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첩에 대하여 상고하다[禊帖攷] |
난정첩(蘭亭帖)은 가장 고증하기 어려우니, 소익(蕭翼)이 난정첩을 기만하여 빼앗았다는 것은 천고에 바꿀 수 없는 설(說)이다. 그러나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에 이미 그 진본(眞本)을 얻은 한 가지 증거가 있으니, 원본을 수장(收藏)할 때부터 그 설의 서로 다름이 이와 같았다.
구양순(歐陽詢)·저수량(褚遂良)이 임모(臨摹)함으로부터 이후로 구본(歐本)은 곧 정무본(定武本)으로서 이는 바로 구양순체(歐陽詢體)이고, 저본(褚本)은 곧 신룡본(神龍本)으로서 이는 바로 저수량체(褚遂良體)인데, 저본은 또 신룡본 하나에만 그치지 않는다. 구양순과 저수량의 임모한 것이 각각 다른데, 만일 왕희지(王羲之)의 진적(眞迹)으로 말한다면 또 별개인 것이다.
그리고 상강(桑姜)이 고증한 것들은 모두 구양순이 임모한 정무본에만 치우쳤고, 저수량이 임모한 것에 대해서는 그리 자상하지 않다. 그런데 미남궁(米南宮)이 저수량이 임모한 진영(眞影)을 얻음에 미쳐서는 이를 평생(平生)의 진완(眞玩)이며 천하 제일(天下第一)로 여기어 유(由) 자를 논하면서 이르기를 "그의 해서(楷書)를 본 것 같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또 중점을 둔 것이 저본에 있었고 정무본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본과 저본을 혼동하여 일컬을 수 없는 것이다.
또 군(群) 자의 갈래진 다리와 숭(崇) 자에 삼점(三點)을 찍는 경우는 구양순과 저수량이 서로 같으나, 천(遷) 자에서 입을 트고[開口] 안 트는 경우는 구양순과 저수량이 서로 같지 않았다. 그런데 당 태종이 쓴 글씨와 회인(懷仁)이 집자(集字)한 성교서(聖敎序)는 모두 입을 터서 썼으니, 태종은 반드시 진본(眞本)을 따라서 임서(臨書)하였고 굳이 저수량의 체법을 배우지 않았으며, 회인 또한 진본을 따라서 모아 취했기 때문에 모두가 입을 튼 천(遷) 자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본이 왕희지의 진적과 일호도 틀림이 없다고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니, 그래서 구양순이 임모한 것은 그대로 구양순체일 뿐인 것이다.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1736~1795) 연간에는 내부(內府)에 수장된 것이 1백 20본(本)이나 되었는데, 일찍이 유왕부(裕王府)에서 한번 빌려 내어 본 결과 여러 본이 각각 서로 달라서 매우 괴이하고 불가사의한 곳이 있었다. 이는 또 어떤 사람이 임모하여 변체(變體)된 것인가, 탕풍(湯馮) 등 여러 사람이 임모한 것 또한 각각 스스로 일본(一本)씩이었던가?
지금 세간에 전하는 것으로는 낙수본(落水本)을 제일로 치는데, 낙수본은 또 내부(內府)로 들어갔다. 그러나 낙수본은 바로 조자고(趙子固)가 수장(收藏)한 것으로 일찍이 강백석(姜白石)의 삼본(三本) 가운데 하나인데, 강백석이 고증한 편방(偏旁)도 그 고증한 것과 다 들어맞지 않으니, 오로지 낙수본만 가지고 말할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정무본은 하나일 뿐이니, 삼본 가운데 두 본은 또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조자고 이상의 강백석과 유자지(兪紫芝) 등 제인(諸人)으로 본다면, 지금 다만 낙수본을 가지고 왕희지 진적의 표준으로 삼는 것은 의당 또 어떻겠는가.
