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필재집 문집 제2권
명(銘)
조선의 고 의정부 좌찬성 이공의 묘지명[朝鮮故議政府左贊成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파(坡)이고 자는 평중(平仲)인데 한산인(韓山人)으로,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호임) 문효공(文孝公)의 사세손(四世孫)이다. 문효공은 그 사자(嗣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임) 문정공(文靖公)과 함께 서로 이어서 원조(元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함께 규재(圭齋) 구양공(歐陽公)의 문하(門下)가 됨으로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동방(東方)에 한산(韓山)이 있음은 이씨(李氏) 부자(父子)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게 하였고, 우리 동방에서도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앙모(仰慕)하는 데 있어 후세에까지 아무런 이의가 없게 된 것은 또한 이공(二公)에게로 돌아갔다.
문정공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된 양경공(良景公) 종선(種善)을 낳았고, 양경공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문열공(文烈公) 계전(季甸)을 낳았는데, 문열공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에게 알아줌을 입어, 공훈이 태상(太常)에 기재되었으니, 인덕(仁德)을 쌓은 은택이 더욱 원대하여졌다. 공은 바로 문열공의 중자(中子)이다. 비(?) 대구군부인(大丘郡夫人) 진씨(秦氏)는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 호(浩)의 딸이다.
공은 막 나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15세가 되어서는 이미 경사(經史)를 다 섭렵하여 대의(大義)를 통하였으며, 또 글을 잘 지었다. 17세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8세에는 신미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으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에 선발되고, 누차 승천하여 응교(應敎)에 제수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시험을 보아 부지돈녕부(副知敦寧府)가 되었다가 지승문원(知承文院)에 승진되고 이어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전임되었다. 공은 급제한 이후 8년 동안에 초탁(超擢)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는데, 나이는 젊고 지위는 높았으나, 남들이 공에게서 교긍(驕矜)의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기묘년에는 문열공의 상을 당하여 복을 마친 다음 세자 보덕(世子輔德)에 제수되고, 누차 승천하여 판내자시(判內資寺), 판예빈시(判禮賓寺)가 되었다. 계미년에는 첨지중추부사로부터 승정원 우승지에 발탁 제수되고 이어 좌승지, 도승지가 되었다. 모두 3년 동안 승정원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임금을 개도(開導)하는 데 있어 비익(裨益)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편전(便殿)에 나가 유독 공만을 불러서 그 손을 끌어당겨 용안(龍顔)으로 공의 얼굴을 비비었다. 이 때 세자(世子)가 곁에 모시고 있었으므로,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이 후일 너의 신하가 될 것이니 잊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세자에게 명하여 친히 술을 따라서 공에게 마시도록 하게 하였다.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 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전임되었다.
무자년 9월에는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경사(京師)에 가서 승습(承襲)을 청하고 돌아왔다. 갑오년에는 대구군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복을 마치고는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였다.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천되어서는 인재를 선발 등용하는 데 있어 각각 그 재능에 맞게 하였다.
