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재이종학 ▒

왕이 어쩔 수 없어서 몽주와 이색ㆍ우현보(禹玄寶)가 이숭인(李崇仁)ㆍ이종학(李種學)ㆍ조호(趙瑚)를 보내서-연려실기술-

천하한량 2007. 3. 7. 20:53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고려말 정사의 문란과 왕업의 일어남
 

중 변조(遍照)는 본래 옥천사(玉川寺) 여종의 아들인데, 어머니가 천하므로 그 무리에 끼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공민왕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칼을 빼어서 찌르려 하자, 어떤 중이 구하여 주어서 곤경을 벗어났다. 왕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김원명(金元命)이 변조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이니, 그 얼굴이 꿈에 본 중과 같았다. 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같이 말하여 보니, 자못 말솜씨가 뛰어나고 스스로 도를 얻었다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주 궁중으로 불러들이니, 이승경(李承慶)이 보고서 말하기를, “국가를 어지럽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중이다.” 하고, 정지운(鄭之雲) 또한 “요사한 인물이다.” 하여 죽이려 하니, 왕이 몰래 피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죽은 다음 변조는 머리를 기르고, 거사(居士)가 되어 이름을 본성명인 신돈(辛旽)으로 하며 돌아와서 다시 왕을 뵙고, 비로소 궁중에 들어가 용사(用事)하였다. 사부(師傅)라고 부르며 국정을 자문하였는데,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많은 사람이 따랐다. 사대부의 처첩들이 신승(神僧)이라고 하여 설법을 들으며 복을 구하러 그를 찾아오면 신돈은 오는 대로 간통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왕이 신돈을 점점 깊이 믿어 매양 그에게 도닦을 뜻을 굽혀 세상을 구제할 것을 청하니, 신돈은 겉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체하면서 왕의 뜻을 굳건히 하였다. 왕이 굳이 말하니, 신돈이 아뢰기를, “듣건대, 대왕께서는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많이 믿으신다고 하니, 이런 일이 없어야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이에 손수 맹세하는 글을 써서 천지 신명에게 증명하였다. 신돈이 용사한 지 몇 달만에, 나이 많은 옛 신하들을 거의 다 내쫓았다. 수정 논도 섭리 보세 공신(守正論道燮理保世功臣)의 호를 주고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을 봉하였다. 《여사제강》
○ 신돈이 처음 궁중에서 나와 기현(奇顯)의 집에 우거하면서 기현의 처와 간통하고 음식을 만들게 하였다. 처음 기현의 처가 과부로 있을 때에 신돈이 중이 되어서 간통하더니, 뒤에 기현에게 시집갔는데, 신돈이 기현의 집에 주인을 정하고 또 간통하였다. 기현이 처와 함께 조석으로 곁에서 신돈을 모시기를 늙은 노비와도 같이 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현이 갑자기 등용되었다. 《여사제강》
○ 신돈은 날로 탐음(貪淫)이 심해졌다. 집에 있을 때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음악과 여색을 마음대로 하지만, 왕을 뵐 때에는 청아한 이야기를 하고, 채소와 과일만을 먹었다. 이달충(李達衷)이 일찍이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돈을 보고 말하기를, “공이 주색을 지나치게 한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하니, 신돈이 좋지 않아 하며 헤어졌다. 《여사제강》
○ 경복흥(慶復興) 등이 은밀히 의논하여 말하기를, “도선기(道詵記)의 이른바 ‘비승 비속(非僧非俗)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 마땅히 왕께 아뢰어 빨리 제거하여야 하겠다.” 하였는데, 신돈이 그들을 모두 남쪽 먼 지방으로 정배보냈다. 《여사제강》
○ 신돈은 천성이 사냥개를 무서워하고, 활쏘고 사냥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날마다 음란 방종하며, 항상 검은 닭과 흰 말을 잡아서 양기를 돋우니, 당시 사람들이 늙은 여우의 정기라 하였다. 《여사제강》
○ 우정언 이존오(李存吾)가 말하기를, “요물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드디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돈은 항상 말을 타고 홍문(紅門) 안에 출입하였고 전하와 함께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신돈이 집에 있을 때 재상이 뜰 아래에서 절하는데도 돈은 누구에게나 모두 앉아서 상대하였으니, 비록 최항(崔沆)과 김인준(金仁俊) 같은 권신들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 하니, 왕이 크게 노해서, 명하여 그 글을 불사르고 존오를 불러서 책망하였다. 이때 신돈이 왕과 함께 의자에 마주 앉았는데, 존오가 신돈을 노려 보며 꾸짖어 말하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느냐.” 하니, 신돈이 황망히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앉았다. 왕이 더욱 노하여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고 벼슬을 강등하여 장사현 감무(長沙縣監務)를 시켰다. 《여사제강》
○ 공민왕 20년 신해에 신돈이 사형을 당했다. 처음에 신돈이 중의 행실로 왕에게 신임을 받았는데, 이미 김란(金蘭)의 두 딸을 들이고 또 첩을 무수히 두고서 권력을 마음대로 부렸다. 기현과 최사원(崔思遠)이 심복이 되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난이 우익(右翼)이 되며, 그의 도당이 조정에 가득하니, 왕도 스스로 안심하지 못하였다. 신돈 자신도 너무 심하게 방자스런 것을 알고, 왕이 자기를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반역을 계획하였다. 신돈의 문객(門客)인 시랑(侍郞) 이인(李?)이 흉한 음모를 상세히 알고서 이름을 숨겨 ‘한림거사(寒林居士)’라 칭하고 글을 만들어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지고, 곧 평민의 복색으로 도망갔다. 속명이 그 글을 바치니, 왕이 이에 명하여 신돈의 무리 기현과 사원 등을 잡아서 국문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드디어 그들을 죽이고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보냈다.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서 죽이기를 청하니, 왕이 이에 임박(林樸) 등을 보내어서 신돈을 수원에서 죽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신돈과 더불어 서로 맹세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왕이 맹세한 글을 임박에게 주어서 신돈에게 보이며 죄목을 세어 이르기를, “네가 전에 말하기를 부녀자를 가까이하는 것은 기운을 기르는 것이니, 간음은 안한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자식을 낳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맹세 중에 있느냐. 성중에 좋은 집 일곱 채를 지었으니, 이것이 맹세 중에 있느냐.” 하였다. 신돈의 머리를 경성에 가지고 와 거리에 매달고, 사지를 찢어서 각도로 돌리며, 그의 두 살 난 아이도 함께 죽였다. 《여사제강》
○ 공민왕 23년 갑인에 홍륜(洪倫)과 최만생(崔萬生)이 공민왕을 침실에서 시해하였다. 《여사제강》

과거에 왕이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젊은 미모의 남자를 뽑아서 채우고, 대언(代言) 김경흥(金慶興)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다. 이에 홍륜ㆍ한안(韓安)ㆍ권진(權?)ㆍ홍관(洪寬)ㆍ노선(盧瑄) 등이 모두 사랑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셨다. 왕의 천성이 여색을 좋아하지 않아서, 노국공주(魯國公主)가 별세한 이후로 비록 여러 왕비를 들였으나, 별궁에 두고 자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슬퍼하며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을 얻게 되었는데, 항상 스스로 화장을 하여 부인의 모양을 하고 경흥과 홍륜들을 끌어들여서 마음대로 음란한 짓을 하였다. 왕이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여 홍륜과 한안의 무리로 하여금 여러 왕비를 강제로 간통하여 아들 낳기를 바랐는데, 정비 안씨(定妃 安氏)ㆍ혜비 이씨(惠妃 李氏)ㆍ신비 염씨(愼妃 廉氏)는 죽기로써 거절하여 좇지 않았다. 왕이 익비 왕씨(益妃 王氏)의 궁에 가서 홍륜 등을 시켜 비에게 간통하게 하니, 왕비가 죽기로 거절하였는데, 왕이 칼을 빼어서 왕비를 치려하니 왕비가 두려워서 좇았다. 이로부터 홍륜 등이 자주 왕의 분부라 꾸며대며 왕래하였다. 또 아름다운 소년들을 많이 선발하여 항상 왕을 모시게 하며 ‘속구치[束古赤]’라 불렀는데, 자제위와 더불어 사랑을 받았다. 《여사제강》
○ 처음에 왕이 홍륜들로 하여금 여러 왕비를 간통하여 아기 낳기를 바랐는데, 이때 익비 왕씨가 임신을 하였다. 환자 최만생이 왕을 따라 뒷간에 가서 은밀히 고하여 아뢰기를, “신이 익비전에 갔더니 익비가 말하기를, ‘임신한 지 이미 5개월이 되었다’ 합니다.” 하니, 왕이 기뻐서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영전(影殿) 노국공주의 영전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했었는데, 지금 비로소 임신하였다 하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리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묻기를, “누구와 관계하였다 하더냐.” 하니, 만생이 아뢰기를 “비의 말이 홍륜이라 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일 창릉(昌陵)을 배알할 적에 취한 척하고 홍륜 등을 죽여서 뒷말이 없도록 하여야겠다. 너도 이 일을 알았으니, 역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만생이 두려워서 홍륜 등과 의논하고 이날밤에 침전에 들어가 왕이 크게 취한 틈을 타 만생이 칼로 쳐서 시해하니, 머리의 골이 튀어서 벽에 묻었다. 홍륜 등이 드디어 김경흥 등을 치면서 소리치기를, “도적이 밖에서 들어왔다.” 하니, 시위하는 군사들이 다리가 떨려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환자 이강달(李剛達)이 먼저 침전에 들어가서, 방에 가득 피가 흐른 것을 보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왕이 불편하다.” 하면서, 문을 잠그고 출입을 금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 태후(太后)가 와서 숨기고 상사를 발표하지 않고, 왕의 명이라 하며 경복흥과 이인임(李仁任) 등을 불러서 은밀히 역적을 잡을 것을 의논하였다. 인임이 만생의 옷에 피흔적이 있음을 보고 순위부에 가두고 국문하여 그 죄상을 캐내고, 홍륜 등을 잡아서 문초하니, 모두 자복하였다. 백관이 저자에 모여서 만생과 홍륜 등을 수레로 찢어 죽였다. 《여사제강》
○ 왕이 별세한 지 3일 만에 신우가 재신과 추신들과 더불어 상사를 발표하였다. 이튿날 태후와 경복흥은 종친을 세우려 하고, 이인임은 신우를 세우려 하여 논의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도당에서 서로 보며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판삼사 이수산(李壽山)이 말하기를, “오늘의 계책은 종실에서 알아서 해야 합니다.” 하였다. 영녕군(永寧君) 유(瑜)와 밀직(密直) 왕안덕(王安德) 등이 크게 말하기를, “왕이 대군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이를 두고 어디가서 구하리오.” 하니, 인임이 드디어 백관을 거느리고 신우(辛禑)를 세웠다. 《여사제강》