조자고의 십삼발(十三跋)과 십칠발(十七跋) 등의 본(本)은 지금 이미 없어졌고, 저본(褚本)인 왕문혜본(王文惠本)만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왕본(王本)의 원적(原蹟)은 영(領) 자를 쓰면서 산(山) 자를 따른 것인데, 이 또한 항심 없는 자의 바꾸어 가버린 바가 되었고, 다만 그 미불(米芾)의 발문(跋文)에서만 진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니, 지금 어떻게 왕희지의 원적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갑을(甲乙)을 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추벽(秋碧)·쾌설(快雪) 등 제본에 대해서는 아울러 논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주D-001]소익(蕭翼)이……빼앗았다 : 진(晉) 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쓴 난정서첩(蘭亭敍帖)의 진본(眞本)이 처음 승 변재(僧辯才)에게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당 태종(唐太宗)이 이것을 입수하기 위해 여러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방현령(房玄齡)의 말을 듣고 어사(御史) 소익(蕭翼)을 은밀히 승 변재가 있는 곳에 보내어 이것을 탈취해오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런데 당 태종은 이를 몹시 좋아하여 당시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것을 각각 수본(數本)씩 임모(臨摹)하게 해서 황태자(皇太子)·제왕(諸王)·근신(近臣) 등에게 나누어 주고, 그 진본은 끝까지 간수해오다가, 태종이 임종시에 유언을 남겨 결국 태종릉에 이것을 순장(殉葬)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난정첩의 진본을 당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에 구양순(歐陽詢)을 시켜서 구득(求得)했다는 설도 있어 그 사실은 자세하지 않다. 《石刻鋪敍》《 蘭亭考》
[주D-002]구본(歐本)은……정무본(定武本) : 구본은 당 태종 때에 구양순(歐陽詢)이 왕명에 의해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첩(蘭亭帖)을 임모(臨摹)한 것을 말하고, 정무본이란 일찍이 구양순이 임모한 난정첩을 석각(石刻)하여 금중(禁中)에 두었던 것이 당 나라가 망할 무렵에 주전충(朱全忠)·야율덕광(耶律德光) 등의 손에 의해 정무군(定武軍)의 소재지에 방치되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3]저본(褚本)은……신룡본(神龍本) : 저본은 저수량(褚遂良)이 당 태종 때에 난정첩을 임모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신룡(神龍)은 당 중종의 연호로서 신룡본이란 곧 저수량이 일찍이 난정첩을 임모한 것이 신룡 연간에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을 이른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4]상강(桑姜) : 모두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고증서(考證書)인 《난정고(蘭亭考)》를 저술한 상세창(桑世昌)과 《강첩평(絳帖平)》을 저술한 강기(姜夔)를 합칭한 말이다.
[주D-005]미남궁(米南宮) : 송(宋) 나라 때 서화(書畫)로 이름이 높았던 미불(米芾)을 말함. 남궁은 그의 호칭이다.
[주D-006]회인(懷仁)이……성교서(聖敎序) : 회인은 당 태종 때 홍복사(弘福寺)에 머물던 중 이름이다. 그리고 성교서는 당 태종이 서역(西域)에 가는 현장법사(玄奘法師)에게 명하여 경석(經釋)을 구해다가 중국에 반포하라는 내용을 기술한 즉 태종어제(太宗御製)의 문장명(文章名)인데, 이것을 중 회인에게 명하여 왕희지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하여 석각(石刻)하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7]탕풍(湯馮) : 당 태종이 왕희지의 난정첩 진본을 소익(蕭翼)을 통해 입수한 다음, 태종의 명에 따라 황자(皇子)·공경(公卿) 등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이것을 임모(臨摹)한 탕보철(湯普徹)과 풍승소(馮承素)를 합칭한 말인데, 이밖에도 조모(趙模)·한도정(韓道政)·제갈정(諸葛貞) 등 3인이 더 있었다. 《蘭亭考》
[주D-008]낙수본(落水本) : 일명 낙수난정(落水蘭亭)이라고도 하는 난정첩모본(蘭亭帖摹本)을 이름. 송(宋) 나라 말기에 서화가인 조맹견(趙孟堅)이 이 난정첩본을 유송(兪松)에게서 얻고는 너무도 기뻐서 밤중에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힘으로 인하여 모든 물건은 다 침몰되어버렸는데, 이때 조맹견은 얕은 물에 나와 서서 오직 이 난정첩본만을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난정이 여기에 있으니 내 그 나머지 물건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그 난정첩본에다 "목숨은 가벼이 하더라도 지극한 보배는 보전해야 한다.[性命可輕至寶是保]"라는 여덟 글자를 제(題)하여 이것을 소장해왔다는 고사에서 그 물에 빠졌던 것을 뜻하여 이렇게 명칭한 것이다. 《輟耕錄 卷九》
[주D-009]조자고(趙子固) : 송 나라 말엽의 서화가였던 조맹견(趙孟堅)을 이름. 자고는 그의 자이다.
