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成宗 12卷 2年 閏9月 19日 (戊午)001 / 한산군 이영은의 졸기

천하한량 2007. 3. 23. 02:47

成宗 12卷 2年 閏9月 19日 (戊午)001 / 한산군 이영은의 졸기


○戊午/韓山君李永垠卒, 弔祭、禮葬如例。 永垠子健, 韓山人, 牧隱李穡之玄孫。 景泰丙子登第, 授承仕郞權知承文院副正字。 丁丑擢重試第一名, 世祖覽其對, 欲授四品官, 銓曹駁之, 特超通德郞司諫院獻納, 俄陞世子弼善, 轉直藝文館。 成化乙酉, 陞司憲執義, 上疏論時弊, 世祖深善之曰: “汝言, 深中時病, 且合章疏之體, 眞乃祖牧隱文章也。” 自是待遇甚隆。 未幾擢拜同副承旨, 中拔英試, 轉左副承旨陞嘉善, 歷兵刑曹參判。 辛卯賜純誠佐理功臣號, 封韓山君。 至是卒, 年三十八。 贈諡丁悼: 述事不第, 丁; 中年早夭, 悼。 子孝文永垠聰悟, 善爲文辭, 常大言曰: “但要直己人, 言不足恤。” 世祖嘗曰: “左右侍從無一人薦永垠者, 此必特立人也。” 其見遇如此。 然性本貪墨, 爲刑曹參判, 索賂無厭, 嘗授鞋匠皮, 令造鞋, 約以給價若干, 已而減價, 督造甚嚴, 少稽遲, 輒囚之。 其治獄, 多類此。 與禮曹判書金謙光爭妾, 訴于司憲府, 憲府請罪永垠, 移義禁府鞫之。 永垠發憤而卒, 時論鄙之。

성종 12권 2년 윤9월 19일 (무오) 001 / 한산군 이영은의 졸기


한산군(韓山君) 이영은(李永垠)이 졸(卒)하니,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영은의 자(字)는 자건(子健)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인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현손(玄孫)이다. 경태(景泰) 병자년에 과거에 올라 승사랑(承仕郞)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고, 정축년에 중시(重試) 1등에 뽑혔는데, 세조가 그 대답한 글을 보고 4품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전조(銓曹)에서 논박하여 통덕랑(通德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특별히 뛰어 올렸다. 얼마 안 있다가 세자 필선(世子弼善)에 오르고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옮겼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올라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하였는데, 세조가 매우 좋게 여겨 말하기를, ‘너의 말이 시대의 병통을 깊이 맞추었고 또 소장(疏章)의 격식에도 적합하니, 참으로 너의 조부(祖父) 목은(牧隱)의 문장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대우가 매우 융숭하여 얼마 아니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탁배(擢拜)되고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가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병조(兵曹)·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거쳤다. 신묘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이다. 정도(丁悼)라고 증시(贈諡)하니, 사실을 진술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한 것을 정(丁)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 죽은 것을 도(悼)라 한다. 아들은 이효문(李孝文)이다.

이영은은 총명하고 글을 잘하며, 항상 큰소리치기를, ‘다만 몸을 곧게 함을 요할 것이고 남의 말은 돌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좌우 시종(侍從)이 한 사람도 이영은을 천거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특립(特立)한 사람이다.’ 하였으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탐묵(貪墨)하여 형조 참판이 되어서는 뇌물받기를 만족함이 없게 하였다. 일찍이 혜장(鞋匠)에게 가죽을 주고 신[鞋]을 만들게 하여 값 얼마를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값을 깎고 만들기를 매우 엄하게 독촉하여 조금 더디면 문득 가두었다. 그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것이 이와 같음이 많았다. 예조 판서 김겸광(金謙光)과 더불어 첩(妾)을 가지고 다투다가 사헌부(司憲府)에 고소하니, 사헌부에서 이영은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의금부(義禁府)에 옮겨서 국문(鞫問)하자, 이영은이 분(憤)이 발하여 졸(卒)하니 당시의 평론이 더럽게 여겼다.

【원전】 8 집 602 면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