과거에 공민왕이 항상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였었다. 하루는 천하게 변장하고 신돈의 집에 갔는데, 신돈이 자기의 아이[禑]를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전하는 양자를 삼아서 후사를 세우소서.” 하니, 왕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미 허락하였으며, 신돈은 은밀히 자기 무리들을 시켜서 모니노(牟尼奴 신우)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신돈이 수원으로 귀양가게 되자, 왕이 근신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가서 그의 여종 반야(般若) 을 보아서 아들을 낳았다. 놀라지 않게 하고 잘 보호하라.” 하였다. 신돈이 죽은 다음에 왕이 모니노를 불러서 태후전에 들이고, 이인임에게 이르기를, “아들이 있으니, 내가 근심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이내 이르기를, “아름다운 부인이 신돈의 집에 있었는데, 아들을 낳을 만하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관계하여서 이 아이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여사제강》
○ 임박이 이미충(李美?)과 함께 왕을 모시고 있을 때, 왕이 미충을 보고 이르기를, “네가 아기의 일을 아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박이 괴이하게 여겨 나와서 미충에게 물으니, 미충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일찍이 금으로 만든 것을 신에게 주며, 신돈의 집에 가서 아기에게 주게 하였는데, 아기가 크게 기뻐하였소. 신돈이 나보고 말하기를, ‘주상이 자주 내 집에 행차하시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소. 내가 이 일을 갖추어 아뢰었기 때문에 임금께서 이 말씀을 한 것이오. ……” 하였다. 돈이 처형되자, 임박이 사관 이지(李至) 등에게 말하기를, “신돈을 처형한 것은 국가의 큰 경사요. 또 큰 경사가 있는 것을 그대들은 아시오. 임금께서 궁인(宮人)을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벌써 일곱 살이요. 신돈이 은밀히 길러서 사람들이 모르게 하였으니, 이 죄만으로도 죽여야 마땅하오. 사관은 마땅히 알아요 할 것이오.” 하였다. 《여사제강》
○ 반야(般若) 가 밤에 몰래 태후궁에 들어가서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내가 사실 주상을 낳았는데, 어찌 한씨(韓氏)를 어머니로 하시오.” 하니, 태후가 내치고 반야를 옥에 가두고 대간과 순위부(巡衛府)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반야가 새로 만든 중문(中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이 문이 반드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는데, 좀 있다가 문이 저절로 무너지니, 사람들이 자못 이상하게 여겼다.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 아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 있을 수 있지만, 어미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인임 등이 마침내 반야를 임진강에 던졌다. 《여사제강》
○ 폐주(廢主) 우왕 9년에 문사찬성사 김유(金庾)가 성절(聖節) 을 하례하고 왕위를 이어받는 승인을 얻으려고, 명 나라에 들어갔다. 명 태조가 책하여 이르기를, “그대 나라에서 그대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그 권신(權臣)이 누구인가?” 하니, 김유가 이인임이라고 대답하였다. 명 태조가 이르기를, “그대의 먼저 국왕이 아들이 없는 것은 내가 아는 바인데 지금 왕은 누구의 아들인가?” 하니, 김유가 변명하지 못하였다. 인임의 집 종이 역시 일행 중에 있다가 듣고 돌아와서 고하니, 인임이 왕께 아뢰고 김유를 국문하여 청주(淸州)로 귀양보냈다. 뒤에 다시 옥에 가두고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곤장 백 대를 쳐서 순천(順天)으로 귀양보냈는데, 도중에 죽었다.
○ 신우(辛禑) 때에 태조가 최영과 동심으로 협력하여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죽였다. 태조가 최영과 더불어 정당(政堂)에 앉았는데, 최영이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한 인물을 모두 내쫓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었으니, 사대부는 모두 그들이 등용한 사람들이오. 지금은 다만 그 인재의 어질고 그러하지 못한 것만을 따져야 할 것이니, 어찌 지나간 일을 허물하리오.” 하였지만, 최영이 듣지 않았다. 《동각잡기》

대대로 녹을 받는 대가로서 국가의 운명과 시종을 같이 한 자가 어느 시대에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선하고 선하지 못한 것의 차별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행한 일의 옳고 그름은 자세히 살피지 않고,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부귀가 융성한 것만을 보고서, 불선한 자도 함께 국가의 주석이나 심복이 된다고 일컬어 은연중, 그 뽑을 수 없고 움직이기 어려운 세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고려말에 염흥방ㆍ임견미ㆍ지윤(池奫)ㆍ이인임 등이 조정 정사를 잡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화가 종묘 사직에 미쳤으니, 사람마다 모두 그들을 죽일 수 있고, 반드시 천벌이 내려져야 했다. 최영이 혁폐도감(革弊都監)을 설치하여 모조리 죽여서 한 집에 죽은 자가 각각 천여 명씩이나 되니, 이에 상하가 통쾌하다 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 서로 경축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왕실이 점점 외롭고 우익(羽翼)이 꺾여지고 쇠잔해져서, 드디어 떨쳐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이 데리고 일을 같이 한 자들은 이숭인(李崇仁)과 김진양(金震陽) 등 약간이니, 모두 초야(草野)에서 나온 백면서생(白面書生)에 지나지 못할 뿐이었다. 때문에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니, 이런 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의논
○ 태조는 최영과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점 성하여지니, 신우에게 태조를 모함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은 국가의 주석이다. 일조에 큰일이 있으면, 누구를 시켜야 할 것이냐.” 하였다. 매양 연회를 하게 되면, 최영이 반드시 태조에게 말하기를, “나는 소찬을 준비할 것이니, 공은 육찬을 준비하시오.” 하였는데, 태조는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하루는 태조가 이것 때문에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 노루 한 마리가 높은 고개에서 달려 내려가는데 지세가 높고 급하여 여러 군사가 모두 바로 내려가지 못하고 산밑으로 돌아 달려와서 모였다. 문득 위로부터 내려오는 대초명적(大哨鳴鏑) 소리를 듣고 우러러보니, 태조가 고개 위에서 곧바로 달려 내려오는데, 형세가 번개같이 빨랐다. 노루와의 거리가 매우 멀었지만 쏘아 바로 맞혀서 죽이고는, 태조는 말고삐를 잡고 웃었다. 최영이 듣고서 한참동안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용비어천가》
○ 우왕(禑王) 14년 무진 홍무(洪武) 21년 에 태조와 조민수(曹敏修)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처음 명 나라 홍무 기유 공민왕 18년 에 명 태조가 부보랑(符寶郞) 설사(?斯)를 보내 와서 새서(璽書) 를 내려 명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것을 통보하였다. 이어 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봉하고, 금으로 된 왕의 인을 만들어 보내왔다. 고려에서는 드디어 원 나라의 지원(至元)이라는 연호의 사용을 정지하고, 사은사(謝恩使) 강사찬(姜師贊)으로 하여금 전에 원 나라에서 내려 준 금인(金印)을 싸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였으며, 의례와 복식을 처음으로 명 나라 제도를 모방하였다. 갑인년(1374)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김의(金義)가 진헌하는 말을 이끌고 명 나라에서 온 사신을 따라 강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사(副使) 채빈(蔡斌)을 죽이고 북원(北元) 으로 달아났다. 우왕 3년 정사 홍무 10년 에 북원에 사신을 보내고, 2월부터 다시 북원의 선광(宣光)이라는 연호를 고쳐 사용하였다. 다음해 무오년(1378)에는 선광 연호를 버리고, 9월에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 태조는 철령(鐵嶺) 이북이 본래 원 나라에 속했던 땅이라고 하여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게 하고 철령위(鐵嶺衛)를 두도록 명령하고, 요동 백호(遼東百戶)를 보내서 알려주었는데, 우왕이 병을 칭탁하고 나가 맞지 않았다. 4월에 다시 홍무 연호의 사용을 정지하였다.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태조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치게 하였다. 《고사찰요(攷事撮要)》