[주D-010]강백석(姜白石) : 송 나라 때 고증학자로 일찍이 《강첩평(絳帖平)》을 저술한 강기(姜夔)를 이름. 백석은 그의 호이다.
[주D-011]유자지(兪紫芝) : 송(宋) 나라 때 시(詩)·서(書)에 모두 뛰어났던 유수로(兪秀老)를 이름. 자지는 바로 그의 호이다.
[주D-012]십삼발(十三跋)과 십칠팔(十七跋) : 난정첩본(蘭亭帖本)에, 발문(跋文)이 열세 편 붙여진 것과 열일곱 편 붙여진 것을 말한다.
[주D-013]왕문혜본(王文惠本) : 문혜는 송 인종(宋仁宗) 때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른 왕수(王隨)의 시호. 왕문혜본이란 곧 일찍이 왕수의 집에 소장되었던 왕희지 난정첩(蘭亭帖)에 대한 저수량(褚遂良)의 임모본(臨摹本)을 이른 말이다.
[주D-014]항심……되었고 : 송 인종(宋仁宗) 연간에 송기(宋祁)가 정무진수(定武鎭帥)로 있을 때 이씨(李氏) 성을 가진 자가 난정첩(蘭亭帖) 석각본(石刻本)을 얻어서 이를 송기에게 바치자, 송기가 이를 공고(公庫)에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무본(定武本)이다. 그런데 그 후 설향(薛向)이 정무진수로 가 있을 때 그의 아들 설소팽(薛紹彭)이 위본(僞本)을 모각(摹刻)하여 이 공고에 있는 정무 진본(定武眞本)과 바꾸어 가져가 버렸던 일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다시 송 휘종(宋徽宗) 연간에 설소팽의 아우인 설사창(薛嗣昌)에 의해 휘종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蘭亭考》《蘭亭續考》
[주D-015]추벽(秋碧)·쾌설(快雪) : 쾌설은 쾌설시청(快雪時晴)으로 시작되는 왕희지의 편지첩(便紙帖), 즉 ‘쾌설시청첩(快雪時晴)’ 을 이르는데, 여기의 추벽 또한 이와 같은 편지첩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2]구본(歐本)은……정무본(定武本) : 구본은 당 태종 때에 구양순(歐陽詢)이 왕명에 의해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첩(蘭亭帖)을 임모(臨摹)한 것을 말하고, 정무본이란 일찍이 구양순이 임모한 난정첩을 석각(石刻)하여 금중(禁中)에 두었던 것이 당 나라가 망할 무렵에 주전충(朱全忠)·야율덕광(耶律德光) 등의 손에 의해 정무군(定武軍)의 소재지에 방치되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3]저본(褚本)은……신룡본(神龍本) : 저본은 저수량(褚遂良)이 당 태종 때에 난정첩을 임모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신룡(神龍)은 당 중종의 연호로서 신룡본이란 곧 저수량이 일찍이 난정첩을 임모한 것이 신룡 연간에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을 이른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4]상강(桑姜) : 모두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고증서(考證書)인 《난정고(蘭亭考)》를 저술한 상세창(桑世昌)과 《강첩평(絳帖平)》을 저술한 강기(姜夔)를 합칭한 말이다.
[주D-005]미남궁(米南宮) : 송(宋) 나라 때 서화(書畫)로 이름이 높았던 미불(米芾)을 말함. 남궁은 그의 호칭이다.