그 후 상(上)이, 평안도(平安道) 일로(一路)는 천사(天使)가 경유하는 곳이므로 반드시 풍채(風采)가 있고 응대(應對)를 잘할 만한 사람을 써야 했기에 바로 공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를 더하여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그 명년에 어떤 일로 파면되어 돌아와서 지중추부사로 도총관(都摠管),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하고, 또 경사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경자년에는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하루는 공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였다가 물러나와 빈청(賓廳)에서 식사를 하는데, 상이 중관(中官)을 시켜 오서대(烏犀帶) 하나를 싸서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경(卿)을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3년 동안 예(禮)를 관장하면서 전혀 과실이 없었고, 또 공직(供職)의 여가에는 경사(經史)를 잊지 않고 늘 보는구나.”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공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치올리자, 대간(臺諫)이 서로 그 부당함을 논박하니, 상이 대간의 상소에 비답(批答)하기를,
“사람을 논할 것이요 작급(爵級)을 논하지 말라. 이 일은 곧 내 평소의 뜻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공은 본디 전고(典故)에 박식하다고 일컬어졌는데, 의례(儀禮)가 더욱 그의 소장(所長)이었다. 그래서 모든 조정의 대례(大禮)에 있어, 옛 제도가 비록 있기는 하나 소략하여 의심스러운 경우에 대해서는 공이 반드시 고금의 예를 헤아려서 힘써 사리에 맞게 행하였다.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초상 때에는 급박한 일들이 많았는데, 공이 그 변통(變通)을 잘 조절하였다. 일찍이 영녕전(永寧殿)에 쓰는 음악이 종묘(宗廟)의 음악과 다르므로, 공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세조(世祖)의 말씀을 기억하건대, ‘오목청묘(於穆淸廟)는 문왕(文王)을 제사 지낸 시인데, 교제(郊祭)에도 쓰고 묘제(廟祭)에도 썼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의 음악을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통용(通用)하여도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시를 보건대, 태조(太祖)의 공(功)만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환왕(桓王) 이상 사조(四祖)의 덕을 겸하여 기록하였으니, 영녕전에 음악 쓰는 일은 세조의 전교대로 따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임인년 남지일(南至日)에는 명을 받들어 공이 황종관(黃鍾管)을 제작하여 갈대 재[?灰]를 채워서 기후를 살폈는데, 기후가 이르자 갈대 재가 과연 비동(飛動)하였으니,공의 박식하기가 이와 같았다.
공이 예조(禮曹)에 모두 6년을 있었고, 을사년(1485, 성종16) 3월에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좌찬성에 임명되었는데, 그 다음해 2월 모일(某日)에 질병으로 작고하니, 향년이 53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크게 애도하고 공을 위하여 2일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하였으며, 공의 질병을 상께 아뢰지 않은 의관(醫官)을 처벌하고, 조제(吊祭)와 부증(賻贈)을 일체 옛 법식대로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호매하고 활달하며 총명이 뛰어나고 특히 담론(談論)을 잘 하였다. 그리하여 평소에는 글을 읽지 않으나, 성리(性理)의 근원 및 역대의 치란 흥망(治亂興亡)에 대하여 마치 물 흐르듯이 줄줄 얘기하였다. 일찍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상이 여러 재신(宰臣)들로 하여금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논난(論難)하게 하자, 선성(宣城) 노공 사신(盧公思愼)이 으뜸으로 성(性), 도(道), 교(敎) 세 글자를 말하고 다음으로는 이기(理氣)의 선후(先後)와 《중용》, 《대학》의 표리(表裏)에 관하여 끝없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는데, 이 때 공이 마치 메아리처럼 민첩하게 대응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이 판서(李判書)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리고 동인(東人)들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세대가 아무리 오래된 씨족이라 할지라도 모두 그 지파(支派)를 분간하였고, 고려 때의 여러 가지 과거(科擧)가 있어온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무 방[某榜]에 아무가 장원(狀元)하고 아무가 몇째라는 것을 하나하나 다 세어서 한 사람도 착오가 없었다. 전후로 관직 임명 때마다 관각(館閣)의 직임을 함께 띠었고, 계속해서 지공거(知貢擧)에 참예하여 인재를 매우 많이 얻었다. 그래서 하동(河東) 정공 인지(鄭公麟趾)는 항상 공을 공보(公輔)의 재목으로 허여하였고, 공 또한 스스로 기약했었는데, 겨우 고경(孤卿)의 장(長)으로 있다가 갑자기 성명(聖明)을 하직하니, 슬프다.