고려는 원종(元宗) 때부터 원 나라를 섬겼으며, 충렬왕은 드디어 원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나라의 황제와는 장인과 사위 사이인 우호관계를 맺었었다. 그리하여 몇 백년 동안 충선왕을 비롯하여 모두 원 나라의 외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었다. 명 나라가 일어나자, 공민왕은 의주(義主)라 하여 섬기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북원(北元)을 가볍게 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의논하는 이가 많았다. 정도전(鄭道傳)과 박상충(朴尙衷) 등은 명 나라 섬길 것을 주장하고,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 등은 원 나라 섬길 것을 주장하여, 서로 헐뜯고 배척하고 하여 죄를 받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최영(崔瑩)이 나라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마침 명 나라에서 철령위를 두게 되자, 모두 원 나라를 섬기자는 논의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는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또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풍설도 있어서, 최영이 실로 꺼려하였으나 죄를 줄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 나라에 죄를 짓도록 만든 뒤에 그것을 핑계로 제거하려고 해서 드디어 이 계획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이때 최영이 우왕에게 요동을 칠 것을 권하니,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집으로 가서 그 계획이 옳지 못하다고 역설하였다. 최영이 자송을 임견미와 염흥방의 도당이라고 핑계대어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귀양보냈더니 곧 죽었다. 자송은 청렴한 사람이어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재상이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우왕이 홀로 최영과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였으나,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였다. 우왕이 봉주(鳳州)에 이르러서 최영과 태조를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요양(遼陽)을 치고자 하니, 경 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지금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네 가지의 불가(不可)함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함이고, 여름철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함이며,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멀리 가서 정벌하면 왜적이 빈틈을 노릴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함이고, 지금은 한창 더위와 비가 심한 계절이어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에게 전염병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불가함입니다.” 하였다. 우왕이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출동시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 하였다. 태조가 다시 옳지 못하다고 있는 힘을 다해 아뢰니, 우왕이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자송이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우왕이 듣지 아니하니 태조가 물러나와 울면서 말하기를, “생민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였다. 우왕이 평양에 행차하여 최영을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삼아 심덕부(沈德符) 등으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게 하고, 태조를 우군 도통사로 삼아 이두란(李豆蘭) 등으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좌군과 우군이 모두 3만 8천 6백여 명인데, 십만 군사라고 호칭하였다. 최영은 우왕과 더불어 평양에 머무르면서 멀리서 지휘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5월에 좌군과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는데, 태조가 의거(義擧)로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고사촬요(攷事撮要)》
좌우도통사(左右都統使)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들이 압록강을 건너니, 앞에 있던 큰 내가, 비로 인해 물이 불어서 첫째 여울에서 수백 명이 빠졌는데, 둘째 여울은 더욱 깊었습니다. 강 속의 섬 안에 머물러 둔치고 있어서 한갖 군량만 허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지금 명 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박의중(朴宜中)으로 하여금 표문을 받들고 가서 교섭하게 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갑자기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종묘 사직과 백성을 위하여 복된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군사를 돌리도록 명령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우왕이 듣지 않았다. 태조가 모든 장수들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만약 명 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게 되면, 종묘 사직과 백성에게 화가 당장에 미칠 것이다. 이제 순역(順逆)의 도리를 글로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 또한 매우 늙었으니, 공들과 더불어 왕을 뵙고 친히 화복의 사유를 아뢰어 임금의 측근에 있는 악인들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든 장수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직의 안전과 위태로움이 공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어찌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려 압록강을 건너왔다. 태조가 백마를 타고 붉은 활에 흰 깃 달린 화살을 잡고 언덕 가에 서 있으니 온 군중이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후세에도 어찌 저같은 인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 장마비가 여러날 동안 내렸어도 물이 불지 않았는데, 군사가 다 건너고 나니 큰물이 갑자기 닥쳐와서 온 섬이 물 속에 잠겼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그때 아이들의 노래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군인과 백성들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노래를 불렀다.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달려가 군사가 돌아온다는 것을 우왕에게 보고하였다. 《여사(麗史)》
○ 위화도에서 회군하기 전에 잠저(潛邸)가 있는 동리에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에,

서경성 밖에는 불빛이요 / 西京城外火色
안주성 밖에는 연기로세 / 安州城外煙光
그 사이를 왕래하는 이원수여 / 往來其間李元帥
원컨대 백성들을 구제하소서 / 願言救濟黔蒼

