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顯宗 6卷 4年 4月 27日 (甲子) 004 / 원천석 서원의 사액을 청한 강원도 진사 한용명 등의 상소

천하한량 2007. 3. 23. 03:15

顯宗 6卷 4年 4月 27日 (甲子) 004 / 원천석 서원의 사액을 청한 강원도 진사 한용명 등의 상소


江原道進士韓用明等上疏以爲:

高麗進士元天錫, 學問精深, 道德純粹, 遭時不淑, 隱居於雉嶽山, 秉無悶之心, 堅不事之志。 及其運告訖, 眞主革命, 益勵栗里高節, 遠挹西山淸風, 終保幽貞, 永矢不諼, 則若天錫者, 眞所謂萬古綱常、百世師表者也。 實與鄭夢周吉再, 竝美而齊芳, 若之有三仁也。 惟我太宗大王以甘盤舊恩, 荐加寵眷, 降臨山局, 至於命其子, 爲基川守, 以爲榮養之地, 而終不以爵祿加之, 以成其志, 天錫高尙之風, 於此益著矣。 往在甲子, 本州多士, 立院於州北七峰之下, 以寓景慕之誠, 而尙稽揭額, 未賁恩光, 誠聖朝之欠典, 多士之缺望者也。 願賜以美額, 以榮享祀。

疏下, 禮曹防啓, 事遂寢。 天錫隱居不仕, 與李穡諸人素善。 我太宗嘗從學, 及卽位, 屢徵不起。 太宗親枉其廬, 天錫逃不肯見, 太宗呼舊時爨婢、 爲之賞賚, 且官其子。 天錫有手稿六卷, 書末及革世時事甚悉。 糊其卷, 而題其表曰: ‘非賢子孫莫開’, 今其書尙在, 而逸其兩卷云。

현종 6권 4년 4월 27일 (갑자) 004 / 원천석 서원의 사액을 청한 강원도 진사 한용명 등의 상소


강원도 진사 한용명(韓用明) 등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 진사(進士)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도덕이 순수했는데, 좋지 못한 때를 만난 탓으로 치악산(雉嶽山)에 은거해 있으면서도 전혀 답답해하는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다시는 섬기지 않을 뜻을 굳혔습니다. 그러다가 고려조의 운세가 마지막을 고하고 진정한 인주(人主)가 혁명을 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율리(栗里)의 고절(高節)을 힘쓰고 서산(西山)의 청풍(淸風)을 멀리 끌어당겨 유정(幽貞)함을 끝내 보전하면서 이를 잊지 않겠다고 길이 맹세하였으니, 천석과 같은 자야말로 이른바 만고의 강상(綱常)이 되고 백세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는 실로 정몽주(鄭夢周)나 길재(吉再)와 함께 아름다움을 짝하고 향기를 같이하는 존재로서 마치 은(殷)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仁者)가 있었던 것과 같은 격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감반(甘盤)의 구은(舊恩)이 있다고 하여 거듭 은총을 가하시고, 산 입구에까지 가시어 그의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의 수령으로 임명하심으로써 그를 봉양할 여지를 마련해주시기까지 하면서도 끝내 작록은 가하지 않아 그의 뜻을 이루어 주셨으니, 천석의 고상한 풍도가 이에서 더욱 드러났다 하겠습니다.

지난 갑자년에 본주(本州)의 선비들이 본주 북쪽 칠봉(七峯) 아래에 서원을 세워 그를 경모하는 정성을 부쳤는데, 아직까지 사액(賜額)을 늦추시어 은광(恩光)이 빛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성조(聖朝)의 흠전(欠典)이요 선비들이 실망하는 바라 하겠습니다. 원하건대 아름다운 편액을 내려주시어 향사(享祀)를 영광되게 해 주소서.”

하니, 소를 내렸는데, 예조가 방계(防啓)한 결과 결국 그 일이 시행되지 않았다.

원천석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이색(李穡) 등 여러 사람과 평소 친하였다. 우리 태종께서 일찍이 그를 따라 학업을 닦으셨는데, 즉위하고 나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아오지 않았다. 이에 태종께서 직접 그의 초막에까지 왕림하셨는데도 천석이 도피하고 만나려 하지 않자, 태종께서 옛적의 식모를 불러 상품을 하사하고 천석의 아들을 관직에 임명하였다. 천석은 수고(手稿) 6권을 남겼는데 고려 말과 세상이 바뀔 때의 일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풀로 붙이고 그 표지에 쓰기를 ‘어진 자손이 아니면 열어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책이 남아 있으나 두 권은 분실되었다 한다.

【원전】 36 집 36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