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世宗 90卷 22年 8月 30日 (己亥) 004 / 전 좌찬성 이맹균의 졸기

천하한량 2007. 3. 23. 02:33

世宗 90卷 22年 8月 30日 (己亥) 004 / 전 좌찬성 이맹균의 졸기


○前左贊成李孟畇卒。 孟畇士原, 之孫也。 年十三中進士試, 十五擢第, 例補成均直學。 累官至司宰少監, 遷內書舍人, 出知丹陽郡事, 考滿拜藝文館直提學。 未幾, 除司憲執義, 以言事貶原州。 及賜環, 知永川郡事。 歲辛卯, 召拜知承文院事, 尋陞判承文院事, 癸巳冬, 遷成均大司成, 上書乞免, 遂除左司諫。 乙未冬, 陞禮曹參議, 累遷至敬承府尹。 戊戌, 出爲忠淸道觀察使, 還拜漢城府尹。 壬寅, 遷禮曹參判, 明年, 拜工曹判書, 尋遷禮曹判書, 累歷吏兵曹判書。 未幾, 拜議政府參贊、兼司憲府大司憲。 戊申, 復拜吏曹判書, 庚戌, 又拜議政府參贊, 乙卯, 復拜吏曹判書。 丙辰秋, 遷知中樞院事、兼判吏曹事, 冬, 陞議政府右贊成, 仍兼判吏曹事, 己未, 陞左贊成。 至是, 自貶所赴京, 行至開城府卒, 年七十。 時人憐孟畇受制於婦人, 老不安死也。 訃聞, 輟朝二日, 致弔致賻。 諡文惠, 學勤好問文, 柔質慈民惠。 以禮葬之, 王世子亦致弔致賻。 孟畇性稟溫良, 早承家業, 爲詩文典雅。 無子。

세종 90권 22년 8월 30일 (기해) 004 / 전 좌찬성 이맹균의 졸기


전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이 졸(卒)하였다. 맹균의 자(字)는 사원(士原)이며 이색(李穡)의 손자이다. 1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세에 과거에 뽑혀, 예(例)대로 성균 직학(成均直學)에 보임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사재 소감(司宰少監)으로 되었고, 다시 내서 사인(內書舍人)으로 전임되었다가, 외임(外任)으로 나가서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되었으며, 고만(考滿)이 되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제수되었고, 얼마 못되어 사헌부 집의(執義)로 되었으나 언사(言事)로써 원주(原州)로 귀양갔다. 사면이 되어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로 되었고, 신묘년에 소환(召還)되어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로 배임(拜任)되었다가 곧 판승문원사로 승진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보되었으나 상서(上書)하여 해면되기를 청하였는데, 드디어 좌사간(左司諫)으로 제수되었고, 을미년 겨울에 예조 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번 옮겨져서 경승부 윤(敬承府尹)으로 되었다. 무술년에 다시 외임으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돌아와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배수(拜授)되고, 임인년에는 예조 참판으로 전보되었으며, 다음해에 공조 판서로 배임되었다가 곧 예조 판서로 옮겼다. 여러 번 이조와 병조 판서를 지냈고, 얼마 못되어 의정부 참찬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배임되었고, 무신년에 다시 이조 판서로 제수되었으며, 경술년에 또 의정부 참찬으로 배수되었으나, 을묘년에 다시 이조 판서로 배명(拜命)되었다. 병진년 가을에 지중추원사 겸 판이조사(知中樞院事兼判吏曹事)로 전보되었고, 겨울에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는데 판이조사는 그대로 겸했고, 기미년에 좌찬성으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와서 귀양갔던 곳에서 서울로 오다가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졸(卒)하였으니, 나이 70이다. 당시 사람들이, 맹균이 부인에게 압제(壓制)를 받아 늙어서 죽음도 편하게 못했음을 불쌍하게 여겼다. 부음이 들리매,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조문하고 부의(賻儀)를 내렸다.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라 하였으니, 학문에 부지런하여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부드러운 자질로써 백성을 자애함이 혜(惠)이다. 예(禮)로써 장사하였는데 왕세자(王世子)도 또한 조문(弔問)하고 부의를 내렸다. 맹균은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일찍부터 가업(家業)을 이어서 시문(詩文)이 전아(典雅)하였다. 자식은 없었다.

【원전】 4 집 315 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