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中宗 101卷 39年 正月 15日 (甲寅) 003 / 시강원 문학 이여의 졸기

천하한량 2007. 3. 23. 02:56

中宗 101卷 39年 正月 15日 (甲寅) 003 / 시강원 문학 이여의 졸기


○侍講院文學李畬卒。

【史臣曰: “有秋, 韓山人, 李穡之後。 與兄, 勵志篤學, 事母色養, 家貧不能具甘旨, 孜孜讀書。 不幸母遘癩疾, 晝夜侍藥, 不解衣帶, 屛去妻孥, 親自扶護。 如是者數年, 竟至不救, 兄第哀毁盡禮。 先折, 撫其遺孤如己生。 平生爲學, 一以古人自期, 一動一靜, 皆不敢慢。 爲正言時, 議者欲以蘇世讓爲相, 往見持平李潤慶曰: ‘世讓爲相, 吾當擊之, 君意如何?’ 潤慶應之不快, 嘆曰: ‘當世之士, 如君者幾人, 可與論事者亦幾人, 而君亦如是耶?’ 潤慶慙謝。 嘗曰: ‘黃憲之狺然吠善, 甚於世讓, 異日之禍, 恐至不測。’ 云。 居常多病, 多賜告, 計其不仕之日, 多則例不受祿, 凡遺苞苴, 一切不受, 然人無知者。 其爲文學時, 已得疾, 以儲副國之根本, 不可不及時進學, 力疾進講, 一日不懈。 精於《易學》, 所得甚高, 故進講之際, 分析蘊奧, 引援譬喩, 期於進德, 至誠不怠。 金安國嘗曰: ‘經筵、書筵時, 與幷入侍, 吾雖無言而退, 安寢矣。’ 其見重如此。 及卒, 士林無不嘆惜。”】

중종 101권 39년 1월 15일 (갑인) 003 / 시강원 문학 이여의 졸기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이여(李畬)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여의 자(字)는 유추(有秋)이고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며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형 치(菑)와 함께 뜻을 가다듬어 배움을 도타이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기되 낯빛을 부드럽게 하여 봉양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맛있는 것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불행히도 어머니가 나질(癩疾)에 걸렸는데, 이여가 치와 함께 옷을 벗지 않고 밤낮으로 구완하며 처자를 물리치고 몸소 곁에서 간호하였다. 몇 해를 이렇게 하였으나 마침내 살리지 못하매, 형제가 애훼(哀毁)하며 예(禮)를 극진히 하였다. 이치가 먼저 젊어서 죽으니, 여가 그 남긴 고아를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평생 학문을 하며, 오직 옛사람과 같게 되려고 스스로 기약하여 동정(動靜) 하나하나를 다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의논하는 자가 소세양(蘇世讓)을 정승으로 삼고자 하매 이여가 지평(持平) 이윤경(李潤慶)을 가 보고 ‘소세양이 정승이 되면 내가 공박하겠는데, 임자의 뜻은 어떠한가?’고 말하였는데, 이윤경이 응답하는 것이 시원하지 않으므로, 이여가 탄식하며 ‘당세의 선비 중에 임자 같은 이가 몇 사람이나 되겠으며 함께 일을 논할 만한 이가 또한 몇 사람이나 되기에 임자도 그러한가?’고 말하니, 이윤경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였다. 일찍이 ‘황헌(黃憲)이 으르렁거리며 착한 사람을 물어뜯는 것이 소세양보다 심하니 뒷날의 화는 아마도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평소에 병이 많아서 말미를 많이 얻었는데, 사진(仕進)하지 않은 날을 계산하여 많으면 으레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고 선물을 보내와도 일체 받지 않았으나, 남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문학(文學)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병을 얻었으나,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제때에 학문을 진취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여 병을 무릅쓰고 진강(進講)하되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역학(易學)에 정통하여 터득한 것이 매우 높았으므로, 진강할 때에는 깊은 뜻을 분석하고 예(例)를 끌어대어 비교해서 반드시 덕(德)을 진취하게 하려고 정성을 지극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안국(金安國)이 일찍이 ‘경연(經筵)·서연(書筵) 때에 이여와 함께 입시(入侍)하면 내가 말할 것이 없이 물러나오더라도 편안히 잘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니, 그가 존중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으며, 죽게 되니 사림(士林)에서 한탄하고 아까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원전】 19 집 35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