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안되어 회군하는 일이 있었다. 《동각잡기》
○ 정종(定宗)이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李豆蘭)의 아들 화상(和尙)과 더불어 우왕 곁에서 태조에게로 달려왔다. 우왕이 말을 빨리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위화도에서 돌아온 모든 장수가 근교에 이르러 둔을 치고, 우왕에게 글을 올려 최영의 죄를 들어 제거하기를 청하였다. 우왕이 듣지 아니하고 설장수(?長壽) 등을 보내어 모든 장수에게 군사를 해산할 것을 타일렀다. 모든 군사가 도성의 문밖에 나아가 둔치니, 우왕이 최영과 더불어 군사를 모집하여 나누어 네 문을 지키고, 조민수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좌군(左軍)은 선의문(宣義門)으로부터 들어가고, 태조는 숭인문(崇仁門)으로부터 들어갔다. 출발하려 할 때 백 보쯤 떨어진 거리에 작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태조가 승리의 징조를 점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여 소나무를 쏘니, 한 화살에 당장 부러지고 말았다. 이에 말하기를, “두 번 쏘아 뭘 하겠느냐.”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축하하였다. 좌우군이 앞뒤에서 협공하여 진격하니, 성을 지키는 군사 중에 맞서 싸우는 자가 없었다. 도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맞이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면서 환호하며 날뛰었다. 조민수가 검은 큰 기를 세우고 영의교(永義橋)에 이르러 최영의 군사에게 격퇴되었으나, 조금 뒤에 태조가 황룡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男山)에 오르니, 흙먼지는 하늘을 덮고 북소리는 땅을 진동시켰다. 최영의 군사들은 깃발만 바라보고 달아나 무너지니, 최영은 형세가 다했음을 알고 달아나서 화원(花園) 우왕이 있는 곳 으로 돌아가며 분노를 참지 못해 문지기를 찔러 죽이고 들어갔다. 태조가 암방사(巖房寺)의 북쪽 재 위에 올라가 큰 나각(螺角)을 한번 불게 하여 모든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큰 소리로 최영을 내달라고 부르짖게 하였다. 우왕은 영비(寧妃) 최영의 딸 및 최영과 더불어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다. 최영이 나오지 않으려 하니, 모든 군사가 화원을 부수고 달려 들어갔다. 곽충보(郭忠補) 등이 바로 전정(殿庭)에 들어가 최영을 찾아 내니,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며 불며 작별하였다. 최영이 두 번 절하고 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같은 사변은 나의 본 뜻이 아니요. 그러나 요동을 치려는 계획은 대의를 거스르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므로 부득이 이리된 것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고,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 드디어 최영을 고봉현(高峯縣) 지금의 고양(高陽) 에 귀양보내고, 두 도통사(都統使)와 서른 여섯 원수(元帥)가 궁궐에 나아가 절하고 사례한 다음 성문 밖으로 군사를 돌렸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조인옥(趙仁沃) 등이 최영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여 드디어 최영을 죽이니, 나이가 73세였다. 형벌을 받을 임시에 태연자약하여 말소리와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죽던 날 도성 안의 사람들은 철시(撤市)하고, 온나라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길에 노는 철없는 아이나 거리의 여자들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최영이 형을 받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으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무덤이 고양(高陽)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벌겋게 벗어져 있다. 사람들이 ‘붉은 무덤[赤墳]’이라고 부른다. 《여사제강》 ○ 《기언(記言)》에 말하기를, “최영이 충주(忠州)로 귀양갔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는데, 시체를 길에 버리니,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 한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판삼사사(李判三司事 이성계(李成桂)) 가 모름지기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였다. 최영이 듣고 매우 성내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인임의 말이 진실로 옳구나.” 하였다. 《여사제강》
○ 처음에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포천(抱川) 재벽동(滓?洞)의 농장에 있고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포천 철현(鐵峴)의 농장에 있었다. 그때 태종(太宗)이 전리정랑(典理正郞)으로 서울에 있다가 사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집에 들리지 않고 바로 포천으로 달려가서 두 후(后)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하여 갔다. 철원(鐵原)을 지나면서 관리가 체포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밤을 새워 길을 가되 인가에 들어가지 못하고 풀밭에서 자곤 하였다. 이천(伊川)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는 장정 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부서를 나누어 변고에 대비하면서 말하기를, “최영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나를 좇지 아니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 하며, 7일 동안 머무르고 있다가 사변이 평정된 것을 듣고 돌아왔다. 《용비어천가》
○ 6월에 태조가 군사를 돌려서 우왕을 폐하여 강화(江華)로 보내고, 우왕의 아들 창(昌)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초 3일에 다시 명 나라의 홍무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우왕이 밤에 환관 80여 명과 더불어 갑옷을 입고 태조와 조민수 등의 집으로 달려왔으나, 모두 성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사(麗史)》
○ 처음에 태조가 회군하였을 때 윤소종(尹紹宗)이 군문 앞에 나아가 정지를 통하여 뵙기를 청하고 곽광전(?光傳) 을 품에서 꺼내어 바쳤다. 태조가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여 들었는데, 인옥이 다시 왕씨 중에서 세워야 한다고 극력 설명하니, 태조가 옳게 여겼다. 여러 장수들이 궁중의 병장기를 내놓을 것을 청하고, 또 영비(寧妃)를 내보낼 것을 청하였다. 신우가 이르기를, “만약 영비를 내보낸다면, 나도 마땅히 함께 나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모든 원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지키면서 신우에게 강화로 가기를 청하니, 신우가 부득이해서 드디어 나왔다. 채찍을 잡고 안장에 의거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이미 저물었다.” 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와 함께 강화로 향하였다. 백관들이 나라의 옥새를 받들어 정비전(定妃殿)에 갖다 두고 왕씨의 후예를 골라서 세우고자 하였는데, 조민수는 신우의 장인인 이림(李琳)의 친척으로서, 신우의 아들 신창을 세우고자 하였다. 민수는 장수들이 자기의 뜻에 반대할까 두려워하여 이색(李穡)이 당시의 이름난 선비라고 하여, 그의 말을 빙자하고자 몰래 물어보니, 이색이 말하기를, “마땅한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민수 등이 드디어 논의를 결정하고 정비(定妃)의 교명으로 신창을 세우니, 그때 나이가 아홉 살이었다. 《여사》 《동각잡기》
○ 태조가 회군할 때 조민수와 더불어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민수도 역시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신우가 강화로 귀양가게 되자, 민수는 인임이 자기를 천거하여 뽑아 준 은혜를 생각하여 인임의 질녀인 근비(謹妃)의 아들 신창을 세우기를 꾀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회군할 때 한 말은 무엇인가?” 하니, 민수가 불쾌한 얼굴빛으로 말하기를, “원자(元子)를 세우는 일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정한 계책이다.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신창을 세웠다. 《용비어천가》
○ 그때 명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변을 듣고, 신하들이 상소하여 고려를 정벌하기를 청하였다. 명 태조가 몸소 정벌하고자 하여 종묘에 점쳐 보려고 바야흐로 재계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고려의 사신이 도착하게 되어 회군한 사실을 보고하므로 즉시 재계를 그쳤다. 《고사촬요(攷事撮要)》
공민왕이 돌아가신 뒤로부터 명 태조는 매양 고려의 집정대신(執政大臣)을 불렀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다. 신창이 왕이 되니, 이색은 창왕으로 하여금 몸소 명 나라에 가게 하고, 또한 명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감시할 것을 청하고자, 자청하여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로 하였다.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강개(慷慨)하다, 이 옹(翁)이여,” 하였다. 이색이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가므로, 그가 돌아오기 전에 정변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 한 사람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니, 태조가 태종(太宗)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보냈다. 명 태조가 평소에 이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가 원 나라에 벼슬하여 한림(翰林)이 되었으니 지정(至正) 14년에 이색이 원 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 지제고에 임명되었다. 응당 한어(漢語)를 알겠구나.” 하니, 색이 한어로 대답해 아뢰기를, “왕이 몸소 와서 천자께 조회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천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기를, “뭐라고 말하느냐.” 하니, 예부의 관리가 전하여 아뢰었다. 이색이 오랫동안 중국에 들어가지 않아서 말이 자못 난삽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천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꼭 나하추와 같다.” 하였다. 이색이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주견이 없어서 내가 맘 속으로 황제가 이 일을 반드시 물을 것이라고 한 것은 묻지 않고, 황제가 물은 것은 모두 내가 생각했던 바와 다른 것이었다.” 하였다. 《용비어천가》 《동각잡기》
○ 이색이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한 것은 장차 어떤 계획이 있었던 까닭에 태조가 의심할까 두려워서 태종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명 태조를 보고 우리나라를 붙들어 보호하여 달라는 뜻을 말하였으나, 황제가 일부러 알아듣지 못하는 체 하였다고 한다. 《월정만필》
○ 강회백(姜淮伯)이 명 나라로부터 돌아올 때, 예부에서 황제의 뜻을 받들어 회답 자문을 보내기를, “고려의 경계는 산으로 막혀 있고 바다를 등지고 있어서 풍속이 매우 다르니, 중국과 비록 통하기는 하나 붙었다 갈라졌다 하였다. 이제 신하가 그 아비를 쫓아내고 그 아들을 세운 다음 중국에 와서 조회하기를 청하나, 대저 윤리가 크게 무너져 임금의 도가 전혀 없고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반역이 분명하다. 사신에게 타일러 돌려 보내노니, 어린 아이[昌王]가 반드시 중국에 올 필요는 없다. 세우는 것도 저희에게 있고 폐위하는 것도 저희에게 있으니, 중국은 이에 간여하지 않겠다.”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기사년(1389)에 폐주 신창을 강화로 추방하고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맞아들여 왕으로 삼으니, 이 이가 공양왕(恭讓王)이다. 《고사촬요》 김저(金佇)는 최영의 생질이다. 정득후(鄭得厚)와 더불어 몰래 여흥(驪興)에 가서 신우를 보니, 이때 신우를 여흥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신우가 울며 말하기를, “답답하게 여기 있다가 꼼짝않고 죽음만 기다리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역사(力士)를 얻어 이 시중(李侍中 태조)을 살해한다면, 나의 뜻을 이룰 수 있겠다.” 하고, 칼을 주며 친하게 지내던 판서 곽충보(郭忠輔)에게 보내어 일을 꾀하도록 하였다. 충보가 거짓 승낙하는 체하고 달려가 태조에게 알리니,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태조가 심덕부(沈德符)ㆍ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ㆍ설장수(?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조준(趙浚)ㆍ박위(朴?)ㆍ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신우와 신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묘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거짓 왕씨를 폐위하고 진정한 왕씨를 세워야 된다” 하고,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 신우를 강릉(江陵)으로 옮기고 신창을 강화로 추방하였다. 이튿날 태조가 여러 공신들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맞아 왕으로 세웠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윤회종(尹繪宗)이 글을 올려 신우와 신창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신우를 강릉에서 죽이고 신창을 강화에서 죽였다. 영비(寧妃) 최씨가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내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다.” 하였다. 10여 일을 먹지 않고 밤낮으로 슬피 울며, 밤에는 반드시 우의 시체를 안고 자고, 곡식을 얻으면 반드시 깨끗이 찧어서 밥을 지어 상식을 올리니, 당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여사제강》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씨의 혈통을 받은 자는 왼쪽 겨드랑 밑에 금비늘 세 조각이 있다고 하였다. 신우가 강릉에서 죽고 신창이 강화에서 죽을 때에 모두 이 표적이 있었다고 한다. 차식(車軾)이 고성 군수(高城郡守)가 되었을 때, 양사언(楊士彦)의 장인 이시춘(李時春)이라는 자는 나이가 70이었다. 매양 말하기를, 그의 증조모가 강릉에 살았는데 나이가 거의 90여 세였고, 자기 나이 열두 살 때 선왕(先王) 우(禑)) 이 그곳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더니, 왕이 형벌을 받을 임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왕씨는 본래 용의 후손이다. 왼쪽 겨드랑 아래에 반드시 세 개의 비늘이 있어서 대대로 표적을 삼는다.” 하고, 드디어 옷을 벗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왼쪽 겨드랑 아래에 과연 세 개의 비늘이 있었는데, 금빛이며 크기가 동전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슬퍼하였다 한다. 《한골동(閑骨董)》
○ 공양왕(恭讓王)이 태조에게 전교를 내리기를, “지난날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공민왕의 영전(影殿)의 공사를 유도하여 정승의 지위를 취득하고 원망을 임금에게 돌려서, 마침내 갑인년(1374)에 공민왕을 시해하는 변란이 있게 하였고,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자, 인임이 옛날 여불위(呂不韋)가 진(秦) 나라를 도둑질하던 계획 을 써서 공민왕 때의 요망한 중 신돈의 소생인 신우를 공민왕의 궁녀 소생이라 속여 왕으로 세웠다. 공민왕의 모후(母后)가 불가하다 하였고, 재상 이수산(李壽山)은 종친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인임이 좇지 아니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었다. 누런 안개가 사면을 막아 햇빛이 드러나지 못하였으며 신우가 상주가 되어 현릉(玄陵)을 장사 지낼 적에 무지개가 태양을 둘렀으며, 신우가 종묘에서 제사를 주장하여 지낼 적에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 안에 신주 모신 집)에서 울고 천둥치고 지진이 있었으며, 신우가 공민왕의 아버지 의릉(懿陵)의 기제(忌祭)에 치재하고 있을 적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우레와 번개에 우박까지 퍼부었으며, 신우가 작(爵)을 이어받을 때는 바람이 조묘(?廟) 침원(寢園)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뽑고 태실의 독수리 기와로 독수리 대가리의 모습을 만들어 지붕모서리에 얹어 둔 것 가 부러졌으며,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신령이 위엄을 진동하여 화를 끊고자 한 것이다. 신우의 어머니 반야(般若)를 뒷말이 없게 하기 위하여 죽일 적에 사평(司平)의 새로 만든 문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다른 해골을 장사지내며 신우의 어머니라고 하니 영구(靈柩)와 영악(靈幄)에 하루에 두 번이나 불이 났다. 이것은 하늘이 신우가 반야의 아들이라는 것을 만세에 보인 것이다. 신우가 왕이 된 지 2년이 되어도 그의 어머니의 이름과 성이 정해지지 아니하니, 재상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이는 간혹 있지만,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자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가 거의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공민왕의 모후가 극력 구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김유(金庾)는 명 나라 황제에게 신우가 왕씨가 아님을 말하였는데 돌아와 죽임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겨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우의 아내는 인임의 질녀로서 신창을 낳으니, 왕씨를 다시 일으켜 회복할 희망이 끊어졌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왕씨를 일으켜 회복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조민수도 또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그의 친척인 인임과 이림(李琳)의 당(黨)이 되어 경의 의논을 저지하고 신창을 세웠으니, 왕씨를 부흥시키는 데 가장 좋은 기회를 잃게 하였다. 기사년(1389) 겨울에 신창이 친조(親朝) 하기를 청하여 파견한 윤승순(尹承順)이 명 나라 예부가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보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다. 거기에, ‘고려 임금의 후사가 끊어져서 다른 성을 왕씨로 대신하였다 하니,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고 과연 황제의 성지(聖旨)에, ‘ 배신(陪臣) 이 직책을 이행하여 군신의 분수를 바로잡는다면, 비록 십수 년을 조회하지 않은들 무엇이 걱정이며, 해마다 와서 조회한들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 나이 어린 아이가 굳이 경사(京師)에 올 필요는 없다’ 하였다. 이것은 천자(天子)가, 공민왕이 사해가 아직 평정되지 않은 때에 솔선하여 명 나라에 신하로 칭하여, 온 천하로 하여금 천명이 명 나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해서, 크게 명태조의 왕운(王運)을 돕는 데 공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의 후사가 끊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왕씨를 일으켜 회복할 것을 신하들에게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신창의 외조부 이림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명 나라 황제의 말씀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으니, 흉악한 꾀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경은 만 번의 죽음도 돌아보지 않고 몸소 대의를 잡아 왕씨를 위하여 만세의 계책을 정하였으며, 덕부(德符)ㆍ몽주(夢周)ㆍ용기(湧奇)ㆍ장수(長壽)ㆍ석린(石璘)ㆍ조준(趙浚)ㆍ박위(朴威)ㆍ도전(道傳) 여덟 명의 장수와 재상들이 따라서 찬성하여 천자의 말씀을 현릉(玄陵) 정비(定妃)의 궁정(宮庭)에서 선포하고, 나를 종실에서 맞아 들여 공민왕의 후계로 되게 하였다. 16년이나 왕노릇을 한 신씨(辛氏)를 하루 아침에 제거하여 31대의 차례를 잇게 하였으니, 경이 왕씨를 일으켜 회복하게 한 공은 강후(絳侯) 나 오왕(五王) 도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용비어천가》
○ 간관(諫官)들이 이색이 신창을 세우고 신우를 맞이하여 오자한 것을 논죄하여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므로 이색을 장단(長湍)에서 국문하니, 이색이 공술하기를, “작년에 명 나라에 갔더니, 예부상서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아비를 쫓아내고 아들을 세웠으니, 천하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는가. 왕과 최영이 모두 구금을 당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므로, 돌아와서 이시중(李侍中)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원명(李原明)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으나,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여흥(驪興)은 땅이 머니 맞이하여 가까운 곳에 두면 임금을 쫓아냈다는 이름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드디어 이색을 함창(咸昌)으로 옮기고 이색의 아들 종학(種學) 등도 모두 먼 곳으로 옮겨 귀양보냈다. 뒤에 종학은 결국 태조가 혁명할 때에 죽었다. 《여사(麗史)》

