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재김인전 ▒

1919년 3월 1일 전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경재 김인전(金仁全)

천하한량 2007. 3. 21. 04:12
김규배의 맏아들, 김인전 선생은 화양 와초에 있던 중등교육 기관인 한영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재직시 평양신학을 나와 1914년에는 전주 서문밖 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후 1919년 3월 1일 전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경에 쫓겨 상해로 망명해서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 2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재무예산 위원으로 피선되자 임시의정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고, 동년 4월에는 의정원 정무조사 특별위원이 되어 군사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의 대외 군사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므로 그는 장기적 독립 전쟁을 위해 군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회의의 개최와 군인학과의 개설, 사업부의 설치 국민 의용병 등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게 하였다.

또한 군사교육의 실시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한 지역선정, 외국의 사관학교에 무관 학생을 파견하고 군사 선전대를 마련하는 등 직접적 전쟁에 대비키 위한 전열을 가다듬는 등 안건을 내세워 실천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활발한 활동으로 1920년 4월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5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의정원을 이끌었다.

 

1920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본구 의원에 당선되어 한진교, 서병호, 이유필 등과 함께 교민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동년 11월에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겸 임시 공채 관리국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 예수교 진정회 서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 등과 중한호조사 설립하여 한 중간의 유대 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동년 11월에는 의정원 의원 25명이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제 4대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동년 7월에는 독립운동 자들의 단합을 위하여 안창호, 김덕진, 최일 등과 함께 시사 책진회를 조직하여 그 회원이 되었으며, 9월에는 중한 호조사의 교육과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0월에는 김구 조상섭, 이유필, 여운형 등과 ‘한국노병회’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하였는데 노병회는 1932년 해산할 때까지 무장항일투쟁을 위한 간부 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3년 5월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다 과로에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 하였으며 상해 외국인 묘지(B39)에 안장하였다. 1993년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