공은 영평위(鈴平尉) 윤계동(尹季童)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바로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외손이다. 아들이 둘이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었고, 차남 덕윤(德潤)은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이다. 딸이 둘인데, 막내는 일찍 죽었고, 큰 딸은 부평 교수(富平敎授) 정수(鄭洙)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직장은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찬(李?)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다. 이 해 4월 아무 날에 장차 아무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한산의 이씨는 / 韓山之李
가정이 그 뿌리를 북돋았고 / 稼壅其根
목은이 또 따라서 빛을 내어 / 牧又濯濯
석대하고 또 번성해져서 / 碩大以蕃
구한과 같은 훌륭한 명성이 / 歐韓令聞
온 천하에 드날렸는데 / 揚于天下
대대로 그 아름다움 이었으니 / 世以趾美
공은 조상을 닮은 분이로다 / 公其肖者
젊어서부터 속에 가득 쌓아 / 少而充積
문채가 화려하게 빛나서 / 英華曄然
누차 성명한 임금을 만나 / 累遭聖明
큰 꿈을 펼칠 길 순탄했어라 / 鵬路翩翩
한림원에선 인재 가르쳐 뽑고 / 金?迪簡
이에 승정원의 장이 되어서는 / 爰長喉舌
하늘의 위엄이 멀지 않았으니 / 天不違顔
어찌 지척일 뿐이었으랴/ 奚?咫尺
편전에서도 경서를 휴대하여 / 便殿橫經
공의 신중함을 상이 칭찬하였네 / 睿奬密勿
인청당안에서는 / 寅淸堂中
진실로 고금의 예를 통했기에 / 展也揚?
통천서로 장식한 띠를 하사받아 / 通天之犀
그 빛이 큰 길에 번쩍이었네 / 絢耀周行
당당한 풍채와 법도가 / 堂堂?度
진실로 재상에 알맞았는데 / 允合巖廊
하늘이 어찌 그리 가혹하여 / 天公何酷
백세 향수 못하게 하였는고 / 不使期?
묘지석에 시 지어 새겨서 / 刻詩?石
오직 어두운 구천에 남기노라 / 維昧之?
[주D-001]규재(圭齋) 구양공(歐陽公) : 원(元) 나라 때의 문장가로서 호가 규재인 구양현(歐陽玄)을 가리킨다. 그는 벼슬이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는데, 조정에 있는 40여 년 동안에 무릇 종묘(宗廟)와 조정(朝廷)의 문책(文冊)·제고(制誥) 등의 글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元史 卷一百八十二》
[주D-002]오목청묘(於穆淸廟) : 《시경(詩經)》 주송(周頌) 청묘(淸廟) 편을 가리키는데, 이 시는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이룬 뒤, 제후(諸侯)들로 하여금 새 도읍(都邑)에서 성왕(成王)에게 조회하게 한 다음, 제후들을 거느리고 문왕(文王)의 사당에 가서 제사(祭祀) 지낼 때에 부른 노래이다.
[주D-003]갈대 재[?灰]를……비동(飛動)하였으니 : 후기(候氣)의 법칙에 의하며, 밀실(密室) 안의 나무 탁자 위에다 십이율관(十二律管)을 각기 그 방위에 맞게 안치하고, 율관 속에는 각각 갈대 재를 채워서, 어느 기후가 이를 때마다 해당 율관의 재가 비동하는 것을 가지고 기후를 점치는데, 예를 들면 동지절(冬至節)이 이르렀을 경우에는 황종관(黃鍾管)의 갈대 재가 비동한다는 것 등이다.
[주D-004]고경(孤卿) : 주(周) 나라 때 삼공(三公)의 다음 가는 관직으로, 즉 삼고(三孤)인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를 가리킨다.
[주D-005]구한 : 모두 문장(文章)의 대가(大家)로 일컬어진 당(唐) 나라의 한유(韓愈)와 송(宋) 나라의 구양수(歐陽脩)를 합칭한 말이다.
[주D-006]어찌 지척일 뿐이었으랴 : 《좌전(左傳)》 희공(僖公) 9년 조에 “하늘의 위엄이 멀리 있지 않아, 항상 내 안면의 지척에 있다.[天威不違顔咫尺]”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을 아주 가까이서 모시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7]인청당 : 예조(禮曹)를 가리킴. 순(舜) 임금이 백이(伯夷)에게, 후세의 예부(禮部) 장관에 해당하는 질종(秩宗)을 임명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오직 공경하여 곧게 하여야만 마음이 청결해질 것이다.[夙夜惟寅 直哉惟淸]”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舜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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