전조(前朝)를 혁명할 때의 역사 기록은 극히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 신우와 신창의 일이 그것이다. 만약 신우가 진실로 신돈의 소생이라면 신우를 폐위하였을 때 당연히 종실의 어진 사람을 선택하여 세웠어야 하는데, 어찌해서 이색에게 물었으며, 이색도 또한 마땅히 전왕(前王 우(禑)) 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겠는가. 그러니 신우와 신창이 결코 신씨(辛氏)가 아님을 알겠다. 《축수편(逐睡篇)》
○ 고려사의 여탈(與奪)은 모두 믿을 수가 없는데, 말년의 사적은 더욱 어긋나고 틀렸다. 이것이 비록 기휘(忌諱) 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실을 전하는 역사에 어찌 그 사실을 모조리 몰각(沒却)하고 덮어 버릴 수 있는가. 신창을 세운 일, 신우를 본 일,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를 보낸 일, 이 세 건의 일을 큰 죄안(罪案)으로 삼아 원신(元臣)과 고로(故老)들을 전락시키고 유리(流離)하게 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빼앗았으니, 도전(道傳)이다, 소종(紹宗)이다, 조준(趙浚)이다 하는 자들은 하늘이 없었는가. 《고려사》를 만든 자는 정인지(鄭麟趾)이다. 인지는 세종(世宗)과 문종(文宗) 두 대에 걸쳐 신임과 사랑을 늘 받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게 되었으나, 마침내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 되고 말았다. 《상촌집(象村集)》
○ 역사책에 이르기를, “이색이 어떤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호치당(胡致堂)이 원제(元帝)의 성은 우씨(牛氏) 였으나 동진(東晉)의 여러 신하들이 그대로 둔 것은 필시 호(胡)와 갈(?)이 번갈아 중국을 침범하는데 만약 옛날부터 쌓아 온 왕업을 의지하지 않으면, 인심을 계속(係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논하였으니, 내가 신씨(辛氏)에게 감히 이의를 하지 못한 것도 또한 그러한 뜻에서 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이 기록은 거짓으로 꾸며서 쓴 것 같다. 아마도 당시에 이씨의 왕업을 도운 여러 사람들이 이색의 말을 빙자하여 창왕 폐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성립시키려 한 것인 듯 하다. 《우암집(尤庵集)》목은 비음기(碑陰記)
○ 눌재(訥齋) 가 말하기를, “갑술년 9월 추성(秋城)의 관사에 있을 때 꿈에 목은(牧隱)을 보았는데, 그보다 수일 전에 원충(元? 김정(金淨))과 목은의 심사(心事)를 논의하여 그 실상을 알아냈다” 하였다. 시를 지어 말하기를,
선정(先正) 한산군(韓山君)은 먼 세대 사람이건만 / 先正韓山世已遼
세상에서 썩지 않고 우뚝 서있네 / 人間不朽挺嶢嶢
사가(史家)는 붓을 잡는데 공정함이 어디 있는고 / 史家秉筆公何在
새 조정의 공신들 그림자도 아득하여라 / 昭代凌煙影獨遙

