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中宗 101卷 38年 10月 10日 (辛巳) 001 / 경술·사장 등을 권장하는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천하한량 2007. 3. 23. 02:55

中宗 101卷 38年 10月 10日 (辛巳) 001 / 경술·사장 등을 권장하는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辛巳/御朝講。 持平吳祥曰: “學校不能敎誨之弊, 其來已久。 四學儒生, 專不樂赴, 至於禮曹月講之時, 則爲學官者, 以寄食之儒, 苟充其數, 以免其罰。 此由士習奢侈, 以飮食居處之薄陋爲厭而然也。” 上曰: “學校重事, 講之已盡而無效, 必使儒生樂赴而後, 可也。 近者不時講經, 則已爲之矣。 必須擇差師長, 久任其職, 則可有成效。 而老病無幹能者, 則必歸于成均館, 爲師長者, 亦以此自處, 故其弊不能祛矣。” 正言李湛曰: “學校不修, 風俗不古, 人倫之變, 比比而出, 專由敎化不明而然也。 自上卽位之初, 上下同寅, 庶務修擧矣。 中間士林之禍屢作, 己卯年間, 年少之輩, 好古而見敗, 厥後士氣摧折, 以謂時事非也, 不事學問焉。 古者講明經義, 先治其身, 行於一家而及於朝廷; 今則不然, 先懷科擧之心, 而從事於章句之末, 無有深講義理之蘊者, 敎養之方, 失其宜而然也。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自上先好學問, 則好學之士, 自然輩出矣。” 上曰: “親臨講製, 雖不可屢爲之, 遣大臣諸宰, 或講或製, 則儒生庶有樂赴之意矣。” 領事洪彦弼曰: “上敎至當。 成廟曺偉爲承旨, 而能文焉, 成廟曰: ‘承旨雖獨往試製, 必不誤選。’ 遂遣成均館, 使製《息馬論道賦》, 取生員黃啓沃所製入之, 成廟覽之, 嘆服無已。 前朝牧隱圃隱, 文章之士輩出, 餘風未殄, 故世祖朝亦多文學之士。 而至於廢朝, 芟刈殆盡, 反正之後, 竄逐之人還入于朝, 故人才稍振焉。 近來人才專乏, 儒者恥學於師, 師亦無敎誨之心。 須擇其經學精通者, 俾授師長之責, 少有成效, 因此遷轉, 司藝而轉爲司成, 司成而陞爲大司成, 如此則必有興起之心矣。 近者金安國用力於理學, 而繼之者無, 只有成世昌申光漢鄭士龍等三人矣。 臣雖不學, 每見此等人, 則人才之不如古如此, 若値華使之來, 則未知國家以何人應之乎? 非但經術, 詞章亦是華國之才, 只有數人, 而他無繼之者。 前日開集春門, 聚儒講經, 庶有興起之心, 然亦不可屢爲之。 不時遣一人製述, 則亦或有勸奬矣。”

중종 101권 38년 10월 10일 (신사) 001 / 경술·사장 등을 권장하는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지평 오상(吳祥)이 아뢰기를,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폐단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사학(四學)의 유생이 모두 즐겨 나아가지 않아 예조에서 월강(月講)할 때에는 학관(學官)이 된 자가 기식(寄食)하는 유생으로 그 수를 채워서 벌을 면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사습(士習)이 사치하여 음식과 거처가 박하고 누추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학교는 중요한 일을 이미 다 강구하였어도 보람이 없으니, 유생을 즐겨 나아가게 해야 될 것이다. 요즈음에 불시에 강경(講經)하는 일은 이미 시행하였다. 반드시 사장(師長)을 가려 차출하여 그 벼슬을 오래 맡기면 보람을 이룩할 수 있겠으나, 늙어 병들고 재능이 없는 자라면 반드시 성균관(成均館)에 돌아가고, 사장이 된 자도 그렇게 자처(自處)하므로 그 폐단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담(李湛)이 아뢰기를,

“학교가 닦이지 않고 풍속이 예전과 같지 않아 인륜의 변고가 자주 있는 것은 오로지 교화가 밝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위아래가 같이 삼가서 모든 일이 닦아졌는데, 중간에 사림(士林)의 화(禍)가 여러번 일어나고 기묘년에는 나이 젊은 무리가 옛것을 좋아하다가 패망당하니, 그 뒤로는 사기(士氣)가 꺾여서 시사(時事)가 글렀다고 생각하여 학문을 일삼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경서(經書)의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되 자신을 먼저 닦아 집안에서 실행하고서 조정(朝廷)에 미쳤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먼저 과거에 급제할 마음을 품어 장구(章句)의 말단에만 종사하고, 의리의 속뜻을 깊이 강구하는 자가 없으니, 가르치고 양성하는 방도가 마땅함을 잃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이보다 심하게 하는 것이니, 위에서 먼저 학문을 좋아하시면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가 저절로 배출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자주 할 수 없더라도, 대신과 재상들을 보내어 강경하기도 하고 제술하기도 하면 유생이 즐겨 나올 뜻을 가질 것이다.”

하였는데, 영사 홍언필이 아뢰었다.

“위에서 분부하신 것이 지극히 마땅합니다. 성종 때에 조위(曺偉)가 승지가 되었는데 글을 잘하자, 성종께서 ‘승지 혼자 가서 제술을 시험하더라도 잘못 뽑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성균관에 보내어 ‘식마 론도(息馬論道)’라는 글제의 부(賦)를 짓게 하였는데, 생원(生員) 황계옥(黃啓沃)이 지은 것을 뽑아 들이니, 성종께서 보고 탄복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전조(前朝)에 목은(牧隱)과 포은(圃隱) 같은 문장의 선비가 배출되어 여풍(餘風)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세조 때에도 문학의 선비가 많았습니다. 폐조(廢朝)에 이르러 거의 다 제거되었다가, 반정(反正)한 뒤에는 귀양갔던 사람들이 조정에 도로 들어왔으므로 인재가 조금 떨쳤습니다. 근래에는 인재가 아주 모자라서 선비가 스승에게 배우기를 부끄러워하고 스승도 가르칠 마음이 없으니, 반드시 경학(經學)이 정통한 자를 가려서 사장(師長)의 직책을 주고 조금이라도 공효가 있으면 이에 따라 천전(遷轉)하여 사예(司藝)가 되어서 사성(司成)으로 옮기고 사성에서 대사성(大司成)이 되게 한다면 반드시 흥기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김안국(金安國)이 이학(理學)에 힘쓰나 계승할 자는 없고, 성세창(成世昌)·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 등 세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신이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번번이 이 사람들을 만나면 ‘인재가 예전만 못한 것이 이와 같으니, 중국 사신이 오면 국가가 어느 사람을 시켜 응대할 것인가.’ 합니다. 경술(經術)뿐이 아니라, 사장(詞章) 또한 나라를 빛낼 재주는 몇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그 밖에는 계승할 자가 없습니다. 전일에 집춘문(集春門)을 열고 선비를 모아 강경하였으므로 아마도 흥기하는 마음을 갖겠으나, 자주 할 수 없습니다. 불시에 한 사람을 보내어 제술하면 혹 권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전】 19 집 16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