 나섰다.  


17전 17승, 가장 빛나는 승리


△ 거북선 내부의 모습. 거북선 안에서 총통을 발사하는 조선 수병의 밀랍인형 모형.

순신의 기함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죽은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주검에서 목을 베어 내걸었다. 일본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 수군의 순류쪽으로 바뀌자 전세는 완전히 조선 수군쪽으로 기울었다. 일본 수군은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31척이 격침된 반면 조선 수군은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호남 지역의 제해권을 되찾게 됐다.


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대략 17차례. 그는 이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17전 17승을 거둔 것이다. 이 전투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 바로 가장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 이겨 정유재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이 명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와 전 지식, 전 역량을 던져 조선의 운명을 바꿔냈다.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어느 의미에선 세계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국가와 가장 준비되지 않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150여년에 이르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세계 어떤 군대보다 전투력이 높은 상태였다. 특히 1543년 조총이라 불리는 장총을 서양으로부터 전래받은 이후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실전에 배치한 상태였다. 이미 통일 되기 25년 전인 1575년 오다 노부나가군은 3천명으로 이뤄진 조총부대를 운용해 다케다 신겐군의 기마군단을 격파했을 정도다. 일부 역사가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총을 보유한 국가로 꼽기도 한다.


△ 일본군이 울산성 전투에서 바주카포를 연상시키는 대형 화포를 사용하는 그림.

 이런 무력을 갖춘 군대 15만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의 병력은 600명이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등 모두 21만4752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집계된다. 특히 히데요시는 정유재란(당시 침략군 병력은 14만명 규모)을 일으키며 이렇게 명령했다.

“해마다 출병해서 그 나라 사람(조선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나라를 빈 터로 만들 것이다.”

일본은 이런 잔학극을 저지르는 한편 5만~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무더기로 끌고 갔다. 일제의 강제 연행 440여년 전인 임란 때부터 이미 그런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을 기본적으로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당시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선 거의 30여년 동안 찻잔도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사쓰마 등지에서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해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 가운데 일부는 노예로서 또다시 포르투갈 등 유럽으로 팔려갔다.

전쟁 뒤 조선은 일본군의 살육과 전염병, 질병 등으로 인구가 격감해 경지 면적이 170만결에서 54만결로 크게 축소됐다.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존립마저 불투명할 정도로 내몰리고 있다. 한양의 경우 임진왜란 170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11만명에 이르던 인구가 전쟁 뒤 3만8천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순신은 일본에게도 군신


△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노량해전 그림.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진 것을 숨긴채 전투를 벌이고 있다.

러-일 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전 뒤 자신을 넬슨 제독에 버금가는 군신(軍神)으로 치켜세우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넬슨은 군신이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 되지 못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

당시 도고 함대의 수뢰사령(水雷司令)인 가와타 쓰도무 소좌는 ‘함대가 출동할 때 이순신 장군의 영에게 빌었다’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땅히 세계 제일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제력, 그의 지모와 용기,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상찬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 

나아가 일본은 일제시대에도 통영 충렬사에서 진해 해군사령부의 주도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진혼제를 지냈다고 한다. 과거 일본의 적장이었던 이순신을 사실상 그들의 군신처럼 떠받든 것이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국사’(國師)라는 칭송을 받은 시바 료타로는 이런 이순신 열풍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창설한 뒤 아직 자신이 없었기에 동양권에서 배출한 유일한 해군 명장 이순신을 연구하고 대단히 존경하게 됐다.”


<근세일본사>에는 이순신과 노량해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전쟁 7년 동안에… 참으로 이순신 한 사람을 자랑 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


한편 구한말에 활동했던 미국의 선교사 겸 사학자로 <대한제국흥망사> 등 역저를 남긴 헐버트(H. B. Hulbert)는 한산대첩과 관련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한산도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며, 도요토미의 명나라 정벌의 웅도를 좌절시킨 일전이었다.”

 

*살라미스(Salamis) 해전: 기원전 480년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함대가 병력과 장비가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둔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