하였다. 임보신(任輔臣)의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말하기를, “눌재의 시에 사가라고 한 것은 목은이 전왕의 아들을 세우자고 한 일이 죄라고 한 정인지를 가리킨 것이다. 눌재가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으면서, 목은이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치당(致堂)이 진(晉) 나라 원제(元帝)의 성이 우씨(牛氏)였으나, 동진(東晉)의 신하들이 내쫓지 않은 이유는 호(胡)와 갈(?)이 번갈아 중국을 침범하는데, 동진은 힘이 미약하였으니 만약 진(晉)이 옛날부터 쌓아 온 왕업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어찌 능히 인심을 계속(係屬)시킬 수 있겠는가. 옛것을 버리고 처음을 일으키는 것(원제(元帝)를 내 쫓는 것)은 원제가 우씨인 것을 덮어 두고 임금으로 그대로 받드는 일에 비하면 쉽고 어려움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니, 그대로 덮어둔 것은 또한 형세에 따라 일을 성취시키는 데 있어서 부득이한 것이었다.’ 한 것을 인용하고, 단정하기를, ‘이색이 신씨를 세울 때에 감히 반대하지 않았던 것 또한 이러한 의미였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본다면, 눌재의 말 또한 어찌 목은의 심정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은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몽예록(夢?錄)》
○ 공민왕이 시해된 것과 반야(般若)가 밤중에 궁중에 뛰어든 일들은 앞뒤로 이어지고 일이 매우 복잡하니, 한 개인의 사소한 일과 같이 이리저리 말을 꾸며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이씨 왕조가 일어날 때에도 또한 전적으로 우를 신씨라고 한 이 일만을 빙자한 것도 아니다. 강직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추강(秋江)은 알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며, 그가 고려 말에서 멀지 않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선배들을 보았으니, 반드시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인데, 그가 지은 시에 ‘두 성 임금’이라는 글귀가 있으니, 눌재(訥齋)나 충암(?庵)의 의견과 같다. 비록 역사를 다 믿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세 군자(君子)의 말이 정론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임씨(任氏) 이후에 비로소 이설을 하는 자가 많아졌으나, 다 억측하여 정확하지 못한 말들이고,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신우에게 용의 비늘이 있었다고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무식한 사람들의 허황한 이야기이니, 더욱 깊이 따질 가치가 없는 것이다. 《몽예록》
○ 원천석(元天錫)은 일찍이 시를 지으면서, 시사(時事)를 많이 읊고 제목에 따라 주해를 붙이되, 신우 이전은 ‘국가(國家)’라 하고, 공양왕 이후는 ‘국(國)’이라고 하고, 이씨 조선에 들어와서는 다만 ‘신국(新國)’이라고만 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 나오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조를 보라.
○ 신우와 신창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의 기록을 진실한 역사로 하여야 한다. 최영이 죽으니 고려에 사람이 없어졌고, 정도전이 들어오니 고려에 역적이 있게 되었다. 이른바 한 사람으로 인하여 나라가 일어서고 망한다는 것이다. 고려가 망한 것은 무진년(1388)에 임금 신우를 폐위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임금을 폐한 뒤에도 목은과 같은 분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 한 가닥 공정한 의논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 도전과 소종 등이 신우를 왕씨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성한다고 하고, 왕씨라고 말하는 자는 반역자라 하는 논의를 부르짖어 조정을 혼란하게 하고 인심을 현혹케 하여, 드디어 문학과 덕행이 있는 선비들을 살육하고 입을 봉하게 한 지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하였다. 그러니 그 시대에 나서 바르고 곧은 것으로 굽히지 않는 이들은 삶의 고생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현혹시킬 수 없으며, 사람의 입을 모조리 봉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골 구석에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써서 역사에 남기려는 원천석의 붓이 있었으니, 어찌 돌로 죽순을 누르면 옆으로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상촌집(象村集)》
○ 어떤 이가 말하기를, “목은이 혁명 때에 즉시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여, 비록 정포은의 명쾌한 태도와는 같지 못하나, 그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을 상고하여 보면, 바로 왕씨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절개를 완전히 지킨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단(長湍)으로 귀양가서 도당(都堂)에 올린 절구(絶句) 열 수 속에, ‘신조(辛朝)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비로소 출신하니[放榜辛朝始出身]’라는 구절이 있다. 목은이 만약 신우가 공민왕의 아들인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어찌 차마 ‘신조(辛朝)’ 라는 말을 시에 드러냈을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라의 운명이 거의 끊어지려는 때에는 그릇 전파되는 말이 많이 생긴다. 궁중의 은밀한 침실의 일은 외부의 신하들이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우가 이미 신돈의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폐위되었고, 목은도 이미 새 임금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싯귀에 그렇게 말하였더라도 매우 괴이쩍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한 말로 본다면, 그가 반드시 신우가 왕씨가 아니라고 단정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목은이 신우가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비록 신우를 폐위시킬 때에 절개를 세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신우를 폐한 다음에 왕씨의 다른 종실에서 뽑아 세우자는 의논이 없었겠는가. 이 또한 그의 숨은 뜻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어떤 이가 또 말하기를, “신우와 신창이 다른 성이라는 것은 중국의 조정에서도 알게 되어 힐문하게 되었으니, 그때 나라의 여론이 비등하여 전파되었던 것을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더욱 공증(公證)이 될 수 없다. 이때에 천명은 이미 왕씨에게서 떠나고 인심은 이씨에게로 돌아갔다. 조정의 대소관리들 중에 왕씨의 사람은 지극히 적었으니, 이른바 ‘중국에서 힐문한다’ 는 것도 사신이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한 거짓말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운곡은 괴이한 말을 전해 들은 자와는 달라서 진위에 대하여 마땅히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인데, 그가 실제대로 기록한 말이 도리어 단안(斷案)이 되기에 부족하단 말인가. 퇴계의 편지에도 ‘국가가 만세를 지난 뒤에는 마땅히 운곡의 논의에 따를 것이다’ 말한 것이 있고, 상촌(象村) 도 말하기를, ‘신우와 신창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의 것을 참 역사로 삼아야 된다’ 하였다. 나의 구구한 견해도 또한 전수 받은 바가 있다.” 하였다. 《곤륜집(崑崙集)》
○ 이씨 왕조가 일어날 때에, 하늘의 명과 사람의 마음이 다 그리로 돌아갔으니, 어찌 신우와 신창이 신씨라는 것이 필요했겠는가. 그런데 오직 저 정인지(鄭麟趾)의 무리가 그들의 좁은 마음으로 사실을 왜곡한 기록을 만들어 마침내 그것이 사실처럼 되버렸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청야만집(靑野?輯)》
공양왕이 즉위하던 날 저녁에, 왕의 사위 강회(姜淮)의 삼촌인 진산군(晉山君) 시(蓍)가 안으로 들어와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장수와 재상들이 전하를 세운 것은 다만 자기들의 화를 면하고자 함이고, 왕씨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 그들을 친애하거나 믿지 마시고,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듣고, 그의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말하였다. 윤씨의 종형 소종(紹宗)이 전해듣고 아홉 공신에게 말하니, 공신들이 들어가서 왕에게 아뢰었는데,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아무 말이 없었으므로 아홉 공신들이 한참 동안 엎드려 있다가 나왔다. 왕이 태조의 공이 높고 인심을 얻은 것을 꺼려하자, 구가세족(舊家世族)들이 왕이 태조를 꺼리는 것을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고하고 헐뜯으며, 신우와 신창의 당파가 왕실과 인척관계가 있어 아침 저녁으로 참소하니, 왕이 도리어 참소하는 말을 믿고는, 밤낮으로 측근들과 더불어 태조를 제거할 것을 몰래 도모하였다. 태조가 참소하는 말에 곤란하게 되어 정도전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자네들과 더불어 왕실에 대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치고 있건만, 참소하는 말이 비등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못할까 두렵다. 나는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화를 피하겠다.” 하고, 먼저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행장을 차리기를 재촉하여 떠나려 하였다. 도전이 말하기를, “공은 어찌 일신의 거취를 경솔히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한쪽 구석에 물러가 살고 있으면, 참소하는 말을 더욱 부채질하여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옛날 한 나라의 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좇았는데도 한 고조(漢高祖)가 죄주지 않았다. 내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는데, 왕이 어찌 나를 죄주겠는가.” 하였다. 도전 등이 극력 이해 관계를 설명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용비어천가》 《대동운옥(大東韻玉)》
○ 홍무 경오년에 왕방(王昉)과 조반(趙?) 등이 명 나라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예부에서 신들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나라 사람 윤이(尹彛) 파평군(坡平君) 와 이초(李初) 중랑장(中郞將) 라는 자가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여 아뢰기를,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이 요(瑤)를 세워 임금을 삼았으나, 요는 왕실의 종친이 아니고 인척입니다. 요가 이성계와 더불어 군사를 출동시켜 장차 중국을 침범하려 하는 것을 재상 이색들이 옳지 않다고 하였더니, 즉시 이색ㆍ조민수ㆍ이림(李琳)ㆍ변안열(邊安烈)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 10인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補)ㆍ이인민(李仁敏) 등 9인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 귀양가 있는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와서 천자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중국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하며, 곧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 등의 명단을 내 보이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라에 돌아가서 왕과 재상이 윤이의 서면에 적혀 있는 사람들을 힐문한 다음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조반이 명 나라에서 윤이와 더불어 대질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정성으로 사대하고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 윤이에게 묻기를, “너의 지위가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니, 자못 나를 알겠구나.” 하나, 윤이가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예부의 관리가 말하기를, “천자가 밝으시어 역시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 있다.” 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 김종연이 도망하였으므로, 대대적으로 나라 안을 수색하였다. 드디어 우현보ㆍ권중화ㆍ경보ㆍ장하ㆍ홍인계ㆍ윤유린을 순군옥에 가두고, 아울러 최공철(崔公哲) 등 11인도 옥에 가두며, 또 이색ㆍ이림ㆍ우인열ㆍ이인민ㆍ정지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ㆍ이귀생 등을 청주옥(淸州獄)에 가두었다. 마침 청주에 홍수가 났으므로, 왕이 심덕부(沈德符)와 태조를 불러 죄수들을 석방할 것을 의논하고 이조 판서 조온(趙溫)을 청주에 보내어 이미 죄를 자백한 자를 제외하고는 석방하여 각처에 안치시키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여사제강》
○ 유원정(柳爰廷)이 명 나라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황제가 윤이와 이초가 무고한 것을 알고 멀리 표수현(漂水縣)에 귀양보냈습니다.” 하였다. 정도전 등이 또 명 나라에서 돌아와 명 태조의 말을 전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너의 나라 일을 어지럽게 하려고 한 모략은 짐이 이미 믿지 않았고, 이미 단죄하였으니, 그대 나라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고 의심할 것인가.” 하였다고 하였다. 《여사제강》

