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재김인전 ▒

경재 김인전 선생이 화양면 와초리에 세운 한영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천하한량 2007. 3. 21. 04:08
 

아버지의 스승, 김인전


화양면 와초리에 사는 임종석씨는 요즈음 마음이 다급하기만 하다. 75세의 고령이지만 세상을 뜨기 전에 꼭 할 일이 있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러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지난 8월 14일에는 열린 군수실에 찾아가 호소도 하였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죽기 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밤잠을 설친다. 잠을 못 자면 그 다음 날은 더욱 더 그 일이 생각난다. 꼭 이루고 죽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기에 더욱 몸과 마음이 지친다.


임종석씨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아버지의 스승, 김인전 선생의 추모비를 와초리에 세우고 세상을 뜨고 싶다는 것이다. 와초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이제 아버지 임학규와 그의 스승 김인전을 위한 역사적 추모비를 남겨 놓겠다는 것이다. 농부의 한 사람으로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을 해낼 수 없기에 각계에 호소하였지만 선뜻 누가 나서서 일을 추진해 주지 않아 더욱더 마음이 다급해 진 것이다. 주변 사람들조차도 임종석 씨가 추진하고 있는 일에 냉소적이다. 늙은이가 무슨 일을 하겠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럼 임학규와 김인전은 그에게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다른 사람들이 몰라라 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다녀야 할까?


임학규는 그의 선친이다. 그는 1919년 마산 신장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출소한 독립운동가이다. 임종석씨는 이런 아버지의 슬하에서 역사의 편린을 모아 온 것이다. 아버지가 왜 독립운동을 하였을까? 촌에서 조용히 살았더라면 일경의 감시도 없을 것이고 후유증도 없었을 텐데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항상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끔 나라가 독립이 되어야 한다든지 사람은 올곧게 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논에서 밭에서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저런 생각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임종석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여쭈어 보았지만 묵묵히 일만하셨다. 가끔 아주 드물게 학교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가끔 말씀하신 말을 더듬어 종합하면 와초리에는 한영학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군산에서 선교사가 건너와서 예배도 보고 말을 타고 다니시던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야구도하고 애국가도 부르고 한글도 배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그 말씀들이 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임종석씨는 그 역사의 편린들을 모아 와초리에 독립운동가 아버지 임학규를 정신적으로 만들어 주신 경재 김인전 선생의 추모비를 세우고 죽고 싶다는 것이다.


그럼 한영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한영학교는 1906년 감리교 재단의 지원과 노력으로 오늘날 화양면 와초리 지사울에 세워진 중등학교이다. 설립 당시 교장은 군산 구암 교회 부위렴 선교사였으며 교직원이 5명, 보통과 학생 10명, 고등과 학생 16명이 있었다. 그 후 1916년까지 학업을 계속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일부 학생을 군산 영명학교로 전학시키고 폐교하였다. 당시 한영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던 분이 바로 김인전 선생이다.


김인전 선생은 1876년 한산군 남하면 지촌리 지사울에서 김규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규배는 남포군수, 수원부사를 역임하였는데 기독교를 일찍부터 수용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문한 김인전은 한영학교에 재직하면서 평양신학을 재학하였으며 졸업 후 전주 서문밖 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 전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후 일경에 쫓겨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과로 쓰러져 1923년 상해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다시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큰 뜻은 한영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을 우리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제헌국회 의원으로 초대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윤석구, 전라북도 초대 도지사 김가전, 마산 신장 3·1운동을 주도한  임학규, 이근호 등이 한영학교 출신들이다. 그 외에도 김정북, 김방호, 이창규, 장세환, 정재환, 유재남, 이세직, 박중규, 김시경, 김연배, 김달수, 김노수, 임선, 임진규, 임종섭, 최연만, 이건직, 윤건병 씨 등이 있다.


임종석씨가 추모비를 세우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공감한 사람들이 있다. 화양면 이장단과 군의원은 청원서를 제출하여 임종석씨의 소원을 풀어보겠다고 나섰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뜻과 임종석씨의 애타는 민원에 서천군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임종석씨 바로 그는 75세의 고령의 노인이 아니다 화양면 와초리의 작은 거인이다. 아버지의 스승 김인전 추모사업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처럼 당돌한 모습으로 각처에 호소하고 스스로 뛰어다녔기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서천 군민의 몫이 남아 있다. 75세의 고령 임종석씨가 아버지의 스승, 김인전을 위하여 추모비를 세우기 위하여 뛰어다녔다면 우리 군민은 이제 서천의 스승으로 아니 서천 출신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자리 매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차제에 새롭게 태어났다는 서천사랑 시민모임에서 김인전 선생의 삶과 서천 사람들이라는 세미나와 홍보활동을 주체적으로 전개한다면 더욱 값진 김인전 선생의 추모비 건립 운동이 될 것이다. 75세 임종석씨의 역사 사랑과 젊은 시민의 만남이 으뜸 서천으로 도약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임종석 연락처 041-951-2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