[주D-006]회인(懷仁)이……성교서(聖敎序) : 회인은 당 태종 때 홍복사(弘福寺)에 머물던 중 이름이다. 그리고 성교서는 당 태종이 서역(西域)에 가는 현장법사(玄奘法師)에게 명하여 경석(經釋)을 구해다가 중국에 반포하라는 내용을 기술한 즉 태종어제(太宗御製)의 문장명(文章名)인데, 이것을 중 회인에게 명하여 왕희지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하여 석각(石刻)하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7]탕풍(湯馮) : 당 태종이 왕희지의 난정첩 진본을 소익(蕭翼)을 통해 입수한 다음, 태종의 명에 따라 황자(皇子)·공경(公卿) 등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이것을 임모(臨摹)한 탕보철(湯普徹)과 풍승소(馮承素)를 합칭한 말인데, 이밖에도 조모(趙模)·한도정(韓道政)·제갈정(諸葛貞) 등 3인이 더 있었다. 《蘭亭考》
[주D-008]낙수본(落水本) : 일명 낙수난정(落水蘭亭)이라고도 하는 난정첩모본(蘭亭帖摹本)을 이름. 송(宋) 나라 말기에 서화가인 조맹견(趙孟堅)이 이 난정첩본을 유송(兪松)에게서 얻고는 너무도 기뻐서 밤중에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힘으로 인하여 모든 물건은 다 침몰되어버렸는데, 이때 조맹견은 얕은 물에 나와 서서 오직 이 난정첩본만을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난정이 여기에 있으니 내 그 나머지 물건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그 난정첩본에다 "목숨은 가벼이 하더라도 지극한 보배는 보전해야 한다.[性命可輕至寶是保]"라는 여덟 글자를 제(題)하여 이것을 소장해왔다는 고사에서 그 물에 빠졌던 것을 뜻하여 이렇게 명칭한 것이다. 《輟耕錄 卷九》
[주D-009]조자고(趙子固) : 송 나라 말엽의 서화가였던 조맹견(趙孟堅)을 이름. 자고는 그의 자이다.
[주D-010]강백석(姜白石) : 송 나라 때 고증학자로 일찍이 《강첩평(絳帖平)》을 저술한 강기(姜夔)를 이름. 백석은 그의 호이다.
[주D-011]유자지(兪紫芝) : 송(宋) 나라 때 시(詩)·서(書)에 모두 뛰어났던 유수로(兪秀老)를 이름. 자지는 바로 그의 호이다.
[주D-012]십삼발(十三跋)과 십칠팔(十七跋) : 난정첩본(蘭亭帖本)에, 발문(跋文)이 열세 편 붙여진 것과 열일곱 편 붙여진 것을 말한다.
[주D-013]왕문혜본(王文惠本) : 문혜는 송 인종(宋仁宗) 때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른 왕수(王隨)의 시호. 왕문혜본이란 곧 일찍이 왕수의 집에 소장되었던 왕희지 난정첩(蘭亭帖)에 대한 저수량(褚遂良)의 임모본(臨摹本)을 이른 말이다.
[주D-014]항심……되었고 : 송 인종(宋仁宗) 연간에 송기(宋祁)가 정무진수(定武鎭帥)로 있을 때 이씨(李氏) 성을 가진 자가 난정첩(蘭亭帖) 석각본(石刻本)을 얻어서 이를 송기에게 바치자, 송기가 이를 공고(公庫)에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무본(定武本)이다. 그런데 그 후 설향(薛向)이 정무진수로 가 있을 때 그의 아들 설소팽(薛紹彭)이 위본(僞本)을 모각(摹刻)하여 이 공고에 있는 정무 진본(定武眞本)과 바꾸어 가져가 버렸던 일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다시 송 휘종(宋徽宗) 연간에 설소팽의 아우인 설사창(薛嗣昌)에 의해 휘종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蘭亭考》《蘭亭續考》
[주D-015]추벽(秋碧)·쾌설(快雪) : 쾌설은 쾌설시청(快雪時晴)으로 시작되는 왕희지의 편지첩(便紙帖), 즉 ‘쾌설시청첩(快雪時晴)’ 을 이르는데, 여기의 추벽 또한 이와 같은 편지첩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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