윤이와 이초의 변에 이색과 권근이 모두 체포되어 청주옥에 구금되었는데, 국문이 매우 혹독하여 일이 어찌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루는 새벽부터 비가 쏟아져 한낮이 못되어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아 넘쳐서 성문이 허물어져 물이 넘쳐 성안으로 들어오니, 가옥이 모두 물에 잠겼다. 문사관(問事官)이 물에 빠져 떠내려 가다가 압각수(鴨脚樹) 은행나무 를 붙잡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석방하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색과 권근이 보전할 수 있었다. 처음에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이 두 분이 무고되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두 선생은 바로 하늘이 특별히 낸 사람이라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하더니, 그 말이 마침내 맞았다. 어떤 사람은 시 쓰기를,

근거 없는 중상이 불행하게 주공에 미쳤더니 / 流言不幸及周公
홀연히 가화(嘉禾) 가 큰 바람에 일어났네 / 忽有嘉禾起大風
듣건대 서원(西原) 청주에 홍수 다 하니 / 聞道西原洪水漲
천도는 고금이 같은 것을 알겠구나 / 是知天道古今同

하였다. 《필원잡기》
○ 신미년(1391)에 명 태조가 정사(正使) 승휘원사(承徽院使) 강완자독(康完者篤)과 부사(副使) 승휘원사 보로테물[?羅帖木兒]과 태경(太卿) 차한테물[蔡罕帖木兒] 등을 보내어 예부의 자문과 선물로 주는 옷의 겉감과 속감을 가지고 왔다. 그 자문에 말하기를, “예부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은 황제의 명을 받든 즉, 삼한 땅에 군신이 패란(悖亂)을 저지른 지 어느덧 20년이 되었으되, 다행히 전란이 없고, 왕씨의 자손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기에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선물로 옷감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정치가 어떠한가를 살피게 한다.” 하였다. 《고사촬요》
○ 정도전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가 군사의 대오가 정비된 것을 보고 나아가 은밀히 말하기를, “장합니다. 이 군사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도전이 말을 돌려 말하기를, “왜놈을 쳐서 동남을 평정한다는 말입니다.” 하였다. 병영 앞에 늙은 소나무가 있었다. 도전이 부탁하여 껍질을 깎고 시를 쓰기를,

아득히 오랜 세월에 한 그루의 소나무 / 蒼茫歲月一株松
몇만 겹의 푸른 산에서 생장하였는고 /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거라, 뒷날 다시 볼 수 있을까 / 好在他年相見否
인간 일은 잠깐 사이에 옛 자취 되느니 / 人間府仰已陣縱

하였다. 이는 하늘의 명이 태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재촉한 것이다. 《용비어천가》 《대동운옥(大東韻玉》


 
○ 공양왕의 세자 석(奭)이 명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니,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 맞이하였다.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한 마리 노루를 쫓아 쏘아 맞혔는데, 미처 고삐를 잡지 못하여 말이 진창에 빠져 거꾸러졌다. 태조는 몸이 매우 편찮아 남여[肩與]를 타고 돌아왔다. 과거에 시중 정몽주가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가는 것을 꺼려, 그의 무리들과 더불어 같이 태조를 해치고자 꾀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는 빛이 있었다. 대간을 추겨 말하기를,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다. 마땅히 먼저 그의 우익(羽翼)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뒤에 도모할 수 있겠다.” 하고, 드디어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준,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도전, 밀직사 남은(南誾), 예조 판서 윤소종,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 남재(南在), 청주 목사 조박(趙璞)을 탄핵하였다. 왕이 그 탄핵하는 글을 도당(都堂)에 내려 주자, 몽주가 안에서 선동하여, 조준을 비롯한 여섯 명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자기들의 당파인 순군천호(巡軍千戶) 김귀련(金龜聯), 형조 정랑(刑曹正郞) 이번(李幡) 등을 조준 등이 귀양간 곳에 나누어 보내서 장차 국문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그때 태종이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지키고 있다가 태조가 말에서 떨어져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데다, 또 태조가 서울에 들어오는 날 몽주가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곧 달려가 길에서 맞이하여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몽주의 음모를 아뢰기를, “몽주가 필시 우리 집을 몰락시킬 것이니, 속히 서울에 들어가야 됩니다. 중도에 머물러 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니, 태종이 두 번 세 번 간청하였다. 태조가 병을 억지로 참고 밤을 새워 가서 밝기 전에 서울에 들어갔다. 몽주가 성헌(省憲) 을 추겨 번갈아 소장을 올려 조준과 정도전 등을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러한 무고는 변명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고, 장차 조정에 가려 하는데, 편찮아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종과 이화(李和) 의안대군(義安大君)ㆍ이제(李濟)ㆍ황희석(黃希碩)ㆍ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성헌(省憲)이, 전하를 세울 때 조준이 다른 사람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는 것을 신이 저지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나, 조준이 어느 사람과 그런 논의를 하였으며, 신이 저지시키는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누구인지, 조준 등을 불러서 대간과 더불어 대질하게 하소서.” 하고, 두세 번 왕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뭇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은 더욱 급하여졌다. 태종이 은밀히 몽주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하게 받을 뿐이다.” 하였다. 태종이 굳이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속히 돌아가서 너의 큰 일이나 마쳐라. 제릉에 돌아가 상주 노릇을 마치라는 것” 하였다. 태종이 숭교리(崇敎里)의 옛 집에 앉아서 걱정하여 결정을 못내리고 있는데, 문을 급히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 보니, 광흥창 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그가 극력 말하기를, “백성들의 이해가 이 시각에 결정이 납니다. 왕후와 장상이 어찌 따로 종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드디어 정종(定宗)과 이제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몽주는 안 죽일 수 없다. 내가 마땅히 그 허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하고,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저격하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상공(相公)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였다. 태종이 조영규 등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터인데, 지금 몽주의 모함에 빠져 악명을 덮어 쓰고 있다. 우리 휘하에 사람이 많으면서 이씨를 위하여 힘을 다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가.” 하니, 영규가 말하기를, “힘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은 영규와 조영무(趙英茂)ㆍ고려(高呂)ㆍ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에 들어가 몽주를 저격하게 하려 하는데, 홀연히 행인을 벽제(?除) 하는 소리가 났다. 나가 보니, 몽주가 문에 도착하였다. 태조의 서형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몽주에게 누설하였기 때문에, 몽주가 동태를 살피고자 하여 문병을 칭탁하고 온 것인데, 태조가 몽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몽주를 죽이는 것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상공께서 성내실 것이 두려우니, 어찌할까요.”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기회는 놓칠 수 없다.” 하고, 영규에게 명령하여 칼을 가지고 길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때 전 판개성부사(前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으므로 몽주가 지나다가 그 집에서 조상하느라고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영규들이 병기를 준비하여 가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몽주가 이르렀을 때, 영규가 달려가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돌아보고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났다. 영규가 달려가 말 머리를 치니, 몽주가 떨어져서 달아나는 것을 고려(高呂) 등이 베어 죽였다. 태종이 들어가 아뢰니, 태조가 크게 놀라면서 일어나 성내어 말하기를, “우리 집이 평소에 충효로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함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몽주 등이 우리집을 몰락시키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하였는데, 태조의 성냄이 바야흐로 대단하였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얼굴빛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공이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하였다. 이튿날 태조가 황희석을 보내어 아뢰기를, “몽주가 죄인들과 붕당을 만들어 은밀히 대간을 유인하여 충량(忠良)한 사람들을 모함하다가 이제 이미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조준 등과 대간을 불러서 밝게 판정하소서.” 하였다. 왕이 어쩔 수 없어서, 이에 대간을 순군옥에 가두고, 배극렴(裵克廉)과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와 이색ㆍ우현보(禹玄寶)가 이숭인(李崇仁)ㆍ이종학(李種學)ㆍ조호(趙瑚)를 보내서 신들을 추겨 탄핵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숭인 등 3인을 순군옥에 가두고, 조금 뒤에 김진양과 이확(李擴)ㆍ이래(李來)ㆍ이돈(李敦)ㆍ권홍(權弘)ㆍ정희(鄭熙)ㆍ김묘(金畝)ㆍ서견(徐甄)ㆍ이작(李作)ㆍ이신(李申)ㆍ이숭인ㆍ이종학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진양(震陽) 등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진양 등은 몽주 등의 추김을 받았을 뿐이다. 어찌 함부로 형벌을 내리겠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진양 등은 죽음을 면하게 되고, 이색은 한주(韓州)로 내쳤다. 《용비어천가》 《동각잡기》

