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 발을 디딘 경재는 망명 이듬해인 1920년부터 임시정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학무총장 권한 대행에 이어
1922년에 제4대 의정원 의장(입법부 수장)에 올랐다.
경재가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짧은 기간 급부상한 데는 무엇보다 계파를 초월한
화합정신이 폭넓은 지지를 받아냈을 것으로 분석하는 견해가 많다.
실제 그는 복잡한 구도의 임정내에서
「화해의 사도」로 불릴 만큼 계파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임정의 역할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김구, 여운형 선생등과 함께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해 군인양성의 기초를 닦았는가 하면
국제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임정의 외교활동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1922년 한 한·중간 유대 강화를 위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회의 우리측 대표로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참가했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조직을 발기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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