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미녀_채문희(蔡文姬)
채문희(蔡文姬)의 이름은 염(琰)이요, 자는 문희 도는 명희라고 한다.
채문희는 동한시기의 대 문호이자 서예가인
채옹(蔡邕)의 딸이다.
동한 말기, 동탁(董卓)은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채읍을 하루에 연속 3급이나 올려주어
중랑장에 까지 올랐다가 급기야는 고향후로 봉을 받았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 된 뒤
채읍은 동탁이 주는 벼슬을 받았던 관계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같이 세상에 드문 인재를 죽이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라며 천방백계로 구하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문장은 굴원과 비할 수 있고,
효도는 증삼(曾參, 즉 공자의 학생)을 따른다"고
평가했다.
동탁이 멸망한 뒤, 흉노와 강/호의 군사들이
중원을 엄습, 많은 사람들이 흉노로 끌려가게 되었다.
채문희도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흉노에 끌려갔다.
정권을 잡은 후 조조는 스승인 채옹에게
딸이 하나밖에 없음을 생각해서
황금 천냥과 백벽 한쌍으로 채문희를 찾아왔다.
이 전에 채문희는
흉노의 좌현왕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나 채문희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또 두 아들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채문희가 35세 되던해 바로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서기 208년, 채문희는 조조의 알선으로
장군 동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재주와 인물이 뛰어 났던 동사는 채문희를 별로 달갑지 않게 대했다.
그러나 어느 한번 어떤 차실로 동사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채문희가 나서 조조를 찾아가
자기의 신세를 하소연 하는 바람에
조조는 자기와 채읍의 인정을 생각해
동사를 용서해 주게 되었고,
그랬던 관계로 동사는 채문희에 대한 마음을 달리하게 되었다.
후에 동사와 채문희는 세상사를 간파하고
산좋고 물맑은 곳을 찾아 은거하게 되었는데,
수렵을 갔던 조조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조조는 전에 채씨가문에 수만권을 헤아렸던 장서에 대한 말을 꺼냈다.
채문희는 전란 가운데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400권을 기억에 살아남은 대로 외웠다.
이에 크게 감탄한 조조는 사람을 보내 베끼도록 했으나,
채문희는 남녀가 유별하다는 구실로 거절하고
자기가 직접 400권을 기록하여 조조에게 바쳤다.
채문희는 일생에 세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다.
흉노로 잡혀가 좌현왕에게 시집가기 전에
그는 하동 위씨집에 시집을 갔었는데
부부는 금슬좋게 지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채문희의 남편은 결혼 1년만에
각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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