 

 
○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상소하기를, “몽주의 무리인 설장수(?長壽)ㆍ이무(李茂)ㆍ이빈(李彬)ㆍ김리(金履) 등은 마땅히 국문하여 논죄해야 되며, 안노생(安魯生)ㆍ최관(崔關)ㆍ김첨(金瞻) 등은 마땅히 멀리 귀양보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장수와 김리는 고향으로 돌려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파면시키고 멀리 귀양보냈다. 《여사(麗史)》
○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할 때, 남은이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할 것을 은밀히 의논하고 태종에게 알리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 큰 일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그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태조에게 돌아가,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이 이미 귀속한 데가 있는데, 어찌 속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지 않는가.” 하였다. 임신년(1392) 6월에 이르러 태종이 남은과 더불어 계획을 정하고 몰래 조인옥ㆍ조준ㆍ정도전ㆍ조박 등 52인과 더불어 추대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크게 성낼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고, 태종이 들어가 신덕왕후(神德王后)에게 아뢰어 전달하였다. 7월 12일에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정비(定妃)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왕은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었으며 백성의 마음이 이미 이탈하였으니,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폐위하소서.” 하였다. 남은과 정희계(鄭熙啓)가 정비의 교서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 궁(宮)에 이르러, 왕의 죄를 헤아리고 폐위하여 원주(原州)로 내쳤다. 13일에 정비가 전교로,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에 극렴 등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옥새를 받들어 전하려고 잠저로 나아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리가 꽉 찼다. 대사헌 민개(閔開)가 홀로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말을 하지 아니하므로 남은이 쳐 죽이고자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의리상 그렇게 못한다.” 하고, 힘써 만류하였다. 태조가 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니, 극렴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 옥새를 마루 위에 놓아 두고, 벌려 서서 절하고 북을 치며 천세(千歲)를 부르고,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태조가 굳이 거절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왕자가 일어나는 것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실로 부덕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였는데, 대소 신하들과 늙은 중신들이 옹위하고 서서 물러가지 않았다. 17일 병신에 백관들이 수창문(壽昌門)의 서쪽에 품계의 차례대로 늘어서서 맞으니, 태조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정전(正殿)에 들어가 왕위에 나아갔다. 어좌(御座)를 피하고 영내(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의 축하를 받았다. 이어 육조의 판서 이상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 이르기를, “나는 수상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렵고 위태로운 마음을 품었는데, 어찌 오늘 이 일을 볼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가 만약 몸이 건강하다면 말이라도 타고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나, 지금 마침 병이 들어 손과 발을 스스로 쓸 수가 없어서 드디어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경들은 각각 나라 일에 충성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힘써 박덕(薄德)한 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곧 전교를 내려, 전조(前朝)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들에게 전과 같이 계속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 이에 앞서 크게 가물더니, 왕이 즉위한 이튿날 정유에 큰 비가 좍좍 내려 사람들이 크게 즐거워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고려의 폐주(廢主)를 공양군(恭讓君)으로 하였다.

태종 16년 병신에 예조(禮曹)의 아룀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군을 봉하여 공양왕으로 하였다. 《동각잡기》. 묘가 고양(高陽)에 있다.

[주B-001]고사본말(故事本末) : 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
[주D-001]홍문(紅門) : 붉은 살로 만든 문인데, 여기서는 대궐의 홍살문을 말한다.
[주D-002]반야(般若) : 우왕의 생모이며, 신돈의 계집종.
[주D-003]성절(聖節) : 중국 황제의 생일.
[주D-004]새서(璽書) : 황제가 제후나 속국의 왕들에게 내리는 황제의 도장이 찍힌 문서.
[주D-005]북원(北元) : 원 나라가 명 나라에게 중원을 잃고 몽고 본토에 가서 세운 나라.
[주D-006]곽광전(?光傳) : 한 나라 대신 곽광이 음란한 황제인 창읍왕(昌邑王) 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실을 적은 전기.
[주D-007]정비(定妃) : 공민왕의 비.
[주D-008]여불위(呂不韋)가 …… 계획 : 여불위가 잉태한 첩을 진왕(秦王)에게 들여 시황(始皇)을 낳게 하였는데, 진왕은 그것을 모르고 시황에게 왕위를 계승시켰으므로 여씨(呂氏)가 영씨(?氏 진왕의 성) 의 나라를 빼앗았다는 고사.
[주D-009]치재(致齋) : 제사를 모시려고 재계하는 것인데 주육(酒肉)을 금하고 들어앉아 근신하는 것.
[주D-010]조묘(?廟) : 조상의 신주를 사당(祠堂)에 모셨다가, 4대가 지나면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 신주를 옮겨 모신 데가 조묘이다.
[주D-011]어름(御?) : 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창고.
[주D-012]친조(親朝) : 변두리의 작은 나라들이 사신을 보내 중국 황제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朝貢)이라고 하며, 친조라는 것은 속국(屬國) 의 왕이 직접 중국에 가서 조공하는 것을 말함.
[주D-013]배신(陪臣) : 속국의 신하를 종주국인 황제에 대하여 배신이라 한다.
[주D-014]강후(絳侯) : 한 나라 장군 주발(周勃)을 말하는데, 나라를 어지럽히던 여후(呂后)의 무리들을 무찌르고 한 문제(漢文帝)를 세운 공신.
[주D-015]오왕(五王) : 당 나라 무후(武后)의 무리를 무찌르고 중종(中宗)을 복위시킨 적인걸(狄仁傑)ㆍ장간지(張柬之) 등 다섯 사람의 공신을 왕으로 봉하였으므로 오왕이라 함.
[주D-016]여탈(與奪) :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역사의 논평에 있어서 허여하는 것은 “여”라 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탈”이라고 한다.
[주D-017]기휘(忌諱) : 여기서 말하는 기휘는 조선 왕실에 대한 기휘임.
[주D-018]호치당(胡致堂) : 송(宋) 나라 사론가(史論家) 호인(胡寅)을 말한다.
[주D-019]원제의 성은 우씨(牛氏) : 진(晉) 나라 민제의 황후가 소리(小吏) 우금(牛金) 과 간통하여 원제(元帝)를 낳았으므로 당시에 우(牛)를 마(馬)로 바꾸었다는 고사가 있었다.
[주D-020]눌재(訥齋) : 중종조 박상(朴祥) 의 호.
[주D-021]두 성 임금 : 신씨(辛氏) 와 왕씨(王氏) 두 성을 말한다.
[주D-022]임씨(任氏) : 《병신정사록(丙辰丁巳錄)》의 저자인 임보신(任輔臣)을 말한다.
[주D-023]상촌(象村) : 인조(仁祖) 때 사람인 신흠(申欽) 의 호.
[주D-024]공신 : 우왕을 폐위시킨 이성계ㆍ정몽주 등 아홉 사람을 말함.
[주D-025]가화(嘉禾) : 《서경》에 가화편이 있는데, 그 내용은 주공이 참소를 당해 물러가 있을 때, 큰 바람이 불어서 벼[禾]가 모두 쓰러졌으므로 성왕(成王) 이 놀라고 두려워 뉘우치고 주공을 도로 맞았더니, 바람이 다시 불어 쓰러졌던 벼를 도로 일으켜 놓았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주D-026]제릉(齊陵) :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
[주D-027]성헌(省憲) : 고려 말기의 문하부(門下府)와 사헌부.
[주D-028]벽제(?除) : 귀인이 통행할 때, 잡민의 통행을 금지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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